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주일

달음질할 목표를 다시 찾기 위해

시편 126 ; 이사 43,16-21 ; 필립비 3,4b-14 ; 요한 12,1-8

김지수 교우 / 한문덕 목사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에서 제정한 청년주일은 1953년 제38차 교단 호헌 총회에서 결의되었고, 기장의 역사와 동일하게 올해는 60주년이 됩니다. 기장 청년회 전국연합회는 전국에 있는 기장 교회들에게 청년주일을 지켜 줄 것을 당부하는 공문을 보내면서 청년주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청년주일은 첫째, 교회 구성원으로 청년을 세워주는 날입니다. 둘째, 청년의 푸른 신앙으로 교회와 사회에 대한 사명을 고백하는 소중한 날입니다. 셋째, 기장교단 성도님들의 애정과 지원을 통한 청년선교에 관심을 갖는 날입니다.

우리 교회도 매년 청년주일을 지켜 왔습니다만 우리교회 청년들이 교회와 사회에 대한 사명을 고백하는지, 우리 교회가 청년들에게 애정과 지원을 하고 있는지, 그래서 교회의 구성원으로 청년들이 제대로 설 수 있도록 했는지는 다시 한번 살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청년주일이 단지 매년 연례적으로 그저 한번 하고 지나가는 그런 행사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 우리교회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도 함께 고민하면 좋겠습니다. 먼저 한 청년의 하늘뜻펴기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향린 교회는 저에게 특별한 교회입니다. 제 경우 집회 현장을 통해서 향린 교회를 알게 되었는데 집회 때 깃발을 들고 나오는 교회라는 점이 신선했습니다. 그 점에 흥미를 느껴 찾아간 교회 계단과 담장에 걸려있는 이런저런 현수막들, 특히 재능교육 노동자들에 연대하는 현수막에 쓰인 ‘교회가 외치지 않으면 돌들이 외칠 것이다’는 문구를 보며 내가 활동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진심으로 원하신다는 확신과 사명감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교회에 대해 매력을 느끼고 신자로 등록했습니다. 설교 또한 마음에 들었는데 엉성한 교리 체계에 기반해 공포 마케팅 따위나 일삼는 이 사회 대부분의 보수 교회들과는 달랐습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은 저 하늘 위에서만 나에게 말씀하는 분으로 알아왔는데 처음으로 내 옆에서 속삭이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거 같아서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등록하고 청년신도회에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청년 주일에 하늘뜻펴기를 어찌해야 좋을까에 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토론의 결론으로 이해한 것을 말하는 것이 청년주일에 하늘뜻펴기에 제일 부합한다고 생각해서 오늘은 그것과 오늘 주어진 하느님 말씀을 연결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 요한복음 말씀의 향유 사건을 봅시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다가올 일, 즉 지금까지 로마제국과 제사장 권력 모두에 저항함으로서 자기가 당할 정치범으로 체포당하고 사형당하는 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는 노선 갈등과 감정의 골이 점점 깊어갑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점점 고립되는 동시에 내면에서도 자신에게 다가올 고난에 대한 번민과 두려움이 조여오는 상황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계획과 그 마음의 고통을 정확히 이해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최고의 존중과 존경을 표시하는 의미에서 예전에 왕에게 기름을 붓던 관습을 따라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마태오 복음이나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사무엘이 사울과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장면과 묘한 대비를 이룹니다.

그 상황에서 가리옷 유다는 마리아를 책망합니다.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데 아까운 향유를 왜 그렇게 낭비 하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애초에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다른 목적을 갖고 그런 책망을 한 것입니다. 돈 주머니에 있는 것을 자기 멋대로 꺼내 쓰는 도적 유다 입장에서는 그 향유를 팔아 예수님의 제자 무리의 돈주머니를 채우면 자신에게도 돌아올 떡 고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그럴 기회를 없앤 것에 대한 분노를 가난한 사람을 명분삼아 이야기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욕구를 위해 다른 명분을 대는 유다의 모습에서 우리 진보 향린 공동체에 드리워진 어두운 모습을 봅니다.

여기서 청년들이 처한 현실 이야기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날 토론에서 느낌 점은 청년들은 어른들이 자신들에게 하는 요구에 대해 불편해 하고 있다는 점이였습니다. 보수적인 일반 교회의 교우, 심지어 직분을 맡은 집사 장로들의 자식에 대한 욕구와 우리 향린교회 교우, 집사 장로들의 자기 자식의 대한 욕구가 다르지 않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보수적인 교회 교인들이 자기 자식들이 1류 대학생, 부자, 엘리트가 되길 바랄 동안 향린교회 교인들의 상당수가 자기 자식들이 ‘진보적인’ 1류 대학생, 부자, 엘리트가 되길 바라는 점입니다. 매일같이 시장주의 교육이 자기 자식들 다 죽인다고 비판하면서 자기 자식들의 시장 경쟁력은 챙기지 못해 안달인 모습, 거기에 적게는 20년간 많게는 30여년간 노출되어 살아온 청년들이 향린교회 다니는 부모를 둔 향린의 새날청년회 청년신도회 구성원들입니다.

