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8일 한가위 감사주일/남신도주일


                                          한가위와 감사 (김태준/조헌정)
                                    신명기 26장 1-13절 골로사이 3장 12-17절 


   오늘은 한가위 감사주일이면서 남신도주일이기도 해서, 제가 어떤 하늘 뜻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명설교자이신 우리 조목사님이 지난해에 하신 설교를 찾아보고, 같은 성경구절과 같은 제목을 내 걸고,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했습니다.  마침 한국 불교가 교단 차원에서 들고 일어나서 이명박 정부의 종교 편향정책을 성토하는 현실에서, 장로 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기독교 인사들이 일으킨 불교와의 부조화라는 우리 종교문화의 문제를 생각하며, 이웃 종교에 대한 이해와  불교의 구원체험에 고백적으로 참여하는 하늘 뜻에 다가 갔으면 합니다.


   저는 4대조 노할머니 때부터 우리나라 첫 번째 개신교인 솔내 교회의 교인이 된 기독교 모태신앙이란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만, 불교대학인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의 교수를 지내면서, 제 종교로 기독교와 직장으로 불교 사이에서 적잖은 부조화를 경험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직장을 모교로 옮길 때 총장이 지금 조계종 총무원장인 지관 스님이었고, 제가 19년 동안 학교에 있었지만, 종교적인 마찰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관 스님이 조계종 총수로 있고, 그 지관 스님이 타고 가는 차를 검색하게 해서 불교 교단을 뿔이 나게 한 경찰청장 어청수가 또한 동국대학교 출신이어서, 모두가 제 죄인 듯해서 제가 몸둘 바를 모를 지경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씀과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하고 거듭 강조하는 오늘의 말씀에 힘을 얻는 체험을 합니다. 저는 향린교회가 나서서 불교를 응원하는 펼침 막을 두개 정도 만들어서 조계사에 하나 보내고, 우리 교회에도 하나 걸어 종교 간 소통에 앞장서고, 촛불집회의 정신을 다시 살려야 하리라는 생각도 합니다. 

  2.
  한국 교회가 1904년 이후 지켜온 추수감사절은 미국의 선교사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11월 셋째 수요일에 감사헌금을 해서 선교부에 보낸 것이 그 기원이 된 모양입니다만, 미국의 국경일인 11월 마지막 목요일이 아닌 한가위 추수 감사절을 지키는 일은 우리 교회 갱신선언에 담긴 문화선교의 정신이 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은 하늘에 찬양하는 감사의 정신이며 서로가 나누는 한가위의 덕담일 터입니다. 그만큼 한가위는 풍요로운 오곡백과며 고향을 찾는 설레임과 보름 달을 닮은 송편을 빚고, 달 밑에서 놀이판이 흥겨운 민족 최대의 명절입니다. 역사 기록을 보면 신라에서는 2대 유리왕대인 기원 32년에 길쌈 내기를 하여 8월 보름에 가배, 가위의 전통이 되었다는 기록으로부터, 《삼국유사》<駕洛國記>에는 8월 보름에 제사를 드린 기록이 전하기도 합니다. 같은 명절이라도 정월은 <正朝> 곧 정월아침이라 하여 ‘낮’의 명절인데 비하여, 한가위는 ‘秋夕’이라 하여, 달을 숭상하는 신앙이 한 가위의 기원이 되었다고도 하고, 송편도 달 모양을 빚었다고 합니다. 저는 시골에 살기 때문에 이번 한가위의 밝고 밝은 달에 참으로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만, 산 속의 달은 참으로 밝고 밝아서, 우리 신라 시대에 해당하는 일본 평안시대 사이교오(西行)라는 스님의 시가 절창이라고 다시 느낀 바 있습니다. 이 시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노벨상 수상연설 때 읊어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달의 시입니다.

     밝고 밝고 밝구나 밝고 밝구나, 밝고 밝고 밝구나 아, 밝고 밝은 달이여.
       (あかあかあかや あかあかや, あかあかあかや あ, あかあかや つき.

