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주일
몸과 마음을 새롭게
시편 1 ; 예레 17,5-10 ; 고전 15,12-20 ; 루가 6,17-26

한  문 덕 목사

[새해를 맞아 60세가 되는 향린교회]

 채근담(菜根譚)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저 하늘과 땅은 영원토록 있지만, 이 내 몸은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고, 인생이란 다만 백년에 불과한 데다, 하루하루는 쉬이 지나가 버리니, 다행히 그 사이에 태어난 이들은 삶의 즐거움을 몰라서도 안 되고, 또 삶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서도 안 된다.”(天地有萬古, 此身不再得. 人生只百年, 此日最易過. 幸生其間者 不可不知有生之樂, 亦不可不懷虛生之憂. 『菜根譚』 107장) 2013년이 시작하고 벌써 한 달 열흘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채근담의 말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이 귀중한 시간들을 즐겁게 누리면서도 혹시 헛되게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늘 살펴야 할 것입니다.
 연말연시에 직장에서의 다양한 업무에 시달리다 보면 새로운 몸가짐과 마음의 다짐을 하지 못하고 그냥 시간을 흘려 보내기도 합니다. 그렇게 연말연시를 보내고 나면 뭔가 맺고 끊음이 없어 어딘가 모르게 찜찜합니다. 우리네 삶 속에 들어와 있는 각종 절기, 관혼상제와 같은 통과의례, 그리스도교의 매 주일 예배 등은 일상의 삶이 늘어져 권태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이 매우 중요시하는 설날이고, 오랜만에 온 가족들이 모여 다시 한 번 새해를 맞이하는 날입니다. 설날의 “설”이라는 말의 어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낯설다”에서 왔다는 설과, 나이를 뜻하는 “살”에서 왔다는 설, 새 것을 나타내는 순 우리말이라는 설 등등. 어원이 무엇이 되었든 설은 나이 한 살을 더 먹는 만큼 새롭고, 기대가 되고, 그래서 변화와 다짐의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올해는 향린교회가 60년 되는 해인데, 이것을 하나의 계기로 삼아 우리 공동체의 신앙과 삶을 성찰해보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고, 구체적 계획을 세우는 해가 될 것입니다. 이미 20년 전에 향린교회는 40년을 맞아 창립 초기 입체적 선교라는 창립정신을 이어 예배중심적 교회가 아니라 선교지향적 공동체가 될 것을 다짐하고 그 세부적인 계획으로 다양한 실천 선언들을 하였고, 지난 20년간 사회선교센터를 세우는 것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선언들을 실행하였습니다.
 제가 2002년 향린교회에 첫 발을 디딘 후 지난 십년간의 향린교회의 여러 활동을 겪어보고, 또 지금 60년사 편찬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지난 60년간의 향린의 역사를 살피고, 오늘 이 시대에 벌어지는 다양한 사회적 사건들에 대해 향린교회가 대처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향린교회가 정말 소중하고, 향린교회에서 제가 목회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여전히 벅찬 감동을 지울 수 없습니다. 뭐가 그리 다르단 말이냐? 라고 누가 제게 묻는다면, 최소한 향린교회는 “세계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교회의 과제에 충실하려고 애쓴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가 그리하셨듯이 남을 위한 존재, 세상의 구원을 위한 존재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는 제 몸을 불리거나,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구제와 봉사를 수단으로 삼고 있고, 또 한편으론 종교적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일종의 친교집단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한 때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제를 선포할 때가 있었으나 중대형교회의 목회세습이 버젓이 자행되는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과연 한국교회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볼 때 향린교회는 아직까지 십자가를 지고 성문 밖으로 나아가셨던 예수를 따르려는 제자의 감각을 잃지 않고 있는 참으로 소중한 교회입니다.
