예수의 부활, 우리의 부활

시편 150 ; 사도 5,27-32 ; 묵시 1,4-8 ; 요한 20,19-31

한 문 덕 목사

부활주일이었던 지난 주 하늘뜻펴기에서 조 목사님은 부활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묻는 것에서 더 나아가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 더 중요하고, 단순히 부활의 사실성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부활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과제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주 하늘뜻펴기를 들으면서 나는 부활을 살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어떻게 해야 일상에서 부활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부활에 대해 묻기]

그래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부활이 우리에게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또 왜 부활신앙인가? 그 부활신앙은 어떤 때에, 어느 곳에서, 누구에게 의미 있는 것인가? 오늘 저는 요한공동체의 예수 경험을 통해 여러분과 위의 질문들을 함께 고민해 보고 싶습니다.

각 복음서마다 다르게 기술되어 있는 여러 가지 빈 무덤 이야기와 예수님의 현현 이야기는 그 내용들이 서로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부활이해에 있어서 몇 가지 공통적인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제자들의 부활 경험은 십자가 처형 후 삼일이 지나 하루만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계속 지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에도 보면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고(20:11-18),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20:19-23), 일주일 뒤에 또 토마와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시고(20:24-29), 그 뒤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21:1-14). 그리고 두 번째로 부활 경험이 무엇이든 간에 이것으로 인해 제자들은 완전히 변했으며, 이후 그들의 삶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 십자가에 달린 분의 부활을 선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은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감옥에 잡히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당대의 모든 기득권과 싸운 제자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에 대해 언급하면서 몇 가지 말을 덧붙이는데, “처음에 그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그에 대한 애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종족은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또 2세기 초에 기록을 남긴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도 “그리스도가 총독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의 추종자들의 해로운 미신이 소멸되기는커녕, 세상의 온갖 끔찍하고 부끄러운 것들이 모이고 유행하는 로마에까지 번져 나갔다”고 언급합니다. 로마 식민지였던 유대 한 변방에서 일어난 작은 운동이 그 창시자를 처형했음에도 소멸되지 않고 로마에까지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성서적 증거에 의하면 부활경험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부활이라는 그 사건 자체만이 아니라 예수가 벌인 하느님 나라 운동,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죽음과 함께 묶어서 보아야 하고, 또 하느님 나라 사건의 경험과 예수의 죽음 경험 없이는 부활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시공간을 초월하고 죽음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활동에 대한 믿음 없이는 부활사건 자체도 없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예수의 부활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요약해서 대답을 해 본다면, 죽음을 넘어 하느님 나라 운동은 계속 되며, 그것을 실현하시는 예수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현존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공동체의 사랑 경험]

90년경 요한공동체는 자신들의 터전, 마음의 고향이었고 정신적 토대였던 유대공동체로부터 추방당했습니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도 이들에겐 적대적이었습니다. 혈연과 씨족, 개인보다는 집단적 유대가 더 중요했던 시절 유대 회당으로부터 내침을 당했던 요한공동체는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바로 전까지 친구였던 이들에게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로 인해 발생한 상처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된 모든 근저에는 예수와의 만남, 예수 경험이 있습니다. 요한공동체는 예수에게서 하느님을 보았고, 그래서 예수가 하느님이라는 고백을 하였고, 이 고백으로 인해 유일신만을 인정했던 유대 전통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혀 삶을 터전을 송두리째 잃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갑자기 가수 윤종신 씨가 작사하고 작곡하고 부른 “내 사랑 못난이”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내 사랑 못난이 윤종신 작사

누가 예쁜 여자를 마다해 남자라면 누구나 바라지

거리엔 모두 연예인들 뿐 미인들 가득한 세상이야

하지만 나에겐 누구나 말리는 못생긴 여자친구 하나 있지

친구들은 그녀에게 첫인사로 인상 좋다하지

그 후에도 친구들은 뻔히 여자친구 있는 내게 소갤 받으러 나오라며

내안의 그녈 무시하면서 말을 하지

하지만 아무도 모르고 있지 그녀만이 가진 매력

겉모습만 보며 사냥하듯 여자친굴 찾는 너흰

내게 그녀는 너무 사랑스럽기만 해

남들이 뭐라해도 너희들이나 잘 살아보렴 난 행복할테니

누군가 내 사랑하는 사람을 모욕했을 때, 내가 더 열 받고 흥분되는 경험을 합니다. 윤종신의 노래처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은 세상에 누가 뭐래도, 보편적 기준이 어떠하든지 간에 상관 않고 둘 만의 비밀스런 앎과 사랑을 꽃피웁니다. 거리엔 모두 연예인처럼 예쁜 미인들 가득하고, 예쁜 여자친구를 가진 남자들은 으스대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거리를 걷지요. 그런데 내 여자친구는 객관적으로 못생겼습니다. 친구들은 내 여자친구를 보고 마지못해 인상 좋다하고, 여자친구 뻔히 있는 걸 알면서도 또 다른 여자를 소개시켜줍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노래의 주인공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그녀의 매력에 빠져있습니다.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일심동체가 되고 더 이상 둘이 아닙니다.