  신라 뿐이 아니라 고구려나 부여에서는 10월에 迎鼓나 東盟이라는 국중대회를 펼쳤는데, 이것 또한 농경사회의 감사 잔치였을 터입니다. 이 국중대회는 나라 굿으로, 모든 죄수를 풀어주며, 부여의 풍속에서는 농사가 잘 안되었을 때에는 임금을 죽이거나 바꾸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국중대회의 전통이 천년 뒤에 불성실한 정부를 보다 못해 소녀들의 촛불집회로 나타나서,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 1조를 함께 노래로 부르며, 국민의 건강을 볼모로 정권을 악용한 대통령을 규탄한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고, 촛불 민주주의는 이웃나라들의 부러움을 사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문화의 전통일 터입니다.

  “어른들이 뽑은 ‘부도덕한’ 대통령에 대하여 소박한 도덕 공격을 통해서 새로운 법을 만들어가는” 소년 소녀들의 반대의 말들은 “유교의 전통에 따른 내발적이고 특이한 한국적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이다”고 평가하는 일본의 한국학자 오구라 기조 교수의 주장(小倉紀藏,《東京新聞》,2008. 6. 30. 夕刊, (<촛불, ‘비도덕 권력’ 내치는 유교적 혁명> 《한겨레》)은 그런 점에서 귀 기울일 만합니다. 명문 교토대학 교수의 이런 평가는 이 문화현상을 두고  “한국의 역동성”으로 평가하는 데서 이 사건, 이 문화현상을 동아시아 다른 나라와 구분하고 있어서 주목을 끕니다. 그는 일본과 동아시아를 뒤흔든 한류(韓流)와  2000년 남북한 정상회담 이후부터 한국의 역동성에서 배우자고 일본 사회에 제안해 온 한국학자로, 조선왕조 시대에도 성균관이라는 국립대학의 엘리트들은 왕에게 직소할 일이 있으면 광화문에 모여 식음을 전폐하고 데모를 해서 왕을 바로 잡았으며, 왕세자를 보내서 마땅한 대답을 들어야 해산을 하던 전통이 지금도 살아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3.
이렇게 두 달이나 이어진 촛불집회를 공권력으로 미봉하자,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속담대로, 이 부정직한 정권은 다시 전인구의 1/3의 교도를 가진 한국 최대의 불교교단을 뿔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가야 발해로 이어져서 고려시대까지 천 수백년을 불교문화와 함께 발달했고, 한국문화의 중요한 문화유산이 당연히 불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요사이 방송에서 코메디안 수준의 장모라는 목사가 “스님들은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예수 믿으라”고 “불교 믿는 나라는 다 가난하고. 예수 믿는 나라는 다 부자다”고 해서 국민의 입방아에 올라 있고, 어제 <한겨레신문>에는 법철학 전공의 김지수 교수가 <광신병과 종교대동>이란 칼럼을 써서, “육신의 생명을 한바탕 봄꿈처럼 허망한 놀음이라고 설파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공통된 가르침이라 할 때, 예수 믿어야 잘 사는 나라가 된다는 주장은 오만과 독선이라고 일침을 놓고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 종교가 존중받고 싶으면 이웃 종교도 존중해야 하고, 자기 신앙이 욕을 당하기 싫으면 남의 신앙도 모멸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습니다만, 불교는 기독교보다 오랜 역사와 철학과 문화를 발전시켜 온 고등종교입니다. 우리 문학의 가장 초기시대의 문학사를 빛낸 향가(鄕歌)는 14수밖에 남아있지 않은 우리말 노래로, <눈 밝안 노래/禱千手大悲歌>에서 유교나 기독교 못지 않게 깊은 불교의 종교성과 깊은 신앙과 감사하는 문화를 살필 수 있습니다.

  서라벌의 漢岐里에 사는 希明이라는 여자의 아이가, 난지 5년 만에 문득 눈이 멀었습니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어미는 아이를 데리고 분황사 왼편 전각에 그린 천수관음 앞에 나아가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빌었습니다.


