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와 변혁을 향한 하늘부름

43:1-7; 8:14-17; 3:15-17; 21-22

 

오늘은 교회력으로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로서 예수께서 받으신 세례를 통해 우리 자신의 세례를 회상하고 신앙적으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세례주일입니다. 洗禮의 한자말은 물을 충분히 붓다는 뜻입니다. 마르코복음과 마태오복음에는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물에서 올라오셨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는 물에 잠기여야 한다는 형식을 중요시하는 교단에서는 침례라는 말을 고집하고 일부 보수 교단에서는 세례를 인정하지 않기도 하지만, 이는 형식의 논리에 매여 있는 잘못입니다. 이는 마치 할례를 받은 유대인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옛 주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형식에 매인 배타성을 깨기 위해 세례 요한, 예수, 베드로와 바울에 의한 새로운 신앙운동이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저는 만약 어떤 교인이 침례의 형식으로 세례받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씻음의 예식]

 

오래 전에 미국 남부의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 오순절 계통의 한 교회의 침례식 기록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성전 맨 앞 높은 공간에 침례탕이 유리로 되어 있어 모든 성도들이 그들이 물에 잠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00여명의 교인들이 서서 손을 들고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하얀 옷을 입은 10여명의 신자들이 한 명 한 명 탕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목사와 보조자는 그들이 뒤로 누운 상태로 몸 전체가 물에 잠기도록 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교인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방언을 하든지 졸도를 하든지 뭔가 종교적 환상 상태에 빠집니다. 그 영화는 그분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찬양과 기도소리로 가득 찬 소란스런 예배 현장을 보여주고 그 분위기에 감싸인 신자들이 하얀 옷을 입고 탕 안에 들어가서 목사에 의해 거꾸로 물속에 잠겼다 일어날 때, 심리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을 때, 그냥 물속에 몸을 잠갔다 나온 것인지, 아니면 세례 요한이 예수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어떤 선언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전에도 회개의 상징으로 몸을 씻는 방식은 존재했었고, 쿰란에 머물렀던 에세네 격리 집단에서는 성서를 필사할 때, 야훼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목욕을 하고 이를 필사하였습니다, 이런 씻음 행위가 세례 요한에 의해 하나의 회개의 양식으로 받아들여졌고, 바울 사도에게서는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되는 예식이 될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할례를 대신하는 구원의 표징이 된 것이다. 과연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까? , 아니오가 있을 수 있지만, 예수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목마른 자에게 물 한 컵, 헐벗은 자에게 옷 한 벌, 감옥에 갇힌 자를 찾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라는 말은 하셨다.

 

세례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못하느냐 하는 관건이 되는가 하는 문제는 하느님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결정할 문제이지만, 우리 교회를 포함한 모든 교회에서 세례는 정교인이 되는 일에 필수적인 과정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세례를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세례식을 통해 공동체 구성원이 보는 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의 선언을 통해 새로운 사람이 되는 공적 고백과 응답을 공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과 예수와의 연속성]

 

오늘 루가복음 본문을 비롯한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는 다른 일반 백성들과 같이 세례 요한을 통해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하늘이 열리는 사건은 예수에게만 일어난다. 이는 예수는 요한의 세례라는 형식은 빌렸지만, 내용은 전연 다른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예수가 추구하는 길이 세례 요한의 길과 다른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로 일컬어지는 예수가 굳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마태복음을 보면 세례를 받으러 오시는 예수를 보고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 하며 굳이 사양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요한에게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하고 대답하셨다. 왜 예수는 굳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아야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신 것인가? 그리고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자 하느님 나라 복음 운동을 시작하셨음을 말함으로 세례 요한과의 떼래야 뗄 수 없는 연관과 연대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과의 깊은 연관성은 무엇이고 그 차이는 무엇인가? 세례 요한이 낙타 털옷을 입고 광야에서 머물었다는 얘기는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예언자 엘리야의 현현이었다. 엘리야는 예언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세례 요한은 그 예언자 전통을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직통으로 이어받았고 요한의 세례를 통해 예수에게 이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대를 이어가는 예언자 전통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배자의 권력과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제사장적인 전통에 대해 각을 세우고 가난하고 힘이 약한 민중들과 함께 하면서 통치 권력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신권 통치를 주장함으로 세상권력의 해체를 주장하는 전통이다. 여기에 왕에 대한 비판으로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자 예수께서 그 뒤를 이어 세상에 나오셨다는 성서 기록의 이유이다.

