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두번째 주일

헤로데의 위협과 예수의 사명완수

15:1-12, 17-18; 27; 필립 3:17-4:1; 13:31-35

 

일명 렉셔너리(Lectionary)라고 하는 세계교회가 공통으로 읽는 말씀에 따라 하늘뜻을 펼쳐나간지 3년째입니다. 3년을 주기로 돌아가는 것이니 올해까지 하면 한 주기를 마치게 됩니다. 이는 하늘뜻펴기를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떤 성서구절을 본문으로 정할까 하는 고민을 없애줄뿐더러, 자기 입맛에 맞는 말씀만을 임의로 선택하는 위험을 없애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각 나라마다 혹은 개 교회마다 지키는 특별한 절기나 기념일과 맞지 않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어떤 경우에는 주어진 4개의 본문 말씀들이 제각각이라 이를 연계하는 경우가 어려울 때가 생겨납니다. 이는 성서 66권의 중요한 성서 구절들을 한번은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생기는데, 오늘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오늘의 본문과 역사적 운명]

 

오늘 창세기의 본문 말씀은 야훼 하느님께서 아브람에게 후손과 땅에 대한 축복의 약속을 주시는데, 아브람이 그 증거를 요구하자 짐승들의 갈라진 사이로 야훼 하느님이 지나가셨다고 하는 고대 종교에서 신과 인간 사이의 계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말해주는 종교사학적으로 퍽 의미가 있는 구절입니다. 또 루가복음 본문 또한 제2성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예수와 당시 정치권력과의 갈등 관계가 어떠했는지에 분명하게 말해주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 두 성서 본문은 그 방향이 서로 다른 말씀입니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이 둘을 각각 다루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기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역사적 예수에 천착해 있는 사람이니 제가 어떤 구절을 선택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짐작하는 바이고, 하늘뜻펴기 제목이 이미 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남대문 방화와 광화문 촛불로 임기를 시작하여 용산참사와 사대강을 거쳐 다시금 쌍용차와 재능해고자들의 촛불로 그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명박정권이 퇴장하는 날이고, 내일이면 52년 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16년 장기독재집권을 부하의 총탄으로 마감한 아버지 박정희의 뒤를 이은 박근혜정권이 시작하는 날이기도 하기에, 루가복음의 말씀은 제가 임의로 선택한 말씀이 아니기에 하느님의 예정이란 단어를 써도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

 

[복음서 기록 당시의 시대적 정황]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일은 평생에 단 한번 있었는데, 그 때는 생애 맨 마지막 주일에 있었고, 그때 올라가신 목적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채찍을 드는 성전숙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숙청사건으로 말미암아 예수는 신성모독죄와 민중소요죄로 인해 로마통치를 반대하는 정치범으로 총독 빌라도에 의해 사형 언도를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십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Q복음서를 적절하게 조합한 누가복음은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신 일이 단 한번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신지 8일째가 되었을 때, 당시의 율법의 관습대로 구원의 표징이 되는 할례를 받기 위해 성전에 가신 일과, 12살 때 과월절을 지키기 위해 부모님을 따라 성전에 갔다가 성전의 랍비들과 토론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 구절은 소년 예수의 지혜가 출중하였음을 강조하는 구절이지만, 이 구절에는 해마다 과월절이 되면이라는 문구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께서 그 이후 계속하여 당시의 관례대로 유대 성인으로서 최소 일 년에 한번 이상 부모님과 함께 혹은 홀로 예루살렘 성전 축제 제사에 참석하셨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지리적 설정에 있어서 갈릴리와 예루살렘의 대결구도로 확실하게 짜여 있습니다. 내용에 있어서도 예루살렘을 중심한 정치종교 지도계층과 갈릴리의 가난한 사람들과의 대립각을 분명하게 세웁니다. 마가는 복음서 처음부터 모세율법과 성전제사의 중심인 안식일 논쟁을 통해 예수의 반 율법, 반 예루살렘의 입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반면 누가복음 은 안식일 논쟁 얘기를 하고 성전숙청을 얘기하지만, 그 구도에 있어서나 전체적 내용을 보면 갈릴리-예루살렘의 대립각이 마가에 비하면 그리 날카롭지 않습니다.

