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8일 오늘의 시대와 예언자 정신(13) 요나: 시대의 징조를 읽자

요나 3장 4-10절; 마태오 16장 1-4절


         요나서는 5년 전 5번에 걸친 하늘뜻펴기를 통해 자세하게 다룬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오늘의 시대와 예언자 정신이라는 13번째 시간으로 당시에는 깊게 다루지 아니했던 주제 곧 역사의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의 포괄성과 배타성이라는 관점에서 요나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요나서는 예언서의 하나로 말해지긴 하지만, 다른 예언자들과는 달리 예언의 내용은 별로 없고 우화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매우 짧은 이야기입니다. 흔히 고래일 것이라고 추측되는 큰 고기 뱃속에 삼일 동안 들어갔다 나온 이야기나 자신의 조국인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니느웨를 수도로 한 아시리아란 나라가 요나의 회개하라는 외침 한마디에 왕으로부터 가축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베옷을 입고 단식을 하여 구원받았다는 이야기는 성서의 문자 그대로를 믿는 문자주의에 빠진 사람들을 제외하고 실제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40년 전에는 장로교 신학대학의 구약학 교수가 이 요나서는 실제 얘기가 아니라고 해서 신학교에서 쫓겨난 예도 있었습니다만, 오늘날은 만약 주류신학대학에서 요나가 사실 인물이라고 주장한다면 쫓겨나는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구원의 배타주의 혹은 특수주의]


        구원에 관련하여 구약성서가 크게 외치는 얘기는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여 계약의 백성으로 살게 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 몸 바친 거룩한 백성이 아니냐?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세상에 민족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 너희를 뽑아 당신의 소중한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다. 야훼께서 너희를 선택한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들보다 수효가 많아서 거기에 마음이 끌리셨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너희는 어느 민족보다도 작은 민족이다. 다만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그 맹세를 지키시려고 야훼께서는 당신의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끌어내신 것이다.”(신 7장 6-8절) 선택에 대한 어떤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로 맹세했고 그 약속을 지키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우리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습니다. 둘 다 아담의 아들들로 이스라엘의 선조였습니다. 하느님은 양을 치던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였지만, 곡식을 바친 카인의 제물은 거절합니다. 그 거절의 이유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이스라엘의 선조인 에사오와 야곱의 경우에는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을 선택하십니다.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억누를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창 25장 23절) 그런데 행실로 보면 야곱은 아버지를 기만하고 형을 속이고 급기야는 몰래 도망을 치는 부도덕한 인간입니다. 행실에 근거한다면 사실은 에사오가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근거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 하느님은 무조건적으로 자신들을 선택했고 다른 백성들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이해했습니다. 


[종교간의 갈등]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라고 선언하는 십계명의 제일 계명은 다른 신들은 모두 악한 신 혹은 미신으로 규정하는 유일신 개념을 갖게 했고 이는 역사의 특수주의 구원의 배타주의를 만들어냈습니다. 개인이나 사회 그리고 민족 심지어는 사랑과 자비를 외치는 종교에서 조차 이런 배타성은 다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서라는 한 경전에 뿌리를 둔 세 형제 곧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유일신을 주장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늘의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가 큰 것입니다. 서로 안 만나면 될 것 아니냐 하지만, 문제는 자신들이 믿는 신이 참 신이라고 주장하는 이 세 개의 종교가 그간 서로 살을 맞대고 앙앙거리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현실입니다. 오늘의 세계에는 세계 3차 대전을 일으킬 뇌관이 두 군데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이고 다른 하나는 팔레스타인 지역입니다. 그런데 길게 보면 핵폭탄은 협상을 통해 제거할 수 있지만, 한번 뿌리내린 종교적 신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가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거의 유래가 드물 정도로 다양한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해왔습니다. 가끔가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불상이나 단군상을 파괴하여 사회적 물의를 빚긴 하였지만 종교 갈등이니 종교편향이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올해 역대 정권 중 가장 부자층으로 구성된 이명박정권이 들어서면서 종교편향 종교갈등이라는 단어들이 거의 매일같이 언론에 얘기되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장로 대통령이 있었고, 천주교나 불교를 믿는 대통령이 있긴 하였지만, 종교간의 갈등이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MB정권의 시작과 함께 기독교가 정치세력으로 등장을 하면서 종교편향이 매우 노골화되었고 이에 불교계가 심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요나서는 바로 이러한 배타적인 신앙에 대해 어떤 지혜와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하느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요나는 이에 불순종합니다. 왜 그러했습니까? 니느웨는 아시리아의 수도인데 이 나라에 의해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당했고 남왕국 유다도 멸망 직전까지 갔습니다. 이방인의 나라이자 원수의 나라입니다. 구원은 선민 이스라엘에게만 허락이 되어 있는데, 이방인이 구원받아 자기와 동급의 사람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요나는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이 명령했지만, 자신의 기존 생각과 선험적인 개념을 부셔야 하는 아픔을 견딜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난 주 저희 집에서 새 교우 17명이 모여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다수가 보수적인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왔던 분들입니다. 고백하기를 향린교회를 다니는 것이 기쁨이긴 하지만 동시에 아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믿어왔던 신앙관을 부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처음 그런 충격을 받으면 우리는 그것이 마치 신앙을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후에 돌이켜 보면 그 충격은 바로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한 과정임을 알게 됩니다. 하늘을 나는 자유의 기쁨을 갖게 되면 과거에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기존이라는 껍질을 깨고 그 작은 구멍으로 몸을 비집고 나오는 그러한 신앙적 충격과 아픔들은 하나의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게 됩니다. 그리고 참 신앙이란 다름 아닌 바로 그러한 충격과 아픔을 당연히 여기는 태도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의 충격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충격이 멈추면 그 순간이 바로 죽음이 임하는 순간입니다.

