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26:1-11, 시 91:1-2; 9-16; 롬 10:8b-13; 룩 4:1-13
흔히 예수의 광야 시험으로 알려진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성령을 가득히 받고 돌아오신 뒤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셔서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여기서 요르단 강에서 성령을 가득히 받았다는 말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들려온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택함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질문이 생긴다. 하느님으로부터 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택함을 받은 신적 인간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광야로 나가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유혹을 이겨야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증명서를 얻게 되는 것인가? 이미 창조주 야훼 하느님이 말씀하셨는데, 증명서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이 광야 유혹 이야기의 출처와 그 배경을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 예수 옆에 있다가 예수와 악마와의 대화를 엿듣고 이를 기록한 것은 아니니까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한 얘기이거나 아니면 예수 죽음 이후 초대교회의 창작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먼저 기록된 마르코복음서에는 유혹 받은 세 가지 이야기는 없고 그저 광야에 나가 40일을 머물었다는 기사만 나온 것을 보면 세 가지 유혹 기사가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에 함께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는 예수의 어록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발견되지 않은 Q문서의 내용이었을 것이라고 성서학자들은 추정합니다. 그런데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을 비교해보면 재미있는 것은 두 번째 유혹과 세 번째 유혹이 서로 엇갈려 나오고 있는데, 이는 무엇이 더 큰 유혹인가에 대한 서로의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고,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루가복음에만 나오는 마지막 구절입니다. “악마는 이렇게 여러 가지로 유혹해 본 끝에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를 떠나갔다.” 만약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경험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라도 이 구절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야기 하셨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는 저자 루가의 해석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마귀가 말하는 다음 기회는 어떤 사건을 두고 한 말일까요? 루가복음 거의 끝부분에 가서 이 마귀가 재등장하는데, 가리옷 사람 유다가 돈을 받고 스승 예수를 팔기로 한 배반의 유혹을 말합니다.
결국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보면 예수께서 광야에 나가 기도하신 것은 맞지만, 그 기도를 모두 세 가지 유혹으로 결론짓는 것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자신들이 당하는 세상의 유혹들을 예수에게 빗댄 것이고 우리의 스승되는 예수께서 이런 유혹들을 이런 식으로 이기셨으니 우리도 이를 본받자고 하는 일종의 추체험적 서술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니까 이 광야유혹기사는 초대교회 교인들의 신앙고백인 셈이지요. 그리고 우리말 대부분의 성서에는 시험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공동번역에만 유혹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희랍어 peirasmos 는 시험 혹은 유혹 둘 다 번역할 수 있습니다만, 이 또한 번역자의 신학적 의도가 반영된 것입니다. 시험과 유혹은 다르지요. 시험은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우리를 더 강하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만, 유혹은 우리 안에서 불필요한 욕망으로 인해 일어나는 어떤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유혹은 시험이란 단어보다 훨씬 부정적입니다. 그래서 유혹이란 단어를 우리 인간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가 유혹을 받았다라고 보는 것은 약간의 무리가 있습니다. 더구나 천사가 예수를 이끌고 광야로 갔는데, 천사가 예수로 하여금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도록 인도했다는 것인데, 이 또한 신학적으로나 교리적으로 무리가 있습니다. 시험 혹은 더 나아가 도전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번역이 유혹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저자 루가의 의도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 째 우리는 예수가 시험을 받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굳이 광야로 가야만 하는지에 대해 질문이 생깁니다. 왜 천사는 굳이 예수를 광야로 끌고 가는 것인가? 마가복음에는 천사가 이끌었다고 하지 않고 내쫓았다고 말합니다. 예수는 가길 원치 않았다는 의미를 풍기고 있습니다. 광야의 신학적 배경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광야는 거친 돌과 바위로 이루어진 물도 없고, 풀도 자라지 않는 허허벌판을 말합니다. 