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도 주일

‘살림’하시는 하느님

시편 36,5-10 ; 출애 1,12-22 ; 로마 5,14-21 ; 마태 2,13-23

구 미 정 목사

[목숨과 생명]

사람은 ‘숨’을 쉬어야 삽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온갖 것이 숨을 쉽니다. 만물에게는 저마다 고유한 숨결이 있습니다. 사람은 처음엔 단전으로 숨을 쉬다가, 나이가 들면 가슴으로 쉰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갈 때가 되면 목으로 쉽니다. 그래서 ‘목숨’이랍니다.

이 놈의 목숨이 뭔지, 목숨을 연명하고, 목숨을 부지하고 산다는 게 뭔지, 참 어렵습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다’ 그러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경희대 이택광 교수는 말하기를, 오늘 우리 시대에 가장 강력한 이즘(ism)은 ‘먹고사니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마세요.”(마태복음 6:25) 헬라어 성경에서 여기 사용된 ‘목숨’은 ‘비오스’(bios)가 쓰였습니다. 영어로 ‘바이오’(bio)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 ‘비오스’입니다.

예수님의 권면을 조금 더 들어봅시다. 마태복음 6장 27-32절의 내용을 축약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누가 걱정한다고 자기 목숨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겠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세요. 이 모든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여러분께 필요하다는 것쯤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 목숨을 위해 필요한 것을 구하지 말라고 하면, 정작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뭐란 말입니까? 바로 ‘생명’입니다. 헬라어로는 ‘조에’(zoe)라 표현합니다. 헬라어 성경은 목숨과 생명, 두 단어를 각각 비오스와 조에로 구분해서 쓰고 있습니다. 비오스가 물질적이고 물리적이고 생리적인 의미라면, 조에는 그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목숨이 다하면 죽는 그런 물리법칙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본성 자체가 영원한 생명(aionios zoe)입니다.

그리하여 비오스를 유지하고 존속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행위와 조에를 얻기 위해 ‘구하는’ 행위가 동일할 수 없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똑같이 ‘구한다’고 표현되어 있지만, 그리스어로는 앞의 ‘구함’(마태복음 6:32)을 ‘아이테오’(aiteo)로, 뒤의 ‘구함’(33절)을 ‘제테오’(zeteo)로 확실히 구분합니다. 아이테오가 ‘욕망한다, 욕구한다’는 뜻이고, 제테오는 ‘소망하다, 추구하다’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비오스를 살아가면서 정작 소망하고 또 추구해야 할 것은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생명이어야 합니다.

[아들/딸 죽이는 세상]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출애굽기도 그렇고, 마태복음도 그렇고, 상황이 온통 암울합니다. 죄 없는 어린 것들의 목숨이 위태위태합니다. 먼저 출애굽기 본문을 봅니다.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어라” 이집트 제국을 다스리는 파라오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아들 있으신 분들이 들으면 기분이 상당히 나쁘시겠어요. 왜 아들만 죽여요?

저는 지난 크리스마스이브 날, 여의도에서 벌어진 ‘솔로대첩’ 행사에 3500명이 몰렸는데, 정작 미팅하러 나온 남자는 700명, 여자는 300명이고, 나머지는 경찰과 구경꾼이더라는 신문기사를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이 시대의 20대를 ‘3포 세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취업포기, 결혼포기, 출산포기! 취업이 안 되니까, 결혼을 못하고, 결혼을 못하니까 당연히 애도 못 낳는다는 거예요. 이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어느 온라인 업체가 이번 크리스마스만큼은 솔로에서 벗어나자고 기획한 게 ‘솔로대첩’인데, 거기에 자발적으로 나온 남자 수가 여자 수보다 월등히 많으니까, 짝이 안 맞은 거지요. 제가 여자애들한테 물어봤어요. “너네는 거기 안가?” 그랬더니 여자애들이 그래요. “그런 곳에 오는 남자애들은 찌질해요. 건질 남자가 없어요.”

아, 이 시대에 아들 두신 분들은 정말 힘드시겠다, 그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요. 아들을 죽이는 세상입니다. 우리 시대의 유일한 진리가 있다면, “남자는 능력, 여자는 외모”라고, 아이들이 입을 모읍니다. 정말 그렇게 굳건히 믿고 있는 듯합니다. 불변의 진리랍니다. 그러니 소위 남들이 우러러보는 좋은 대학 안 나오고, 스펙이 뒤쳐져서 취직도 못하고, 계속 비정규 알바로 근근이 목숨을 유지하고 사는 2030세대 남자들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아들 죽이는 세상’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생겼습니다. 정말 남자들, 죽을 때까지 돈 버는 기계로 살아야 하는 남자들, 능력 없으면 무시당하고 버림받는 남자들, 너무 불쌍합니다. 창세기 3장 17절 말씀을 눈물 없이는 읽을 수가 없어요.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아들 죽이는 세상’이 딸한테는 유리한가 하는 겁니다. 이집트 파라오가 히브리 노예들의 아들을 죽이고 딸은 살려두라고 했을 때는 의도적으로 성비불균형을 일으켜서, 자연스럽게 이집트 남성들이 히브리 여성들을 성적으로 지배하도록 할 심산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히브리 여성들이 낳는 아기는 모두 이집트 남성들의 피가 섞이게 되니까요. 그런 식으로 인종청소, 인종말살을 해서 이집트 제국을 단일민족으로 만들어 통치를 쉽게 하려는 게 파라오의 속셈이었습니다.