 

부활 기사를 보면 이는 더욱 확실해집니다. 168절에서 끝나는 원 마가는 빈 무덤 얘기를 통해 예수의 부활을 전하면서, 그러나 부활 예수를 만나려면 갈릴리로 가야한다고 말합니다. 반면 누가는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 엠마오를 향해 가던 제자들이 부활 예수를 만나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옴을 말하고, 같은 시간 부활 예수는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또 하늘의 능력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부탁하십니다. 누가복음의 속편인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120여명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면서 새로운 예수신앙운동이 시작합니다. 누가는 유대민족주의를 넘어선 이방세계의 구원을 분명히 밝히는 책이지만, 예수 복음의 운동의 출발점을 갈릴리가 아닌 예루살렘임을 분명히 말합니다.

 

[역사의 주체? 담지자?]

 

그래서 그 내용에 있어서도 마가는 예수와 함께 하는 군중 혹은 무리들을 오흘로스라는 희랍어 단어를 사용함으로 당시의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갈릴리의 민중들의 지역성과 계급적 당파성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말하고 있는 반면, 누가는 오흘로스라는 단어보다는 모든 민족 혹은 일반 백성으로 번역되는 라오스라는 단어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민족을 구원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누가의 이해는 당시의 혈연중심적인 좁은 역사관에 비교하여 본다면 대단히 혁명적인 사고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설파하신 하느님 나라 복음의 주체 혹은 담지자가 누구였느냐는 물음에 대해서 누가는 12사도를 비롯한 스데반과 빌립과 야고보와 바울이라는 지도자 중심적인 역사 인식을 가진 반면 마가는 12 제자의 스승 예수에 대한 몰이해를 계속 드러내면서 오흘로스라는 갈릴리에 기초한 한() 많은 민중 집단 중심의 역사 인식을 가졌다는 점에서 두 복음서 저자는 완연히 다릅니다.

 

만약 이 자리에서 마가와 누가 중 누구의 역사관이 더 옳은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면 이는 뿌리 깊은 긴 논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조선의 역사를 기술할 때, 왕 중심의 역사 기술을 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궁궐 밖의 일반 백성들의 삶을 중심하는 역사 기술을 하는 것이 옳은지? 이를 좁혀서 향린교회 60년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안병무 홍근수를 비롯한 몇몇의 지도자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민중의식을 담보한 일반 교인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나갈 것인가? 향린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안병무라는 개인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을 것이고, 8,90년대 시대적 화두였던 통일운동과 교회개혁을 얘기할 때, 홍근수라는 개인을 빼놓는다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팥 없는 찐빵이 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향린교회가 몇몇의 특수한 지도자들에 의해서 움직여왔는가 하면 이 또한 분명히 아닙니다. 저들을 뒷받침하는 걸쭉한 평신도지도자들이 있었고, 또 그 배후에는 당회나 제직회와 같은 기록에 그 이름이 나오지는 않지만, 수많은 대자적 혹은 즉자적 민중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운동이든지 선도적인 위치에 있는 지도자가 없는 운동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운동이 살아 움직이려면 이에 동조하고 받혀주는 민중 세력이 없이는 모든 운동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맙니다. 향린교회도 평신도목회를 강조하여 말하지만, 소수의 헌신적인 지도자들이 없다면 자칫 사분오열이 되기 십상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평신도 목회를 지향하는 교회가 갖고 있는 수적인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4세기경의 교회 지도자들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중에서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지 않고 이 둘을 함께 선택할뿐더러 이 둘만으로도 부족하다해서 마태복음과 요한복음까지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보여주는 정경으로 정한 것은 인간의 지혜에 따른 결론이라기보다는 성령의 지혜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보면 아직 66권으로 정경이 정해지지 않았을 때, 마르시온이라는 초대 감독의 아들이 당시의 유행하는 영지주의라는 철학적 이원론에 근거하여 제1성서의 야훼 하느님은 유대민족의 신이요 심판하시는 분으로 제2성서의 인류구원과 예수의 사랑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보아 제1성서를 배제할뿐더러 유대민족의 사고가 담긴 복음서나 서신들을 모두 배제하는 교회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래 그는 누가복음 한권만을 인정했습니다. 물론 그의 이러한 운동이 27권을 제2성서의 정경으로 하는 교회의 결정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만, 이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우선은 교회의 혼란을 잠재우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만, 동시에 당시에는 4복음서 외에도 여러 복음서들이 있음으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었지만, 4복음서만을 정경으로 제한함으로 말미암아 다양한 관점과 운동들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부와 정치권력과의 상관관계]

 