 

[예수의 독자성]

 

그러면 복음서는 예수와 요한의 하나됨을 계속 강조하면 되었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을 때에 하늘이 열리는 성령의 직접 계시를 말하고, 요한은 백성들에게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다름을 강조했으며,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다고 하는 현격한 차이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무엇이 달랐기에 요한복음에서는 요한이 예수를 보고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는 얘기를 하자 요한을 따르던 안드레아와 또 다른 제자는 예수를 좇아갔으며, 후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가 세례를 베품으로 사람들이 그쪽으로 몰리고 있다고 비난성 보고를 하자, ‘나는 망해야 하겠고, 그는 흥해야 하겠다.’고 말하는가? 무엇 때문이었는가? 또한 예수께서도 세례 요한의 시대와 자신의 시대를 구분하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보다는 크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이 예언하는 일은 요한에게서 끝난다.”(11:11-13)

 

우선 출신이 달랐습니다. 요한은 사제계급 출신이었고, 예수는 천민계급의 하나인 땅 한 평 소유하지 못했던 비정규직 노동자 목수의 아들로 자라났습니다. 요한은 글을 배웠겠지만, 예수는 당시 95% 이상의 사람들이 문맹인이었던 것처럼 글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광야에 거하며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고, 부자들과 당시의 권력자들이었던 군인들과 세리들을 향해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뿌리 옆에 놓인 도끼가 나무를 찍어 넘어뜨릴 것이라고 위협하였습니다. 반면 예수는 광야에서 신앙 훈련을 받았지만, 실제 활동은 광야가 아닌 도시에서 도시로 옮겨 다니며 활동했습니다. 전도 방식에도 차이가 있는데, 요한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요한에게로 나아온 반면, 예수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오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예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셨습니다. 어찌 보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은 요한에게 나아올 수도 없었고, 주류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착취의 대상으로 회개할 것도 별로 없었던 갈릴리 민중들이 굳이 요한에게 나아갈 필요성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큰 차이는 이것입니다. 요한은 회개와 엄격한 정의를 외쳤고, 그가 말하는 하느님은 키를 들고 곡식을 타작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엄격하게 가리는 분이었다. 반면 예수는 사랑과 용서를 말하고, 하느님을 돌아온 탕자를 반기는 자비의 아바로 말씀하신다. 이런 차이로 인해 세례 요한은 옥에 갇혀 있으면서 예수에 관한 보고를 듣게 되었는데, 뭔가 자신의 기대와는 달랐다. 그래서 제자를 보내 이렇게 묻는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11:3) 세례 요한은 로마제국의 폭력을 또 다른 폭력으로 전복하는 그런 옛 시대적인 인식 체계 속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요한을 옛 시대의 마지막 사람으로 예수는 천명하고 자신이야 말로 새 시대의 첫 사람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에 세례요한의 물세례와, 예수의 성령과 불의 세례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교회에서 베푸는 세례는 세례 요한의 물세례인가? 아니면 예수의 성령과 불의 세례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 교회에서 쓰는 세례의 물은 단순히 상징으로 쓰이는 재료일 따름이지, 그 내용은 예수에 의한 성령과 불의 세례인 것이다.

