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의 학살과 회개 촉구

55:1-9; 63:1-8; 고전 10:1-13; 13:1-9

 

사람을 깊이 사귀는 과정 속에서 상대방의 직업이나 가족관계를 알면 내면을 알고 싶어 신앙에 대해 묻게 됩니다. 혹 절이나 교회에 다니세요? 다니지 않는다고 하면 거기서 대화는 끝이 납니다만, 그래도 신뢰가 가는 사람이라면 그러면 신이 존재한다고 믿으세요?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요즘은 종교가 순기능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역기능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에 절이나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잘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제가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는 하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더 깊은 대화를 이어나갈 수가 있지만, 약간 단호하게 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뭔가 거리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를 믿는 사람들이고, 이 자기를 믿는 사람들은 남에게 자랑할 만한 부나 세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카리스마와 일상성]

 

종교사학자 막스 베버는 종교생활이란 카리스마와 일상성이라는 양극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하는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어떤 생명력과 규격화되어버린 일상적인 삶 사이에 종교생활이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성숙한 신앙이란 이 둘 사이의 긴장관계 안에서 사는 것이지 이 둘 중 하나 중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신앙인들은 이 둘 사이의 긴장이 가져오는 불편함 때문에 이 둘 사이에 머물지 않고 어떤 한쪽을 선택합니다. 깊은 영적 체험을 찾기 위해 일상적 삶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종교생활이 너무 일상화되어버려 신앙의 감격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교회에 다녀오는 일과 동창회 모임에 다녀오는 일 사이에 별다른 차이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만, 삶의 모습에서 본다면 별다른 차이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회사에서 함께 몇 년을 일한 후에 아 그래 난 교회 다니는 줄 몰랐어.” 이 경우는 익명의 신앙인과는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신앙인이라고 해서 반듯이 비신앙인과 구별이 되는 별난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사랑을 베풀고 정의를 실천하는 삶의 모습에 있어 세상 사람과 차이가 없다면 그건 신앙이 너무 일상화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교회를 십 수 년을 다녀도 성서를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간혹 성서를 읽기는 읽되 신문 기사를 읽듯이 읽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찾는 기쁨을 밭에 묻힌 보화를 발견하고 이를 갖기 위해 자신의 가진 것을 다 파는 상인에 비유했습니다. 성서 안에 담긴 무궁무진한 보화들을 찾아내려면 지금까지의 자기와 맞바꾸려는 어떤 투쟁과 자기 헌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기존의 자기를 그대로 둔 채 거기에 덧붙여지는 치장품으로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정약용의 5단계 책읽기 방식과 하늘말씀]

 

사순절을 맞아 성서배움마당에 참여를 하고 또 집에서 성서를 읽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 많이 있기에 다산 정약용의 다섯 단계의 책 읽기 방식을 통해 성서를 더 깊이 읽어나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박학(博學)입니다. 좋은 책을 두루 읽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심문(審問)의 단계입니다. 범인을 심문한다고 할 때의 그 한자어입니다. 이는 스스로 생각하는 단계입니다. 아는 게 병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박학한 지식이 오히려 사람을 어둡게 만듭니다. 배운 것을 물어야 하는데, 이때 병든 자식을 가진 어미가 그 처방을 물을 때의 간곡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 세 번째 단계로 신사(愼思) 곧 신중히 생각한다입니다. 몸이 씨앗을 받아 아기를 갖듯 정신으로 하여금 새로운 생각을 잉태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 자신 안에서 새롭게 잉태된 생각이 자신의 신념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명변(明辯)의 단계입니다. 명백하게 분별하여 행동의 기준이 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 명변이 분명하지 못하면 언행의 불일치가 일어나고 해 입는 것을 두려워하여 의로운 일을 함에 있어 망설이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독행(篤行) 독행인데, 여기 한자어 도타울 독은 우리가 자주 쓰지 않는 말입니다. ‘도탑다를 국어사전에 보니 서로의 관계에 사랑이나 인정이 많고 깊다로 설명하고 있고, 한자를 보면 말 마()자 위에 죽()를 얹어놓았는데, 이는 말이 천천히 걷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말은 빨리 달릴 때보다 천천히 걸을 때에 그 위풍이 살아납니다. 의로운 행동을 하되 급히 행하지 않고 인정을 갖고 행하라는 말인데, 곱씹을수록 맛이 살아나는 단어인 것 같습니다.

