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조화, 공동체의 조화

8:1-3,5-6,8-10; 19; 고전 12:12-31a; 루가 4:14-21

 

<팡세>라는 책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하는 유명한 말을 남긴 17세기 불란서의 수학자이자 사상가인 파스칼은 사랑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에서 행복을 발견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지난 주 한자어 복이란 단어는 넓게 보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얘기를 드렸고, 여기에 함께 언급된 행복 또한 비슷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져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복 혹은 행복은 더 급진적입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많이 갖고 있고, 기뻐하고,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이 복이 아니라, 반대로 가난하고 애통해 하고, 자기를 비워 욕심이 없을뿐더러, 사회적 정의와 평화를 위해 애쓰고 노력하고, 애쓰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이 때문에 고통과 핍박을 당하는 자가 복되고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파스칼은 바로 이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한 결과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이런 복을 누리려면 자기 이익을 생각해서는 결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고 사랑 그 자체에서 기쁨을 누리는 깬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해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깬 사람이 되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복을 누리는 사람이 될 것인가? 그건 우리가 불행 혹은 화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겉으로 드러나는 1차원적인 자기 아픔의 차원에서 판단하지 않고, 요동치는 물결 밑 저 깊은 심연, 고요 그 자체, 종교적인 용어로 말하면 영원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자기를 바라보았을 때, 얻어지는 성찰의 결과입니다.

 

[성서는 민중들의 이야기]

 

하느님의 말씀 혹은 법이라고 일컬어지는 성서는 바로 그런 시각에서 읽어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서는 당시 중동에서 제국의 폭력적인 힘에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던 노예 출신의 히브리인들이 어떻게 하면 이러한 국가 폭력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고 인간들이 오순도순 평화롭게 잘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가운데, 세계 역사를 바라보고, 자신들의 고난의 역사를 정리해 놓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주로 왕을 중심한 자신들의 역사 이야기를 하지만, 그러나 그 관점은 민중들이 본 관점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라 불리지만, 동시에 민중 이야기입니다.

 

오래 전 한때 형제 나라였던 북왕국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을 받았고, 자신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고, 거기에 야훼 하느님이 계시기에 끄덕없다고 자부하였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들의 나라인 유다왕국 또한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였고, 왕은 눈알이 뽑히고 지도자들은 모두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6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지배 35년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60년이 되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하는 가정을 해보면 참으로 암담한 결과를 추론하게 됩니다만, 하여간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은총인지 역사의 흐름인지는 알 수 없지만, 페르시아라는 새로운 제국이 등장하면서 저들은 포로생활에서 해방을 받아 고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물론 당시 끌려갔던 1세대들은 모두가 죽었고, 바벨론에서 태어난 2, 3세들이었습니다.

 

물론 다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다른 민족과 결혼을 하거나 나름대로 생활의 정착을 이룬 사람들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중 페르시아 왕의 측근으로 권력의 핵심에 들어간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느헤미야입니다. 그는 고국에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영향으로 야훼 하느님을 신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유대에 돌아간 친척들로부터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황폐하게 무너져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이때부터 그는 잠을 이룰 수 없게 됩니다. 어느 날 그는 왕에게 자신을 유다지방의 총독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고 이를 허락받습니다. 그래 그는 함께 살아가던 다른 민족들의 반대와 모함에도 불구하고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벽들을 다시 세우고, 새해를 맞아 백성들이 성전 뜰에 모였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과 그곳에 남아 있던 백성들과의 깊은 갈등이 있었고, 이방 문화와 이방 종교들로 인해 개인과 사회의 가치관이 제대로 성립되지 않는 혼돈의 시기를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1945815일 갑작스레 해방을 맞아, 중심 세력이 없이 너도나도 주인행세를 하여 제 각각의 주장을 펼쳤던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혼돈의 시대에 제사장 에스라가 모든 백성을 불러 모아놓고 모세 5경의 말씀을 온종일 읽었고, 거기서 유대백성들은 뭔가 중심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읽었던 율법서가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모세 5경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핵심은 같습니다. 그건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래 유랑하는 아람 족속들로 애굽의 노예로 사백년을 살아가다 야훼 하느님의 인도하심으로 해방을 받아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살아갔다는 은혜에 대한 감사의 고백으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혈연이라는 민족 공동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신앙공동체에 대해 눈이 떠진 것이지요. 왜 자신들이 그러한 왕국 멸망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역사의 눈을 뜨게 된 것이지요. 과거의 긴 역사를 돌아보면서, 자신들이 겪었던 왕국의 분단과 60년의 유배와 포로의 아픔은 새 역사의 밑거름이 된다고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에즈라가 모두 쳐다볼 수 있도록 높은 자리에서 책을 펴들자 온 백성은 일어섰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세계 교회의 성서읽기에 따라 성서 말씀을 읽어가고 있습니다만, 전통적으로 복음서를 읽을 때에는 모두 일어서는 전통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서구의 많은 교회들이 이런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본래 저도 3년 전 이 성서읽기를 시작하면 그렇게 할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약간 번잡스러운 생각이 들어 시작을 하지 못하였는데, 오늘부터 이렇게 하고자 합니다.

