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에 대한 새로운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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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카카오톡에 이런 글이 올라왔습니다. 경상도 할마이 셋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할매가 어이 예수가 죽었단다.’ ‘와 죽었다 카드노?’ ’못에 찔려 죽었따 안카나‘ ’아이구 머리 풀어 헤치고 다닐 때 알아봤다.‘ (이때 암말 않던 할매가) ’어이 예수가 누고?‘ ’몰라, 우리 며늘아가 아부지 아부지 캐쌌는거 보이. 사돈 어른인 잡지 뭐‘ (그러자 다른 할매가 물어보는데) ’그래 문상은 갔드나?‘ ’아니 안갔다‘ ’왜 안갔노?‘ ’아 문상 갈라 캤더니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타 카드라.‘ 부활에 대한 조롱 조크이지만, 부활 신앙 자체에 대한 조롱이라기 보다는, 부활을 고백하는 오늘의 교회에 대한 조롱이라고 생각합니다. 말로만 부활을 믿는다믿는다 고백하지 말고, 세상 가치를 넘어 하느님 나라 가치를 실현하는 기독교인들이 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기독교 인터넷에 화제가 되는 뉴스는 박근혜정부에 가장 많은 관료를 배출한 강남의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의 박사학위 논문 표절 사건입니다. 처음 표절 얘기가 나오자 설교 시간에 눈물을 흘리며 이는 자기를 쫓아내려는 반대파들이 조작해낸 것이라고 말하면서 표절이 사실이면 사임하겠다고 강하게 부정하더니, 표절이 낱낱이 드러나자 이제는 표절을 시인하고 회개하는 의미에서 6개월간 강단을 쉬겠답니다.

 

전 세계의 교인들이 오늘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합니다만, 그 부활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부활은 영생의 구원을 말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세상에서도 축복을 받고 죽어서도 영생한다면 이는 꿩 먹고 알 먹고 식인데, 과연 이것이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준 부활의 삶인가요?

 

[죽음에 대한 급증한 관심]

 

최근 죽음에 관련한 책들이 많이 발간되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이 쓴 책이 아닌 인문학 분야의 책들입니다. 예를 들면 하버드대에서 20년간 명강의로 뽑혀온 마이클 샌더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 반열에 오는 기세를 이용해서 예일대에서 17년 연속 명강의로 뽑힌 셀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만만치 않게 팔려나갔다. 이 외에도 인터넷에 죽음이라는 단어를 치면 죽음에 관하여‘ ’신의 죽음’ ‘편안한 죽음을 맞으려면 의사를 멀리하라’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다’ ‘죽음 그 후’ ‘죽음의 역사’ ‘죽음의 부정등등의 책 이름이 떠오릅니다. 사실 셀리 케이건은 인간에게 영혼은 없으면 죽음은 그저 컴퓨터가 고장이 나서 작동을 하지 않듯이 죽음으로 인간은 그냥 끝이다라는 결론을 철학적으로 풀어가고 있고,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인생을 값있게 살라는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신론적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도 많지만, 또 무신론자였다가 신앙인으로 전환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리 스트로벨(Lee Strobel)은 예일대 법대 출신의 탁월한 언론인으로 14년 동안 <시카고트리뷴>을 비롯해 저명한 신문사 기자로 있었고 심층 취재 기사와 공익 언론 부문에서 수많은 상을 수상했으며,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베스트셀러 작가인데 그는 단순한 무신론자가 아니라, 교회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었던 사람인데, 아내를 따라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예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단순히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이 아니라, 예수의 증거를 찾아 2년 가까이 조사한 끝에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으며 이후 목사가 되어 교회 사역을 했고, 지금은 집필에 힘쓰고 있습니다. 예수는 역사다, 특종! 믿음 사건, 창조설계의 비밀등의 저자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사람이 있습니다. 노태우정권 시절 초대 문화부장관을 지낸 이 시대의 최고의 지성인이라 불리던 이어령교수가 무신론자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이후 펴낸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도 꾸준히 팔리고 있는 서적입니다. 그는 변호사이자 검사였던 딸이 선교사로 나서 제3세계의 헐벗은 아이들을 위해 노력하는 변화된 모습, 그리고 그 딸이 갑작스레 시각장애인이 되고 기도의 힘으로 9개월만에 다시 회복하고 그리고 암투병 가운데서도 감사와 기쁨을 잃지 않고 부활 신앙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고 기독교인이 됩니다. 단지 기적을 경험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비판적 이성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신의 영역인 영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물론 리스트로벨이나 이어령교수와 같이 당대 최고의 비판적 지식인으로 무신론자로 자처하다 신앙에 귀의한 사람도 있지만, 버트란트 러셀과 같이 끝까지 무신론자로 남아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서방의 통계를 보면 점점 무신론자들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는 추세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교회가 비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회적 현상에 대해 사회가 타락하고 있다고 각을 세우고 교회의 담을 점점 높이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 반기독교 현상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우리들 자신에게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기 성찰을 통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전통적 신앙을 고집하고 자기가 아는 신앙만을 고집하다보면 교회는 쇄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신앙과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닌 것입니다. 자기가 틀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잘못 믿어 왔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 부활 증언에 대한 비판적 성찰]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예수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단순하게 이는 사실이다 아니다라는 단순한 가치 기준에 매이지 말고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길이 필요합니다. 성서는 2천년전 당시 시대 사람들이 부활이 사실이 아니다라는 비판에 대해 이에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의 의도나 사도바울의 부활 증언들은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대인들은 부활의 사실성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무리 성서에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고 주장을 해도 사실성을 갖고 논하자면 성서 자체가 갖고 있는 모순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그런 식의 접근은 더 이상의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복음서마다 예수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가 다 다른 것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어떤 사건에 관해 재판을 진행하는데, 그 현장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서로 다르다면 재판관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사실은 둘 이상이 있을 수 없으니 모두가 거짓이다. 따라서 그런 사실은 없었다. 두 번째 길은 그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거짓으로 결론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4 복음서의 목격자들의 증언이 제각각이니 부활은 없었던 일로 다들 거짓을 말하고 있거나 아니면 4 복음서 가운데 하나만을 진실로 선택하고 나머지 셋을 거짓으로 결론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의 사건을 역사적 사실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서울대물리학과 명예교수인 장회익교수는 창조론에 관련한 한 대담에서 성서의 기록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라. 사람 얼굴을 실제와 달리 찌그러뜨렸다. 왜 그런가. 피카소는 사실을 그린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적 직관을 그린 거다.‘나는 누구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종교적 직관을 기록한 거다. 그게 창세기의 내용이다. 그런데 피카소의 그림을 실제 얼굴의 사진이라 해석하고, 거기서 얼굴 모습만 찾으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나. 작품성을 놓치게 된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성경의 표면적인 문자만 붙들면 성경에 담긴 진수를 놓치게 된다. 결국 본질은 놓치고 껍질만 붙드는 셈이다.”(잊혀진 질문차동엽 명진출판. 2012. 236)

