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대와 예언자 정신(11) 말라기

말라기 3장 2-9절; 루가 4장 16-21절


        설교 중에 자주 언급되는 성서 구절에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선 황금률이라고 알려진 남에게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비롯하여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오른 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을 것이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라는 바울로의 말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라는 요한의 말씀 등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중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구절이 말라기서에 있는 말씀입니다.


[말라기서에 대한 오해]


   “너희는 열의 하나를 바칠 때,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 양식으로 쓰게 하여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고 갚아 주는지 갚아 주지 않는지 두고 보아라.” 공동번역에는 이렇게 점잖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만, 옛 번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그래 교인들은 십일조를 드리면서 복을 주시나 주시지 않나 하느님을 시험합니다. 그래 복이 오지 않으면 하느님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구나 생각하면서 더 많은 헌금을 드립니다. 반면 목사님들은 이 성서구절에 근거해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교인들은 하느님의 것을 떼어 먹은 도둑놈으로 몰아붙이는 경우까지 생겨나게 됩니다. 제가 교인 입장으로 생각해보면 참 부담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자니 아깝고 안하자니 괴롭고.


        그래 어떤 교인들은 아! 십일조는 구약성서에 있는 율법으로 신약 복음의 시대에서는 무효화되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예수님은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하면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 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마태오 23장 23-24절) 예수님은 율법이 정한 물질의 십일조는 물론이고 공의와 자비와 신의라는 사회적 실천까지 더하여 행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막상 십일조를 드리기로 작정할 때에도 그리 쉽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목회할 때에는 교인들로부터 이 십일조가 세금을 빼기 전의 금액인지 아니면 세금을 빼고 난 후의 금액인지에 대해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왜냐하면 세금이 보통 20에서 30퍼센트에 가까우니까 세금 전과 후의 금액이 상당히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월급을 받는 사람들은 세금을 빼기 전이든 후이든 계산이 분명합니다만, 가게를 운영하시는 분들은 수익을 어디까지 잡을 것인지가 애매합니다. 그래 제가 만난 어떤 순복음교회 출신 장로님은 조그마한 구두수선가게를 갖고 있었는데, 아예 매상의 십분지 일을 드리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은 십일조헌금 외에 주정헌금 따로 감사헌금 따로 선교헌금 따로 드리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건축헌금과 같이 많은 돈이 필요할 경우에는 부흥강사를 초청해서 특별심령부흥회를 엽니다. 그래 헌금에 대한 부담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교인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향린교인들은 이런 부담이 없으니 좋긴 하겠지만, 부담이 없으면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는 얘기 또한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말라기 예언자의 주요한 외침]


        열에 하나를 바치라는 십일조 얘기는 레위기를 비롯한 다른 곳에도 등장하지만, 말라기서에서처럼 노골적인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 교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성서를 고르라고 하면 아마도 말라기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라기서 얘기만 나오면 갑작스레 머리가 쑤시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이 자리에도 몇 분 계실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성서의 한 구절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바람에 생긴 잘못입니다. 말라기서를 잘 읽어보면 말라기서는 사제들의 잘못을 비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고 십일조의 강조는 헌금을 많이 내도록 하기 위한 말씀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장 7절에 “너희 사제라는 것들은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너희는 뻔뻔스럽게도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너희는 제단 위에 더러운 빵을 바치면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제단을 더럽히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야훼의 제상쯤이야 아무려면 어떠냐고 하는구나.” 2장 1절에는 “너희 사제들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기릴 생각이 없으니 너희에게 내릴 것은 재앙뿐이다. 축복 대신 저주를 내릴 수밖에 없다.”