저는 성서를 읽어가는 태도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믿되 그냥 믿지 않고 의미는 무엇인지 물어보고, 의심하고 그래서 자기만의 물음을 만들어 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배워오고 들어온 모든 상식과 지식을 기반으로 묻고 답하되, 거기에 상상력을 더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를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성령의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예배에서 성서를 읽기 전에 성령의 도움을 구하는 짧은 기도를 드립니다. 대부분의 남한 교회에서는 이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노래로 하고 있지요. 여러분이 하늘말씀읽기 중에 노래를 할 때에 그냥 부르지 말고 성령의 지혜를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마치 오늘이 내가 내 삶에서 드리는 마지막 예배인 것처럼 진실한 마음이 담긴 기도로 불러야 합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외친 것처럼 우리 영혼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갖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예배 시간에도 한 2,30분 일찍 나와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하고 본문의 말씀도 한번 묵상해보아야 하는데, 허겁지겁 나오고 있으니 어찌 하느님의 은혜가 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이 묵상을 한 후에 하늘말씀을 읽을 때에는 글을 보지 말고 그냥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들어보시면 또 다른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한 달에 한번 수요일 오후 2시에 노숙인들에게 치약이나 속옷이나 빵을 나눠드립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언제부터 와서 기다린 줄 아세요. 빨리 오는 사람들은 12시부터 와서 줄을 섭니다. 그런데 향린교인들은 그런 간절함이 없습니다. 물론 일찍 와서 식당이나 주차장에서 봉사하는 사람들도 있고, 성서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신앙에 정진이 있으려면 간절함이 먼저 앞서야 하고, 간절함이 있는 사람은 우물물을 먼저 찾게 되는 것입니다. 없으면 말지 다음에 먹으면 되지 하는 태도로는 필요한 것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결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하느님의 나라가 도적같이 임한다는 말씀으로 자주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쳤는데, 이 말은 오늘 저녁이 나의 마지막 때로 알고 준비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해석의 아쉬움]

 

오늘 루가복음 말씀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3년동안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라는 주인의 명령에 포도원지기가 나서서 주인님, 한해만 그냥 두십시오, 제가 거름을 주어 잘 가꾸어보겠습니다. 내년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때 가서 베어 버리십시오.“ 여기서 주인은 누구이며 포도원지기는 누구를 말하는가? 대체로 주인은 하느님으로,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으로 설명을 하여 교회를 수년씩 다녀도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우리를 향해 당장 베어버리라는 하느님의 심판 명령에 대해 예수께서 중재를 하시어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는 해석이 보편적인 이해입니다. 일종의 알레고리적 해석입니다. 좀 더 보수적이고 문자적인 해석은 여기서 말하는 3년은 예수님의 사역의 기간을 의미하고 무화과나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전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당시의 유대왕국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이렇게만 해석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아쉬움이 많이 남는 본문입니다.

 

이 짧은 본문에 예수께서는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두 번이나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으니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말씀은 분명 회개에 관련되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회개를 강조하기 위한 구절로만 해석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아쉬움이 많이 남아 있는 구절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였다는 구절이 나오고 실로암 탑이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깔려 죽었다는 사실 기사가 나오는데, 왜 이런 얘기가 회개를 강조하는 얘기에 덧붙여 나와야 하는지? 이 두 기사는 성서 다른 어느 곳에서도 그리고 당시의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책에서도 나오지 않는 독립된 기사입니다. 꾸며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사실성이 담겨 있습니다. 사고로 죽은 그 사람들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보다 죄가 많아서 당한 것이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두 사건을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라고 말하고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아쉬움이 많은 구절입니다. 이건 예수의 말씀에 의하면 분명 달은 아니고 손가락에 불과합니다만, 사실은 본래는 이것이 달이었는데, 후에 상황의 변화에 따라 손가락으로 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좀 더 이를 추적해 보고자 합니다.

 

사실 하늘뜻펴기를 준비하는 설교자의 기쁨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신학을 1020년 공부한다고 해서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과정은 남이 해놓은 것들을 답습하는 공부이기에 남이 관심을 갖고 밝혀놓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종종 하늘뜻을 준비하면서 아 여기에 이런 보화가 숨어 있었구나 하는 희열을 느낄 때가 가끔 있는데, 오늘 본문이 그러했습니다.

 

[바로 그 때?]

 

오늘 본문이 시작하는 첫 마디부터가 심상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바로 그 때라니? 무슨 때라는 말인가? 아무리 본문을 훑어보고 앞뒤 구절을 읽어보아도 이 얘기를 할 때가 어떤 때를 말하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계속 여러 얘기를 하고 있지, 예수께서 어떤 특별한 상황에 있는지를 말해주는 단서가 하나도 없습니다. 앞장 12장을 보면 멀리 나갔던 주인이 돌아오면 자기 책임을 다한 종은 칭찬을 받겠지만, 불충한 종은 벌을 받을 것이다라는 마지막 때에 관련한 비유 말씀과 나는 이 세상을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을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매우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 그리고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과 때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하시는 책망의 말씀, 본문 바로 앞절에는 고소하는 사람과 화해하라는 말씀이 연이어 나오고 있습니다.