문제는 이 기대가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기대라는 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1류 대학생, 부자, 엘리트라는 것이 진보의 가치와 완전히 반대되고 양립할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이게 다 자식 잘되기 위한 거야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가 보기에 그 모습은 유다가 가난한 사람을 명분으로 삼아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모습과 너무 유사합니다. 자신들이 못 달성했거나 대를 이어 달성하고픈 부나 지위에 대한 욕망을 자식을 통해서 대리로 충족하려는 그런 모습을 보며 안타까웠습니다.

제 경우를 예로 들자면 부모님께 몹시 서운한 점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의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자기 아들 김지수를 만들기 위해 절 반강제적으로 재수를 시키고 의대를 보낸 것 이었습니다. 전 의대 공부가 전혀 적성에 맞지 않았고 재미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급도 네 번이나 당했고, 그럴수록 공부 대신 게임으로 도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게임 중독이 심해져 정신병원에서 입원 치료까지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그런 일을 겪고 나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군대를 갔다 와서 지금은 원래 하고 싶었던 기계공학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에 힘들어도 그대보다 더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즐기고 있습니다. 게임 중독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 되었습니다. 한창 중독이 심할 때는 일상과 게임의 경계가 없어질 정도였는데 지금은 해야 할 일을 할 때는 게임에 대한 생각을 접어둘 능력도 생겼고 평소에도 게임 시간을 통제할 능력이 생겼습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잘못된 기대를 통해 자녀들에게 상처를 준다는 점입니다. 향린 공동체 안에서 청소년 자녀들을 학원 보내기 위해 주일날 교회 오지 못하게 하는 부모가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릴 때 교회 다니는 걸 하나님께 도피한다고 쏘아 붙이며 교회에서 예배 끝나자마자 집으로 잡아가던 제 부모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서운했습니다. 그런 부모들도 아까의 경우처럼 자식 잘되기 위한다는 핑계를 댄다는 것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부모들의 기대 말고도 청년들을 괴롭히는 교회의 문제가 있습니다. 청년들이 교회에서 하는 일들이 주체적으로 결정한 일도 아닐뿐더러 그 일로 인해서 청년끼리 교제하고 모일 시간이 없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곳이 마음과 영혼과 몸의 안식을 누리는 곳이 되어야 하는데 거꾸로 자기의 마음과 영혼과 몸에 부담을 주는 곳이 된 점입니다. 권유라는 이름 하에 이런저런 행사에 청년들을 동원하는 모습을 보며 청년들을 일종에 악세사리 취급한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특히 그런 피곤함을 못 이겨 청년들이 교회를 한두 명씩 떠날 때마다 남은 사람들에게는 더 무거운 일이 주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제일 안타까운 점은 처음 이 말씀을 작성한 뒤에 한문덕 목사님께서 보내주신 예전 7년간 있었던 청년주일 하늘뜻펴기를 읽어 봤을 때였습니다. 지금까지 한 말이 예전에 청년들이 다 한 번씩 했던 말들이라는 점에서 많이 놀랐고 서글펐습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년들이 잘못한 것 또한 되돌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2월 4일 청신 모임에서 기성세대들에 대한 불만들을 말하다 누군가 “그 동안 우리가 한 것이 무엇일까?”라고 질문했을 때 아무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필립비서 말씀은 우리 청년의 현실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처음에 바울은 자신의 스펙 자랑을 장황하게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자신의 스펙이 하느님 나라 일을 하는데 해로움이 될 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들을 장애물로 여기며 하느님 나라 운동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음질친다고 합니다. 바울의 고백을 보며 우리 청년들의 현실과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보게 되었습니다.

