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고민, 루가의 고민(사순절 6)

31;9-16; 50:4-9a; 필립 2:5-11; 루가 22:14-23:56

 

지난 주 320일은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시작한지 10년째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동시에 이라크 침공을 미제국의 군사패권주의의 악랄한 침공이라고 비판의 소리를 높였던 미국의 교회 중 예수의 갈릴리 목회를 가장 잘 접목시킨 교회로 알려진 워싱톤의 Savior 교회를 세우신 Gordon Crosby 목사님이 95세로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신 날입니다.

 

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결코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전쟁 반대를 외쳐온 평화주의자, 그리고 이 평화를 제대로 지켜내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어 설교 때마다 공동체의 사랑과 자본주의 비판과 미국의 패권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여 오신 신앙의 원론주의자, 그래서 지금 워싱톤 시내의 흑인과 히스패닉이 밀집되어 살아가는 빈민가 근처에 10여개의 자매교회와 40여개가 넘는 사회선교 단체를 세워 오신, 제가 존경하고 좋아하여 오던 크로스비 목사님이 이라크 침공 10주년이 되는 이 날, 95년간 몸담아 오던 정든 집과 교회와 세상을 떠나기로 작정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추구했던 평화목회의 방점을 찍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일 년 중 어느 날에 죽을까를 잠시 고민하였습니다. 태어나는 일은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없어도 죽는 날은 사고사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꽃 속에 핀 평화]

 

평화의 시인 박노해는 이렇게 평화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3월이 오면 몸이 아프다.

 

아이 생일이 오면

몸이 아파오는 어머니처럼

이라크 전쟁터로 달려간

3월이 오면 몸이 아프다.

 

붉은 꽃이 피는 날

이라크에서 만난 아이들이 꿈속에서 걸어와

그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본다.

내 이마에 뚝뚝 떨어지는 빨간 눈물

빨간 꽃 빨간 피 빨간 목숨

 

3월이 오면 몸이 아프다

 

봄날 아침에 피어나는 꽃들

저 꽃 속에서 폭음을 듣는다

하늘 나는 종달새 소리에서

전폭기 소리를 듣는다.

 

[동아시아의 평화 운동]

 

지난 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오키나와에서 진행된 평화컨퍼런스에 다녀왔습니다. 우리 교회가 몸담고 있는 기장 서울노회와 동경북지구에 있는 교회가 지난 10년동안 선교 교류를 하여 오고 있었고, 오키나와 교회와는 서울노회가 단독으로 교류를 하여 오고 있다가 이번에 세 교회가 한꺼번에 만난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교회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함께 논의한 것입니다. 일본에 기독교단은 하나밖에 없는데, 동경 북지구에 있는 교회들은 숫자로는 얼마 안 되지만, 마치 남한 땅의 기장교단마냥 일본교회 안에서는 정의와 평화를 외치는 가장 진보적인 집단입니다. 사실 일본 교회는 역사는 오래고 숫자는 5% 미만에 지나지 않지만, 그간 일본 사회 내에서 평화를 향한 진보적인 소리를 외쳐왔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자주 하는 얘기가 이제는 일본 교회의 보수화가 너무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소리가 전연 반영이 되지 않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다 시피 지금 우리나라나 일본은 모두 과거의 보수정권들이 다시 등장하였습니다. 정치와 사회의 보수화가 크게 물결치고 있는데, 이에 발맞추어 교회 또한 그러합니다. 남한 교회의 보수화는 어떻게 보면 지금이 최고점에 도달해 있다고 보고 있고, 아마도 올해 가을에 치러지는 WCC 10차 총회를 기점으로 그 기세가 점점 줄여들 것으로 보이는데 반해 일본 교회의 보수화는 그 정치적 보수화가 너무나 뿌리가 깊어 최소 1020년이 지나야 그 기세가 꺾일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지금 WCC 총회를 반대하는 아우성은 그 보수화의 몰락을 재촉하는 길입니다.