 

[구원의 포괄성 혹은 보편주의]


        요나서는 우리에게 어떤 신앙적인 깨달음을 위해 어떤 종교적인 논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매우 우화적이고 과장되는 이야기 방식을 도입합니다. 어린이 동화책에나 등장할 수 있는 이야기들로 계속됩니다. 그러면 누가 읽어도 웃고 지나갈 이 얘기를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의 책 속에 넣어 경전으로 취급하는가? 요나서를 구약경전의 하나로 예언서의 하나로 확정지을 때, 유대의 랍비들은 후세들에게 어떤 깨달음을 기대했을까?


     두 가지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창조신앙입니다. 세계는 모두 야훼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기에 적국인 아시리아를 포함해 모든 인류가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요나서는 이 구원의 대상에 가축까지도 포함한다는 점에서 광우병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오늘날 깊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고 이점에서 요나서의 위대한 면이 엿보입니다.


    두 번째는 구원의 대상에서 애초부터 제외되었던 니느웨, 복음을 전해도 믿지 않으리라고 여겨졌던 아시리아라는 제국이 요나의 외침을 듣자마자 왕으로부터 가축에 이르기까지 전폭적이고 즉각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났다는 얘기는 구원은 우리에게서가 아니라, 원수에게서부터 먼저 일어나고 있다는 각성과 자아 중심의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요나서는 이런 하느님의 촉구에 대해 요나가 ‘아 하느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느님의 크고 높으신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라고 회개하는 얘기 곧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고 끝까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화가 잔뜩 난 채 얘기가 끝나고 있습니다. 요나서에 의하면 구원받은 백성은 니느웨 백성들이지 요나로 대변되는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원받은 니느웨 백성들을 완전 숫자를 상징하는 12만명이라고 말함으로 유대민족 없이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암시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루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결국 돌아온 탕자 둘째 아들은 잔치자리에 참여하지만, 첫째 아들은 이런 아버지의 태도를 못마땅해 하면서 끝내 잔치자리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더 노골적인 비유도 말씀하십니다. 종교라는 우리 안에 있는 99명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이 구원을 받는다. 이에 종교 지도자들은 분노하여 예수를 죽일 것을 모의합니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구원의 특수성]


        물론 예수님도 구원의 특수성이 보이는 말씀 또한 하십니다.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는 이방 여자의 간청에 대해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마태 15장 24절) 더 나아가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모욕적인 언사까지 하십니다. 물론 이 어머님의 끈질기고도 재치 있는 답변이 예수님의 마음을 변화시켜 딸의 병이 고침을 받았지만, 이 문장은 예수님 또한 구원에 대한 제한성을 두신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만듭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베드로의 얘기는 교회 밖의 구원에 대해 가능성을 차단합니다. “예수에게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행 4장 12절) 예수님 또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성서 안에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이야기 곧 구원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들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특수주의가 있는가 하면 누구나 예수 이름이 아니라 하더라도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품고 삶의 실천을 하는 사람이면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는 보편주의가 있습니다. 이는 성서 안에서 어떤 구절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고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서 해석의 선택 문제]


        가장 극적인 예가 복음서에 있습니다. 마르코 마태오 루가복음에 공통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마르코복음 9장 40절과 루가복음 9장 50절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마태오복음 12장 30절은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표현은 반대만 하지 않는다면 다른 주장을 한다할지라도 함께 하겠다는 포괄적인 입장입니다. 반면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다.’라는 표현은 피아가 분명한, 중간지역이 없는 매우 배타적인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간 서구 교회는 마르코나 루가의 입장 보다는 마태오의 입장을 선호하여 예수 믿기를 거부하는 수많은 아프리카와 남미의 원주민들을 학살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보수교회들이 이웃종교를 인정하지 않고 교회 밖의 구원 혹은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마태오의 입장을 따른 것입니다.