 

예배가 형식적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반대로 너무 형식이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새롭게 만들어가기도 합니다. 거룩한 영은 바람과 같이 물의 흐름과 같이 자유로운 영이기에 인간의 형식에 결코 매이지는 않지만, 예배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가 함께 하기에 일정한 형식은 필요한 것이고 또 형식의 부의미한 반복성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가끔 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의 희년 선언과 오늘의 의미]

 

예수께서도 변혁을 자주 말씀하셨지만, 동시에 주어진 기본에 충실하셨습니다. 오늘 루가복음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고향 나자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백성들을 가르치셨는데, 그 과정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장에 들어가셨다.> 늘 하시던 대로. 일정한 형식을 준수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용은 매우 혁신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성서의 말씀의 가장 핵심인 이사야의 희년 선언의 말씀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은 무엇인가요? 그건 평등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부유세를 매겨 골고루 나눠 갖는 일이야 말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주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당시에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먹을 것이 없어 쌀을 꾸었는데, 이를 갚지 못한 신용불량자들이요, 개발이라는 이름하에 조상 대대로 살고 있던 집에서 쫓겨나가는 민중들이 이에 저항하다 감옥에 갇힌 용산 철거민들입니다. 이들에게는 해방 곧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라. 여기에 눈먼 사람들은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안과 의사, 이태환장로님을 두고 하는 말인가요? 이는 권력과 재벌의 하수인이 되어 사실을 감추는 언론의 왜곡을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자유 언론 투명도에 있어 점점 하락하고 있습니다.

 

국정원 여직원을 비롯한 다양한 방식으로 대선에 개입한 권력형 부정선거가 있었고, 지금 많은 사람들이 전자개표방식에도 뭔가 석연치 않는 부분들이 많으니 이를 명확하게 밝히라는 요구를 하고 있지만, 언론이 눈을 감고 있음으로 백성들이 모두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언제 잘릴지 몰라 공장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정당한 요구를 하지 못합니다. 경찰은 권력의 개 노릇을 하는 견찰을 비판했던 경찰대의 표창원교수가 여기저기 강사로 다니면서 내부의 비리를 폭로하자 정부 국정원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명예훼손죄로 고소를 하는 등, 억누르고 있습니다. 제주가 평화의 섬이 되도록 하기 위해 강정의 해군기지 건설을 막기 위해 애를 쓰던 양윤모감독을 비롯한 평화운동가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벌금으로 억누르고 있는데, 이런 부당한 일들을 막기 위해 예수는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실현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이것이 모세 율법이 말하는 안식일과 안식년의 정점이 되는 희년의 핵심인 것입니다. 사실 희년의 내용은 이보다 훨씬 더 급진적입니다. 당시에도 그러했지만, 지금도 이 희년을 성서에 나와 있는 그대로 실천한다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로 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것이구요.