 

[오키나아와 한반도]

 

오키나와는 13세기 이래 류큐 왕국으로 수백년동안 조선 일본 중국 대만 필리핀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하여온 독립국가였습니다. 이후 중국과 일본 두 나라에 조공을 함께 바치면서 줄다리기 외교를 하여오다 130여년 전 일본 막부시대에 강제 합병을 당한 약소국의 불운을 안고 있는 땅입니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가 이곳에 최후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저항함으로 인구의 4분지 1이 죽임을 당했고, 이후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미국의 식민지로 점령당했다가 1972년에 비로서 일본에 반납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일본 국토 전체의 0.6%에 불과한 작은 오키나와 땅에 미군기지 74%가 밀집해 있을 정도로 일본 패전의 아픔을 송두리째 안고 살아가는 매우 불행한 민족입니다.

 

우리는 일 년의 몇 주 키리졸브와 같은 한미군사훈련이 진행되는 시기에만 B52 핵폭격기와 핵잠수함이 움직이지만, 오키나와는 일년내내 이런 전투기와 잠수함이 움직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대가 뜨고 내려 그 폭발하는 굉음소리로 인해 가까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일반 비행기가 내는 소음과 전투기가 내는 굉음은 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비행장이 오키나와 한 가운데에 놓여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가장 편편하고 좋은 도시의 중심을 그냥 불도저로 밀어 버리고 비행장을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 크기도 일본 하네다 국제공항보다 4배가 큽니다. 우리말로 하면 서울 중심지에 비행장이 들어서 있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는 헬기가 오키나와 대학건물에 부딪혀 폭발하기도 했습니다. 비행장을 옮기라는 주민들의 반대소리가 높습니다. 그래서 헤네코라는 해군기지의 바다를 메워 비행장을 만들고 큰 구축함들이 정박할 수 있도록 부두를 확장하겠다고 하는 것을 10년 전부터 주민들이 막아 지금은 소강상태에 있습니다. 제주의 강정 해군기지는 만약 이곳에서 제대로 미군들이 해군기지를 운영할 수 없게 될 경우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고 해군기지가 완성이 되면 강정에는 비행장이 복원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해군도 비행기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주는 제2의 오키나와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전쟁은 너희 일본 본토사람들이 시작하였으니 그 책임을 지고 미군기지는 모두 본토로 옮겨가든가 아니면 일본 땅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반미 감정도 높지만, 일본 본토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동경북지구 교회들이 회개하는 의미에서 오랫동안 오키나와 교회에 함께 일하자고 손을 벌렸지만, 이를 거부해 왔던 것인데, 이번에 서울노회가 일종의 중재자의 역할을 서면서 함께 만나게 된 것입니다. 산재해 있는 미군 기지들을 돌아보면서 다시 한 번 미국은 전쟁으로 일어선 나라이고 전쟁으로 그 나라를 버티어가는 나라임을 실감했습니다. 엊그제 하늘말씀을 준비하던 중 우연히 아프카니스탄에서 전투를 하던 미군부대원들을 밀착 취재한 기록 영화를 보면서 전쟁이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어 가는지를 보았습니다. 동료들의 죽음을 통해 공포를 느끼면서 동시에 적의를 갖게 되어 어린이들과 여성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실상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다시금 미국이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패권주의를 빨리 포기하고 그리고 무기를 생산하는 공장들을 빨리 평화산업 체제로 만들어가는 길만이 인류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우선되는 길임을 깨달았습니다.

 