 

[세례의 내용- , , 성령]

 

성령과 불은 따로 떨어진 개념이 아니라 같은 개념이다. 첫 번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일어날 때, 불같은 성령이 임한 것이다. 이때 제자들은 각국의 언어를 말함으로 바벨탑으로 인해 단절된 민족 간의 화해와 하나 되는 사건을 가져왔고, 죽음이 무서워 숨어 지내던 일을 끝장내고 거리로 나가 새로운 시대를 선포하고 그 시작은 바로 로마와 예루살렘 성전의 권력자들이 한 패되어 살해했던 갈릴리의 예수의 부활에 의한 것임을 외쳤던 것이다. 성령과 더불어 말씀되는 불이란 곧 거역할 수 없는 하늘로부터 오는 강력한 힘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물의 차가움과 대비되는 뜨거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신앙의 오해가 여기에 있다. 신앙은 뭔가 뜨거움이 있어야 한다. 뜨거운 것 찾다가 4도 화상 입어 돌이킬 수 없는 이단 신앙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많다. 성령파, 구원파, 신천지파 등등 남한만도 400여개의 신흥종교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대체로 여기에 빠져든 사람들은 뜨거운 것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신비 현상의 뜨거움은 신앙의 덫이 되어 인생 파탄은 물론 가정 파탄을 부르곤 한다.

 

불과 성령에 의한 세례는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중생의 체험은 맞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에 대한 내용과 이를 추구하는 방식이 다르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선포한 것이 아닌, 신흥종교의 교주들이 단편적으로 뽑아내어 제멋대로 조합을 한 조잡한 것들이다.

 

우선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 대한 해석에서도 큰 차이가 드러난다. 오늘 본문은 집사 빌립보에 의해 사마리아 사람들이 세례는 받았지만, 성령을 받지 못했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손을 얹고 기도하자 성령이 임했다는 구절이다. 이 구절에만 의한다면 물로 받는 물세례가 따로 있고, 성령세례가 따로 있다는 결론을 갖게 된다. 그러나 사도행전에는 이와 관련해서 서로 상반된 구절들이 여럿 나온다. 10장에는 베드로가 로마의 군장교인 고르넬리오의 집에 초청을 받아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먼저 성령이 거기 모인 모든 사람에게 내린다. 사람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지도 않았는데 내린 것이다. 이들이 방언을 말하고 하느님을 찬양을 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는 그제야 세례를 베푼다. 순서가 뒤바꿔서 일어났다.

 

오늘 본문을 물세례 따로 성령세례 따로 이해하는 근거로 해석한다면 자가당착에 빠진다. 19장에서 바울로가 물세례를 베풀 때에 성령강림이 동시에 임하듯이 이는 동시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사도행전 전체의 인식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 구절에만 의거해서 성령 세례 혹은 성령강림을 주장하는 구원파를 만나면 나무 하나를 보고 숲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라고 충고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순서가 아니다. 오늘 성서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정통파 유대인들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함으로 집사 스테파노가 살해당하고 함께 일하던 집사 빌립보가 사마리아로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음으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 차이가 없어졌을 뿐만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당시 사마리아는 유대인들로부터 경멸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피를 더럽힌 민족들로 모세 율법에 근거한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된 사람들이었고, 개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출입도 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처져 있어 그들을 만나고 대화하는 것은 국가 안보를 해치는 불법이었습니다. 예수는 이를 깨고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고, 결국 예수 죽음 이후 제자들에 의해 한 형제자매가 된 것이다. 당시 적으로만 인식되던 로마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예수그리스도에 의한 성령강림 사건의 결과입니다. 성령강림을 통한 이적 현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은 손가락에 불과한 것이고, 손가락이 가리키고자 하는 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가족 새로운 민족 새로운 한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곧 세례는 사회적 경계를 깨는 일이었습니다. 인간과 인간 민족과 민족 사이의 장벽을 깨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성서가 증언하는 성령강림 사건으로 일어난 결과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성령강림 혹은 성령은사를 병 고침, 방언 등의 사사로운 이적사건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또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성서 해석입니다.

