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4

돌아오지 않은 탕자:

여호수아 5:9-12; 시편 32; 고후 5:16-21; 루가 15:1-3; 11-32

 

가끔 살인을 불러오는 개인의 다툼도 처음부터 살인이 계획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서로 오고가는 말이 격해지다 그만 감정 폭발로 인한 우발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교도소에 오래 있던 분이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살인을 저지르고 종신형을 사는 죄수들의 얼굴을 보면 도대체 저렇게 순하게 생긴 사람이 어떻게 살인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양치기 소년과 남쪽 주민들]

 

이와 마찬가지로 전쟁 또한 그러합니다. 서로 총질을 하면 함께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제를 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감정 섞인 말과 고성이 오고가다 그만 어느 한쪽에서 이성을 잃고 총질을 해대면 그게 전면전으로 확산되는 것입니다. 지금 남북 정부나 군부의 장성들의 오고가는 말을 들으면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기들은 벙커 안에 들어가서 전쟁 지휘나 하면 그만이지만, 어떻게 말하면 그게 그들은 직업이지요.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그만 총알받이로 그 인생이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북조선의 3차 핵실험 그리고 유엔의 제재와 북조선의 반발로 일촉즉발의 위기입니다. 인구의 반이 밀집되어 있는 서울은 38선으로부터 불과 수십킬로미터에 지나지 않아 핵폭탄이 아닌 재래식 무기만으로도 순식간에 수백만이 희생되고 불바다가 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나와 내 가족만은 안전할 것이다 하고 하는 착각을 갖고 살아가는 동물이 이성을 자랑하는 인간들입니다. 동물들은 서로 부딪혀보다 약한 쪽이 도망을 가게 마련이지, 죽을 때까지 싸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성을 자랑하는 인간이란 동물은 죽음도 불사하고 싸우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입니다.

 

양치기 소년의 가짜 늑대 얘기에 계속 속아오던 마을 사람들이 어느 날 진짜로 늑대가 왔다고 아무리 소리를 쳐도 믿지 않듯이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면 그러합니다. 북조선의 군을 대표하는 사령관이 나와 미국은 핵폭탄 8천개를 보유하면서 자신들이 갖고 있는 몇 개의 핵폭탄을 제재하는 이중 잣대를 규탄하고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키리졸브 한미군사훈련 중단을 요구하면서 정전협정 폐기를 선언하고 임의의 순간에 임의의 대상에 대한 자위적인 군사행동을 취할 것을 선포한 매우 위태로운 순간입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 긴장과 대립의 높은 매우 위태위태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서울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식당이나 버스 안에서 대화 내용을 들어보아도 아무런 위기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저 개가 짖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간 수십년동안 남쪽 정부가 불바다 물바다 등등 북쪽의 전쟁위기설을 하도 떠들어왔기에 이제는 만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콩으로 된장을 쑨다고 해도 믿지 아니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마 포탄이 우리 머리 위에 떨어져도 처음에는 무슨 실수이겠거니 할 것입니다. 우리의 판단과 이성이 죽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미군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미국 본토에 살고 있는 미국인들이 북에 대해 갖고 있는 위기심이나 공포의 십분의 일도 우리는 갖지 않고 살아갑니다. 면역의 효과인지 착각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저도 북이 아무리 위협을 해도 같은 민족끼리 그렇게까지 하겠어? 혹은 자기들도 죽을텐데 전쟁이야 일으키겠어? 그러나 역사는 인간은 서로 죽는 줄 알면서도 몇 사람의 호전적인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 전쟁은 매우 쉽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북은 애당초 그러하지만, 이제는 남도 군 출신 장성들이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어 매우 불안합니다. 미국 빈민가에서 장사하는 한인들의 경우 총기를 소지하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강도들이 왔을 때에 총기가 없으면 돈 얼마 잃는 것으로 끝나지만, 그 총기로 인해 그만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납니다. 총기소지가 평화의 시기에는 자기 목숨을 지켜주는 것 같지만, 위기의 시기에는 그 총기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되는데, 목숨이 둘 셋이 있으면 과거의 실패에서 지혜를 얻어 총기소유를 포기하면 되는데, 문제는 목숨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핵 재앙]

 