청년들의 문제로 돌아오자면 우선 청년들이 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학벌, 스펙, 일자리 등등을 이루었지만 우리가 정말 하고 싶어서 하고 이룬 것들이 아니라 부모 혹은 사회가 강요해서 이룬 것들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무엇을 할 계획이나 의지가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어느새 향린 청년의 목표마저 스스로 원하고 성찰해 결정한 결과물이 아니라 부모, 혹은 이 사회를 주름잡고 있는 자본과 반통일세력에 의해 주입되고 강요되고 세뇌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 해야 할까 하는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우선 이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가치관에 우리가 얼마나 물들어있는지 인식하고 어떻게 삶의 목표를 수정하고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토론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매월 주제를 정해 토론하기로 했습니다. 청년들에게 당면한 문제들을 각 달의 주제로 정했는데 2월에는 건강한 자립과 재정문제를 갖고 토론을 했습니다. 3월에는 교육 4월에는 건강, 4월에는 연애와 결혼 등의 주제를 갖고 한 달에 두 주씩 발제를 하고 토론을 하는 식으로 진행해 나갈 예정입니다. 그것을 통해 자본과 반통일세력이 우리 청년에게 강요한 목표가 아닌 우리의 목표를 찾겠습니다. 그들이 강요한 목표를 우리의 목표로 삼은 상태에서 빠르게 달음질해봐야 우리가 가야 하는 참된 목표에서 빨리 멀어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우리 청년들이 토론하고 교제할 시간적 공간적 여유를 주셨으면 합니다.

아직 청소년이나 어린이를 자녀로 둔 부모님들에게도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자녀들이 시장 경쟁력을 갖춘 사람이 되고 부와 지위를 갖추길 원하시는 분들에게 특히 묻고 싶습니다. 그것이 정말 자녀들이 잘되고 행복해지는 길일까요? 우리 청년들처럼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것 없이 사회가 시키는 대로 경쟁에 찌들어 사는 삶을 산다면 돈을 많이 벌고 풍요롭게 산다한들 그것이 과연 행복한 삶일까요? 그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것에 따라 최선을 다해 살 수 있도록 해주시길 요청하면서 말을 마치고자 합니다.(김지수 교우)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야훼께서 새 일을 시작하셨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눈물로 씨를 뿌린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시편 기자는 노래하지만 저는 오늘 향린교우들과 특히 청년들의 구원을 위해 희망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 지, 경고와 심판의 말씀을 드려야 할 지 고민이 많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유행하고 있는 한 마디는 “힐링” 즉 치유입니다. 인터넷에서 검색어로 “힐링”이라는 단어를 치면 힐링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이 100여권이나 되고, 방송에서도 힐링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을 타고 교회에서도 힐링 설교가 유행하고, 지난 달 4-5일에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과 연합신학대학원이 함께 주최하는 2013년 동계 미래교회 컨퍼런스에서도 “설교와 힐링”이라는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힐링 설교 50편을 제공한다는 광고도 하였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고통이 없는 때가 없었고, 죽음과 고난이라는 인간의 유한성을 해결하기 위해 종교가 생겨났다면, 종교의 영원한 주제는 아마 죽음과 고통으로부터의 치유 또는 구원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유독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한다는 것은 지금 이 시대가 그만큼 절망의 시대이고, 치유해야 할 상처들이 많다는 것을 나타내는 반증이라 할 것입니다.

김지수 교우가 청년신도회와 새날청년회의 청년들과 함께 토론하고 논의해서 작성한 오늘 하늘뜻펴기의 한 축도 이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남과의 경쟁에서 이겨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무언의 세속적 압박이 교회 밖이나 교회 안이나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 특히 향린교회에서조차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는 향린교회 출신 청년들의 증언은 우리들의 신앙이 얼마나 위선적이었는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속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챙기면서 겉으로는 공공의 선을 행하는 것인양 처신하지는 않았더라도, 공동체 차원에서 사회적 불의에 대해, 불평등과 잘못된 교육 관행에 대해 소리높여 비판할 수 있지만, 개인의 사적 영역에서 그 믿음대로 실천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우리의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에게 묻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를 만난 후 이전의 모든 스펙을 쓰레기로 여겼다지만 우리의 신앙과 가치관은 아직도 세상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양발을 걸친 박쥐와 같다는 사실을 솔직히 고백하고 진정으로 회개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이런 믿음 없음과 이중성, 위선 때문에 우리가 키운 자식들이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성세대의 치열한 자기 반성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기성세대에게 들린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가 변화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기성세대 뿐만 아니라 우리의 청년들과 그 후배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된다는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약 15년 전 제가 일산에 작은 교회에서 교육 전도사로 일하고 있을 때, 기장 전국교사연합회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강사로 당시 동안교회 담임 목사였던 김동호 목사가 주제 강연을 하였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써 강연을 시작하였습니다.