인간의 생명이 위협받는 위험한 장소입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광야는 사탄의 집단 거주지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광야를 보다 적극적인 의미로 이해했는데, 유대인들은 광야를 ‘므드바르’(히)라고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하느님의 법/말씀이 들려지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의미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창세기 1장에서 공허 속에서 우주 만물을 태동하게 만든 하느님의 행동하는 말씀(다바르)을 뜻합니다. 변혁하고 창조하고 새롭게 하는, 인간으로서는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담긴 동적인 말씀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서를 보면 위기에 처한 사람들마다 광야로 피신을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곳에만 가면 사람이 변화되고 어떤 강력한 힘을 얻습니다. 모세가 그러했고 다윗이 그러했고 세례요한이 그러했습니다. 가장 극적인 예는 선지자 엘리야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 대결에서 이세벨 왕후의 측근 바알의 사제들을 모조리 죽이자, 이세벨왕후가 노발대발하여 내 기필코 엘리야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맹세를 하는데, 이 소리가 엘리야에게 들립니다. 그러자 그는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죽어라고 도망을 가다 너무 힘들자 그만 싸리나무 아래에서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야훼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주십시오. 저는 못난 놈입니다.’ 자기 포기, 패배 선언을 합니다. 그리고 쓰러져 잠을 자는데, 천사가 깨워 주는 빵과 물을 먹고 기운을 차려 사십일을 걸어 호렙산 광야 속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세미한 소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자 그는 언제 자기가 죽음을 두려워했느냐는 듯이 전폭적으로 변화되어 또 다시 역사를 변혁해가는 주체로 나서, 아합과 이세벨의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역사를 펼쳐갈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어 세울뿐더러 이웃왕국인 시리아의 뒤를 이어갈 왕까지 기름 부어 세웁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하느님의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는 광야는 언제나 40이란 숫자와 함께 합니다. 왜 40인가? 뚜렷하지는 않습니다. 한자 문화권에 속한 우리들은 60이라는 숫자를 변혁과 재창조의 숫자로 얘기합니다. 음양오행설과 10간 12지가 어울려서 숫자 60이 나왔고, 이를 회갑 혹은 환갑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이 중시하는 40은 아마도 공간의 기본단위인 동서남북을 뜻하는 숫자 4와 시간의 기본단위인 열을 곱한 숫자가 아닐까 추측합니다. 혹은 60이나 40은 한 세대를 뜻하는 인간의 수명과도 관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성서는 뭔가 중요한 역사적 사건 혹은 재창조와 같은 변혁을 얘기할 때는 항상 40이라는 숫자를 언급합니다. 노아 홍수의 기간이 40일입니다. 야곱의 후예들인 이스라엘족속 곧 히브리 노예들이 애굽에서 산 생활은 400년입니다. 출애굽 후 광야에서 머문 기간이 40년입니다. 모세 또한 호렙산 가시떨기 불꽃을 통해 사명을 받을 때가 광야 피신생활 40년이 되었을 때입니다. 다윗의 통치 기간이 40년입니다. 이렇게 보면 숫자 40은 하느님의 임재를 뜻하는 거룩한 숫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는 언제나 인간에게 있어서는 고난과 역경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숫자 40과 관련하여 한 가지 성서 이야기를 더 한다면, 마태복음 1장 족보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의 아버지 요셉에 이르기까지 누가 누가에게서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 따분한 족보를 쭉 얘기하고 나서, 저자 마태오는 친절한 해석을 덧붙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가 14대요, 다윗으로부터 바벨론포로까지가 14대요, 그리고 바벨론포로부터 요셉까지가 14대이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42대가 되는데, 그래서 합이 42대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합이 얼마가 되는가는 독자가 알아서 깨우쳐라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눈치가 빠른 독자들은 다윗과 바벨론 포로라는 단어가 앞과 뒤에 두 번 겹치니까 합은 42가 아니라 40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족보도 실제 역사를 말한다기보다는 저자의 신학적 의도가 담긴 족보인 것입니다. 이를 루가복음과 비교하면 더 분명해지지만, 이 얘기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니까 오늘 이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저자 마태오가 숫자 40에 맞춘 족보 이야기의 신학적 의도는 무엇인가? 첫째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 탄생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는 야훼 하느님이 개입하신 신의 역사였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역사의 중간 매듭이 다윗과 바벨론포로라고 적시되어 있듯이 이는 영광과 승리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수치와 패배의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오가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신학적 의도는 이 족보에 담긴 4명의 여성입니다. 유대 남성만이 들어갈 수 있는 족보에 굳이 여성들 이름을 집어넣었는데, 이 여성들이 하필이면 모두 이방여인들이요, 단지 이방여인일 뿐만 아니라 모두 스캔들로 가득 찬 여인들이었고, 그 스캔들이 단순한 스캔들이 아니라, 당대의 언론을 뒤집어 놓을만한 엄청난 스캔들이라는 것입니다.