 

안병무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불트만이라는 신약성서 신학자가 부활의 비신화화를 이야기하였는데, 어느 날 일본인 목사가 학교로 불트만을 찾아와 다짜고짜 당신은 예수의 부활을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하고 다그치자, 안경을 매만지며, 조용한 목소리로 당신이 말하는 부활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실이 아니라, 이해이다. 부활을 아무리 믿고 매 주일 사도신조를 통해 평생동안 수천 수만번을 나는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아무리 고백한다 하더라도 현실의 삶에서 세상의 가치에 굴복하여 살아간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가요? 오히려 고백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요? 믿는다고 하면서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오히려 자신이 믿는다고 하는 신에 대해 모욕을 주는 행위이니 차라리 믿지 못하겠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자신과 신 앞에 솔직한 행위가 아닐까요?

 

저의 <역사와 해석> 성서배움마당에 향린교인이 아닌 분이 4분 참석하십니다. 성당을 다니시는 분도 계시고 역사학도로 처음 교회 문을 들어오신 분도 계시고 보수교회를 다니시다가 마음속에 수없이 신앙의 질문이 일어나는데, 도대체 질문만 하면 인간관계가 깨어지니 답답해서 못다니겠다고 하소연을 하십니다. 사실 그런 교회일수록 믿음의 교리만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그런 교회일수록 교회 몸짓 불리기에 힘쓰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자선행위에는 열심이지만, 그들이 왜 가난한가를 물으면 그건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외면합니다. 그러면서도 청와대 조찬기도회에 참여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돈을 내는 등 친권력적입니다.

 

[부활 고백을 넘어 부활의 삶을]

 

저는 부활에 대한 고백이 아니라, 삶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를 묻는 일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몸의 부활을 믿든 정신과 영혼의 부활을 믿든 아니면 제자들에 의한 민중부활을 믿든 중요한 것은 그 믿음에 따른 실천적 삶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난 부활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고 해서 성서가 말하는 모든 내용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부활을 믿지 못한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라는 얘기도 가능한 것입니다.

 

산에 큰 불이 일어나 숲에 있는 모든 나무와 풀이 다 타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해 또 다시 풀이 자라고 몇 해가 지나자 썩은 고목에서 싹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부활이라 부를 수 있는가? 없는가? 아마 우리는 부활에 대한 정의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옳은 행동일 것입니다.