[이 시대의 과제?]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행위로 표현되어야 하는가?”하는 물음을 계속 물어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이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기술공학과 사회적 매체는 우리가 상호 소통하는 방식, 공동체들을 구성하는 방식을 빠르게 바꾸어가고 있고, 그 결과 사람들은 과거보다 훨씬 복잡한 정체성을 가지고 다양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명확하게 인식하면서 그리스도인 개인으로, 그리스도교 교회공동체로 그 시대가 요청하고 하느님이 명령하시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난 주 우리는 제직수련회를 통해 2013년으로부터 시작되는 향후 5년을 염두에 두며 오늘의 사회적 과제를 살핀 것입니다. 강사로 오신 홍윤기 교수는 불교 집안에서 성장하여 불교재단의 대학인 동국대 교수이시고 비기독인이었습니다. 교회가 이런 분을 모시는 것이 걸림돌이거나 흠이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신앙과 신학은 자기 종교에 대한 깊은 헌신이 있음에도, 타종교, 비종교인들의 비평과 새로운 정보에 개방적이며 세상과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에 적극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홍윤기 교수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과제를 평화, 복지, 민주, 정의로 크게 나누고,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외교적 상황들을 분석하였습니다. 남과 북을 비롯하여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에 모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고, 새로 탄생한 정부들의 힘의 균형이 무너지거나,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최고 행정 수반들이 오판이라도 하면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음을 경고하였고, 자본집약적 성장 속에서 정작 중요한 사람들이 배제되고 그래서 노동의 기쁨을 누릴 수 없는 삶은 더욱 비참해져 자살 뿐 아니라 방관사, 고독사가 증가하며, 자본독재, 법조독재라는 새로운 독재가 등장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근혜 씨는 대통령 당선을 위하여 자신의 생래적 모습과는 달리 다른 진영의 온갖 좋은 것들을 자신의 것인 양 빙의(憑依)하였는데, 과연 그가 대통령이 되어서 그런 공약들을 해낼 수 있을지 어떨지 현재로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기초노령연금에 관한 공약이나 4대 중증질환 100% 국가 보장과 같은 공약들이 벌써부터 어긋나는 것을 보면 희망을 품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더군다나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쌓아 온 부정부패와 인권유린, 공공의 사유화 속에서 문제는 산더미인데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여기저기 노동자들의 신음은 더욱 깊어지고, 며칠 전에는 재능교육 해고노동자들마저 성당 종탑꼭대기에 올라가 아픔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선포와 새 마음]