여인 다말에게서 나온 아들은 시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출생합니다.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부정의 관계입니다, 라합이라는 여인의 직업은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몸을 맡길 수 밖에 없는 창녀였습니다, 다윗의 할아버지를 출생한 모압 여인 룻은 과부였습니다. 그리고 이어 등장하는 여인이 나오는데, 여인의 이름인 밧세바로 표기하지 않고 이름 대신에 아예 우리야의 아내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다윗이 자기 부하의 아내를 빼앗았다고 하는 것을 그대로 고발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4명의 여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은 모두 당시 혈통을 중시하는 유대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들의 폭력에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힘없는 여인들임을 알게 됩니다. 마태는 유대인 크리스챤들을 향해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율법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종교적 개념은 거룩입니다. 모세 율법이라고 하는게 딴게 아닙니다. 한마디로 줄이면 거룩을 지키기 위해 더러운 것과 접촉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 더러운 것들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태가 족보에서 노리고 있는 것은 ‘야 너희들,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이라고 자부하는 아브라함의 후손 이 유대인들아, 깨끗한 척, 거룩한 척 하지 말아라. 너희들이 핏속에는 너희들이 더럽다고 하는 그 모든 이방족속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족보 맨 마지막, 아니 새로운 족보의 시작이 되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남자 없이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이것을 과학의 눈으로 보지 말고, 신앙의 눈 곧 마태 신학의 눈으로 본다면 이건 남자가 없는 족보 그러니까 족보 자체에 대한 거부인 것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이고 자매인가? 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하여 복음 안에서의 가족은 누구인지를 1장부터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마태족보는 단순한 족보가 아니라 야훼 하느님은 핏줄로 이루어진 혈연 관계를 넘어서시는 분이시고 그럴 뿐더러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서 계시다고 하는 약자편애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한편의 웅장한 신학논문이자 유대 남성들이 자랑스럽게 다져놓은 가부장적 사회의 치부를 여지없이 고발하는 사회 고발장인 것입니다.
[왜 사느냐고 묻거든]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을 ‘예수의 광야 시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밋밋하여 처음에는 ‘광야의 도전’이라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만, 이 또한 상투적인 것 같아 21세기의 감성을 감안하여 [왜 사느냐고 묻거든]으로 붙여보았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루이저 린저라는 독일 작가가 매우 유명했는데, 그때 출간된 그의 책 제목도 [왜 사느냐고 묻거든]이었습니다. 이 질문이 어떤 사람에게는 사치스런 질문으로 들릴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짜증스럽게 들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심오한 철학적 질문으로 들리기도 하겠습니다만,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와 동시대의 인물로 유명한 수도원 원장이자 신비적 영성가로 잘 알려진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누가 자기에게 ‘왜 사느냐?’고 물으면 ‘그냥 살기 위해서 산다’고 답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러하거니와 당시 사람들은 보통 이런 질문을 받으면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다거나 혹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말을 하기 마련인데, 위대한 신학자의 입에서 ‘나는 그냥 살기 위해 산다.’라는 답은 우리가 쉽게 빠지기 쉬운 종교의 허위성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루이저 린저는 <왜 사느냐고 묻거든>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동물은 자신의 고통을 겪을 뿐이지만, 인간은 그 고통을 승화시킨다.” 삶에서 결코 피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을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으로 삶의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당신은 행복할 권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행복이란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지는 소망의 충족이 아니고 본연의 자기에서 완전히 일치하는 자아발견이다.”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는 박근혜정부 출발 일주일을 앞두고 있는 오늘 되새겨볼만한 말입니다. 근혜씨도 루이저 린저 정도는 알고 있을텐데 이 구절을 한번 되씹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본연으로 돌아가서]
신명기 26장의 본문 말씀은 제1성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는 구절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이 광야에서 살아온 지가 39년하고 11개월하고 그리고 첫 주일 첫날을 맞이했습니다. 이제 저 보름달이 초생달이 되고 또 다시 보름달이 되는 그날이면 그들은 꿈에도 그리던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왔던 자신들의 부모세대들은 거의 대부분이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 새로운 세대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님을 통해 애굽에서 겪었던 혹독한 고난과 홍해바다의 기적과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마실 물이 없어서 고통 받던 얘기들을 듣고 자랐습니다. 이 카이로스의 상황에서 모세는 120의 나이에 자기는 저들과 함께 들어가지 못할 것을 알고 있기에 비장한 마음으로 마지막 유언에 가까운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거든 땅에서 얻어진 첫 열매인 햇곡식을 갖고 야훼 앞에 나아가 이렇게 고백하여라.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애굽에 내려가서 몸 붙여 살았는데 애굽인들이 우리를 억누르고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는 우리를 굽어 살피시어 우리를 구해내셨습니다.”