        물론 어떤 종교나 마찬가지이지만, 포교를 함에 있어 자신들이 외치는 소리만을 유일한 구원의 진리로 선포해야 합니다. 똑같은 물건을 파는 상인이라 하더라도 자기들의 물건이 다른 가게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니 똑같은 상표의 물건인데 뭐가 다른 가게보다 더 낫다고 따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게 바로 세상의 이치임을 알면 됩니다.


        인류역사 5천년 전에는 배타적인 유일신 개념은 없었습니다. 서로를 인정하는 다신론이 있었습니다. 다른 신을 똑같이 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존재는 인정하는 포괄적인 유일신론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국이 형성되고 강력한 군주가 생기면서 자신의 권력을 정당시하고 지배를 보다 쉽게 하기 위해 자신이 믿는 한 신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배타적 유일신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종교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유일신 개념은 이집트의 태양신 레(Re)나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배타적 유일신론의 영향을 받았고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이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하느님의 강>, 그레고리 라일리 47-68쪽)  


        그리고 이 배타적인 유일신론이 절대적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생겨난 결과가 무엇입니까? 종교간의 전쟁과 민족 살육입니다.


        오늘의 사회는 하나의 지구촌이 되어가면서 매우 다양한 생각과 사고 그리고 다양한 언어와 민족들이 함께 어울러져 가야만 하는 공존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생각이 다르고 밉다고 해서 어떤 한 민족을 무력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은 곧 자신의 파멸을 가져올 따름입니다. 미국이 밉다고 911테러를 일으킨 알카이다 이슬람 근본주의 종교집단은 미국의 침략을 받아 와해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게다가 미국은 반테러의 이름으로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는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미국은 어떠합니까? 넘쳐나는 군사비를 감당하지 못해 그 결과로 금융경제파탄이라는 심각한 위기를 만들어 냈고 이 위기는 미국 한 나라로 그치지 않고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사회는 함께 가야만 하는 국제사회요 지구촌 사회입니다. 한 연못에 사는 물고기를 죽이면 그 썩은 시체에서 나오는 독이 연못 전체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회입니다. 정치경제군사적으로만 아니라 문화 종교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 다원화의 인정이 곧 자신이 믿는 신앙의 다원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정치경제적으로는 시장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라고 표현하지만, 종교문화적으로는 다원화된 포스트모더니즘시대입니다.


[요나 기적의 상징성]


        예수님을 시기하고 넘어뜨리려는 종교지도자들이 ‘당신이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표가 될 만한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고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아침에 하늘이 흐린 것을 보고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이렇게 하늘을 보고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하느냐? 악하고 절개 없는 이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나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시대의 징조는 무엇이고 요나의 기적은 무엇인가?


        저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믿음이 다른 신앙의 대상이 다른 상대방을 인정해야 하는 다원의 시대적 상황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세대의 징조를 읽어내는 핵심이요, 요나서가 던져주는 상징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성서는 하느님은 한 분뿐임을 말하고 있고 우리 또한 한분이심 하느님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 유일신 고백은 상대방을 부정하는 배타적이거나 폐쇄적인 고백이 아닙니다. 가나안 정복 시대 유대민족의 우월성과 절대성을 강조하며 모든 이민족을 말살하는 전쟁의 이야기가 여호수아서로부터 사사기 사무엘서에 계속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중간에 룻기라는 모압의 한 아름다운 여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방 여인이 다윗 왕의 선조가 된다는 인류구원의 보편성과 민족 개방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민족적 폐쇄성이 강한 마태오복음도 맨 처음 예수의 족보 이야기를 하면서 문제가 많은 이방 여인 4명을 예수의 조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요나서는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아시리아가 구원받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보편성과 포괄주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서가 보여주는 위대한 점입니다.


[배타적 유일신론에서 포괄적 유일신론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요나서에 의하면 니느웨 백성들이 야훼 하느님에 대한 어떤 종교적 개종 행위를 한 것은 없습니다. 자신들이 믿던 신들의 상을 부수고 신전을 새로 짓고 유대인들이 믿던 야훼 하느님께 제물을 드리는 예배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잘못에 대한 회개만을 했습니다. 단식을 하고 베옷을 입고 권력을 잡았다고 남을 못 살게 굴던 나쁜 행실을 뉘우쳤을 따름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요나와 관련해서는 일반적인 신들을 뜻하는 하느님이라는 단어는 매우 적게 등장하고 대부분의 경우 유대민족의 신인 야훼라는 민족 특수한 이름이 언급되지만, 니느웨 백성들과 관련된 고백 속에서는 야훼라는 이름은 전혀 등장하지 않고 하느님이라는 종교 보편적인 단어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개종을 전제로 하지 않는 구원을 얘기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곧 요나서는 교회 밖의 구원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고,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아닌 회개에 대한 행실을 중요하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종교간의 협력 그리고 이웃종교의 다른 신앙을 인정할 수 있는 접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서로 다른 신을 믿으면서도 이 사회의 공의와 인류의 평화 추구에 있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는 사랑과 자비의 실천 곧 약자에 대한 배려와 선행을 얘기합니다.