     무릎을 고치며 두 손 모으고 나아가
     천수관음 앞에 빌어 말씀드립니다.
     즈믄 손 즈믄 눈을 같은 것에서 하나를 더옵지
     저는 두 눈이 다 멀었으니, 하나사 주시고도 지나겠지요.
     앗어라, 나에게 끼쳐 주실 것을, 어디 쓰실 慈悲오니까?

   눈 먼 아이의 눈을 뜨게 해 주려는 어미의 애타는 마음이 눈물겹도록 잘 표현된 기도의 노래이다. 천수관음보살은 눈이 천개이며 손도 천개인 능력 있는 보살인데, 두 눈이 다 먼 나에게 눈 하나만 주시고도 지낼만하지 않습니까? 하고 매달려 비는 마음에 간절한 정성이 넘친다. 천개 눈 가운데 두개도 아니고 ‘하나만’ 이라도 달라고 하는 이 간절한 발괄은 오늘의 감정으로 읽어도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특히 이 분황사는 원효 스님이 있던 절이고, 이곳 금당 북쪽 바람벽에 그린 천수관음보살상은 이름 높은 솔거의 그림이었다 합니다. 솔거의 그림은 신품이어서, 황룡사에 그린 늙은 소나무는 새들이 참으로 알고 쉬려고 날아들었다가 바람벽에 부딪치기 일쑤였다는 전설이 전합니다. 이런 화가 솔거가 그린 천수관음보살상이니 이 또한 거룩한 기운이 돌았을 시 분명합니다. 이런 거룩한 관음상 앞에서 천개의 눈 가운데 하나만 주십사하고 비는 애타는 소원 앞에서 목석이라도 감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자비를 최고의 덕목으로 하는 관음보살인데다, “어디 쓰실 자비입니까”하는 애틋한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입니다. 여기에는 이루어질 것을 믿는 기도자의 확실한 신앙이 보이고, 그러기에 역사는 “봄철 절마다 버들꽃을 보게 되었다고 기리고 있습니다.

  4.  신영복 교수의 《나무야나무야》라는 책에는 <천수관음보살의 손>이라는 글 속에 <또 하나의 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어려서  어떤 아주머니가 아이를 업고 두 손에는 물건을 들고, 머리에는 임을 이고, 치맛자락에 또 한 아이를 달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또 하나의 손>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 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천수관음상을 보고, 이 보살이 천개의 손에 천개의 눈이 달렸다는데 놀랐습니다. 그것도 그냥 손이 아니라 눈이 달린 손입니다. 눈이 달린 손은 생각이 있는 손입니다. 마음이 있는 손입니다. 불교에서 보살은 고통 속에 허덕이는 뭇 중생들의 수많은 모습을 하나하나 상징하는 것이며, 모든 보살의 총체가 바로 붓다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관세음은 ‘世音’ 곧 세상의 소리를 듣는다는 뜻일 터입니다. 경제를 살려 부자가 되기 위해서 유치원서부터 영어몰입교육을 하고, 거짓말로 속여서라도 나만 부자가 되는 삶이 아니고, 고통 속에 허덕이는 중생, 민중의 소리를 듣고 보고 소통하고 우정으로 닥아가는 실천이 곧 ‘관세음’이며, 또한 이런 소통이 없이는 이 계절에 우리가 말하는 감사가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향가 <눈밝안 노래>에서 한기리 희명이 지어 천수관음 앞에 빌었다는 노래는 바로 깨달음이 없는, 세상을 볼 눈이 없는 나의 이야기 나의 노래와 나의 기도이기도 할 터입니다. 두 눈이 먼 아이가 지어 부른 불교의 노래라고 해서 버릴 유산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불자의 기도와 같은 기원과 정성도 가지지 못했다면, 우리는 불교가 남의 종교라고 해서 그들을 뿔나게 하는 것은 죄악일 터입니다. 온갖 거짓된 현세를 버리고 참 마음을 찾기 위해 가족은 물론 모든 것을 버리고 산 속으로 귀의한 스님들을 뿔나게 한 장로와 목사의 불신앙을 우리가 함께 회개하고 모든 고통 받는 민중, 신음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있는 성문 밖으로 내려가는 것이 우리의 감사이며, 눈이 열리는 변화일 터입니다.