또 하나 깊이 깨닫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갈망하는 한반도의 통일이라고 하는 것이 오키나와의 평화문제와 하나로 엮어져 있다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첫날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지도 못한 채 우리는 한 미군기지 근처로 갔습니다. 저희들이 도착했을 때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는데, 그곳에는 10여명의 남녀노소 교인들이 비를 맞아가며 우리 승리하리라는 평화의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함께 하여 몇 곡의 평화의 노래를 불렀는데, 조금 있다가 천둥이 치고 비가 더 세차게 내렸습니다. 저는 순간 이 천둥의 소리는 야훼 하느님께서 통곡하시는 소리요, 이 비는 야훼 하느님께서 흘리시는 눈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서울에도 매주 목요일 저녁 아픔을 당하는 현장을 찾아 촛불기도회를 갖는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있음을 알려드리고 목요일에는 미대사관 앞에서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회가 있을 것과 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지만,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우리의 희망의 노래를 들으시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셨는지, 점차 비는 그치어 갔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여섯 번째 주일로 흔히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한 주간을 앞두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을 하시는데, 그때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향해 연도에 서 있던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라고 환호를 하였는데, 이를 두고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세계교회 성서읽기표는 오늘 종려주일에는 입성과 수난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는 지난 몇 년동안 입성 장면의 성서 본문을 선택하고 예수께서 새끼 나귀를 타신 장면을 재현하여 광대의 복장을 입거나 자전거나 롤러를 타고 들어왔고 바보 예수라는 하늘뜻펴기 제목을 진행하여 왔습니다만, 올해는 예루살렘 입성이 아닌 입성 이후 예수께서 처형당하시기까지의 말씀을 본문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오늘 루가복음 성서 본문은 본래는 2214절로 2356절까지 두 장을 다 읽게 되어 있습니다. 전통을 중시하는 교회에서는 하늘말씀 읽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20분 이상을 소요할 것입니다. 사실 오늘 같은 경우는 본문 말씀을 읽는 것을 주로 하고 대신 조용히 그 말씀을 묵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습니다만, 저는 이런 방식은 잘못하면 십자가 처형에 대한 오해가 있을까봐 하늘말씀을 군데군데 선택하여 읽고 이 안에 담긴 깊은 뜻을 잠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십자가 이해의 두 길]

 

사실 예수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일에 크게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가장 많이 설교하는 방식은 죄가 없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 구원을 완성하셨다고 하는 것이고 이를 믿고 고백하면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를 구속사적 이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걸림돌이 있습니다.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이해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숙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첫째, 고대 사람들은 신의 노여움을 풀어주기 위해 동물의 피를 대신 바치든가 때로는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1성서가 말하는 율법시대의 제사 방식입니다. 그러나 예수 이후의 제2성서 복음의 시대에는 이런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에 모두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나의 죄가 깨끗하게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희생을 당해야 한다고 믿고 있고, 그 희생제물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는 율법시대를 종결하고 복음의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 예수의 피가 마지막으로 필요했다라고 말합니다만, 과연 사랑과 용서의 야훼 하느님이 아들의 피를 원하셨을까? 지난 시간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께서 무조건 용서하셨지 거기에 어떤 조건을 달고 희생을 요구했던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그렇게 구속사적으로 이해해 버리면, 십자가 죽음 이전에 사셨던 지상에서의 예수의 삶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당시의 정치 종교 지도자와의 갈등 관계나 권력 비판에 대해 별다른 관심도 갖지 않을뿐더러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는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사회정치적인 고발도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어차피 죽을 몸인데,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은 후차적인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질문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한 말씀에 대한 구속사적인 해석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의 십자가를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 제물로 보게 되면 이는 자발적인 희생이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십자가의 처형이라는 말이 성립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부분의 이야기, 겟세마네 동산에서 가능하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의 의미도 사라지고, 빌라도와 헤롯을 왔다갔다하며 받았던 재판도 별 의미가 없어집니다. 베드로의 부인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예수는 죽도록 예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죽음 이후 가롯 유다를 따르는 무리들이 생겨났던 것 또한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가룟 유다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배반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없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없었다면 우리의 구원도 없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를 꼬드낀 사람은 악마가 아니라 인류구원의 완성을 위해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라는 주장입니다. 배반자가 아니라 스승 예수의 계획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가장 위대한 제자가 됩니다. 일종의 신앙의 모순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이와 관련한 인간 고통의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현재 겪고 있는 삶의 고통에 대해 십자가가 어떤 해답을 주어야 하는데, 십자가 죽음을 죄의 용서와 인류 구원의 초점을 맞추어 구속사적으로 이해하고 나면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고통은 하나의 통과의례로 이해되고 바로 부활의 승리로 넘어가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종교는 삶과 현실의 종교가 아닌 죽음과 영생의 종교로 변질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맑시스트들의 비난을 피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어떻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예수의 갈릴리 공생애의 삶은 당시 민중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첫 번째 목표였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이해의 필요성]

 

이렇게 구원사적 교리로만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에 새끼 나귀를 타신 일은 그냥 낮아지시기 위한 것이라고만 이해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어지는 질문은 꼭 나귀를 타고 가야 낮아지시는 것인가? 그냥 걸어가시면 낮아지시기 위한 길이 아닌가요?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사적인 접근이 아닌 역사적 접근을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신 일은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입성하는 로마의 기병대에 자신을 빗대신 정치적 행위입니다.