        지난 수십년간 사람들의 교육수준은 엄청나게 높아졌고 그 속도 또한 매우 빨라졌습니다. 교인들의 지적인 욕구도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한의 교회는 교회 문턱에서부터 이성을 벗어 놓고 교회 안에 들어올 것을 요구하고 교리 수호라는 이름아래 성서문자주의에 기초한 아전인수적인 해석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점점 더 보수화되고 근본주의화 되고 있으며 현실도피적인 영성만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들이 교회성장주의와 개인의 영혼구원 일변도, 기복주의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사회의 정의와 평등 그리고 평화를 위해 기여해야 할 때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교회는 결코 이 역사 속에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지나간 인류역사가 증명하는 바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나라와 같이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는 사회 속에서는 더 이상 내가 믿는 신만이 유일한 신이고 다른 종교나 신들은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배타적인 유일신론은 지양하고 다른 종교의 존재도 인정하는 포괄적 유일신론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요나를 통한 시대의 징조입니다.’ 이웃종교의 진리를 인정하고 함께 나아가려는 노력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물론 문제는 있습니다. 고민도 있고 갈등도 있습니다. 부부가 의견이 다르면 고민이 생기고 갈등도 생겨납니다. 그러나 가정을 지켜가기 위해, 인류의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 서로가 한발자국 물러나야 합니다.


        요나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니느웨가 구원받는 일에 대해 분노하며 계속 다르싯으로 가는 배를 탈 것인지? 아니면 야훼 하느님의 자비하신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진정 니느웨 백성들과 함께 살아갈 것인지? 이제는 더 이상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에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구원받아야 할 대상들로부터 무언가 하느님의 뜻을 배워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의 성숙성이 요구되는 시대]


        소통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공멸이 아닌 공존을 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종교가 앞장서서 소통의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믿는 종교만이 절대적이고 유일하다는 주장은 접어야 한다. 상대방의 믿음 안에도 진리가 있다고 하는 열려진 자세를 가져야 한다. 2차 세계대전시 영국과 독일의 어머니들은 모두 자신들의 아들들이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를 그리고 자국의 승리를 야훼 하느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두 나라가 모두 승리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과연 야훼 하느님은 한 나라를 버리고 다른 한 나라를 선택한 것인가?


        에이브러행 링컨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남북전쟁이 계속되던 어느 날 링컨의 부관이 말합니다. ‘각하 저는 오늘의 전투를 앞두고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 승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링컨은 “하느님이 우리 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하느님의 편이 되도록 기도하게나.”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의 뜻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하느님의 이름을 빌린 한 개인의 뜻에 불과합니다. 영화 밀양에서 우리는 아들을 살해한 유괴범을 용서하기 위해 감옥을 찾아갔다가 충격을 받습니다.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았다는 말에’ 여기에 이 여주인공은 은총을 남발하는 값싼 구원의 신을 향해 항의하고 손가락질하고 경멸합니다. 상대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이 믿는 신의 뜻이 전부인양 절대인양 주장하는 신앙의 교만에 대해 반종교의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성숙성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인류공동체의 미래를 바라보며 자기를 초월하여 상대방을 인정하는 성숙성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믿는바 야훼 하느님이 거주하신다고 믿는 그리심산 성전이나 유대사람들이 믿는바 야훼 하느님이 거주하신다고 믿는 예루살렘 성전에 계시지 않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요한 4:24) 우리가 고백하는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십니다.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고 우리의 머리로 담을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표현을 좀 더 확대하면 사람이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사람 곧 인류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함께 일한다고 해서 내 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함께 일할 때에 우리는 자신의 독특성을 발견하고 더욱 더 창의적으로 그리고 풍부한 신앙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존재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인정할 때 비로소 자신의 내부의 무한하고 영원한 생명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바라문의 금언의 말씀입니다. “네 마음속의 등불이 꺼지면 어둠이 너의 길을 뒤덮을 것이다. 그 무서운 어둠을 조심하라. 그대의 마음속에서 모든 이기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성의 어떠한 빛도 네 마음에서 생기는 어둠을 몰아낼 수 없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