 

사실 이 루가복음의 말씀이야 말로 예수님 하느님 나라 운동의 핵심입니다. 성서 무오설을 주장하려면 이런 핵심을 갖고 이 루가복음의 말씀을 갖고 성서 무오설을 주장해야 하는데, 자기에게 유리한 작은 구절을 갖고 말하니 참으로 어리석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이 사회 곳곳에서 아파하는 영혼들, 특히 사회 구조악으로 말미암아 신음하고 고통당하는 힘없는 사람들의 소리에 함께 아파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 말로 하느님 나라 운동의 핵심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와 한 집에 살아가는 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서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살아가는 방식이니 이런 좁은 생각을 뛰어넘어 보다 넓고 깊게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그런 교회가 되라는 것이 예수님의 바람이었던 것입니다.

 

[목회의 근본]

 

사도 바울은 이를 아주 쉽게 설명하기 위해 몸에 비유합니다. 머리가 발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몸 가운데서 약한 지체가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우리는 몸 가운데서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부분을 더욱 조심스럽게 감싸고 또 보기 흉한 부분을 더 보기 좋게 꾸밉니다. 하느님께서는 변변치 못한 부분을 더 귀중하게 여겨주셔서 몸의 조화를 이루게 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몸 안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 나가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목회자로서의 저의 최대 사명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향린교회의 교인들이 이런 기쁨을 얻도록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아픔을 당한 교우의 아픔을 함께 나누어 그 아픔은 반으로 줄이고 기쁨을 함께 나누어 배가 되도록 할 것인가?

 

바울 선생은 서로 다른 지체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어 하나의 일을 하는 것을 가리키어 몸의 조화(調和)라 말하고 있습니다. 조화라는 말은 서로 어울리다’ ‘균형을 잡는다라는 말입니다. 다른 성서에서는 이를 서로 돕는다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공생(共生)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비슷한 단어로 함께 존재한다라는 공존(共存)이라는 단어도 있고, 더 적극적인 용어로는 서로를 살려낸다는 상생(相生)이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輪回)의 가르침 안에는 모든 생명체가 하나라는, 우리 눈앞에 보이는 모든 크고 작은 생명체가 나의 과거인 나의 어머니이자 동시에 내가 돌아갈 나의 미래이자 나의 분신이라고 하는 생명경외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인도, 네팔, 태국을 비롯한 불교권의 상대를 향한 인사말을 나마스떼입니다. 이 말의 뜻은 내 안에 있는 신이 당신 안에 있는 신에게 평화의 인사를 드린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형상을 띄고 태어났다는 곧 상대방이 내가 존중하고 숭배해야 할 하느님임을 강조하는 창세기 1장과 일맥상통하는 인사법입니다. 좀 길긴 하지만, 우리 또한 이렇게 인사를 하면 어떨까요?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께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여기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유일신관을 갖고 있으니까, 당신의 얼굴을 보니 내가 믿는 야훼 하느님이 거기에 계시는군요. 이런 뜻입니다.

 

[몸을 통한 우주적 성찰]

 

사람의 생활수준이 높아지면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마련인데, 요즘 신문이나 TV 광고에 건강기구나 건강식품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심심치 않게 듣는 말이 9988234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백세를 넘는 분들도 주위에 여러분이 계시다보니 이 말 또한 바꿔질 때가 곧 올 것 같습니다.

 

최근 박지원의 "열하일기", 홍명희의 "임꺽정", 허준의 "동의보감" 등 고전을 통해 색다른 텍스트 읽기를 시도하여온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몸과 인문학>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이는 부제인 동의보감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에서 드러나듯이 동양의 역학적 관점을 가지고 쓴 사회비평 에세이입니다.

 

그는 묻습니다. [몸과 우주, 우리는 이 단어들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몸은 병원에 맡기고, 우주는 천문학적 쇼의 배경으로나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 결과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숱한 질병과 번뇌들이다. 21세기 인문학의 화두는 몸이다. 몸이야말로 삶의 구체적 현장이자 유일한 리얼리티다. 가장 깊으면서 동시에 가장 투명하고, 가장 체계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야생적이다. 소외와 억압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길이 그 안에 있다. 헌데, 그 길을 탐사하다 보면 광활한 우주가 펼쳐진다. 정치와 양생이 마주치고, 여성성과 지혜가 결합하며, 교육의 원리와 음양의 이치가 교차하는! 이를테면, 몸과 우주의 정치경제학이라고나 할까]