 

도대체 바로 그 때라는 것이 어떤 때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9장에서부터 예수 일행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있으니 그 때를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을 때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바로 그 때라는 강조 어법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이 표현은 루가가 예수 일행이 처한 어떤 급박한 상황을 말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 방식으로 보입니다. “바로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일러드렸다.” 곧 바로 그때라는 것은 이제 방금 일어난 매우 중대한 소식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법인 것입니다. 예수 또한 갈릴리 출신입니다. 또 예수는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 로마 총독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을 죽였다고 하는 얘기는 앞으로 닥칠 예수의 운명을 암시하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관련하여서는 결론에서 다시 한번 언급하겠습니다.

 

[빌라도 학살과 역사적 정황]

 

왜 빌라도가 희생 제사를 드리던 사람들을 죽였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다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당시 갈릴리는 예로부터 로마의 지배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던 곳이었고, 그래서 폭동도 자주 일어났건 곳으로 유명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열두 번도 넘게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예가 예수께서 태어나시던 즈음의 지도자였던 유다입니다. 그는 갈릴리 출신으로 예루살렘까지 와서 세금납부 거부운동을 일으켰는데, 이 운동은 후에 폭력으로 로마의 지배에 저항하는 젤롯당으로 발전이 되었습니다. 지금 본문에 나오는 갈릴리 사람들이 젤롯당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희생제사를 드리는 가운데 총독 빌라도에 의해 처형당한 갈릴리 사람들이란 바로 그런 로마에 대한 저항으로 말미암아 생긴 일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희생 제사를 드리는 가운데 빌라도 총독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 피가 성전 제물과 섞여졌다는 이 표현은 성전 안에서 일종의 폭동이 일어났다는 중대한 정치적 사건을 두고 한 말입니다. 경찰이 교회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듯이 로마 군인 또한 성전에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에 들어올 수 없듯이 제사를 드리는 그 거룩한 장소에서 칼을 뽑아 사람을 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정상적 상황이 아닌 매우 위급한 상황, 곧 민중 폭동이 일어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죽은 열여덟 사람이란 말도 그냥 탑이 오래되어서 저절로 무너져 내린 것인지 아니면 민중 폭동에 의해 무너져 내린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앞서 갈릴리 사람들과 관련지어 얘기한다면 이 또한 민중 폭동으로 인한 무너짐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로암 연못은 요한복음 9장에 나면서부터 시각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을 예수께서 고칠 때에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는 기사에도 그 이름이 나옵니다만, 예루살렘성은 높은 지역에 위치에 있기에 물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암벽을 통해 밖에서 물이 흘러 들어오도록 설계가 되어 있었는데, 이 실로암 연못은 주민들의 식수 근원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실로암 저수지에 세워진 이 탑은 보기에 좋으라고 만들어 놓은 탑이 아니라, 이 식수원을 지키기 위한 망대였습니다. 탑이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망대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니까 폭동을 일으키려는 무리들에게 있어서 곡식창고와 식수원을 점령하는 것은 중요하였기에 실로암 망대는 주 공격목표라고 말할 수 있고 망대가 무너졌다는 것 또한 민중소요로 인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모든 성서 번역은 이를 무시하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4절에 실로암 망대에 깔려 죽은 사람이나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이나 같은 단어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희랍어 원문에 보면 이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일반적 의미의 사람인 'anthropous'를 쓰고 있지만, 망대에 깔려 죽은 사람들은 'pheileitai'로서 빚진 자를 말합니다. 빚에 몰린 사람들이 왜 실로암 망대에 깔려 죽는 것입니까? 아까 언급한 유다의 폭동이 로마의 세금을 반대하는 폭동이었다면 이는 매우 깊은 관련성이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빚에 몰린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실로암망대를 점령하였는데, 이를 로마군인들이 제어하는 가운데 망대를 무너뜨려 이들을 모두 죽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노동자들이 마지막 길로 철탑 위에 올라가서 농성을 하고 있는데, 아예 이 철탑을 밑에서 넘어뜨려 버린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리고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과 다른 갈릴리 사람들이라는 구절에서도 희랍어를 보면 처음 갈릴리 사람들은 갈릴리 죄인들입니다. 당시의 죄인들이란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정치적 의미가 훨씬 강한 것입니다.