 

오늘 부활절에 주시는 본문의 말씀은 모두 4개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핵심 구절을 통해 이 구절이 부활에 관련하여 어떤 이해를 암시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시편에서의 핵심 구절은 이것입니다.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부활이란 다름 아닌 세상으로부터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버린 돌과 같이 쓰레기로 여김받았던 사람들, 곧 변두리로 밀려난 사회적 약자들이 머릿돌이 되는, 사회의 주체가 되는 일종의 민중 혁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에서의 핵심 말씀은 새 예루살렘입니다. 그 새것의 정체는 건물이 새로워졌다는 말이 아니라, 제 손으로 지은 집에 들어가 살고 제 손으로 가꾼 포도를 따 먹는 그런 사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왜 제 손으로 지은 자기 집에 들어가 살지 못하고, 제 손으로 가꾼 포도를 따 먹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그건 이웃 제국들의 침략 때문입니다. 제국들의 침략과 약탈이 없는 사회 이것이 바로 예언자 이사야가 꿈꾸는 새 예루살렘입니다. 이를 동물의 세계에 빗대어 말하고 있습니다.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는 사회. 강대국의 생리는 무엇입니까? 약소국의 피를 빨아먹는 일입니다. 어떻게 빨아 먹습니까? 요즘 같은 세계금융자본주의 시대에서는 국경을 넘은 기업투자와 주식투기입니다. 주식을 하면 열 명의 한두명은 돈을 법니다. 그러나 나머지 여덟 아홉명은 다 망합니다. 그런데 실패한 본인들은 자신의 실패가 시장자본주의의 구조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 여기지 않고 그저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전쟁의 경제학]

 

영어 제목이 The Economics of Killing본래는 [살인의 경제학](지은이 비제이 메타)이 맞지만, [전쟁의 경제학]이라는 순화된 언어로 번역된 책이 작년에 출간되었습니다. 부제는 ‘F16 전투기가 어떻게 세계를 빈곤에 빠트리는가?’입니다. 겉으로는 세계의 평화를 지킨다고 하면서 실상은 여기저기 분쟁을 일으키어 무기를 팔아 떼돈을 벌어먹는 미국의 군수산업의 실체를 폭로한 책입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영토분쟁은 결국 서로서로가 미국의 록히드마틴 신제품 전투기를 경쟁적으로 사들이는 꼴이 되었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재작년 미국과 600억 달러의 무기 계약을 했는데, 이는 그해에 미국이 사우디에서 사들이는 원유의 두 배에 해당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겉으로는 미국에 자동차, 컴퓨터를 팔고 있지만, 속으로는 그 몇 배에 해당하는 신무기를 구입하고 있습니다.

 

사우디나 남한을 비롯한 무기 수입국들은 미국과의 교역에서 겉으로는 남고 속으로 믿지는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밑지는 장사를 하고 있는가? 그건 무기수입과 관련한 지배계층들의 이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무기 수입의 20%가 커미션으로 돌아옵니다. 쓰인다. 누구에게? 정치가와 군인과 관료들이 나눠먹는다. 어떻게 나눠먹는가? 스위스은행에 넣어주고 비밀번호를 알려주면 됩니다. 스위스은행 계좌에 가장 많이 이름이 있는 나라 1위가 사우디아라비아이고 2위는 남한이다. 미국에서 무기 수입 1,2위가 이 두 나라임을 안다면 이게 다 무슨 돈인지는 뻔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으로 된 계좌의 액수를 다 합하면 우리나라 3년치 국가예산에 해당합니다. 이 검은 돈만 갖고도 박근혜정부에서 앞으로 3년동안 세금 걷지 않고도 나라 운영을 할 수 있습니다.

 

어제도 국방부장관이 나서서 북한을 일격에 타파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듣기에는 그럴싸하지만,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서울을 향해 쏟아지는 일분에 수만발씩 날라오는 대공포탄을 어떻게 막는다는 말입니까? 그중 단 한발만 서울 시내 땅속의 묻어 있는 가스관에 맞는다면 서울시내는 일시에 불바다로 변합니다. 미사일 한방만 핵발전소에 맞는다면 반경 수십킬로는 죽음의 땅으로 변하고 맙니다. 아마 올해도 미국과 남한의 무기상들은 탁상 앞에 앉아 새로운 무기 개발과 이의 도입에 관련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을 것입니다. 안보 안보를 외치면서 백성을 공포로 몰아넣고 전쟁 세력들은 뒤로 돈을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남한의 사병 대 장성 비율은 세계 최고입니다. 별이 너무 많습니다. 현재의 장성을 반으로 줄여야 합니다. 그러나 줄이려고 하면 군부가 반발합니다. 말은 안보이지만, 실은 밥그릇 때문입니다.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군참모총장 출신이 대통령 일신을 보호하는 경호실장이 되었다고 하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는 군 전체에 대한 모욕입니다. 오바마는 자신의 경호실장으로 경호실 출신 여성을 임명했다는데, 여성대통령이니 여성을 임명하면 얼마나 모양새가 좋을까? CNN이나 BBC 뉴스를 들으면 한반도는 전쟁이 곧 일어날 것 같은데, 정작 우리 모습을 보면 전연 그렇지 않으니 저들이 바보인지 우리가 바보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새 예루살렘을 얘기하며 더 이상의 전쟁과 침략이 없는 평화의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늑대와 사자가 풀을 먹고 사는 전쟁무기 생산공장을 폐쇄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복으]