예수는 누구였던가요? 그가 벌인 일들은 이미 세상에 밝히 드러나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는 세상에 평등을 가져왔으며, 외롭고 소외된 이들에게 무한한 연민을 품은 이였습니다. 그와 함께 했던 많은 이들은 그에게서 소망을 찾았고, 삶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그는 민중들의 속마음을 알아주었고, 민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었습니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는 매력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고 요한공동체는 이 예수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당시 로마의 지배아래 있던 시대는 신들의 시대였습니다. 헬레니즘을 수용한 로마엔 신이 많았습니다. 정치적인 신인 로마황제 말고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도 많았습니다. 위대한 전쟁 영웅에겐 신의 칭호와 그에 대한 찬사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물론 유일한 하느님을 섬기는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모든 것들이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또한 이런 우상숭배의 현실을 극복해 내지는 못합니다. 변절한 유대인들과 과격한 유대인들, 고민하는 유대인들로 뒤섞여 있었습니다. 특히 지도자들은 대부분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일부는 이미 로마와 타협하고 있었고, 남은 자들의 거룩함 강요는 민중들에게는 부담이자 짐이었습니다. 과격파들의 행동도 진정한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결국 하느님보다 하느님의 이름을 도용해서 자신들을 드러내는 이들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의 욕망이 종교를 통해 표출된 것이지요.

로마의 신이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신은 민중들에겐 모두 무용지물이거나 왜곡된 신이었는데 한 분이 나타납니다. 그에게는 자신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모든 행동과 말과 생각은 모두 자신의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온 것이었고, 그래서 그를 만난 사람들 특히 요한공동체는 그를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자, 하느님과 같은 분으로 고백하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빛이신 하느님을 그대로 반사하는 거울이 나타나자 어둠이 가득한 곳에 추함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자연에선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이 없는데, 인간 현실 속에서는 어둠이 빛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를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를 따르던 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그리고 너무나 분명하고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저주인가? 예수는 일개 정치범에 불과한 죄인으로 판명되는 것이 옳단 말인가?

[요한공동체의 십자가 이해]

지난 4월 4일 새벽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분향소이자 농성장이 기습 철거를 당했습니다. 5시 50분쯤 중구청은 가로정비과 공무원 40여명을 투입해서 10여분 만에 철거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약 40톤 가량의 흙을 붓고 묘목을 심어 150m2 규모의 화단을 만들었습니다. 최창식 중구청장은 철거에 앞서 오전 5시쯤 경찰에 협조 요청을 했고, 현장엔 여경 30명 등 경찰력 280명이 배치되었습니다. 당시 현장에는 전국금속노동조합 쌍용차지부의 이현준 씨와 고동민 씨 등 3명밖에 없었고, 농성장 철거 소식을 듣고 찾아온 쌍용차 노조원들, 쌍용차 사태 해결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 관계자들, 시민들, 또 우리향린공동체 교인들과 경찰, 중구 직원들과 대치해 실랑이가 벌어지면서 약 40여명이 각기 다른 경찰서로 연행당했습니다.

연행자들은 모두 나왔지만 아마 업무집행방해로 고소당하고 재판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노동자와 민중들의 생존을 위한 절실한 요구를 짓밟는 중구청의 이런 모든 행동들은 법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불법시설물을 철거한 행정집행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연행당한 사람들은 모두 불법을 행한 범죄자들이 되겠지요. 그러나 누가 진정으로 불법을 행하는 것인지는 세상이 다 알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도행전 본문에서 베드로와 사도들은 자신들이 누구에게 복종해야 하는지 대사제에게 되묻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들은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재판을 통해 진짜 누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인지 드러나게 됩니다. 요한복음서에서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하는 과정을 자세히 보면, 누가 누구를 재판하고 있는지 역설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불의한 세력이 정의를 핍박할 때는 언제나 그 불의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바로 성전 지배 체제의 불의와 로마의 군사적 폭력의 잔인성이 만천하에 드러난 사건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수치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대한 심판이며, 하느님께 올리는 영광이 됩니다. 요한공동체에게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불의한 세상이라도 물과 피를 다 쏟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영광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공관복음서의 예수가 큰 비명을 지르며 죽음을 당했다면 요한복음서의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말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요한공동체의 부활 경험]