 

[TV 프로그램에 나와 전신성형을 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못생겨서 무시당했다고, 그래서 자신감을 얻고 싶었다고. 새빨간 거짓말이다. 자신을 무시한 건 바로 자신이다. 자신이 이미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있는데 남들이야 당연한 거 아닌가. 실제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가족 친지들의 이목구비도 잘 모른다. 이목구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목구비가 만들어 내는 표정과 생기를 보기 때문이다. 표정과 생기는 포착불가능하다. 그래서 진정으로 타인들과의 소통을 원한다면 기운의 배치를 바꾸어야 한다.]

 

[건강이란 무엇인가? 단지 병에 걸리지 않고 각종 수치가 정상이면 건강한 것인가? 어떤 삶을 살든 간에? 절대 그렇지 않다. 삶이 왜곡되면 생리적 리듬도 어긋나게 마련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전쟁도, 지순한 사랑의 파토스도 삶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지 않으면 다 병이 된다. 그리고 이 병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질병보다 더 치명적이다. 존재 자체를 심각하게 훼손시킬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건강은 삶에 대한 지혜와 분리될 수 없다. 인도의 아유르베다 의학은 병을 지혜의 결핍으로 정의한다.]

 

, 교육, 정치, 사회, 경제, 여성, 가족, 사랑, 운명 등 총 8개의 장을 통해 수승화강(水昇火降)’-물은 올리고 불은 내리고, 곧 차가운 기운은 올리고 뜨거운 기운은 내리는 것이 생명의 원리이듯 잘 산다는 건 그건 사회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계의 능동성과 생리적 순환의 동시성 더 나아가 삶과 죽음은 동질성을 함께 논하는 그의 성찰에 대해 깊이 동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실연은 행운이다,> <상처도 스펙이다,>라고 하는 작은 제목이 말해주듯 몸을 통해 우주를 보고 우주를 통해 몸을 바라보는 역발상을 통해 인생의 근본 이치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조율의 신앙적 해석]

 

조율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관현악단이 연주 직전 자기 소리를 전체에 맞추는 것을 말합니다. 예향이 시작하기 전 가야금과 해금의 줄을 조정하고 피리나 대금 주자들 또한 그때그때 몸 상태와 입술의 위치에 따라 변하는 소리를 전체에 맞추어 조절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날한시 같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같은 악기라 하더라도 또한 제각기 자기만의 독특한 울림과 떨림으로 다른 소리가 나기 마련이고, 한 악기의 같은 줄, 같은 자리에서도 아침이 다르고 저녁이 다른 법인데 해금과 가야금의 소리를 맞추고 피리와 대금의 소리를 맞추고 여기에 장구의 가죽울림이 하나의 음을 만들어내는 조율은 어찌 보면 자기를 죽이는 일입니다. 같은 곡을 같은 교향악단이 연주를 한다하더라도 지휘자에 따라 다른 소리가 나는 것은 그런 이치입니다.

 