쉽게 이해하면 역사의 주인이신 야훼 하느님께 감사하라는 부탁이지만, 자신들을 떠돌이의 후손으로 고백하라는 이 부탁은 자신의 뿌리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뿌리가 자랑스러운 뿌리라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뿌리가 자랑스럽지 못한 것이라면 이는 정말 중요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서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주기도나 사도신조나 ‘향기로운 이웃’과 같이 예배공동체의 정형화된 신앙고백문이라면 이는 정말 위대한 일입니다. 저는 성서의 위대함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더러운 출신을 잊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보통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이를 지워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이를 예배 안에서 공동의 고백으로 만들어왔던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이런 뿌리 정신을 거의 잊어버리고 약자 팔레스타인들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이는 저들이 경전이라고 일컫는 히브리성서의 근본정신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사실 이 뿌리정신을 이어서 성서에는 우리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고 있고 바울은 자기는 죄인의 괴수라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는 종교적인 정죄를 하고자 함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는 고백의 출발인 것입니다. 나의 나됨이 나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겸손과 낮아짐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향린교회도 이제 5월 17일 창립 60년을 맞이하면 어떤 선언을 할텐데, 그 시작은 이러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류 역사로부터 내팽겨진 떠돌이들이, 아무 것도 아닌 뜨내기들이 야훼 하느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으로 이렇게 민족과 교회 역사 안에 의미 있는 교회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하는 감사와 회개의 신앙 고백으로 시작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이 있듯이 사실 누구나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들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순절의 첫 시작은 지난 수요일부터입니다. 이 날을 성회 수요일 혹은 재의 수요일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섬돌향린교인들과 함께 죄의 고백이 담긴 회개의 기도문을 쓰고 이를 불에 태우고 그 재를 이마에 바르면서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찌니라’는 하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람이 교만해지는 것은 처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처음, 인간의 본래로 돌아가는 절기가 바로 사순절입니다. 그냥 돌아가자고 해서는 안 되니까 뭔가 변화를 주기 위해서 단식도 하고 기호식품도 끊으면서 일상적으로 추구하여 오던 개인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을 더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기도와 묵상, 성서읽기를 하여보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자기의 존재성 안으로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안과 통하는 깊은 연대와 나눔을 통해 큰 자기를 만들어내라는 것입니다. 오늘 신명기 말씀에 계속 반복되는 단어 하나는 ‘우리’입니다. 그리고 그 ‘우리’는 단순히 함께 예배드리고 고백하는 그 예배 공동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배 공동체 밖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 보면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너희들이 축제를 가질 때에, 너희끼리만 먹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떠돌이도 함께 부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너희들의 오늘의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거리로 내몰림 당하여 대한문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중인 사람들, 철탑과 종탑 위에 올라간 이 사회의 막장 사람들과 함께 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순절은 자기를 내려놓고 자기 안의 또 다른 자기 곧 이 땅의 아픔을 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다가가는 시간입니다.