그런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만을 놓고 비교할 때, 향린교인들은 민중신학의 영향으로 마가의 오흘로스의 계급적 민중성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더 많을 것으로 보이기에 친마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누가가 어떤 대립각을 세우는 일에 있어 미온적인가? 전연 그렇지 않다는 점이 누가가 가진 매력입니다. 가장 쉬운 예로 마태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느님의 나라가 저희 것이니라.’라고 가난을 물리적 가난에서 정신적 가난으로 확대하고 있는 반면, 누가는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함으로 물리적 가난을 중시할뿐더러 혹 어떤 설교자가 이 가난을 정신적 가난으로 확대 해석할까 하는 염려를 잠재우기 위해 이어 부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자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은 누가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 로마 식민지시대의 부자는 누구인가? 일제시대에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었는가를 물어보면 답은 분명해집니다. 친일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부자가 될 수 없었듯이 친로마가 되지 않고서는 부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친권력이 되지 못하면 재벌이 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정치권력에 가장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는 사람도 누가입니다. 마가는 헤롯왕을 세례요한을 옥에 가두고 참수한 자로 그리고 예수는 분명 세례요한의 뒤를 잇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권력과의 갈등을 말하고 있지만, 오늘 누가가 말하는 것과 같이 분명한 언어로 표현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본문은 헤롯왕이 예수를 죽이고자 한다고 매우 분명한 어조로 말합니다. 물론 마태복음에도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를 찾아 별을 따라 이곳까지 왔다고 말한 것을 빌미로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의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을 모두 살해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헤롯왕이 동방박사들이 말하는 유대인의 왕을 너무 좁은 의미로 해석한 오해 때문이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 구절에서는 이렇게 여유 있는 해석으로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미 앞서 여러 말씀으로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치시고 병든 자를 고치고 마귀를 내어 쫓는 매우 구체적인 일들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예수에 대한 오해를 하고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비밀국정원들이 오랫동안 관찰하여 올린 정확한 보고서에 근거해서 헤롯은 예수를 조속히 제거해야 할 위험인물로, 반체제인사로, 빨갱이로 결론지은 것입니다.

 

[헤롯은 왜 예수를 죽이고자 하였는가?]

 

그런데 우리가 복음서를 그냥 읽어보면 예수의 하시는 일이 국가권력에 대해 위협적이라고 볼만한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흔적을 찾아 볼 수는 있지만, 예수께서 국가전복을 꾀했다고 추정할만한 행동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헤롯왕은 왜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일까? 헤롯의 오해인가? 아니면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의 말씀이나 행동들을 살짝 비틀어 현실정치와는 무관하게 보이도록 한 결과일까? 저는 후자로 보고 있습니다. 복음서가 기록되는 당시는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자 대규모 병력으로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초토한 시킨 다음이었습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는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도 유대교 안에서 개혁적 입장을 갖고 있었는데, 유대교의 근간이 되는 성전 자체가 사라지자, 스승 예수의 의도는 유대교의 개혁이 아닌 새로운 신앙운동이었다고 하는 깨달음을 갖고 예수 운동을 새롭게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복음서 저자들이 매우 주의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당시 로마의 국정원은 어디선가 반란의 불씨가 일어날 것인가를 주시하고 있었던 시기이기에 최대한 반로마적인 색채나 현실정치에 대해서는 최대한 입을 다물어야 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는 로마의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반로마 반헤롯적인 예언자적인 활동이나 말씀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운동의 핵심을 빼버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당시 복음서 저자들이 갖고 있었던 고민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나죽으나 로마의 제국 통치 안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전연 다르게 전할수도 없거니와 요한의 묵시록마냥 너무 은유적으로만 기술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저자들은 해석여지를 남겨놓는 애매한 표현을 많이 썼고, 그리고는 귀 있는 자는 들어라 하는 뜬구름 잡는 말로 얘기를 종종 끝내는 것입니다.

 