아들 죽이는 세상은 딸도 죽이는 세상입니다. 여자들은 종신토록 노동해야 먹고 산다는 관념이 남자에 비해 덜합니다. 돈 많고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면 의식주 문제가 한 방에 해결된다는 세속적 믿음이 팽배합니다. 그래서 외모에 신경을 쓰고, 다이어트에 ‘올인’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불편한 진실’은 따로 있습니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창세기 3:16)

[위엣 권세에 맞짱 뜨기]

아들이든 딸이든, 장애가 있든 없든, 부모가 정상적인 혼인관계에 있든 없든 뱃속에 든 아기는 누구나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지요. 잉태되는 순간 이미 존엄한 생명이지요. 그래서 우리나라는 태어나면 벌써 1살로 치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뜻은 모든 생명이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뜻은 다릅니다. 소위 합리를 따지고 이성을 따지고 제도를 따지고 법을 따지고, 무엇보다도 돈을 따지면서, 생명을 저울질합니다. 하물며 국가 권력이, 그것도 지존무상의 권력이, 태양신의 아들이라는 대제국의 파라오의 권력이 명령하는 데 감히 누가 거역하겠습니까?

“위엣 권세에 복종하라”, 어느 시대나 그렇게 사는 게 옳다고 배웠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느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바라.” 로마서 13장 1절 말씀을 그 문맥과 상관없이 뚝 떼어다 우리를 세뇌시키니, 정말 그래야 국민 된 도리구나, 애국하는 길이구나, 하고 삽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보면 분명 아닌데, 국가 권력이 시키면 당연히 해야 하는 줄 압니다. 대표적인 보기가 원전 정책입니다. 2011년 3월 11일에 발생한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로, 저 멀리 독일에서는 곧바로 5월 30일에 탈핵을 선언하고, 모두 17기의 원전 가운데 8개를 폐쇄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길, 소망의 길입니다. 그런데 일본과 가까이 있는 우리나라는 원자력 강국을 선언하고, 현재 22기가 가동되고 있는 것을 2024년까지 42개로 늘리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길, 욕망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은 죽음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야고보서 1:15)고 야고보 장로님도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흥미로운 사실은, 출애굽기 본문을 살피면, 국가 권력의 명령에 맞선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투사도 아니고, 머리에 먹물 든 선생도 아닙니다. 중세 때는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기 일쑤고, 오늘날에는 산부인과 의사에 밀려 도태된 직업군의 사람, 바로 산파 할머니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누가 받습니까? 역사의 흐름은 누가 바로 잡습니까? 아들도 죽이고, 딸도 죽이는 이 대학살의 땅에서 생명살림의 희망을 전파하는 이가 누구입니까? 평범한 사람입니다. 평범하되, 한 가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산파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이집트 왕이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하지 않고.”(출애굽기 1:17) 그렇습니다. 살면서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끊어지는 삶입니다. 이 산파 할머니들은 그걸 알았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부지하는 것 따위 연연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끈을 놓게 될까봐, 그것이 더 두렵습니다. 이 초월의 믿음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세상 권력과 맞짱을 뜰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저자는 이 할머니들의 이름을 자랑스레 호명함에 있어 결코 인색하지 않습니다. 그 위대한 이름은 바로 십브라와 부아! 이들은 제국의 공포정치를 끝장내고 하느님의 생명정치가 시작되는 데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산 넘어 산이지요. 산파들의 지혜로 히브리 남자 아이들이 살아나게 됐는데, 이번에는 더 강력한 제재조치가 들어오지요. 악은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선이 역사 안에서 펼쳐질 때는, 특히나 더욱 기승을 부리기 마련입니다. 파라오의 강력제재가 뭡니까? 이번에는 산파들을 제쳐놓고 아기를 낳은 어머니에게 직접 명령합니다. “갓 태어난 히브리 남자 아이는 모두 강물에 던지고, 여자 아이들만 살려두어라.”