[유혹과 도전]
사순절 첫 주일에 예수님의 광야 유혹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교회의 오래된 전통입니다. 이는 우리들 스스로를 다잡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에 휘둘리지 말고 살자는 것입니다. 첫 번째 유혹은 우리 모두가 쉽게 당하는 육체의 유혹입니다. ‘사흘 굶어 도둑질하지 않는 장사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예수는 사십일을 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에게는 돌을 빵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는 나의 배고픔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굶주린 사람들을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좋은 해결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건 우리 모두를 빵의 노예로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빵공장의 사장으로 만드는 모욕의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이는 동물과 차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에게 빵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빵의 노예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엑소더스 출애굽 해방의 핵심이 이것입니다. 애굽은 빵과 고기가 풍성한 곳입니다. 거기로부터 탈출한 출애굽이 성서역사의 시작입니다. 성서 자체는 창세기로 시작합니다만, 이 또한 하느님의 형상을 얘기함으로 인간의 고귀함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돌로 빵을 만들라는 이 유혹 이야기는 단순한 배고픔과 빵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있는 물질주의, 황금만능주의 맘몬주의에 대한 경고인 것입니다.
한 미국인 부부가 직장을 따라 동부에서 서부로 이사를 가는데, 쓰던 세간들을 모두 작은 트럭에 담았습니다. 중간 중간 모텔에 들려 잠을 자는데, 도난의 위험 때문에 짐을 매번 방안으로 옮겼다 다시 실곤 했습니다. 옆방에 기거했던 한 수도사가 길을 떠나면서 짐을 옮기는 힘든 모습을 보고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짐을 옮기십니까?’ “예, 여기는 우리가 살 곳이 아니거든요. 우린 그냥 이 도시를 지나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도사께서는 짐이 하나도 없으십니까?” “예, 저 또한 그냥 이 세상을 지나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바드신학대학장의 자리를 내려놓고 지적장애우 공동체로 들어간 헨리 나우엔이 말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행복이 소유에 달려 있는 것처럼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소유 때문에 행복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진정한 기쁨, 행복, 내적 평안은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줄 때 생기는 것이다. 행복한 삶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는 삶이다. 그러나 그 진리는 대부분 우리가 인생의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할 때 발견하게 된다.” 사순절은 일부러 우리 자신을 절망적인 상황 속으로 밀어 넣는 절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두 번째로 받는 유혹은 권세욕입니다. 높은 자리에 대한 욕망, 특히 돈과 명예와 권세가 한꺼번에 보장되는 정치권력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물론 가끔 지나친 권력 욕심은 부하에 의해 살해를 당하기도 하고 감옥행으로 귀결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부모님을 모두 총탄에 잃은 박근혜당선자는 경호실장을 장관자격으로 올리고 그 자리에 참모총장 출신을 임명하였습니다. 사택이 구기동이라 청와대 앞으로 지나갈 때가 많은데, 경찰들이 차를 세우고 어디 가십니까? 하고 묻는 등 매우 형식적이고 불필요한 검문을 하고 저는 수염이 있어서 그런지 다른 사람에 비해 더 꼼꼼히 묻습니다. 그래 돌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 검문 과정이 더 강화될 것 같습니다. 근혜씨가 부모를 모두 총탄에 잃었으니 그 심리적인 트로우마가 매우 심각하겠지만, 권력의 중추에 올라서면 이 살해 공포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네로황제가 자기 어머니를 독살하고 헤롯왕이 자기 동생이나 사위를 살해하는 것은 권력을 빼앗기면 내가 죽을 것이라고 하는 공포 때문입니다. 청와대 주위에 수만 명의 군대를 배치해도 그 공포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세상 권세는 결코 공짜가 아닙니다. 자신의 영혼을 포기하는 대신 얻어지는 대가인 것입니다. 저는 근혜씨가 제발 정신착란을 일으키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아버지가 그랬듯이 이는 우리나라에 커다란 재앙인 셈이지요.