요한복음서에서는 죽음으로 모든 것을 완성했기 때문에, 다른 복음서나 바울서신처럼 십자가의 수치를 씻기 위해, 또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부활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십자가 죽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럼에도 요한복음서는 예수의 현현 이야기를 여러 개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죽기 전에 약속했던 것, 즉 자신이 다시 오겠다는 재림의 약속의 확증이며, 동시에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 안에서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 즉 영생이 이루어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다시 오심 즉 재림은 요한공동체에게 평안을 줍니다. 오늘 본문에 잘 나와 있듯이,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들 닫아 걸고 숨어 있었던 제자들에게 예수는 “샬롬”을 베풀고 있습니다. 그리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 줍니다. 이 행동은 하느님에게 적대적이었던 세상을 위해서도 자신을 내어 주었던 이가 자신의 제자, 아니 친구라 부르고 발을 씻겨 주었던 이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표징입니다. 제자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지요. 그렇게 예수가 주는 평화와 평안 속에서 제자들은 세상으로 파송을 받습니다. 예수를 적대시 하였던 세상은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박해와 핍박을 하겠지만 제자들은 예수가 주시는 평화와 성령으로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요한 공동체는 자신들의 고난 가득한 삶의 자리를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그러하신 것처럼 당당하게 걸어갔습니다. 죽음처럼 강한 사랑은 당당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공동체는 백마탄 왕자를 기다리는 환상적 사랑의 꿈을 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고난의 자리에, 하늘의 자리를 비우고 이 땅에 내려오는 그 자리에 있다는 놀라운 역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물질 적대적이며 육신을 거부하고 염세주의적이었던 영지주의 사조와 결별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는 몸소 고난을 입으신 분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스스로 살덩이가 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기독교 역사의 초기부터 영적인 복음서라 불렸고, 또 그리하여 태양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있다는 독수리에 비유되었습니다만 하늘을 높이 나는 독수리가 가야할 곳은 하늘이 아니라 땅이었던 것입니다.

[요한공동체의 삶의 자리]

요한공동체는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고백을 통해 자신의 삶의 자리를 확보합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곳은 바로 자신들을 적대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적대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에 말입니다. 특히 토마처럼 예수의 부활 경험이 없었을 때,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토마는 다행히도 예수의 손과 옆구리를 보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고백을 하지만 역사적 실존 인물로서의 예수를 본 적도 없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는 상황은 우리에게만이 해당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요한공동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한복음서는 90년 이후에 쓰였고, 그 때는 이미 역사적 예수와 함께 했던 이들이 전부 세상을 떠나고, 예수를 본 적도 없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공동체는 기댈 곳 없는 개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공동체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자신들의 공동체가 어떠한지 보여줌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증거 하였습니다. 이들은 혈연에 의해 맺어진 공동체도 아니고, 성적 지향에 따라 서로 끌려서 이룬 둘만의 결혼공동체도 아닌데, 구성원들의 서로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와 영생을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엔 위계질서가 없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생존을 위해 제도와 질서를 만들어갈 때, 요한공동체는 철저한 위계질서가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요구되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의 삶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낀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이들을 형제자매로 묶어냈습니다. 서로 돕고 사랑하는 것은 같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내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음에도 요한은 참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교회는 누구에게나 개방된 곳이었고 모두를 품어야 할 곳이 됩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을 품었고, 사마리아 사람들을 품었으며, 같은 우리에 있지 않은 다른 양들까지도 함께 하려고 했던 교회였습니다.

“예수를 직접 만나고 싶은가? 그의 옆구리를 만져보고, 손바닥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 싶은가? 생생한 그를 보고 싶은가? 서로 사랑한다면,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꾸릴 수 있다면, 그들이 똘똘 뭉쳐 살 수 있다면 거기에 예수가 계시다. 거기에 참 생명이 있다. 그런 공동체에서 예수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역사적 예수를 만난들 무슨 소용이 있나? 또한 내가 예수가 아니라면 부활한 예수를 만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그의 옆구리를 통해 피와 물을 다 흘리기까지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고대 교부들은 이 사건을 하느님의 천지창조와 연결시켜 해석했고, 이제 세상은 다시 창조되었습니다. 아담의 옆구리에서 새 인류가 탄생되었듯이 예수가 흘린 사랑의 피와 물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이들을 통해 새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가 맺는다는 것을 보여 주신 예수는 그리스도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 서로 사랑하고 서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준다면 주님 예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되고, 우리는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의 부활을 위해 남겨진 과제]

우리의 부활을 위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보지 못하고도 믿는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살았던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는 비록 못 보았지만, 우리는 그가 베풀었던 사랑의 내용을 잘 알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해 낼 수 있습니다. 60주년을 맞아 많은 것을 기획하고 해 내고 있지만 무엇보다 서로 사랑합시다. 서로가 서로에게 예수가 됩시다. 슬퍼하는 이와 함께 울고, 아픈 이와 함께 아파하고, 기쁨 또한 서로 나눕시다. 서로 서로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예수 따라 자신의 것을 내어 줍시다. 나를 내어줌으로 공동체 속에서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선교는 더욱 견고해 질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이 어디 있냐고, 예수의 부활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됩시다.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도 포기하지 맙시다. 포기하라는 유혹에 넘어가지 맙시다. 굶주린 이에게는 당장 먹을 것을 줍시다. 하느님이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유롭고 겸손한 사람이 됩시다. 모든 것에 감사하고 이기심 없는 기도를 드립시다.

그러면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하느님과 그분의 성령과, 진실한 증인이시며, 죽음으로부터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며, 땅 위의 모든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은총과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