같은 논리로 우리는 핵 원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일은 일본의 동북부 해안에서 발생한 지진과 이로 인한 쓰나미가 해안지방을 덮고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폭발하는 사고가 난지 꼭 2년이 되는 날입니다. 쓰나미로 인한 사망자 2만명은 즉각 알려졌지만, 핵 사고로 인한 즉각 사망자는 공식적으로 10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도쿄를 포함한 후쿠시마 반경 250Km 곧 일본 땅 70%가 방사능에 오염되었고 이로 인해 100만 명 이상의 암환자와 기형아 출산 등의 피해가 계속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경고는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다른 한편 정부와 핵관련 관료들이 말하는 안전하다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사고가 있을 것이라는 부정의 얘기보다는 잘 될 것이라는 긍정의 얘기를 더 좋아하고 믿으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안에서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는 긍정의 복음과 영생구원 예수축복만을 외치는 대형교회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런 긍정의 소리, 주안에서 안전하다 평안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얘기를 하신 적인 한 번도 없기에 저도 그런 소리를 못하는 것입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전에도 대규모 핵사고들이 있었습니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사건, 1979년 미국 스리마일에 일어난 단순노무자에 의한 핵사고, 1986년 구소련 과학자들의 무리한 실험에 의한 체르노빌 사고에 이르기까지 여러 크고 작은 사고들이 있었습니다. 27년 전에 일어난 체르노빌 사고는 수만 명의 목숨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거대한 땅을 풀 한포기 자라지 못하는 죽음의 땅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핵먼지는 바다를 건너 스웨덴의 순록과 영국의 양들에게 영향을 주어 집단 매장되었고, 유럽 각국에서 생산된 우유들이 대량 폐기되었습니다. 유럽 북반구 전역에서 갑상선질환, 백혈병, 각종 암 발병율과 기형아 출산율이 현저하게 높아졌습니다.

 

체르노빌 폭발로 인한 재앙이 유럽 대륙을 넘어 바다 건너 영국에까지 전파되었다면 후쿠시마 폭발로 인한 재앙이 이보다 훨씬 짧은 거리에 있는 한반도에도 임했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일본정부도 그러하거니와 우리 정부도 이런 것들은 모두 숨기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이미 핵먼지로 인한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단지 너무 천천히 진행되기에 알아채지 못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1년 전 11살의 후쿠시마 여자 아이가 이 자리에서 저희들에게 던진 질문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저는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요? 제가 결혼을 할 수 있을까요? 제가 건강한 아가를 낳을 수 있을까요?"

 

한번 사고가 터지면 대형사고가 되고 마는 핵발전소 사고들. 경주시민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핵발전소의 위험성을 묻는 항문에 대부분 위험하다고 답한 반면, ‘핵발전소는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 필요하다고 답했습니다. 핵발전소, 원전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거짓신화에 있습니다.

 

[핵 관련 거짓 신화]

 

첫째, 핵무기는 군사용으로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하지만, 원전은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평화적 도구로, 이득을 준다는 생각입니다. 이 같은 생각의 뿌리는 핵산업을 주도했던 미국에 있습니다. 미국은 1950년대 소련과의 군비경쟁으로 핵무기 개발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미국 시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핵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즉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사건으로 인한 핵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 개선 작업이 핵의 평화적 사용이라는 슬로건이었습니다. 이것은 방사능으로 인한 실제의 피해를 축소하고 은폐하는 미국의 전략이기도 했습니다. 핵발전을 고집하는 이유는 단지 전력생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핵무기 원료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지금 긴급한 현안으로 떠오르는 것은 핵폐기물 처리입니다. 핵폐기물은 100만 년 동안이나 방사선을 내뿜지만, 인간이 만들어놓은 핵폐기물을 보관하는 용기의 수명은 40년입니다. 핵폐기물을 해결할 방도가 없다면 핵이 안전하다는 신화는 거짓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2016년이면 보관용량이 한계에 이른다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까요? 일본의 유명한 반핵운동가 다카키 진자브로는 핵발전소를 화장실 없는 맨션아파트에 비유했습니다. 오랫동안 스웨덴은 핵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리하기 위해 암반 지하 5백미터에 창고를 만들었습니다. 만년은 유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저장창고 들어가는 입구에 이곳은 핵폐기물이 저장되어 있는 곳이니 절대 이를 열면 안 된다는 경고판을 세워두어야 하는데, 언어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만년 후의 인간이 지금의 언어를 계속하여 쓸 것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원전은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깨끗한 대안에너지라는 거짓신화입니다. 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논리입니다. 핵발전소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거대한 발전소가 필요합니다. 우라늄을 채굴, 운반, 농축해야 하고, 핵폐기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원자로를 폐쇄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을 위해 막대한 화석연료가 사용됩니다. 후쿠시마 원전이 전기 공급이 차단됨으로 인해 물이 공급되지 않아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공기를 더럽히지 않는 클린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 더러운 공기를 내품는 발전소를 돌려야 하는 모순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현재 남한과 일본, 중국을 둘러싼 동아시아에는 핵발전소가 밀집되어 있습니다. 현재 1위는 미국 104, 2위 프랑기 58, 3위 일본 54, 4위 러시아 31기 그리고 남한이 24기로 5위입니다. 여기에 현재 신축 중인 중국을 포함하면 한반도는 핵 지뢰밭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것이고 여기에 핵무기까지 포함시킨다면 정말 우리는 죽음의 문턱에 가장 가까이 와 있는 민족입니다. 후쿠시마 사건은 인간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과학에 대한 맹신에서 벗어나고 경제 성장 논리에 대해 무조건 좋다가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해 물어야 합니다.