지금 어떤 종교지도자가 남한의 마을 이곳저곳을 두루 다니면서 나를 믿으면 죽어서 천국을 갈 것이라고 말하고 종종 병든 자를 고쳐주고 귀신이 들려 헛소리 하는 사람을 고쳐주고 그러면 국정원이 이 사람은 민중소요를 일으켜 폭동으로 국가체제를 전복하려는 의도가 있는 사람입니다 라는 보고서를 올리고 청와대는 그를 체포하도록 할까요? 아니지요, 국가권력은 오히려 백성들의 관심을 현실정치에서 돌리니 더 좋아하고 음으로 양으로 장려할 것입니다. 친정부 교회들은 도로 밑을 교회 예배처소로 사용을 해도 문제없이 지나가지만, 향린교회가 그랬다고 한다면 국가권력은 아예 향린교회 자체를 없애버리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헤롯은 왜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일까? 도대체 뭐가 맘이 안 들어서 예수를 제거하려고 했던 것일까? 하는 질문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복음서만을 통해서는 예수께서 헤롯왕의 심기를 건드는 무슨 말을 하셨는지, 무슨 행동을 하셨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복음서의 기록된 문자에만 의존해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 한 두개가 아닐뿐더러 실제로는 복음서끼리도 서로 모순입니다. 다만 오늘 말씀을 통해 누가가 전하고자 하는 요점은 예수는 헤롯의 살해 위협을 받았다는 사실이고, 예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달리 영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무조건 반정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일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분명 우리는 우리의 정부가 잘되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회도 평안하고 가정도 평안하고 나도 평안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정부가 잘못해서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봅시다. 이건 한 정부의 고통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이 고통을 겪어야 하고, 그 후손들까지도 심각한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현 정부가 잘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와 정치권력과의 상관관계]

 

그런데 그 기도가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눈을 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권력은 두 사람 이상이 모인 집단에서는 언제나 일어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회사도 마찬가지이고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옆에서 이를 견제하거나 비판하지 않으면 개인이든 집단이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기 마련이기에 결국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기 마련인 것입니다. 교회가 정치적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는 정치에 관해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정치권력을 탐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예수는 자신을 예언자로 단언하시면서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예루살렘은 정치 권력의 핵심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 하늘보좌 영광을 버리고 자신을 비어 이 세상에 오셔서 낮은 자들 가운데 함께 하셨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로부터 지난 2천년동안 교회가 고백해 온 신앙의 핵심입니다. 교회는 세상 안에서 세상 밖으로 나가도록 불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세상 밖으로부터 세상 안으로 들어오도록 불림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고난이 온다 하더라고 이를 기쁨으로 받아내겠다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소금과 빛의 사명은 외딴 곳에서 홀로 존재하는 사명이 아닙니다. 소금은 이 세상 안에 부패가 있는 그 현장에 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빛은 광야에 홀로 비추는 빛이 아니라, 사람들이 걸어가는 그 현실의 발등을 비추는 거리의 빛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대통령을 물로, 돌로 비유하였듯이 예수께서는 헤롯을 여우에 비유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 여우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이면 내 일을 마친다고 전하여라. 여기서 우리는 마귀축출과 병고침이 단순히 지금의 의사들이 하는 일과는 전연 다른 정치적인 사건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 여인이 자기 딸이 귀신들렸다고 말합니다. 딸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는 모릅니다. 오늘날이라면 학교성적이거나 이성관계, 혹은 왕따로 생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는 로마 군인에게 겁탈을 당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누가 병에 시달릴까요? 오늘날은 사업의 실패 혹은 재개발로 해고로 인해 길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당시 헤롯은 세금을 최대한 많이 거두어 로마황제의 마음을 얻고자 했습니다. 폭정을 감당할 수가 없어 사람들이 집을 버리고 방랑하기 시작합니다. 거리에 살게 되면 누구나 병이 생깁니다.

 

국가권력과 하나 된 자본가 재벌들의 횡포로 말미암아 쌍용차에서만 23명의 희생자가 생겼습니다.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남한 땅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살률 국가입니다. 모두가 중병에 걸려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걸 다 어떻게 해결하나? 그러면 교회가 모른 채 해야 할까요? 이웃사람들이 죽든 말든 우리는 교회에 나와 손뼉을 치고 할렐루야를 외치면 되는 것일까요? 그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인가요?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

 