 

그 시간이 어떤 시간이었습니까? 그냥 타신 게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빌라도총독을 필두로 한 로마의 기병대가 가이사랴를 떠나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과월절 첫날, 소위 말해 식민지지배 국가권력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유대사회의 부와 권력을 함께 누리고 있었던 지도자들, 기득권층이 모두 예루살렘 서쪽 연도에 가서 저들을 환호하는 그 시간에 맞추어 반대편 동쪽으로부터 입성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매우 의도적인 행위였으며 로마제국의 식민지지배에 대한 저항과 야유가 담긴 행위였습니다.

 

어느 도시에나 가면 잘사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나뉘어져 있습니다. 예루살렘 동쪽에는 하루하루 날품을 팔아 살아가야 했던 가난한 사람들, 로마정부와 헤롯정권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들, 갈릴리 출신이라고 이방인이라고 업신여김을 받았던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우스꽝스러운 이 정치적 퍼포먼스에 함께 동조하며 환호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서에는 왜 로마의 군대가 입성한다는 얘기가 빠져 있는가? 유대인들이 지키는 축제절기에 군사행렬이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상식적인 일이었기에 굳이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뿐더러, 잘못하면 이런 기록은 로마정부로 하여금 복음서를 불온문서로 낙인찍힐게 만들 염려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에 생략되었거나 혹은 삭제된 역사적 사실들을 복원하여 함께 읽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교리에 억매이지 않고, 그리고 성서 문자에 매이지 않고, 성서 문자 배후에 담긴 정치사회역사적 맥락을 짚어가며 해석해나가는 방식은 최근에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해석방법입니다. 성서의 기록은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일차 저자나 혹은 저자가 속한 공동체에 의해 해석된 기록이지 오늘날의 신문 기사와 같은 6하 원칙에 의해서 기록된 사실로서의 기록은 아닙니다. 사실 신문이라고 하더라도 편집자의 의도나 기자들에 의해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때로는 왜곡된 기사도 얼마든지 양산되고 있습니다. 지난 주 몇 개의 은행과 언론기관을 공격한 사이버테러를 중국 아이피 주소를 가진 북한의 소행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북한 사이버 군대가 몇 명이고 어쩌고저쩌고 소설을 잔뜩 써내더니 바로 그 다음날 중국 아이피가 아닌 농협 자체 내의 아이피라고 말을 바꾸었습니다. 원인을 잘 모르면 기다려야 하는데, 무조건 북한 소행이라고 일단 치고 보는 것입니다. 이게 인터넷 시대라고 불리는 현대의 신문 언론 모든 기관들이 하는 짓거리입니다. 그러니 2천년 전 언론조작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가능했겠는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바른 소리를 한다 싶으면 무조건 친북이니 종북이니 하며 빨갱이로 일단 몰아 경찰과 검찰은 고소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후에 무죄가 되더라도 자기들은 그걸 진행하는 23년 동안 월급을 받고 자기 자리가 보장되지만, 여기에 당하는 백성들은 재판으로 인해 생업을 포기해야 하고 친척과 친구들과 가족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야 하는 인생이 파탄나게 되는 것입니다.

 

[피하고 싶은 의 정체?]

 