        사실 말라기서는 당시 백성들의 지도자들인 사제들을 향한 비판적인 예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하게 강조하는 말씀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구절입니다. “나는 너희의 재판관으로 나타나 점장이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 하늘 두려운 생각 없이 날품팔이, 과부, 고아, 뜨내기의 인권을 짓밟는 자들의 죄를 당장에 밝히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점장이와 간음하는 자란 곧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을 말하는데, 당시 이방신이란 어떤 신을 두고 하는 말이겠습니까? 그것은 주위의 강대 제국들의 신을 말합니다. 왜 유대민족이 조상 대대로 섬겨온 야훼 하느님을 놔두고 주위 제국들의 신을 섬기는 것입니까? 그것은 제국들의 신은 풍요를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부자를 장담하고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즐기는 것, 개인의 욕망 충족이 인생의 행복이고 성공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점장이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는 오늘 이 시대에 어떤 사람들입니까? 747이라는 불가능한 경제수치를 들먹이며 백성들을 모두 부자 만들어주겠다고 꼬이는 정치 사기꾼들과 미국의 첨단과학이 만들어내는 미사일과 팬텀기가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말라기 예언자의 핵심적인 주장은 다른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공의에 있습니다. 날품팔이와 과부와 고아와 뜨내기 요즘말로 하면 노숙자들과 쪽방에 기거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고아들과 외국인노동자들의 인권과 복지를 회복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실상 십일조의 근본이 여기에 있습니다. 본래 십일조는 노동력이 있는 사람들이 수입의 십분지 일을 내어 놓아 노동력이 없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일종의 사회적 복지시스템이었습니다. 정치와 종교가 구분되기 전 성전이 이를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국가가 생기고 성전의 권력화가 이루어지면서 이를 나누지 않고 축척하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국가권력에 야합하면서 하느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이름하에 성전을 호화찬란하게 꾸미기 시작하고 성전 재산을 늘려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가장 깨끗해야 할 사제들이 그러하니 사회의 공의는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래 말라기 예언자 시대의 사람들은 한탄조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섬겨 보아야 쓸데없는 일이다. 그의 분부를 지켜보았지만, 무슨 소용이 있더냐? 만군의 야훼 앞에서 베옷을 입고 울어 보았지만 무슨 소용이 있더냐? 결국 살고 싶은 대로 살아야 살길이 트이는 세상인걸. 못된 짓을 해야 성공하는 세상인걸. 하느님을 시험하고도 멀쩡하게 살아 있지 않은가?”(3장 14-15절)


        정말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란 청렴과 헌신을 뜻하는 단어가 아닌 부정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오늘의 부자와 권력층을 대표하는 ‘고소영’이라는 단어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아닌 세상 권세자가 되고 부자가 되는 것이 하느님을 잘 믿는 증거라고 자랑하는 적반하장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가난한자의 축복을 얘기하고 나를 따르려거든 가진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많이 갖는 부자축복 설교가 남한 교회 전반을 휩쓸고 있습니다. 게다가 어떤 정신 나간 대형교회 부흥목사는 불교를 믿으면 가난하게 되고 기독교를 믿으면 부자가 된다는 성경 어디에도 없는 얘기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떠벌리고 다닙니다. 그런데 기장의 장로님들이 매년 수백명이 모여 여름수련회를 하면서 이분을 계속해서 강사로 데려다가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가장 개혁적이라는 기장의 장로님들마저 이러하니 한국교회가 어떤 꼴이 되겠습니까? 지금 꼴이 말이 아닙니다.


[한국교회에 告함]


        그래 지난 주 노숙자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부산 애빈교회의 김홍술목사께서 종로 5가 한국기독교회권 정문 앞에서 일주일을 노숙하며 금식침묵기도를 가졌습니다. 그는 한국교회에 고함이라는 글을 통해 ‘가진 재산 그리고 헌금을 가난한 자와 굶주리는 북녘 어린이에게 나누어 줘야 한다. 재산이 많을수록 조직이 방대할수록 확장 유지 관리 치장에만 헌금을 쓰니, 세상이 돌을 던져 조롱하지 않습니까? 이는 주님의 심판입니다. 재산을 다 팔아 가진 것 없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가질 것이라곤 복음의 능력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그리고 ‘규격화 된 옷 기성복이나 제복과 같은 교리로 신앙양심의 자유를 억압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교리와 교권으로 세워지는 아니라 의와 신과 인으로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며 반문하며 오늘 교회에 만연된 맘몬주의와 교권주의에 몸으로 항거하였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몇몇 개혁적인 교회들은 오늘 우리가 루가복음에서 읽은 예수님의 나사렛 선언에 기초하여 희년토지정의실천운동을 펼쳐나가면서 한가위 직전 주일인 곧 오늘을 ‘희년실천주일’로 선포하였습니다. 저도 여기에 함께 동참하는 서명을 하였습니다. 루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외치신 첫 번째 말씀이 희년의 선포였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함을,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은총의 해가 곧 희년입니다.’


        레위기 25장에는 이 희년의 때에 지켜야 할 규례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종들에게는 자유를 주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토지 또한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려주고 모든 빚은 탕감하도록 하였습니다. 트로크메라는 불란서 성서학자는 예수님께서 그냥 30세가 되니까 세상에 나오신 것이 아니라 바로 이 희년의 해에 세상에 나오셔서 이를 다시금 재천명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인간 구원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희년의 실천이었던 것입니다. 


[희년 선언과 남한 사회]


        지금 남한은 경제의 양극화가 매우 심화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그럼에도 계속 소수의 가진 자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성장 성장 성장주의 일변도입니다. 누군가가 분배를 얘기하면 북한의 공산주의자 빨갱이로 몰아갑니다. 그렇다면 희년을 선포하신 예수님이야 말로 진정한 빨갱이였고 가진 것을 다 내어놓고 함께 살았던 예루살렘 초대교회야 말로 빨갱이 집단이었습니다. 사실은 그래서 예수께서 로마의 십자가 형벌에 처형당하셨고, 초대교회는 핍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참 교회는 모든 이가 함께 잘 사는 평등사회를 추구합니다. 소수만 잘사는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아닙니다. 너와 내가 함께 잘사는 사회가 행복한 사회요 성숙한 사회입니다. 저는 을지로입구나 종각의 지하도를 지나갈 때마다 괴롭습니다. 거기에는 항상 몇 명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손을 벌리고 구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못 본채 지나갈 때마다 괴롭습니다.