 

사도행전 본문의 핵심 말씀은 부활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증언이다. 이게 초대교회의 예수 복음의 핵심이었다. 죄의 용서가 왜 이렇게 중요했는가? 단순히 천국갈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기 때문일까요? 죄의 용서가 중요했던 것은 이 땅에서 하느님의 일을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자유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의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만민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시켜 선포하신 평화의 복음입니다. 평화는 그냥 기도한다고 오는 것인가요? 오늘 우리가 부활을 믿고 고백하고 부활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은 우리가 모두 평화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이웃을 위한 평화의 사도, 남북의 평화의 사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본문의 핵심 말씀은 부활한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내가 아직 하느님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가거라.” 우리는 부활 신앙을 예수를 붙잡는 신앙으로 이해합니다. 나 개인이 예수를 붙잡아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그런 개인적인 부활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서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를 붙잡지 말라. 그런 생각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 도피적인 개인 부활 그런 것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붙잡지 말고 제자들에게 가서 나의 부활을 알리라는 부탁은 공동체의 부활 공공성, 사회성의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무서워서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심판과 공의가 임박했음을 알고 구차한 방식으로 목숨 부지하려고 하지 말고 거리로 나서 사회적 약자들이 힘을 얻어 역사의 주체로 나서도록 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어제는 38년 전 박정희군사독재에 의해 살해당한 장준하선생님의 유골을 다시 묻는 겨레장이 시청에서 있었습니다. 박정희와는 일제 시대부터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지사입니다. 박정희가 다카키 마사오로 일본천황에게 혈서로서 충성을 맹세할 때, 장준하선생은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일본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탈출하여 6천킬로의 중원을 걸어 임시정부 요원이 되었고, 이후 OSS 군사요원으로 국내잠입을 기다리던 중 해방을 맞아 김구선생의 비서로 일하였습니다. 동경신학교에 이어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목사후보생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는 한명의 목사가 되기보다는 민족의 얼을 바로 세우는 지사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박정희의 군사쿠테타 이후 사상계 편집장으로 박정희와 끝까지 맞섰습니다. “박정희씨는 국민을 물건 취급하여 우리나라 청년을 월남에 팔아먹었고 박씨는 과정 공산주의 조직책으로 임명되어 여순사건에서 조직 활동을 한 사람이라고 하여 국가원수 모독죄로 구속되었다가 옥중 국회의원 당선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민주회복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제1호 위반자로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민주화운동을 이끌어 오던 중, 1975년 약사봉에서 실족사로 처리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암살의혹만 있었지만, 1년 반전 폭우로 묘소 파괴 위험이 있어 이장을 준비하던 중 두개골에 큰 구멍이 발견되어 법의학자 이정빈서울대명예교수를 중심으로 국민대책위원회가 결성이 되어 정밀감식을 한 결과 명확한 타살로 결론이 지어졌습니다.

 

복음서가 증언하고자 하는 예수 부활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요한복음에서 나를 붙잡지 말라는 말씀이나 다른 복음서에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는 말씀이 바로 이렇게 감추어진 역사의 진실이 드러나는 공의의 심판을 두고 하는 말인 것입니다. 굳이 판사가 법정에서 범인이 누구라고 그 이름 석자를 말하지 않아도 이미 역사는 살인자가 누구인지를 천명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는 역사인 것입니다. 장준하선생은 생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이 가슴의 피눈물을 삼키며 투쟁하련다. 이 길을 나는 가련다.”

 

의인의 부활을 노래하는 시편 기자의 환호를 다시 한 번 외침으로 저의 하늘뜻펴기를 마치겠습니다.

 

<야훼께 감사 노래 불러라.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 야훼의 오른손이 번쩍 들렸다. 야훼의 오른 손이 힘을 떨치셨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야훼께서 하신 일을 널리 선포하리라. 정의의 문을 열어라. 의인들이 들어가리라. 이 놀라운 일 야훼께서 하신 일이다. 이 날은 야훼께서 내신 날, 다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주보 목회자 마당에 실려 있는 남북부활절공동기도문을 함께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