“기장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10년 후 기장교회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이렇게 묻자 몇몇의 청중이 “아멘”이라고 희망적 대답을 하였지만 이 목사는 단호하게 “전 기장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전 그 때 작은 충격을 받았고, 속에서는 분노와 수치가 동시에 올라 왔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교만할 수 있는가? 당신이 기장에 대해서 뭘 안다고 기장의 미래를 운운하는가?” 한편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또 한편으로 “내가 기장의 미래인데, 내 미래가 없단 말이냐! 내가 기장의 미래가 무엇인지 보여주겠다.”라는 마음을 먹기도 했습니다.

“향린교우 여러분! 향린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 조건을 달겠습니다. 새로운 변화와 개혁 없이 잘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냥 지낸다면 전 향린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현재가 되는 그런 미래는 있을 지 모르지만,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역사적 사명을 담당하는 화살촉 같은 존재로서의 향린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청년 김지수 교우가 전한 두 번째 메시지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행히도 지금 청년들은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해 왔나?”를 성찰하고 있습니다. 기성세대들에게 불만을 표시한 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또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아주 단순한 요구, 청년들이 교제하고 토론하고 친교를 나눌 시간적 공간적 여유를 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주체적으로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다고 합니다. 이 단순한 요구가 이뤄질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가능할까요? 제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최소한 지난 10여년간 이 청년들의 요구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제 말이 믿겨지지 않으시면 지난 7년간 청년주일의 하늘뜻펴기와 10년간의 청년 담당 목회자의 활동보고, 그리고 청년들에게 지원한 예산을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향린과 인연을 맺은 지난 10년간 수많은 청년들이 왔다가 떠났습니다. 그 중에는 생활목회자로 향린교회의 다양한 목회와 선교에 헌신하고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던 청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역할을 담당하면서 계속해서 스스로의 신앙과 삶에 대한 가치관이 깊어지고 계속 향린에 출석하는 청년은 매우 적은 수에 불과합니다. 새로운 미래에 맞는 지도력을 길러내야 할 지금, 오히려 과거에 향린이 해 왔던 목회의 역량과 하느님 나라 운동을 지속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들 정도입니다. 그만큼 세월이 바뀐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시대적 소명과 사명이 사라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미래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일구실 것이기에 우리가 근심걱정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닙니다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 하고 나아갈 일꾼이 감소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지점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할 그 때에 시작하면 늦지 않습니다.

60주년을 맞은 향린교회가 이런 저런 행사와 축하의 자리를 마치고 나면, 그런 모든 과정에서 드러난 성찰을 토대로 제일 먼저 청년의 문제, 즉 다음 세대의 문제를 놓고 본격적인 고민을 하면 좋겠습니다. 목회자의 지도력도 이어져야 하고 평신도의 지도력도 이어져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보여주는 세습과 같은 꼴불견은 다음 세대 목회자를 제대로 길러내지 못했기에 생기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목회자의 문제는 신학교가 우선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하더라도 평신도 지도력은 앞으로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요? 20~30대 청년의 문제에 대해서만 국한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향린의 미래를 준비하고 계획을 해야하는 모든 단위, 목회실, 당회, 목회운영위원회는 무조건 청년들을 만나셔서 그들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면 좋겠습니다. 청년공동체들의 상황 뿐만 아니라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개인들의 신앙과 삶이 어떠한지 듣는 시간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지난 2월 26일 아침, 경기도 성남시청 소속 사회복지직 여성공무원이 자살하였습니다. 5월에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도 짧은 유서를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서에는 “일찍 가서 미안하다. 근무하기 힘들다.”라는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 얘기만 듣고 “뭐 그 정도 가지고 목숨까지 끊나”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성공무원이 담당해야 업무는 정말로 산더미 같았습니다. 그 공무원은 혼자서 관내 기초 생활 수급자 290명, 기초 노령 연금 신청 대상자 800명을 담당하고 있었고, 장애인 1020명을 혼자 관리하였으며, 17개 경로당도 혼자 순회해야 했습니다. 또한 그런 가운데 주민 2600명으로부터 보육료와 양육수당 신청도 받아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힘들다고 하면 먼저 가서 그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상황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청년들이 특별찬송을 합니다. 하나는 임한빈 교우가 함께 노래운동을 하는 친구들과 가사를 만들고 직접 작곡한 곡이고, 또 하나는 기존 곡에 심예원 교우가 편곡한 곡입니다. 청년들이 선택한 이 곡들의 가사의 일부는 이렇습니다.

“숨가쁘게 흘러가는 여기 도시의 소음 속에서 빛을 잃어가는 모든 것, 놓치긴 아쉬워 잠깐 동안 멈춰서서 머리 위 하늘을 봐

우리 지친 마음 조금은 쉴 수 있게 할거야. 한 걸음 더 천천히 간다해도 그리 늦은 것은 아냐”

경쟁과 생존의 불안에 지친 청년들이 조금이나마 쉬고 싶은 심정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음 노래 가사는 이렇습니다.