 어느 설교자가 좋은 설날 아침, 밝고 희망찬 내용으로 하늘뜻을 펼치고 싶지 않겠습니까만은 현실과 동떨어진 헛된 희망은 거짓 예언자의 달콤한 속임수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성서 본문의 주인공 예레미야 같은 이는 저주로 시작되는 예언도 서슴치 않습니다. 

“야훼가 하는 말이다. 나에게서 마음이 멀어져 사람을 믿는 자들, 사람이 힘이 되어주려니 하고 믿는 자들은 천벌을 받으리라. 벌판에 자라난 덤불과 같아, 좋은 일 하나 볼 수 없으리라. 소금쩍이 일어나서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뙤약볕만이 내려 쬐는 사막에서 살리라.”
    
 눈물의 예언자라 불리는 예레미야는 정치 변혁의 폭풍이 휘몰아치던 역사적 전환기의 한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활동했던 시기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앗시리아 제국의 세력이 차츰 무너져 내려 새로운 희망이 보이는 듯 했으나, 잔인하고 가혹하기가 앗시리아에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은 새 강대국 바벨론이 이미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사제 가문에 속해 있던 예레미야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의 활동 말기에 이르러 예루살렘은 쑥대밭이 되고, 대부분의 유다 백성은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했지만, 백성들은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씀에 반항하였고, 이방 신들에게 나아갔으며, 거의 마약처럼 하느님의 성전이 무너질 리 없다고 믿으면서, 잘못된 안전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약소국인 유다 왕국이 위기에 처한 것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놓인 유다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 아니라, 나라의 책임자들과 백성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깔보고 정치적인 동맹관계와 음모 가운데서 자기들의 살 길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예레미야는 외쳤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위탁을 받아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조국의 멸망을 예언해야 했고, 자기 백성의 잘못에 대해 가혹하고도 무자비하게 지적을 해야 했습니다.
 만인이 듣기 싫어하는 예언을 행하고, 또 몸으로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으므로 예레미야는 온갖 고초와 수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경험을 통해서 예레미야는 소중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는 이스라엘 전체 집단의 구조적 불의와 우상숭배에 물든 체제를 날카롭게 비판했던 다른 예언자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비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야훼 하느님이 자기 백성과 새 계약을 맺으셔서 이제는 하느님의 계명을 돌판에 써 주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에 적어 두실 것이라는 선포를 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선포입니다. 이 선포는 모든 조직과 제도가 가지는 한계를 넘어서게 합니다. 겉으로만 그런 체 했던 위정자들의 위선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고, 공적과 업적주의는 무너지게 됩니다. 집단 속에 숨어 요리조리 책임을 회피하는 개인의 양심에 화살이 꽂히게 됩니다. 군사력, 기술 혁신, 사회적 지위, 경제적 성취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삼으려는 이들에게 진정한 인간됨이 무엇인지에 대한 각성의 불꽃을 일으키게 합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이제 인간의 속마음에 직접 가 닿기 때문입니다.
 식민지와 전쟁 이후 거의 폐허의 상태에서 재기한 우리나라는 그동안 경제적 성장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고, 형식적이나마 민주주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삶은 편리해졌고, 세계무역 10대 강국이니, G20 개최국이니 하면서 세계무대에서 나름 영향력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허리는 잘려 스스로 서지 못하고, 꼿꼿이 설 수 없기에 미국의 주구(走狗)가 되어 굽신거리며, 그렇게 종이 되어 주체성이 없으니 강대국들의 눈치만 살피고, 돈의 맛에 길들여져 인간됨은 사라지고, 이웃을 위한 헌신은커녕 최소한의 배려조차도 점차 상실해 가는 짐승의 나라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 평화, 생명이라는 가치에는 눈을 감아 버리고, 오로지 돈, 권력, 사회적 지위에만 탐닉하는 위정자들로 인해 이 나라 민중은 고달픈 하루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정치는 무척 중요한 것이고, 바른 정치가 되어야 좋은 사회가 가능한 것이지만 이제 예레미야의 깨달음처럼 정치인들에게 사회를 맡길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 민중 한명 한명의 가슴에 새로운 뜻이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향린교회는 오랜 역사의 경험과 민주적인 교회 운영, 교회의 다양한 활동을 수행하는 각 부서의 조직들, 새 교우의 정착을 위한 프로그램, 다양한 관심사에 따른 소모임의 활동과 친교들이 있습니다만 오늘 더욱 필요한 것은 그런 조직이나 제도, 교회의 건물이나 사람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곧 바로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의 뜻을 묻고 소통할 수 있는 새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시편 1편이나 예레미야의 오늘 본문 후반부에 잘 나오듯이 하느님께 의지하는 자는 물가의 뿌리를 내린 나무와 같다고 합니다. 우리네 생활의 뿌리는 바로 마음이며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닿아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든 행동은 좋은 열매든 나쁜 열매든 맺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열심을 내어 선교활동을 하여도 그 마음의 뿌리가 하느님께 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정 욕구나 업적을 쌓으려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특히 공동체의 경우에 반드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람의 마음은 천길 물 속이라 아무도 알 수 없지만,”이라는 부분을 다른 번역 성경으로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 닿아있지 않은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부패해 있으며, 변덕이 식은 죽 끓 듯 하여 들어갈 때 다르고 나갈 때 또 다른 것입니다. 그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우리네 모든 신앙행위는 위선이 되거나, 일시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또한 마음을 올곧게 하느님께 두지 않으면 위기가 닥칠 때 우리가 그동안 쌓아 자랑하는 향린의 60년 공든 탑도 하루 아침에 무너질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자기중심적 욕심을 넘어서]