요즘 북한 핵과 관련하여 남한 미국 중국 일본 사이에 불꽃 튀기는 권력의 충돌을 봅니다. 북한은 미국 주도의 UN 제재가 일어나면 4차 5차 핵실험을 경고하고, 남한은 북쪽의 주요군사기지를 목표로 하는 순항미사일 배치가 끝났다고 협박을 하고 이제 평양을 공격하는 가상 시나리오의 키리졸브 한미군사훈련이 시작하면 그 대립은 극한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이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남북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60년 전 625때 3백만이 희생당했다면 이제는 3천만이 희생될 것입니다. 3천만이 죽는 정도가 아니라 만약 남한의 핵발전소 23개 중 몇 개라도 미사일을 맞는다면 한반도 전체는 최소 백 년동안 생물이 살수 없는 동토의 땅의 될 것이고, 중국 일본 태평양 또한 여기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굳이 핵이 아니더라도 재래식 무기만으로도 서울의 모든 주유소와 화염물질 공장들이 불에 타면 불바다가 될 것이고 도심의 고층빌딩들과 값비싸고 전망 좋은 고층 아파트들은 우리가 911 때 보았던 쌍둥이빌딩마냥 한줌의 잿더미로 변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정신 나간 사람들은 이번 기회에 선제공격을 하자고 말하기도 하는데, 지난 통일심포지움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자기는 은퇴한 장로교 목사라고 떳떳하게 밝히는 것을 보면서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 은퇴가 아니라 세상 은퇴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이분은 목사로서 무엇을 믿고 무엇을 고백했는지가 의심스러웠습니다. 성서는 보지 않고 군사교과서만 본 모양입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임으로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변화시켰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교회가 먹힌 것입니다. 예수가 말한 원수사랑과 비폭력의 평화의 방식을 버리고 팍스로마나라는 로마제국의 폭력적 통치 방식을 본받아 교황이라는 지배 권세를 만들어냈고, 침략전쟁으로 땅을 빼앗는 대신 천국에서 받을 상이 크다는 설교와 함께 기도하자고 눈을 감게 한 다음 땅 문서를 가져감으로 부를 축적하여 왔습니다. 곧 오늘날 기독교의 개종전도라는 제국주의적 선교방식은 예수의 케노시스의 낮아짐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십자가 자기 헌신이 주가 되는 팍스크리스티의 방식이 아닌 모두 팍스로마나의 폭력적 방식인 것입니다. 요즘 남한교회를 보면 세상 권력과 밀착한 권력추구형 교회 대재벌이 하는 문어발식 교회 성장이 주류가 되고 말았는데, 이 또한 복음의 탈을 쓴 로마제국의 방식입니다.
세 번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유혹인데, 이는 이렇게만 한다면 사람들은 예수를 당장 하느님의 아들이 아닌 슈퍼맨/신으로 경배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설득하러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닐 필요도 없고, 굳이 여러 가지 말과 비유로 가르칠 필요도 없습니다. 너무나 쉬운 길입니다. 그러나 그 따르미들은 십자가를 따르는 주체적 인간들이 아닌 기적의 환상에 사로잡힌 노예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곧 사라지고 말 군상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한탕 욕망 실현을 통해 사람들의 갈채를 받는 그런 인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수단과 방법이 바르지 아니한 결과는 언제나 비극과 패배를 불러올 따름이라고 하는 역사의 교훈을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물질이나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것입니까? 이런 것들이 단순히 경쟁에서 이기고 삶의 편안함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까? 실은 이 모든 소유욕과 권력욕과 명예욕의 바닥에는 자기부정/자기거부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가치 없는 존재라고 여길 때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한 방식으로 돈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아닌 세상으로부터 먼저 인정받고자 할 때, 우리는 이미 영혼을 잃어버린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바로 하느님과 마주대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분주함 busy-ness로부터 벗어나, 광야로 나아가는 이유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세상 염려에서 벗어나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 의, 곧 생명과 평화와 정의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행복과 성공의 길임을 깨닫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단순히 윤리도덕적으로 옳은 삶을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의 떡과 잔을 나눕니다. 도대체 그냥 떡과 잔을 나누면서 자신을 기억하라고 하면 되었지 떡은 내 살이요, 잔은 내 피라고 하는 얘기는 왜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 안에서 우리 각자는 죽고, 예수 안에서 거듭나는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부활은 첫 번째 삶의 연속이 아닙니다. 두 번째의 삶은 그 질이 다른 것입니다. 첫 번째가 씨앗이라면 두 번째는 꽃과 열매인 것입니다. 첫 번째가 알이라면 두 번째는 창공을 훨훨 나는 새요 흘러내려오는 물결을 박차고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인 것입니다. 이것이 사순절 첫 주일에 하늘 식탁에 둘러 앉아 떡을 떼며 서로 축복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자리가 아직 오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이미 도달한 하느님 나라의 현존임을 알아채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