 

[편리의 관점이 아닌 생명의 관점에서]

 

우리는 소비자라는 편리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생명의 관점에서 핵을 다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핵 없는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인 연대는 핵보유국의 눈이 아니라 피폭자의 눈으로, 과학기술의 관점이 아니라 생명의 눈으로, 우리 세대가 아니라 미래세대의 눈으로,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을 포괄하는 전 우주생명 공동체의 눈으로 이 문제를 다시 볼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핵에 대한 성찰은 곧 신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기술발전으로 인한 편리 추구와 탐욕의 결과가 우리의 생명을 위협한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재고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숨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30년 전 1983WCC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는 핵무기에 대한 최초의 신앙고백을 밝혔습니다. 핵무기의 생산과 배치, 사용은 하느님을 대적하는 죄악이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그 후 교회는 핵무기 제거를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201231일 핵무기에 관한 한국그리스도인들이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핵은 하느님 없이 이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의 절대 권능에 대한 욕망이고, 과학과 기술의 이름으로 온 우주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을 거부하고자 하는 현대판 선악과 사건이며, 하느님이 지으시고 사랑하신 모든 지구 생명체를 멸절시킬 수 있는 사망의 권세라고 규정했습니다.

 

이제 2개월 후에 있을 창립 60주년을 맞아 발표할 향린교회 신앙선언문은 한반도의 비핵화를 요구하고, 탈핵 운동에 참여하고, 에너지 절약과 재생에너지 사용확산에 힘쓰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정한 첫 번째 탈핵(원전탈출)주일입니다. 부산에서 모이는 세계교회협의회 10차 총회는 부산에서 열리는데 이는 고리원전으로부터 30킬로 안에 있고, 거기서 오는 전력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하루 저녁 예배는 전기불을 끄고 촛불로 예배를 드리는 방식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탕자 1]

 

오늘 루가복음서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독립하여 성공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하여 외국에 나가 허랑방탕하여 모든 것을 잃고 죽음의 자리에 이르렀다 아버지의 집의 하인으로나마 일하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제나저제나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이 아들이 살아 돌아옴을 기뻐하여 큰 잔치를 베풉니다. 한편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오던 큰 아들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기는커녕 큰 상처를 받습니다. 아버지가 나와 집안으로 들어가 함께 기뻐하자고 하지만, 이 아들은 오히려 화를 내며 저는 여러 해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주시다니요!’ 그러자 아버지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지금 큰 아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동생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그런 식으로 얼버무려 대처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법대로 정의를 실천해달라는 요구입니다. 우선 둘째 아들이 저지른 죄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유산을 허랑방탕하여 흥청망청 쓴 것만이 아닙니다. 우선 그는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던 땅의 일부를 자신에게 줄 유산으로 달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땅이란 하느님의 소유물로 사고팔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쩔수 없이 사고팔았다 하더라도 50년이 지나면 돌려주어야 할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를 팔아 외국에 나갔습니다. 여기서 외국은 우리가 말하는 해외와는 전연 다른 개념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야훼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으로 율법이 미치지 않는 유대 땅 밖은 일종의 더러운 지역입니다. 그는 하느님과 조상을 버리고 더러운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가장 더럽다고 여기는 돼지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비인간화가 된 것입니다. 그는 마땅히 저주를 받아 구원의 명부로부터 영원히 배제되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 집을 떠올리고 돌아왔습니다. 단순히 종으로 일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아버지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이야기 속에서 언제나 자신을 회개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자신을 돌이켜 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이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용서를 거부하고 정의만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한 번도 곁길로 가보지 않았음을 얘기하며 다른 사람들의 곁길을 비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비유의 결론은 둘째 아들 탕자는 회개하고 돌아와서 아버지 집에 거하지만, 의인으로 자처한 큰 아들은 아직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진짜 탕자입니까? 파스칼이 말한 대로 인간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죄인임을 고백하는 의인과 의인임을 자처하는 죄인.