“밀려드는 과제와 시험공부보다 나를 더 바쁘게 하는 건,

날 부르는 손님의 벨소리

야심한 시간 홀로 치우는 텅빈 가게엔 내가 내뱉는 한숨으로 가득차

시원한 바람속에 담배 한모금으로 다시 한번 힘내자고 되뇌어보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비틀비틀 거리는 내 맘 어쩔 줄 모르네

나는 돈 대학생이다 나는 없고 돈만 있는 돈 돈 돈 세상

빚 알바 내 목을 조여오는 세상아

내가 바라는 건 살아있는 나 나 나”

이 노래가 잘 들려 주듯이 지금 청년들은 살고 있지만 죽어 있습니다. 저는 바울 사도의 바람대로 우리 청년들이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청년들이 1류 대학생, 부자, 엘리트가 되지 않아도 좋지만, 우리의 청년들이 진짜 실력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참된 힘, 즉 올바른 지식과 열정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의 운동에 사용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사랑과 정의를 동반하지 않는 힘은 타인을 해치는 나쁜 것이지만 힘을 동반하지 않는 사랑과 정의는 무력할 뿐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청년들이 사랑과 정의를 동반한 힘을 갖기를 원합니다.

자신이 경쟁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성찰하는 능력을 갖기 바랍니다. 문제의 다면성을 파악하여 일면만을 고집하지 않고, 종합적 판단 능력을 가지고,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유연성을 가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감정에 휘둘려 일을 망치거나, 가슴은 없고 머리만 큰 가분수가 되거나, 생각 없는 행동으로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는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경쟁보다는 협동하는 능력을, 자신의 옳음을 행동으로 증명하면서도 타인과 공감하고 소통하며,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개인적 욕심은 잠시 내려놓을 줄도 아는 넉넉함을 가진 청년들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며, 배움을 향한 개방성과 배운 대로 살려는 의지, 그리고 다양한 경험을 해 볼 때 만이 가능합니다. 이런 것이 가능하려면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 청년들은 그 첫걸음을 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의 선배들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김지수 청년은 유다에게서 우리들의 어두운 면을 봅니다만, 저는 예수의 발을 닦는 마리아와 그것에 감동하는 예수님에게 주목하고 싶습니다. 김지수 청년의 말대로 공관복음서에서 이 여인은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마치 왕의 대관식을 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오늘 요한복음서에서 마리아는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발을 닦는 것은 종이 주인에게 하는 행위였습니다. 샌들을 신고 다니는 중동지역에서 바깥에 갔다가 집에 들어오면 물을 준비해서 종이 주인의 신발 끈을 풀고 발을 닦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마리아가 물이 아니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닦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다가 뭐라 했지만 아마 마리아는 유다의 말이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한 행동은 사랑의 표현이었고, 사랑은 둘만의 경험이며 그 외의 모든 것은 주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이 여인에게서 사랑의 핵심을 발견합니다. 사랑하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심지어 모두가 하기 싫어하는 낮은 자리, 즉 종과 같이 시중드는 자리에까지 기쁜 마음으로 내려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사랑하는 두 사람은 모두 주인공이 됩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림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해 주었고, 예수님은 이 여인을 높임으로써 영원히 우리들에게 기억되게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는 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신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가 인간의 친구가 되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자신의 제자들을 종이 아니라 친구로 부릅니다(요한 15:15). 심지어 종의 모습처럼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제자인 베드로의 발을 씻깁니다. 관계는 평등한 친구이지만 사랑할 때는 종처럼 섬기게 되고, 섬기면서도 서로 주인공이 되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건은 서로 사랑할 때만 가능합니다. 이 서로 사랑으로 1세기 말부터 2세기 초까지 요한공동체는 온갖 핍박 속에서도 자신의 공동체를 굳건히 지켰을 뿐만 아니라 다른 공동체까지도 아우르는 품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요한 10:16).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향린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 조건을 달겠습니다. 향린의 기성세대가 아들딸인 미래 세대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제도와 조직으로, 또 일상에서 실천한다면 전 향린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향린의 미래가 없다는 제 처음 말에 향린의 청년들이 분노해서 “내가 미래인데, 한 목사님,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라고 제게 대들면서 향린의 주인으로, 주체로 여러 가지 향린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저는 향린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모든 조건이 만족된다고 해서 향린의 미래가 보장된다는 것도 아니고, 또 향린이 그런 것을 다 이룬다고 해서 완전한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뒤에 있는 것들은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우리를 부르셔서 새롭게 거듭나도록 하십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목표이며 우리가 바라는 상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