국정원 여직원이 대선 여론 조작에 개입된 일로 인해 경찰이 조사를 하고 있지만, 두 달이 넘도록 소문만 무성합니다. 삼성 떢값 장학생 불의한 검사를 고발한 국회의원은 비밀누설죄로 의원직에서 쫓겨나고 오히려 부정을 저지른 집단과 이를 보호하는 권력자들은 승승장구 권력의 핵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검사판사의 중요직을 거친 사람들은 로펌에 들어가 옛날 자리를 이용하여 엄청난 수입을 올리고 그래서 부자가 되면 또 장차관으로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는 부패의 고리들로 엮어진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재산을 증식하고, 어떻게 병역면제를 받게 되었는지, 그 부정이 낱낱이 드러나지만, 주머니 털어 먼지 나지 않는 사람 어디 있느냐?는 교묘한 논리로 윗물이 점점 더 더러워지고 있습니다. 그 더러운 물은 곧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흙탕물에서 뒹굴고 흙탕물을 마시면서 마귀에 쏘이고 병에 걸리면 애써 벌어놓은 재산 열두 해 혈유병을 앓는 여인처럼 다 갖다 바칩니다. 벌어 논 돈이 없으면 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범죄행각을 벌이든가 아니면 살기 아니면 죽기식의 자살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헤롯은 병아리들을 잡아먹는 여우로, 자신은 병아리들을 보호하는 암탉으로 비교하시면서 성전이 버림받을 것을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성전은 단순히 예배드리는 한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체제로 운영되는 유대사회 전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헤롯은 예루살렘 성전뿐만이 아니라 궁궐을 비롯하여 대대적인 수로건설과 신도시를 세운 토목광이었습니다. 물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 이를 본 제자는 예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이명박대통령은 4대강 사업에 대해 자화자찬을 하면서 은퇴하면 부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이 4대강변을 유유자적 다녀보겠다고 하는데, 제발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이 어떤 피해를 입고 있는지, 썩어가는 물로 인해 죽어가는 물고기들을 직접 눈으로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녹색성장이 아닌 녹조라떼의 실상을 보았으면 합니다. 4대강을 모든 자연의 생명체들의 젖줄인 생명의 자궁으로 보지 않고, 자전거 유람용 감상물로 보는 그의 생각을 과연 평생을 건설업에 몸담아온 토목업자로서의 자연스러운 발상이다라고 순수하게 받아주어야 할지, 아니면 저렇게 철따구니 없는 사람이 대통령도 되는 사회에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하는 자조섞인 쓰라린 연민으로 대신할지 난감합니다. 더구나 그분이 남한의 내놓으라 하는 대형교회의 장로라고 하니 도대체 내가 목사라고 말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자전거유람을 하겠다고 방송에서 말은 꺼내놓았으니 한두 번은 시도하겠지만, 나이 70세에 가까운 양반이 다니면 얼마나 다니겠습니까? 그리고 햇볕 그을리는 일이 한국 여성들이 최고로 싫어하는 일인데, 부인한테 동의도 얻지 않고 국민들에게 함께 다니겠다고 얘기했으니 그 책임을 어찌 질는지 매우 귀추가 궁금합니다. 괜히 수십 명의 경호원들만 귀찮게 하고 지방단체들만 성가시게 하는 일이 되겠지요. 아마 한번 해보고는 경호상 어려움이 많아 포기하겠다는 얘기가 금방 나올 것입니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발언에 대해 정말 말이 안 나옵니다.

 

하여간 오늘로 이분은 전직대통령으로 마감을 하고, 내일이면 박근혜정부가 시작합니다. 여성이 된 것은 바람직한 일인데, 여성다운 점은 별로 없습니다. 보통 여성이 남성과 비교해서 큰 차이라면 감성적 언어를 통한 소통과 배려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아예 말조차 별로 없는 비밀 투성이의 여인입니다. 소통을 강조했던 사람이 말을 아예 하지 않는다면 불통이 되는데 이건 문제입니다. 또 여성이든 남성이든 대통령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약속을 지키는 일입니다. 후보시절 자기는 다른 건 몰라도 약속만은 지키는 사람이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습니다. 그가 가장 많이 쓴 단어는 경제민주화였습니다. 지금 이 단어는 새정부정책에서 사라졌습니다, 두 번째로 강조했던 복지정책의 핵심이었던 노인연금, 사대중증암환자 100% 보장 정책들은 이미 너덜너덜한 휴지조각들이 되었습니다. 정책이야 실제로 세워보니 잘 안 된다. 그거는 또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주위의 각료들이 아버지 박정희독재정권과 연결이 닿아있는 과거형 인물로 채워졌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정권의 방향을 대강 읽을 수가 있겠습니다. 이미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를 불법단체로 만들기로 작심하였습니다. 국회 통과로 합법화된 조직을 불법화하겠다고 하니 박정희의 과거독재시대로 회귀하겠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백성들과 함께 하시면서 헤롯왕의 권력을 비판하고 여기에 저항했습니다. 그래서 살해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에 예수는 조금도 굴함이 없이 그를 교활한 여우라 부르고 예언자가 가야할 길은 오직 하나의 길밖에 없음을 선언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희는 응하지 않았다. 너희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을 오늘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으로 바꾸면 이렇게 되겠지요. “대한민국아 대한민국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희는 응하지 않았다. 너희 나라는 하느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