무력감이라는 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지요. 저는 이게 꼭 요즘 세태를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같은 땅에 산다고 다 3포 세대가 아니에요. 고소득 연예인들 보세요. 아이를 셋씩, 넷씩, 잘만 낳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가 저출산이래요. 2010년에 나온 임상수 감독의 영화 <하녀>를 보니까 그렇더라구요. 출산포기는 ‘하녀’의 몫이지, ‘마님’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더라구요. 영화는 그런 식으로 우리 사회의 계층화를 비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이 땅이 자유민주공화국이라고 헌법에만 명시되어 있지, 사실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대목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힘없는 약자의 설움이 이토록 절절하게 그려진 대목도 또 없을 것 같습니다. 제 자식을 제 손으로 죽여야 하는 어미의 심정만큼 참담한 게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인간의 죄악이 땅에 관영할 때, 무죄한 아기들이 억울하게 대속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현실은 비단 성경에만 나타나 있는 이야기가 아니지요. 지금도 북한의 아기들, 아프리카 곳곳의 아기들, 팔레스타인의 아기들이 죽어갑니다. 부모의 생활고 때문에 혹은 부모가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 관계에 있다 하여 억울하게 낙태 당하고, 설령 태어났더라도 길거리에 버려지는 우리 사회의 아기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은 히브리 노예의 아들들이 파라오의 부당한 명령에 의해 죽임당하는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하느님이 하늘에서 천군천사를 보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활약상이 기대되는 그 순간에, 오히려 성경 저자는 사람이 하는 작은 일을 소개합니다. 레위 가문에 속한 한 가족이 행한 일입니다. 태어난 아기를 차마 제 손으로 죽일 수 없던 가족은 석 달간 아기를 숨어 길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기를 수 없게 되자, 갈대상자에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그 안에 아기를 담아 나일강에 띄웠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파라오의 역할이 마태복음에서는 헤롯왕과 겹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는 페르시아 제국의 사제계급으로, 고대 페르시아어에서 ‘마구시’(magush), 중세 페르시아어에서 ‘마기’(magi), 헬라어에서 ‘마고스’(magos)라 불린 사람들입니다. 마술을 영어로 ‘매직’(magic)이라고 하는 것도, 이 사람들이 행했던 주술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는 조로아스터교니까, 아마도 동방박사는 이 종교의 사제요 학자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들은 본래 점성술로 유명합니다. 별을 연구하다가 예수 탄생의 길조를 읽고 찾아온 모양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종교 사이에 소통이 원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출현으로 헤롯왕이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지요. 자기가 유대인의 왕인데, 또 다른 왕이 나셨다니, 얼마나 빈정 상하는 일입니까? “그 박사들에게 알아본 때를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마태복음 2:16)는 기록에서 헤롯의 위기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성경은 역시나 헤롯을 응징하시는 하느님의 전능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냥 논조를 바꾸어 헤롯의 음모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는 한 가정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지요. 바로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아기 예수 말입니다. 이집트로 피신하여 헤롯이 죽을 때까지 거기 살았다는 것은 마태저자가 예수를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와 견주려는 문학적 플롯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오늘 우리는 이 두 이야기에서 하나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한 사람’을 찾으시는 하느님]

불온한 현실의 벽에 부딪쳐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부당한 공권력의 횡포 앞에서 삶이 와르르 붕괴되어 나갈 때, 과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뭐냐는 거지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분들의 기사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상담학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 사태처럼, 그렇게 어느 공동체 안에 자살자가 속출하면, 그 죽음의 기운이 전염되는 속도가 정상적인 공동체에 비해 엄청나게 빠르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그 도시에 몸담고 사는 사람 전체가 자살경계선에 있다고 봐야 한다는 거예요.

어디 부산이나 평택에만 해당되는 말이겠습니까? 한반도 전체에 죽음의 공기가 자욱하지요. 오죽하면 제가 요즘 장기하와 얼굴들이라는 인디밴드의 <별일없이 산다>는 노래를 하느님의 계시인 줄로 믿고 열심히 듣는다니까요. 가사가 이렇습니다.

니가 깜짝 놀랄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 거다. 뭐냐 하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니가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를 들려주마. 오늘 밤 절대로 두 다리 쭉 뻗고 잠들진 못할 거다. 그게 뭐냐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이번 건 니가 절대로 믿고 싶지가 않을 거다. 그것만은 사실이 아니길 엄청 바랄 거다. 하지만 나는 사는 게 재밌다. 하루하루 즐거웁다. 나는 사는 게 재밌다. 매일매일 신난다.

여기 나오는 ‘너’가 누군가 한참 생각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만든 ‘너’는 누구냐? ‘나’의 입에서 ‘앓는 소리’를 넘어 ‘죽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지속적으로 ‘나’를 불안과 절망 속에 처넣는 ‘너’는 누구냐? 행여 ‘나’의 삶이 하루하루 즐겁고 재밌을까봐 호시탐탐 ‘나’에게 걱정거리와 고민거리를 안겨주는 그것의 정체는 뭐냐?