저는 이점에서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하느님 당신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기도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예수의 진짜 고민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여기서 피하게 해달라는 잔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예수 자신의 죽음인가? 그렇다면 이루고자 하는 예수가 말하는 나의 뜻은 무엇인가? 십자가를 피하고 삶을 연장하는 것인가? 삶을 연장한다면 얼마나 연장할 것인가? 6개월인가? 일 년인가? 십년을 더 산다고 해서 이미 죽음을 준비했던 예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미 예수는 여러 차례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습니다. 심지어는 직접 헤롯이 당신을 죽이기로 작정했다는 살해 위협까지 받았습니다. 그때 예수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헤롯을 여우로 야유하고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곳에서 죽을 수가 있겠느냐며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 권력의 비호를 받는 성전 희생제물을 파는 상인들과 하느님께 헌금을 드리기 위해 성전용 화폐로 바꾸어주는 환전상들의 상을 뒤집어엎고 채찍을 들어 저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혼자 하셨는지 제자들을 포함한 일단의 함께 하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행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하실 수 없는 일종의 반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2,3일이 지나지 않아 아 괜히 그 짓을 했구나!’ 하며 후회하는 기도를 드린다는 말입니까? 저는 안중근의사나 윤봉길의사가 후회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고, 어설픈 조폭들도 이런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이미 죽기로 작정했으면 그 길로 가는 것이 대부분의 지사들이 선택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신이 죽을 때가 되니까 죽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이를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셨다. 예수의 마지막 기도의 고민이 이런 것이었다? 저는 이는 예수에 대한 모독이라고 봅니다. 하느님의 아들 때로는 하느님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기도 하신 분에 대한 모욕입니다. 자신이 부활할 것을 알고 계셨다면 이는 더욱 큰 모욕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해석이 가능한가? 오늘 이 본문을 갖고 설교를 하는 목사님들이 대부분일텐데, 이렇게 말고 다르게 해석하시는 분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그러면 왜 이렇게 밖에 해석할 수 없는가? 그건 이미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구속사적인 관점에서만 해석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보다 사회정치적인 관점 곧 해방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보다 역사적 실체에 접근하는 다른 해석이 가능한데, 이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류 구원이니 구속이니 하는 교리적 관점은 잠시 잊고 있는 그대로 오늘의 말씀을 한번 읽어 보면 지금까지 전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구절들에 의문을 갖게 됩니다. 2215절에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이 과월절 음식을 함께 나누려고 얼마나 별러 왔는지 모른다.’ 얼마나 별러 왔는지 모른다. 이미 죽음에 대한 완전한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22절에서 가롯 유다의 배반을 암시하시며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께서 정하신대로 가지만 사람의 아들을 잡아 넘기는 그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이미 하느님의 뜻을 아시고 그 길을 작정하셨습니다. 30절에서는 이미 죽음 이후 하느님의 나라 옥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37절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는 성서의 말씀들이 다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겟세마네(올리브) 동산 기도에서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죽기를 거부하시며 피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며 기도하셨다고 하는 것은 너무 큰 모순이 아닌가요?

 

예수의 고민이 고작 그것이었을까요? 저는 이미 자신의 죽음의 문제는 오래 전에 해결하셨고, 지금 마지막 순간에 가진 고민은 이것이 아니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루가는 이를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루가는 이 예수의 고민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전하는 구절로는 독자들이 예수의 진짜 고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마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는 공포와 번민에 싸여서 할 수만 있으면 수난의 시간을 겪지 않게 해달라고 하시며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다. 무슨 공포와 번민에 싸였던 것일까? 마가는 베드로가 죽기까지 예수를 지키겠노라고 맹세하는 얘기를 기록함으로 예수의 공포와 번민이 무엇이었는지를 암시하고 있지만, 루가는 이 공포와 번민이라는 단어를 빼고 보다 구체적인 암시를 적어 놓았습니다.

 

그게 오늘 예수의 기도 앞에 나온 매우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입니다. “지금은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가고 식량자루도 가지고 가거라. 또 칼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 가지고 가거라.” 웬 칼 얘기입니까? 그리고 예수를 잡으러 오는 무리들이 다가오고 가롯 유다가 입을 맞추어 예수를 잡아 넘기려고 할 때에 제자 중 한 사람이 칼로 대사제의 종의 오른쪽 귀를 내려쳐 떨어뜨립니다. 그러자 예수는 이를 주어서 다시 붙어줍니다. 논리적으로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과정입니다. 예수를 잡으러 온 무리들 속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있었을 터인데, 예수의 제자들이 칼 두 자루를 어떤 대항을 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고 어떤 암시가 숨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몇 가지 질문이 계속 일어납니다. 이미 예수는 거리 행진을 통해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람이 되었는데, 변장을 하지 않았다면 굳이 가롯 유다가 누가 예수인지를 지적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또 예수 일행이 숨어 있지 않았다면 가롯 유다가 굳이 앞장을 서서 길을 인도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예수께서 품으신 고민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정의와 사랑과 화해와 용서의 하느님 나라를 말씀해 오셨습니다. 억압당하는 갈릴리의 민중의 편에 서시어 로마의 압제와 헤롯의 악행을 고발하시고 예루살렘 성전 체제가 갖고 있는 잘못된 악의 구조에 대해 채찍을 들어 이를 깨끗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는데, 그건 민중 폭동이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폭동이 일어났었고, 그리고 지금은 바로 민중 폭동이 가장 일어나기 쉬운 애굽의 노예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과월절이었습니다.