 

이런 은사들은 개인의 은사들이 아닙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위한 공동체적인 은사입니다. 대체로 이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내는데, 오히려 자신은 숨기고 대신 예수 이름을 드러내고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가져오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제일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개인 때문에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온 은사임을 매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은사는 새로운 인간성을 향한 하나의 시작이지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세상에 나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성령은 예수를 광야로 몰아갔습니다. 40일이란 물량적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몇 년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훈련과 성숙의 과정을 겪고 나서 세상에 나오신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 섬돌향린교회 분가를 하면서 이는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일 따름이라고 말한 의도가 그런 것입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 혹은 성령강림을 굳이 구별하자면 세례란 죄의 고백과 용서를 통해 의인으로 인정함을 받는 일이요, 성령강림은 성화의 과정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인 것입니다. 루터교나 칼뱅의 장로교는 의인됨을 강조하고 후에 시작된 웨슬레의 감리교와 성결교는 성화를 강조합니다. 이 둘은 물세례와 성령강림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듯이 하나의 교회인 것입니다.

 

오늘은 세례주일이면서 예배 후 공동의회가 있는 지난해의 목회를 마무리 짓고 새해의 목회를 시작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담임목사로서는 새해의 목회 구상을 얘기하는 자리입니다. 3년 전 오늘 저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 삶을 판단하는 기준은 첫째로 감사요, 두 번째는 도전하는 삶을 말했습니다. 독일 시인 귄터 아이히의 <>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였습니다. “불편을 겪어라. 그리고 세계라는 장치 속에서 기름이 아니라 모래가 되라.”

 

[기름이 아닌 모래]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하거나 행복에 겨운 삶을 살라고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변화를 시키려면 우선 불편하게 살라는 도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빛이 되어 세상의 어두운 곳을 비추고 소금이 되어 불의를 막아내라는 소명을 주셨습니다. 소금과 빛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건 둘 다 자신의 몸을 사르고 녹이는 일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한 신앙 훈련소입니다.

 

이제 이러한 감사와 도전이라는 신앙의 열쇠 말을 붙들고 냉철한 눈으로 오늘의 향린교회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저희 교회는 매년 수십 명이 새롭게 등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인원은 다른 교회와는 양으로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향린교회 정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는 구호에 동의하는 것이고, 그래서 심지어는 빨갱이라고 불리는 비난을 받을 각오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향린교회를 가겠다고 하면 주위에서 말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들이 말리고, 가족들이 반대합니다. 예수님 말씀에 나를 따르게 되면 가족 안에 불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를 실감하는 교우들이 여러분 계십니다. 심지어는 회사에서조차 향린교회는 다니지 말라고 하는 얘기를 들은 교인도 있고, 군대를 간 교인이 향린교회에는 나가지 말라는 충고도 받습니다. 그래 등록은커녕 방문하는 일조차 쉽지 않은 곳이 향린교회입니다. 향린교회의 교인이 되는 일을 다른 교회의 교인이 되는 일과 동일시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 십자가 신앙고백을 하고 십자가를 저 앞에 달았습니다만, 여러 해 반복하는 기존 교인들에게는 하나의 연례 예식에 불과할 수 있지만, 새로 등록하는 교인들에게서는 결코 만만치 않은 주문이자 도전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한 침묵수련회에 참석하여 워싱톤 세이비어 교회를 40년을 다닌 60대의 여성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하는 일을 들어보니 이는 일반 목사보다 더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헌신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평신도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교회의 정회원이 아니랍니다. 왜냐하면 정회원이 되려면 교인선서를 해야 하는데, 거기에 교회의 재정을 책임진다는 구절이 있어 여기에 걸려 정회원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앞으로 이런 구절을 한번 넣어 정회원을 구별하여 보면 어떨까요?