 예수님의 마음에 비추어 우리 마음이 얼마나 자본주의에 물들었는가를 알아보려면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보면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마음에서부터 진정으로 우러나와 “아멘. 정말 그렇습니다.” 하는 이가 여기 계시는지요? 예수님은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라고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아니요. 우리는 더 부자가 되고 싶어요. 우리는 아직 위로 받지 못했어요.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의 것이 아니어도 좋으니 가난은 싫습니다.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아도 좋으니 부요해 보면 좋겠네요!”라는 말이 마음 가득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부요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예수님의 오늘 말씀에 쉽게 아멘이 나오지 않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에 가 닿아 있기 보다는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전혀 다른 삶의 가치가 있음을 깨닫기보다 그냥 현실에 안주하거나, 이 자본주의 사회가 제시하는 욕망에 순종하는 것이 평범한 우리들의 나약한 삶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오늘 바울 사도의 말씀을 들어도 우리의 구부러진 마음 때문에 바울 사도의 본 뜻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의 소식은 우리에게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목숨의 영원한 연장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제가 예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공무원을 오래하시다가 은퇴하신 분이 교회에 등록하신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분의 세례 교육을 담당하였었는데, 교회에 등록한 이유를 물었더니 “영생을 얻고 싶어서요. 죽은 후에 천당이 있다고 하니 거기에 가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분이 이해한 영생은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 영원히 유지되는 것! 즉 영혼의 불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할 때 그 핵심은 영혼의 불멸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면 당대 헬라적 문화에서 영혼 불멸은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알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혼불멸 사상은 예수의 부활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오늘의 고린토전서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바울은 부활을 네 가지와 연관지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과의 관계, 둘째, 예수의 부활과 우리 자신들의 부활의 연결관계, 셋째, 부활과 죄의 문제, 넷째, 새로운 세상이 가능한가에 대한 희망의 문제입니다.
 고린토 교회에서 예수의 부활이 문제가 된 것은 그 부활이 바로 몸의 부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신적인 인간(神人) 예수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나사렛 촌 동네의 로마 반역자 예수가 부활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에게 중요했던 것은 우리가 생각하듯 우리의 생명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 지금도 여전히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즉 몸의 부활과 현현으로써 개인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제자 공동체 즉 교회를 통해서 계속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서 하느님이 역사하신다는 우리의 믿음의 내용을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바리새파가 가지고 있던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악을 물리치고 자신의 나라를 세우시는 첫 표징이 바로 부활로 나타나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에서 새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읽었고, 이제 예수의 부활을 믿는 우리 모두는 새로 시작된 하느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이 연결되는 것은 하느님의 시작하신 역사에 우리가 동참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인간의 유한성과 욕심, 자기중심주의에서 비롯된 죄와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그 보다 더 큰 구조적 죄악의 사슬을 끊고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영원하신 하느님 나라에 소망을 두어, 모든 악의 궁극적 결과로 여겨졌던 죽음까지도 극복되는 희망을 예수에게서 보았다는 신앙고백 즉 부활의 신앙고백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어떤 면에서 신앙의 눈으로만 보이고, 신앙의 행위로만 가능한 일들을 이루어 냅니다. 그리하여 바울에게 십자가는 치욕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이자 하느님의 사랑의 승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아침 최근에 <윤선도 평전>, <몸과 인문학>이라는 책을 펴낸 고전평론가 고미숙 씨의 라디오 인터뷰를 들었는데, 그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교육풍토 특히 선행학습에 대해 비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나 선생님으로부터 공부를 잘하려면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요즘은 예습이 아니라 선행학습이 일반화 되어 있는 듯 합니다. 고미숙씨의 말에 의하면 선행학습을 하게 되면 학교에 가서 배울 내용을 미리 배우기 때문에 이 아이는 선생님을 존경할 이유가 없게 되고, 또 선행학습을 하지 않은 같은 반 친구를 무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가족을 떠나 만나는 처음 사회인 학교에서 아이들이 타인을 존중하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을 일상화 했을 때, 과연 이 아이가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고미숙 씨의 비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자신을 존중해 주지 않는 사람을 상대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식정보의 습득은 빨라질 지 모르나 사람 사이의 관계 형성은 어려워지고, 고립된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 고미숙 씨의 요지였습니다.
 선행학습을 강제로 시키는 많은 부모들이 보지 못하는 점을 고미숙 씨는 잘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새로워진 우리들이 세상과 다르게 볼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또 그 새로워진 시각과 비전으로 행동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더 아름다워질까요!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이제 우리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 제가 여러분에게 몇가지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다음 주에 강단이 나오면 집에 가져 가셔서 질문에 대한 자신만의 답변을 달아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 무엇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의 길로 끌어들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당신의 이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를 여러분 자신의 말로 해 보십시오.

2. 아래의 일곱 가지 질문에 대해 당신만의 생각과 신념을 말해 보십시오.
- 하느님은 누구신가?
- 그리스도(구원자)라 불리는 예수는 누구신가?
- 하느님의 영 혹은 성령은 누구신가?
-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사람답게 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 죄란 무엇이며, 구원은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가?
- 교회의 본질과 기능, 역할은 무엇인가?
- 우리가 희망하고 기대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 삶의 마지막에 대하여 당신은 어떻게 기대하고 생각하고 있는가?