[감사의 절기]-조헌정

  오늘이 저희 교회가 지키는 한가위감사주일이면서 총회가 정한 남신도회 주일이기에 남신도이면서 국문학자이신 김태준집사님에게 오늘의 하늘뜻펴기를 저와 함께 하시도록 청을 드렸습니다. 국문학자로서 한가위에 초점을 맞추시면 저는 감사의 삶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 것입니다. 처음을 여시면서 저를 당치않게도 명설교자라는 과분한 칭찬으로 시작하셨지만, 주초에 김태준집사님의 하늘뜻을 받아들고 적지 않은 고민과 스트레스를 받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하늘 뜻을 펼친다면 서로가 서로의 격에 맞아야 하는데, 제가 김태준집사님의 높은 격을 맞출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저의 부족함을 채워주시리라 믿고 말씀을 드립니다.

  우선 현 정부의 종교편향을 질타하시며 두 개의 펼침 막을 만들어 하나는 조계사에 하나는 교회에 거실 것을 제안하셨는데, 저도 이에 적극 동의하오니 사회부와 선교부에서 이를 수용하시어 진행하시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한가위 절기에 관련해서는 김태준집사님께서 민속학적인 입장에서 잘 말씀해 주셨으므로 저는 감사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교회들이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데 이 날은 세계교회 전통과는 별 관련이 없이 미국 정부가 11월 넷째 목요일을 감사일로 선포한 데서 출발합니다. 미국은 열대온대한대 기후가 모두 함께 하고 있어 추수감사일을 어느 절기에 하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첫눈이 나리기 시작하는 11월 하순에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일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아무 생각 없이 수용하는 것은 남한 교회만이 보여주는 일종의 사대주의적인 친미 경향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농촌사회가 급격히 축소되고 있어 추수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하루 속히 우리의 민속절기인 한가위 절기에 맞추고 그 이름도 추수감사주일이 아닌 한가위감사주일로 바꾸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성서적으로 본다면 유대인들의 3대 절기인 과월절, 칠칠절, 수막절은 모두 감사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과월절은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해방 받았음을 감사하는 날이고, 칠칠절은 보리의 첫 수확을 감사드리는 날이며 수막절은 가을의 곡식들을 거두고 나서 드리는 감사의 절기입니다. 이 절기들은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의 예배이자 동시에 백성들이 함께 즐기는 축제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서 본문은 이 절기들이 감사와 축제를 넘어선 보다 깊은 신앙적인 의미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각종 햇곡식을 떠내어 광주리에 담아 가지고 사제에게 이를 드린 후에 이렇게 고백한다는 점입니다.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에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 몸 붙여 살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불어나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에집트인들은 우리를 억누르고 괴롭혔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느님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는 우리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우리가 억눌려 고생하며 착취당하는 것을 굽어 살피시고 우리를 구출해 내시어 이 땅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여기 이스라엘 민족은 햇곡식을 드리면서 단순히 한해의 소출에 대한 개인적인 감사가 아닌 민족을 구출해내신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감사도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단순히 한해의 소산물에 대한 자연의 감사나 나 한 개인에 대한 감사로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 한민족을 지켜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가 필요합니다. 우리 또한 이스라엘 마냥 주변의 강대국들에 둘러 싸여 수많은 침략과 억압의 고난을 겪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우리는 고난 속에 있습니다. 자주독립국가라고 말하지만, 분단으로 인한 아픔과 질시 그리고 군사적으로는 미국의 직간접의 지배하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우리 민족은 아직까지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도상의 단계에 있지만,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까지 인도하신 야훼 하느님의 구원과 인도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떠돌이의 고백]