 

게다가 향린교회는 징을 치고 우리가락으로 예배를 드리니 민족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없이는 교인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향린교회에 오신 분들은 분명히 사회와 민족 그리고 정의 평화 생명에 대한 하느님 나라 민중운동에 분명한 사고와 의식을 지닌 분들입니다. 그러기에 교인 숫자를 말할 때에 향린교회 한명과 다른 교회 한명을 동등하게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향린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보면 참으로 독특하신 분들입니다. 함께 하면 할수록 알면 알수록 삶의 깊이 들이 담겨 있습니다. 말없이 몇 년을 다닌 분에게 저런 장점이 숨어 있었다니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진국이 숨어 있는 분들입니다. 다른 교회에 가면 다 지도자가 되실 분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바라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한 교회로 불러주셨는데, 그냥 스쳐지나가서야 되겠는가? 보다 깊은 만남을 통해 하느님의 깊으신 섭리를 이해하고 그 은혜를 함께 경험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향린교회의 당면 과제]

 

향린교회는 공동체교회와 평신도교회, 입체적교회라는 이상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함께 모여 살아가는 생활공동체는 아니더라도 신앙을 함께 나누는 신앙공동체는 교회의 생명입니다. 새해에는 교우간의 깊은 만남을 통해 신앙의 스파크가 일어나는 일에 중점을 두고자 합니다. 현재를 냉철하게 분석해보면 주일 예배 외에 다른 활동으로 교우끼리 폭넓은 만남을 하는 분들은 2,30%에 지나지 않습니다. 끼리끼리는 잘 만납니다. 교회가 신앙의 집단이 되려면 끼리끼리를 넘어서야 합니다. 적어도 향린교회 10년을 다녔으면 교우들의 이름뿐만 아니라, 자녀들은 몇 명이 있고 하는 일은 무엇이고 그분이 향린교회를 통해 얻고자 하는 신앙의 목표는 무엇인지 대강 이런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한 주에 한명만 서로 안다하더라도 일 년이면 5010년이면 5백명을 알게 됩니다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교회는 사도 바울로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어느 한 지체가 아프면 온 몸이 아픈 것이 몸의 특성입니다. 그런데 함께 예배드리는 이 작은 공간 속에서조차 아픔은커녕 이름도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 향린교회가 당면한 최상의 과제는 어떻게 하면 한 몸으로서의 교회를 이룩할까 입니다. 성가대원들의 아름다운 노래는 듣지만, 그분이 어떤 분인지, 그 노래가 그냥 목소리의 아름다움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삶의 고통을 통해 나오는 영혼의 아름다움이 더해서 나오는 소리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세대별 차이는 더욱 심각합니다. 2,30대와 50대 이상이 만나는 장이 거의 없습니다. 신도회로 나뉘어져 있다 보니 자기 연령 때만 알고 지냅니다. 게다가 청년신도회부터는 남녀사이의 대화도 단절되어 있습니다. 남녀7세 부동석이 아니라, 70세까지 부동석입니다. 식당이나 친교실을 보면 남녀유별입니다.

 

[1. 공동체 교회]

 

60주년을 맞이하고 분가를 이루어낸 올해 향린교회의 최대과제는 몸으로서의 교회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오래된 교우들은 새로 온 교우들에게 향린교회의 좋은 전통과 신앙유산을 남겨주어야 할 책임이 있고 그리고 새 교우들은 이를 배울 책임이 있습니다. 나이로 인해 육신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분들은 젊은 분들이 몸으로 감당하는 사회선교의 일을 위해 거리로 나아갈 때, 기도로 동참하는 하나 되는 일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이런 일들이 단절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을는지를 고민하여야 합니다. 평화나눔공동체와 소모임이 여럿 있지만, 이것 또한 끼리끼리 모이다보니 신구 교인간의 만남과 세대 간의 간격을 좁히는 역할은 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역을 대신하는 새로운 만남의 구조가 필요합니다.