 

이 두 죽음의 사건이 오늘 본문에서는 모두 그들이 죄가 많아 죽은 것이 아니라, 너희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회개 경고의 증거로 제시되고 있습니다만, 이 회개가 단순히 어떤 개인의 윤리도덕적인 회심이나 반성을 강조하기 위한 예증이라면 굳이 로마의 지배에 저항하다 희생당한 정치적 죽음을 언급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루가는 굳이 어떤 오해를 무릎 쓰고 이 사건을 예수님의 회개에 연결시키는 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다시피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예수의 반로마 반 헤롯의 정치적 행동을 직접 대놓고 말하기는 어렵기에 우회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 당국으로부터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이런 의미입니다.

 

아까 오늘 본문의 얘기를 시작하면서 바로 그 때라는 단어에서 심상치 않는 기운을 얘기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때는 희랍어로 임박한 하늘의 때, 정의와 평화의 야훼 하느님의 통치를 뜻하는 ‘kairos’의 때입니다. 지금 갈릴리를 출발한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이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 얘기가 131절에서 들려옵니다. 지난 주 우리는 1331절 이하의 마지막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또 다른 지배자 로마의 앞잡이 헤롯왕이 예수를 죽이겠다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헤롯을 여우로 야유하면서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곳에서야 죽을 수가 있겠느냐? 하고 말씀하신 단호함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 때, kairos의 때는 그 시기를 읽는 사람들만이 느끼는 종말의 위기입니다. 그러니까 13장 전체의 맥락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 촉구하시는 회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개인의 실수나 잘못을 낱낱이 눈물로 고백하는 그런 개인적 회개가 아닌 하늘의 임박한 때를 인식하는 사회 전반에 대한 회개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1운동과 엑소도스]

 

오늘은 지난 94년 전인 1919년 일제의 총칼 앞에서 숨죽이며 살아가던 우리 선조들이 나라의 자주와 독립을 외친 삼일절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기미년 독립운동은 33인의 민족 대표들이 태화관이라고 하는 식당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읽는 것으로 시작하였지만, 그 과정은 전 조선 민중들의 항거로 번져나갔습니다. 당시 기독교의 역할이 어떠했는가? 우선 33인 가운데 반이 목사요 장로요 교인이었습니다. 후에 일본 헌병대가 조사한 피검자 종교별 현황을 보더라도 기독교인들이 불교나 천도교인보다 많고 교역자로 볼 때는 두 배 이상이나 많았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숫자가 인구 1%에 지나지 않았을 때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 3.1운동은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되었다고 결론짓더라도 크게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어린 유관순의 이야기 또한 신앙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사실, 20%에 가까운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우리 선조들의 애국심을 팔아서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제가 20년 전 미국 뉴저지에서 목회할 때에 당시 83세쯤 되신 한 권사님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황해도 자기 마을에서 독립 만세는 모두 교인들이 하였는데, 하루는 주일날 일본 순사들이 와서 말을 시켜서 목이 쉰 사람들을 모두 잡아갔다는 것입니다. 이 만세운동은 대도시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전국 모든 산골로 번져갔으며 단지 며칠 동안에 일어났다 사라진 운동이 아니라 근 1년 이상 끊임없이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이 독립운동 근저에 깔려있는 백성들의 믿음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총칼 앞에서 맨손으로 저항한 어찌 보면 아주 어리석고 무모한 운동이 어떻게 1년씩이나 지속될 수 있었을까? 지금도 그런 일이 계속될 수 있을까? 무엇이 우리 조상들로 하여금 도저히 승산이 없어 보이는 비폭력저항을 계속하게 하였을까?

 

3.1운동은 독립운동이자 동시에 신앙운동이며 부활을 몸으로 체험한 순교운동이었습니다. 여기 선언서의 일부분을 들어봅시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의 희생을 당하여 역사 있은지 여러 천년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려 고통을 겪은지 이제 10년이 되도다. 오 호 예로부터의 억울함을 풀어보려면 지금의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앞으로의 두려움을 없이 하려면 겨레의 양심과 나라의 도의가 짓눌려 시든 것을 다시 살려 키우려면 사람마다 제 인격을 옳게 가꾸어 나가려면 불쌍한 아들딸에게 부끄러운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자자손손이 기리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하려면 우선 급한 것이 겨레의 독립인 것을 뚜렷하게 하려는 것이라.’ 겨레의 양심과 나라의 도의 그리고 인격을 바로 세우기 위해 정치적 독립이 우선임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지금 한반도는 허리가 잘린 채 분단되어 있고, 남북은 언제 전쟁이 시작할지 모르는 군사대결의 상태입니다. 벌써 평양을 공격하는 한미합동군사훈련이 시작하였고, 북은 이에 대한 군사적 대응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요? 우리 모두는 국가안보라는 허위 사고에 볼모로 잡혀 있습니다. 여기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얘기를 하면 종북주의자로 빨갱이로 몰아 부칩니다. 전시작전통제권을 갖지 못한 나라가 어떻게 자주독립국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질문만 해도 사람들은 못들은 양 질겁합니다. 60년 정전협정을 끝내고 평화협정으로 바꾸자는 얘기만 해도 이는 북한의 주장과 같다 하면서 종북주의자로 몹니다. 무조건 북쪽 사람들을 총칼로 죽임으로 통일을 이루자는 주장만이 진리인양 박수 갈채를 받고 있습니다. 미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행동인 것입니다. 사람의 탈을 쓴 늑대들의 사회입니다.