  무엇을 감사해야 할까요? 첫째는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아람인은 아라비아인과는 다릅니다. 오늘날 시리아를 이룬 족속으로 한때는 중동 지역을 다스리기도 하였던 민족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일반 대중이 쓰던 말 또한 아람어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람인이란 단어는 본래는 어떤 한 민족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닌 떠돌이 곧 당시의 가장 낮은 계층인 유목민을 일컫는 사회 계급 용어였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들은 모두 양을 치던 유목민들이었습니다. 한 곳에 머무를 수가 없었습니다. 땅을 소유할 수가 없었고, 떠돌이로 다녀야만 했습니다. 우리 용어로 고쳐 말하면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화전민이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집없이 살았던 노숙인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고자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예배 의식에서 자신들이 떠돌이 족속의 후예임을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저는 바로 이것이 바로 신앙인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자신을 낮추는 대신 야훼 하느님을 높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인간적인 장점이 있습니다. 성공할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성공을 하느님께 돌리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단순히 겸손한 사람이 되기 위함은 아닙니다. 이유는 인간은 언제나 성공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사노라면 실패할 때가 있는 법이고 밑바닥의 인생을 경험해야만 하는 아픔의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성공을 자신의 것으로 여긴 사람은 자연히 실패 또한 자신의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때 이 사람은 너무나 낙담하여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기가 십상입니다. 자살할 확률이 많은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 국가 평균의 두 배입니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종교성이 강한 민족이라고 하면서도 자살률이 높다는 것은 종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참 종교는 부자나 성공을 외치는 대신 인생의 유한성을 드러내면서 고난의 의미와 비움을 강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서기 67년 로마에 의해 그 왕국이 멸망당한 이후 근 2천년동안 나라 없이 떠돌이로 세계를 방황하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다른 민족들로부터 온갖 설움을 당해야 했고, 2차대전시에는 히틀러에 의해 6백만이 살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다시금 나라를 세웠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곳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들을 학대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지만, 적어도 2천년동안 나라 없이 흩어져 살던 민족이 다시금 모여서 나라를 세운 예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이는 분명 신앙의 힘입니다. 그러면 이 신앙의 힘이 어디에 있었는가? 그건 매 예배 때마다 ‘제 선조는 떠돌이 아람인이었습니다.’라는 과거를 잊지 않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가난하고 부끄러웠던 과거를 떠올리고 이를 고백하는 데서부터 나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우리의 부끄러웠던 과거를 감추려고 하지 말고 이를 드러내어 고백하며 오늘을 감사하는 생활을 하자는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남한은 세계에서 열 두서너번 째에 해당하는 경제력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전쟁 직후 먹을 것이 없었던 가난했던 시절을 극복하고 세계가 놀랄만한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행복하냐고 물으면 열이면 여덟 아홉이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의 얼굴이 저절로 제 눈에 들어옵니다.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곤 한결같이 모두의 얼굴에는 피곤과 불만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누군가 건들면 금방 화가 터질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해외여행을 해보시면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보다 훨씬 가난한 나라 사람들도 이렇게 얼굴이 찌들어 있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더 많이 더 크게’를 삶의 모토로 외치기 시작하면서 우리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지고 입에서는 감사라는 단어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지적하고 정의로운 길로 가도록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비판과 감사는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현재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어 있고 이 때문에 사회적 갈등이 많은데, 그렇다면 모든 사람의 소득이 같아지면 감사가 많아질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십여 년 전 러시아에도 가보았고 북한에도 가보았습니다. 얼굴에 웃음꽃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내일에도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3만 불 국민소득이 우선이 아니라 감사의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창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교회와 사찰들이 담당해야 할 부분입니다. 감사하는 사람 저는 그 사람이야 말로 진정 성공한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유대 랍비인 휴고그린은 독일의 집단 수용소에서 겪은 체험담을 전후 독일 잡지에 기고했습니다. “그날은 1944년 몹시 추운 겨울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나와 친구 몇 명을 수용소 건물 한쪽 구석에 모이게 하셨다. 아버지는 그날이 유대인의 명절인 ‘하누카의 저녁’이라고 하시고는 주발을 꺼내시더니 수용소에서는 좀처럼 구하기 힘든 버터를 녹여 촛불을 켜셨다. 나는 아버지께 그 귀한 버터를 먹지 않고 낭비하는 것에 항의했다. 아버지는 나를 가만히 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밥을 먹지 않고도 3주간을 살 수 있어, 하지만 희망이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단다.’”