조율이란 자기가 낼 수 있는 여러 개의 소리 가운데서 전체에 어울리는 한 소리를 제외하고는 전부 죽이는 작업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를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집단의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닌가? 신앙이란 전체의 소리에 자기 소리를 맞추어 함께 하나의 큰 소리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만, 이탈리아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가 어느 날, 연주회를 하는 도중 줄 하나가 끊어졌습니다. 남은 세 줄로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너무 강렬한 탓인지 또 하나의 줄이 끊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파가니니가 연주를 포기할 줄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두 줄로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또 줄이 끊어졌습니다. 한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연주는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파가니니는 잠시 음악을 멈추고 청중을 바라보더니 마지막 남은 한 줄로 연주를 완벽하게 마쳤습니다. 물론 이때 남은 줄이 G 선이었습니다만, 유명한 바하의 G선상의 아리아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곧잘 우리들의 인생에 비유됩니다. 내가 자랑하고 의지했던 물질의 줄, 명예의 줄, 가정의 줄, 사랑의 줄, 이런 줄들이 끊어졌을 때에 우리는 모두 낙심하게 되고 이 낙심이 지나치면 상심과 우울을 넘어 자살이라는 극단의 상황으로 번져갑니다. 내용과 각각이지만, 사람은 누구나 다 이러저러한 시련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가 던져 주는 교훈은 내가 의지하는 인생의 줄이 다 끊어져 한 줄만 남았다 하더라도, 아니 남은 한 줄마저 끊어졌다 하더라도 그게 인생의 끝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사람에 따라 어떤 사람은 이 한줄을 반전의 기회로 삼아 역전의 인생을 살아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과의 비교 속에서 체념하며 살아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중국의 한 농가의 일대기를 통해 도전과 갈등에 대처하는 인간의 운명을 그린 노벨 문학상을 받은 <대지>의 저자 펄벅 여사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는 내 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딸은 인내하는 법을 나에게 가르쳐주었지요, 우리 가족 모두는 동작이 느린 사람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는 급한 성격입니다. 물론 나도 둔한 사람에 대해 참을성이 없는 가족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그런 내가 정신이 박약한 딸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힘든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으로서 평등하고 동등한 권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나에게 분명히 가르쳐 준 것은 바로 내 딸이었습니다. 만약 이런 기회가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나에게 능력이 못한 사람을 참지 못하는 거만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딸의 약점을 자기 것으로 만든 펄벅은 이를 통해 위대한 문학작품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를 조금 더 확대한다면 바울 선생이 말한 바,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의 약점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나의 위대성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고 이때의 위대성은 나 혼자의 위대성이 아닌 교회의 위대성 곧 하느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와 동시대였던 사상가 표도르 스트라호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와 하느님은 하나이다!” 라고 예수는 말했다. “그러나 만약 너희가 내 육체를 하느님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 다른 모든 존재에서 독립한 나의 비육체적인 존재를 하느님으로 생각한다면, 그것 또한 잘못이다. 너희가 너희 자신 속에서 진정한 나를, 참으로 하느님과 하나이며 모든 사람 속에서도 동일한 나를 이해했을 때, 비로소 너희는 옳은 것이다. 그런 나를 이해하려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의 아들을 높이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너희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구별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자신들이 하나하나 별개의 존재로 보이지만, 그것은 마치 모든 사과꽃이 저마다 자기는 하나의 독립된 존재라고 생각해도, 사실은 한 그루의 사과나무에 핀 꽃이며, 모두 하나의 씨에서 태어난 것과 같은 것이다.”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134)

 

예수는 우리를 향해 온 우주의 창조주가 되시는 야훼 하느님의 사랑하는 딸과 아들들임을 계속 강조하셨습니다. 이는 자기 안의 신성을 통해 다른 사람의 신성을 발견하는 일, 다른 말로 하면 공동체성의 조화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파스칼이 말한 바 사랑 그 자체 안에서 희열을 얻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성숙한 사람을 우리는 다른 말로 큰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큰 사람이 되게 하소서>란 시를 읽어드림으로 오늘의 하늘뜻을 마치겠습니다.

 

<큰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오 하느님!

모든 하찮은 것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소서.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우리가 큰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남을 흠잡는 일을 그만두게 하고서.

모든 이기심을 말끔히 떨쳐버리게 하소서.

모든 겉치레를 벗어버리고 자기 연민과 편견없이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게 하소서.

남을 판단하는 일에 절대로 성급하지 않고 항상 관대하게 하소서.

매사에 시간의 공을 들이게 하시며 늘 차분하고 평온하며 온유하게 하소서

우리 마음속에 있는 좋은 생각들을 행동으로 옮기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 늘 올바르고 두려움 없이 살게 하소서

사람들 사이에 차이점을 만드는 것이 실상은 삶의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라는 것을 사람의 커다란 것들 안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고 오 주 하느님!

우리가 남에게 친절하기를 잊지 않게 하소서

(멜리 스튜어트)

 

 

[보냄의 말]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건전하며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이기심을 뜻한다면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삶의 길이입니다. 이웃을 여러분 자신처럼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삶의 넓이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하고 위대한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것을 삶의 높이입니다. 이 의무를 다하는 일이 곧 완전한 삶을 사는 일입니다.(마르틴 루터 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