성경에서는 그게 파라오로도 나오고, 헤롯으로도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그 적의 이름이 모호한 게 더 무서운 것 같습니다. 설령 사람이 원수로 다가올 때에도 그 사람 안에 무엇이 들어가 있어서 그 사람을 사로잡고 휘두르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은 신자유주의, 맘몬 숭배, ‘먹고사니즘’, 그게 악의 실체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손에 잡히지 않잖아요. 게다가 더 무서운 건 내 밖에 있지 않고, 내 안에 들어와 떡 버티고 있잖아요. 내 마음에 성공한 사람만 보면 무조건 용서가 되고 부럽고, 그런 거잖아요.

성경은 제도와 법과 체제가 인간의 삶을 옥죌 때, 그로 인해 고통당하는 인간의 현실을 고스란히 전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맞서 담담히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들은 현실의 벽이 높다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은 ‘버티는’ 힘입니다. 씨름에서도 두 장사가 버티고 있으면, 티브이 상으로는 정지화면처럼 보이는 그 동작에서도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흐르지 않습니까? 일단은 버텨야 합니다. 그 다음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데이터를 동원해서 행동하는 단계입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갈대상자를 구해다가 역청과 송진을 발라 그 안에 모세를 담아서 나일 강에 띄웠을 적에는 버리거나 죽게 내버려두기 위한 행동이라 볼 수 없지요. 이집트에서 나고 자란 세월이 얼마인데 이집트 문화를 몰랐겠습니까? 매월 초가 되면 귀족들이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나일강으로 목욕 마실을 나간다는 사실을요(구미정, 『성경 속 세상을 바꾼 여인들』74쪽 참고),

제가 경험해보니까 물은 99도까지 절대로 끓지 않더라구요. 딱 100도에서 끓는데, 언제 100도가 되는지 우리는 모르는 거지요. 모른다고 장작을 집어넣지 않으면, 금방 불이 죽어버려요. 어쨌든 열심히 장작을 패서 아궁이에 집어넣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장작이 모이고 모여야 100도가 되는 거지, 일순간 되는 건 또 아니거든요.

독일의 생태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하느님은 신생아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이라고 하면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간달프처럼, 신령한 할아버지로 그리기 일쑤인 우리에게 그의 말은 얼마나 충격입니까? 하느님을 감히 스스로 방어할 능력조차 전혀 없는, 돌보는 이가 잠시라도 한 눈을 팔면 금방 생명이 위태로워지는, 한없이 무력한 아기에 비유하다니요? 막 태어난 신생아에게 필요한 것은 전적인 사랑과 돌봄입니다. 인간에게는 신생아를 보살필 ‘무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갓난아기로 고백한다는 말은 하느님의 생명력이 인간의 사랑 여부에 달려있다는 뜻이겠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해 드려야 비로소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고 실현된다는 의미겠지요.

이런 맥락에서 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한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평범한 한 사람, 부당한 사회 현실 앞에서 끝까지 하느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 ‘버티기’ 작전을 쓰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살아내는 한 사람, 로마서 5장이 증언하는 ‘한 사람’이 바로 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서는 악에 대한 연대책임을 강조하는 것과 나란히, 선에 대한 공동분배를 강조합니다. 한 사람의 불의한 행위로 모두가 힘들었다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두가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 오로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의 의로움을 선물하는 한 사람이 바로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영국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가 이런 말을 했답니다. “악이 승리하기 위한 조건은 단 한 가지다. 선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

일찍이 다석 유영모 선생님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사는 것 말고, 진짜 생명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을 가리켜 ‘얼생명’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얼을 자기 존재에 일치시킨 사람을 말합니다. 그분은 삶이라는 단어 자체가 ‘살다’의 명사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살다’는 ‘사르다’에서 나왔습니다. 초가 제 몸을 ‘불사르다’라고 할 때의 ‘사름’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때의 사름은 물론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목숨이 다하는 거지요. 하지만 그저 의미 없는 사라짐이 아니라, 그렇게 제 몸을 불살라 사라짐으로써 주변을 환하게 밝혔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르는 삶’이라는 것은 자신의 기운 혹은 힘 혹은 에너지, 곧 선한 영향력를 주변에 나누는 삶을 말합니다.

“살아서 살라서 살려라!”는 화두는 그런 맥락에서 나왔습니다. 생명은 단순히 ‘살라는 명령’을 넘어 ‘살리라는 명령’까지 포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 중에 가장 위대한 일을 ‘살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임의 권세에 맞서 살림의 역사를 펼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고, 그 하느님의 살림을 이 땅에서 이어받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이십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