 

[만주국의 부활]

 

공교롭게도 작년 남한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아시아 태평양 지역 6개 국가가 비슷한 시기에 정권 개편이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북한과 미국, 러시아는 정권 교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유례가 거의 없는 동시 권력 재편을 맞아 동아시아 중심 국제질서의 방향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성공회대 한홍구교수는 이를 만주국의 부활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유신체제를 맏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남한, 3대 세습을 한 북한, 일본 자민당 체제를 만든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외손자 아베 신조가 총리로 복귀한 힝본, 혁명 원로 시중쉰 전 부총리의 아들로 중국 태자당의 대표 인물인 시진핑 국가주석의 중국. “기시가 만주국을 사실상 설계했고, 박정희는 다카키 마사오란 이름으로 만주군에서 복무했으면, 김일성은 일제와 만주국 괴뢰 정권을 상대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점을 들어 동사이아에 만주국 시절의 대립구도가 부활했다.](한겨레 2012. 12.29) 만주국은 동아시아 전체를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는 출발점이었습니다. 2차 대전 뒤에도 중국, 소련, 북한 대 미국, 일본, 남한이 대결한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토양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지난해 9월 일본 정부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의 무인도 3개를 국유화하였고 이로 인해 동아시아는 긴장 정국으로 변했습니다. 중국이 댜오위다오 영토분쟁을 통해 민족보수주의의 입장을 달래듯이 일본 또한 독도(다케시마) 분쟁을 통해 극우세력들을 조정하고 있습니다. 결국 G2로 떠오른 중국의 부상과 다시금 기지개를 펴고자 하는 일본의 우경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을 누르고 재등장한 남한의 보수정치가 펼쳐낼 세력 판도는 동아시의 평화 나아가 자국 내의 평화세력들에 대해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게다가 지난 2월 북한의 3차 핵실험이 있은 후, 남한과 일본은 핵무장론을 공공연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두 나라는 2010년 미국부무 산하 연구소의 자료에 의하면 잠재적 핵보유국가로 나와 있다. 한마디로 6개국 모두가 핵보유국이 되는 위험을 안고 있다. 물론 남한과 일본은 핵이 당장 없다 하더라고 미국과의 군사방위조약에 따라 핵우산 속에 있으니 핵보유국가나 다름이 없다.

 

지금 동아시아 네 나라는 모두 국가주의 강화를 통해, 내부 위기를 권위적으로 돌파하려 하고 있습니다. 곧 다른 세 나라가 모두 북한의 정치 형태를 쫓아가는 구시대적인 사회정치 체제로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동아시아는 국가주의의 문턱이라는 회귀적 보수주의에 대한 경계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삼일절의 정신, 제국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되찾고자 하는 엑소더스의 신앙이 더욱 필요한 시점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카이로스의 때인 것입니다. 하늘의 뜻을 이어가는 민중들이 역사의 주체로 나설 때인 것입니다. 잘릴 운명에 처한 무화과나무는 과수원지기의 도움으로 1년의 시간을 벌었지만, 결국 잘려나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남한의 교회들, 웅장한 건물을 자랑하는 교회들은 백년 전 우리 선조들이 어떤 신앙을 갖고 살았는지, 일제의 폭정에 어떻게 저항했는지, 교회는 순교의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날 민중 중심의 순교 정신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민족이라는 단어는 재벌과 대기업이 외치는 세계화라는 허구적인 단어 앞에서 힘없는 단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삼일절 기념주일을 맞아 우리는 회개하지 않으면우리 또한 멸망할 것이다라고 하는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을 귀를 기우립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여러분이 성서를 읽지 않고 기도생활에 소홀하였음을 회개하여야 할까요? 예루살렘 내에서의 빌라도의 학살과 빚진 자들의 외침에 대해 무심하였음을 회개해야 할까요?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