 

[돌아오지 않는 탕자 2]

 

저는 이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을 단지 인간들에게만 적용하지 않고, 우리 사회에 적용을 하고 싶습니다. 이 사회에서 인간 역사를 통해 자신들은 결코 나쁜 짓을 하지 않았고, 인간에게 좋은 것만 주었다고 자랑해온 것들이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종교와 과학입니다. 그런데 과거에도 그러하고 지금도 종교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높지만, 현재 과학에 대한 비판은 듣기 힘듭니다. 아이폰과 컴퓨터의 거대한 문명 속에서 과학에 대한 맹신이 너무 높습니다. 이 맹신에 기초하여 우리는 원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안보에 기초하여 핵무기 개발과 신형무기 구입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먹지 말라는 경고의 딱지가 붙어 있던 선악과는 인간에게 어떻게 보였습니까? 먹으면 죽으리라는 부정적 경고는 어느새 살아지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여 자꾸만 쳐다보고 있는데, 사탄이 속삭입니다. 너 그거 먹으면 하느님과 같이 되는거야. 하느님이 되면 얼마나 편해지는데,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마음대로 먹게 되는거야. 능치 못함이 없지. 긍정의 얘기만 들렸습니다. 우리는 과학이 가져오는 문명의 발달과 이로움과 편리함에 감사하지만, 그러나 과학 또한 다른 모든 학문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결국 인간의 손아귀에 놓여 있기에 견제되지 않았을 때, 이는 오히려 재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호수아의 말씀은 애굽 땅에서 노예로 살아오던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처음으로 땅의 소출을 맛보았는데, 그때 하늘의 만나가 그쳤고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은 내가 오늘 너희에게서 애굽인들의 수모를 벗겼다고 말합니다. 애굽인들의 수모란 노예의 삶을 말하는데, 사실 노예로부터의 해방은 홍해를 건너는 40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비로소 가나안 땅에 들어가 땅을 가꾸며 거기에서 나오는 소산물을 먹었을 때, 노예의 수모가 끝났다고 말합니다. 결국 광야 40년의 삶,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에 의존하던 삶을 노예의 삶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탈핵주일을 맞아 이 말씀이 던져주는 신앙의 뜻이 크다고 봅니다. 인간 스스로의 노동의 수고를 통한 땅으로부터의 소산물을 먹을 때, 곧 땀의 대가를 통한 희열의 기쁨을 얻을 때에 인간은 노예적 삶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로운 삶의 모습은 어떤 것들입니까? 일하지 않고 땀 흘리지 않고 부동산 투기와 주식 투기 등등으로 부자가 되어 빈둥빈둥 살아가는 모습을 말하지 않나요? 오늘 성서는 오히려 그것이 노예의 삶임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탈핵이란 단순히 핵발전으로부터의 탈출을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삶이 자연 생태계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시키고,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손상시키지 않고 이 지상에서 지속적으로 자손대대 생존할 수 있는 순환적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자신들이 사는 땅은 자손들로부터 잠시 빌려 사용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현재 선택한 결과가 앞으로 일곱 세대가 지난 후 자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심사숙고한 후에 결정했다고 합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점은 바로 미래 세대를 바라볼 줄 아는 혜안과 이에 기초한 절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바,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나 위주, 인간 위주, 현재 위주의 삶이 아닌, 타인 위주, 자연 위주, 미래 위주의 사고방식과 삶의 추구입니다. 화해란 지금까지의 자기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거하기 위해서는 둘째 아들과 같이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기 성찰로부터 시작합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집이란 모든 인류가 평화롭게 정의가 실현되고 온 우주의 생명이 공존하는 하느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희미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가 꾸준히 노력하노라면 언젠가는 뚜렷하게 보일 때가 올 것입니다. 그날을 향해 함께 나아가십시다.

 

다함께 일어나셔서 주보 뒷면에 있는 탈핵주일 공동기도문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보냄의 말씀]

 

사랑하는 것은 죽는 것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

당신을 위해서 매일 제 십자가를 지는 것

주여 언제나 자기를 방어하고

사소한 일에도 누구에게나 지려고 하지 않는

승자의 오만 위에 곤두서서

살지도 죽지도 못하고 괴로워하는 나에게

죽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여 나에게는 당신의 굳셈보다는 약함이

무한한 약함이 필요합니다.

저주를 당해도 비난치 않고

넘어뜨림을 당해도 항거치 않고

죽임을 당해도 원망치 않는

사랑에 찬 약함이

이웃에게 지지 않겠다고 발버둥치고

늘 머리를 쳐드는 나의 오만을

당신의 약함으로 부끄럽게 해 주십시오.(이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