3. 당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었던 경험(1번 질문)과 당신이 믿고 있는 신앙내용(2번 질문)에 근거하여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거나 할 수 있는 행동들을 적어 보고 그것을 성찰해 보십시오.

4.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나 모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임들이 하고 있는 행동들을 위 3번처럼 성찰해 보십시오.

5. 3번과 4번에서 살핀 행동들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당신이 알아야 할 목록을 적어 보십시오. 당신이 함께 일하고 또 일하게 될 사람들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이들의 배경, 문화, 필요, 요구에 대해서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또 주변 환경, 사회적 연결망, 경제적 현실,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6. 이제 당신의 행동 계획을 잡아 보세요.

 유대인들은 우리의 설날에 해당하는 음력 티슈리 월(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으로는 9, 10월경) 1일에 로시 호샤나라는 신년절을 지킵니다. 그리고 그 날로부터 10일 동안 참회의 시간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 ‘10일의 참회’를 마무리 짓는 신년 10일을 대속죄일(욤 키푸르)라고 부르며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고 하느님께 지은 죄를 회개합니다. 이 날을 안식일 중 안식일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절기가 주중에 해당되더라도 일을 완전히 중단하고 이 날을 엄숙히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날은 음식·음료·성교를 금하고, 극단적인 정통파 유대인들은 가죽신을 신고 기름을 바르는 것조차 금합니다. 유대교 회중들은 욤 키푸르 전야와 그날 하루 종일을 기도와 명상으로 보내며, 전야에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 친구들끼리 지난 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해 줍니다.
 우리의 설날은 유대교의 신년절의 참회 전통과는 다르지만 다시 한 번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며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는 계기로 삼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섣달 그믐이 되면 야광귀라는 귀신을 막기 위해 체를 대문밖에 걸어 두었습니다. 야광귀는 밤에 내려와 신발을 훔쳐 신고 도망가는데, 그 때 잃어버린 신발의 주인공은 1년 내내 일이 꼬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체와 바늘을 걸어두면 야광귀가 밤새도록 바늘로 체의 구멍을 세다가 신발을 훔치지 못하고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내용은 그렇습니다만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체의 구멍들을 우리 조상들은 눈으로 생각했고, 그렇게 밤새 엄청 많은 눈으로 세상을 살펴 조심스레 새해를 맞이했던 것입니다. 오줌 싸면 키를 씌우고 옆짚에 소금 얻으러 보내는 것도 키에 난 엄청 많은 구멍들을 눈들로 생각했기 때문이고, 부적이나 온갖 귀신을 쫓는데 물고기 그림이 들어가는 것도 물고기는 눈을 부릅뜨고 감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해를 맞는 여러분! 이제 우리의 눈을 부릅뜨고, 우리의 모든 몸과 마음을 열어 새로운 다짐을 합시다. 예수의 삶의 정황, 문제의식, 고민과 이어지는 구체적인 활동, 그리고 예수 자신의 삶이 그러했으므로 피할 수 없었던 그의 죽음의 성격 등을 헤아리고, 우리가 그의 제자가 되기로 했던 그 첫 경험의 기억을 반추하며, 우리 신앙의 내용을 명확히 하고, 그에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일들과 우리 공동체가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본다면 우리는 입술의 고백을 넘어 일상의 삶에서 몸의 행위로 이어지는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원래 설날에는 서로 덕담을 주고 받아야 하는 지라 마지막으로 지난 1월 제 생일을 축하하며 한 집사님께서 제게 책을 선물해 주시며 제게 적어 주신 덕담을 소개하고 오늘의 제 하늘뜻펴기를 마칠까 합니다.

“거의 일상이 되어버린 부조리, 불합리, 비상식 속에서 배울 만큼 배웠다는 사람들의 이율배반적인 언행을 보며 도대체 ‘배운다는 것’,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회의가 듭니다. ‘값’은 알지만 ‘가치’는 모르는, 아니 분간할 수 없고, 과감히 후자를 선택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애써 생각해 봅니다. 그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바로 믿음이 아닐까 합니다. 목사님의 목회의 여정이 나무를 심는 사람과 같은 ‘용기를 심는 사람’의 그것이길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여 올 한해 여러분의 여정이 가치를 선택하여 과감히 행하는 용기 있는 참 신앙인 여정이 되길 바랍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