[나눔의 축복]

  두 번째 오늘 구약의 말씀은 하느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저에게 주신 햇곡식을 하느님 야훼 앞에 놓고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 엎드려 예배드리고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와 너희 집에 주신 온갖 좋은 것을 먹으며 즐겨라. 너희뿐 아니라 너희 가운데 있는 레위인과 떠돌이도 함께 즐기도록 하여라.”(11절) 감사의 축제를 갖되, 끼리끼리만 하지 말고 레위인과 떠돌이를 초청하여 함께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떠돌이는 분명히 가난한 사람이지만 레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레위인은 12지파 중의 한 지파로 아론 제사장의 후예들로서 성전의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들에게는 땅을 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른 열한 지파 사람들이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은 좁은 의미에서는 오늘날의 성직자들을 말하지만, 보다 큰 의미에서 본다면 그들은 땅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로 일종의 무산계급이었습니다. 소유의 개념에서 보면 레위인이란 떠돌이와 같이 무산계층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먹을 것이 없었던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백성들이 타작하는 마당에서 십일조세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던 제사장들은 굶는 일이 없었겠지만, 농촌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은 먹을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감사절은 단지 교인들끼리의 축제날이 아니라 수입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 구조조정으로 직업을 상실한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이 땅의 떠돌이인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날입니다.

  여기에 사도바울로의 권면의 말씀의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뽑아주신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성도들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입니다. 그러니 따뜻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서로 도와주고 피차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합니다.”

  몇 달 전 한겨레에 실린 미담의 기사입니다. 전북 전주시 덕진구 인후동 전북은행 안골지점 앞에서 구두닦이와 수선 일을 하는 63세의 기독교인 조규완씨, 그는 지난 2002년부터 7년동안 매년 설과 추석 두 차례에 걸쳐 인후1동 주민센터를 통해 불우이웃 성금을 내놓았습니다. 벌이가 안 좋으면 30만원 벌이가 좋으면 50만원 연말에 내는 성금까지 합하면 매년 4,5백만원을 내어놓고 있습니다. 작년 겨울에는 우울증을 앓던 30대 초반의 아들까지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신의 몸도 정상이 아닙니다. 직장암으로 4차례나 수술을 받았고 대장을 두 번씩이나 잘라내 하루에도 7,8번씩 화장실을 찾아야 합니다. 불평의 제목을 찾으라고 한다면 어떤 누구보다도 그 항목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추운 겨울 차가운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며 구두를 닦아 모은 돈을 이웃을 위해 기쁘게 내어 놓고 있습니다.  주민센터의 공무원은 조씨가 매번 성금기탁사실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해 그동안 꾹 참아왔으나 너무 아름다운 선행이라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바램에서 소개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조규완씨는 말합니다. ‘죽는 날까지 얼마나 나누면서 살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도울 수 있을 때가지 이웃을 돕고 베풀 것입니다. 없는 형편이지만 주는 것이 오히려 마음이 편하고 행복합니다.’

  사도 바울로 선생은 계속하여 권고합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여러분은 무슨 말이나 무슨 일이나 모두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오늘 여러분에게 숙제를 드리겠습니다. 오늘 집에 가시거든 백지에 ‘2008년 감사할 것들’이라고 쓰신 후에 번호를 1부터 30까지 매기고 서른 가지의 감사를 써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를 침대 머리맡에 부쳐 놓고 잠을 주무시기 바랍니다. 내일의 아침 햇살은 분명 더 밝아져 있을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