 

문제는 폭동을 일으키기는 쉬웠지만, 그러나 그 희생은 결국 민중들이었습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습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제국이 만들어 내는 폭력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그냥 지나치는 것은 폭력적 구조를 더 크게 만드는 또 다른 악행이었습니다. 여기에 예수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피하시게 해 달라는 잔은 자신의 죽음이 아닌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민중 폭동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유혹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그 유혹 또한 민중 폭동을 통한 새로운 나라, 예수를 왕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 체제였습니다. 이를 위해 제자들은 준비가 되었고 누가 예수의 왕좌 오른편에 앉을 것인지 왼편에 앉을 것인지를 갖고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이를 위해 칼도 준비가 되었습니다. 저들은 3년동안 이 때를 기다려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마지막 순간 이를 포기하신 것입니다. 그 때가 오래 걸리더라도 폭력적 방식이 아닌 사랑의 방식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하심을 아버지의 뜻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물론 이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그러나 바로 눈앞에 보이는 그 성공의 유혹을 떨쳐버리기는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루가의 고민은 이런 것입니다. 후세 사람들이 이 예수의 고민을 제대로 알아채기를 바랐습니다. 그냥 단지 예수님이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을 자청하신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죽음에 도달하기까지의 예수가 가졌던 고민을 단지 구속사적인 희생 제물로만 치부하지 않고, 그래서 십자가 구속의 피를 기뻐서 찬양하는 그런 유치한 신앙인들이 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직설적으로 쓰게 되면 로마 안기부에 의해 불온문서로 찍히게 되니까, 루가는 이를 최대한 피하면서도 후대 사람들이 진정한 예수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갈 수 있는 흔적들을 여기저기 남겨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편으로는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고 예수를 풀어주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으로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빌라도와 헤롯은 바로 그날 다정한 사이 곧 한 통속이 되었다는 상반된 얘기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지만, 과월절에 죄수 한명을 사면하기로 되어있었다는 풍속이 있음을 언급하면서 예루살렘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살인죄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바라바가 예수 대신 풀려나왔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예수는 당시의 로마총독이나 예루살렘 유대 지배자들에게 이 바라바보다 더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혔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들은 예수를 왜 이토록 두려워했던 것일까요? 폭동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지난 목요일 밤 30여명이 미대사관 앞 광화문거리에서 촛불기도회를 마치고 우리는 조그마한 화분에 평화라고 쓴 종이를 붙이고 촛불을 들고 대한문으로 향했습니다. 그러자 경찰들이 막아섰습니다. 촛불을 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강제로 저들이 촛불을 껐습니다. 여러분 촛불을 무서워하나요? 저는 촛불을 바라보면 세상이 좀 더 밝아지는 것 같아 마음이 평안해지는데, 어떤 사람들은 촛불을 무서워합니다. 촛불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왜 무서워할까요? 우리가 몽둥이를 들었다면 저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꽃을 들고 촛불을 들었기에 저들은 두려워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의 고민과 루가의 고민 사이에 서 있습니다. 향린 또한 2천년간 지속되어온 전통적인 개인구원이라는 구속사적인 이해와 새로운 사회정치사적인 이해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한 주간, 사순절 마지막 고난주간을 그냥 부활절로 건너뛰지 마시고, 매일 성서읽기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의 고민과 루가의 고민을 이 땅의 현실 곧 남북분단과 군산복합체제와 결합한 미국주도의 금융자본주의, 맘몬이 주인이 된 신자유주의라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의 고민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할 때만이 예수의 부활은 진정 민중의 부활로, 나의 부활로 되살아 날 것입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