 

다른 교회의 평균 연령이 60세인 반면 저희 교회는 40세입니다. 60년 역사의 교회로서는 매우 젊은 교회이지요. 그러나 나이든 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대화의 단절은 앞으로 많은 문제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지난해에도 동성애 문제가 터졌을 때, 그 갈등은 매우 첨예했습니다. 너무 첨예해서 대화의 장을 만들기도 어려웠습니다. 의견은 달라도 대화는 할 수 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이번에 분가교인들이 주로 중간세대에 속한 3,40대였습니다. 중간세대가 더욱 빠져나간 지금 세대 간격을 줄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저희 교회 또한 얼마가지 않아 어느 교회와 다름없이 껍데기 건물만 남아 민주화의 역사 유적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변화에 민감하며 새로운 변혁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만의 경험에 기초한 좁은 생각을 넘어 더 크게 더 넓게 더 길게 보는 공동체의 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만남을 더 넓게 더 깊게 할 수 있는 새로운 구조를 함께 논의하여 3월경에는 시작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2. 평신도교회]

 

그리고 평신도교회로서의 위상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평신도 하늘뜻펴기의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평신도교회란 단순히 평신도가 예배에 사회를 보고 목회운영위원회를 만들어 재정을 담당하고 제직회장을 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신도교회의 핵심은 목회의 핵심이 그렇듯이 섬김과 돌봄의 일을 목사에게 맡겨놓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가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가 알아야 하는데, 그 방식의 하나로 예배 시간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100여명이 모이는 작은 교회들, 강남향린이나 들꽃향린이 시행하고 있고, 섬돌향린도 그럴 것이라 여기지만, 매 주일 한 분이 약 5분정도 자신의 삶과 신앙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새 교우들이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이 될 것이고 동시에 오래된 교우들은 이 분들을 통해 향린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읽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새교우들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3. 입체적 교회]

 

입체적 교회란 세상의 서로 다른 직업과 재능을 함께 모아 하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펼쳐가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사회 선교의 현장에 함께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일을 평신도들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하여 나간다는 말이 입체적 교회의 상입니다.

 

향린40년사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들이 추구했던 교회는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에 잠깐 교회 나와서 한 시간 예배보고 설교를 듣는 것으로 만족하는 교회가 아니었다. 사회생활에 쫓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주일에 단 몇 시간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성서공부를 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 이들의 확신이었다. 신앙운동은 전 생애를 바쳐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주일날 한번 모여 예배보고 헌금하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그것만 가지고 나는 할 일 다 했다.’고 스스로 안주해서는 안 된다.> 안병무선생께서 한때 향린교회를 가리켜서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렸다는 자책어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작은 일에 매이지 않습니다. 남한 교회 전체를 보듬어 안는 큰 시각을 가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작은 차이를 넘어서야 합니다.

이제 하늘뜻 마무리를 짓고자 합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 열어 제친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새로운 인간상으로 거듭납니다. 이는 하늘로부터 오는 거역할 수 없는 성령의 부름입니다. 이 부름은 예수께서 갈릴리의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과 함께 하셨던 것과 같이 오늘 이 땅의 낮은 자들과 함께 하는 일이고, 이 복음 운동을 통해 새 역사 창조에 나서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리 모두가 인간답게 살아가는 정의로운 사회 건설, 전쟁의 위협을 없애고 평화를 심는 일, 우리 스스로가 편한 삶에서 불편한 삶으로 삶의 양식을 바꾸어 지구 환경의 재앙으로부터 생명을 지켜내는 일입니다. 올해의 교회 표어는 그래서 11월 부산에서 모이는 세계교회협의회 10차 총회의 주제인 생명의 하느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로 교체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 하나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일들이지만, 향린교회에는 이 모든 것을 더해 그 무엇보다도 남북화해와 통일의 과제가 놓여 있습니다.

 

이제 생명, 정의, 평화의 하느님 나라를 생각하며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세례 재확인 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