        지금 이 남한사회는 소수의 사람들 상위 5%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부를 독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는 대를 이어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유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자의 자녀들은 아예 출발선에서부터 배제되고 있습니다. 말은 민주사회지만, 실상은 귀족사회요 왕족사회입니다. 수 천 년 전 중동에도 그런 사회가 있었습니다.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노예로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귀족으로 그 운명이 정해지던 사회가 있었습니다. 중동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당시의 인간사회가 다 그러했습니다. 이는 비극이었습니다. 고통의 소리가 하늘을 찌릅니다. 이에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놔두어서는 안 되겠구나. 모범이 되는 한 나라를 만들어 다른 나라들도 배우도록 해야 하겠구나. 그리 생각하시고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노예들을 불러내어 새로운 나라를 만들도록 하신 것입니다.


[야훼 하느님의 본래 의도]


        그리고는 모세를 통해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너희들이 이 약속을 지키면 너희들을 내가 영원토록 지켜주겠다. 그리고 주신 법의 기초는 평등사상이었습니다. 그래 권력과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다시는 귀족이나 왕족들이 나오지 않도록 법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왕이 있으면 권력이 생기고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니 아예 처음부터 왕을 세우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오직 야훼 하느님만이 그들이 섬길 유일한 경배의 대상이자 왕이었습니다. 그것도 하느님이 눈에 보이도록 상을 만들면 그걸 소유한 놈이 또 권력을 행사하니까 야훼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도 인간은 본래 호기심이 많은 동물이니 자꾸 볼라고 하지 아니겠어요? 그래 하는 말이 ‘하느님을 보는 놈은 그 즉시로 다 죽는다.’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당시 부의 핵심은 땅이었는데, 이를 50년마다 원래의 주인 가족들에게 되돌려 주도록 하여 땅의 대물림을 끊어놓았습니다. 야훼 하느님은 이 부분에 대해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 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 25장 23절)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족장 얘기에 땅 얘기가 자꾸 나오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땅 부자로 만들어주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땅은 본래 하느님의 것임을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그래 지금도 이스라엘의 땅은 개인이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국가로부터 빌려 쓸 따름입니다. 이게 본래 성서의 정신이고 기독교 정신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기독교의 장로라는 분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잠잠하던 땅 투기를 건설경기라는 이름으로 부추기는 반성서적이요 반야훼 하느님 곧 바알신의 정책을 세워가고 있습니다. 2주전에는 부동산정책을 내어 놓았는데 이게 모두 소수의 재벌들 땅부자 아파트부자들을 더 부자되게 하는 정책입니다. 이번 주에는 감세정책을 내어 놓았는데, 말은 서민들을 위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부자들을 위한 정책입니다. 일년에 2천만원 소득이 있는 사람은 겨우 4만원 혜택을 보고 1억원을 버는 사람은 99만원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였습니다. 게다가 전체 근로자의 50%는 본래부터가 세금을 내지 않는 저소득층이니 이놈의 감세는 결국 부자만 위한 정책입니다. 왜 그러면 이명박정부는 부자에게 자꾸 혜택을 주려고 하는가? 물론 부자들로 하여금 돈을 쓰게 해서 내수를 일으키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그러나 부자들이 돈을 국내에서 쓰나요. 외국으로 나다니고 차 가구 옷을 포함해서 모두 외제만 씁니다. 음식은 물론이고 먹는 물마저도 외제만 수입하여 먹습니다. 그중 알프스 물로 알려진 프랑스 에비앙만도 올해 판매양이 50억 원을 넘는다고 합니다. 백화점에 가면 조그마한 물 한 병에 2만원짜리도 있다고 합니다. 


[양극화 해결이야 말로 하느님의 명령]


        지금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오늘 성서의 말씀과 같이 날품팔이, 과부, 고아, 뜨내기의 인권이 보장되도록 그들의 아들딸도 부자들의 자녀들과 같이 미래를 향한 공평한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복지혜택도 늘리고 제도적인 법 규정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세금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더 늘려야 하는 것입니다. 가진 자들이 더 많은 것을 나눌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OECD 국가를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양도세 종부세 비율이 매우 낮고 남한의 복지는 매우 허약합니다. 복지 교육 의료 모든 부문에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북유럽의 나라들은 모두 우리보다 세금이 세배 이상 높습니다. 몇 년 전에 미국 정부가 경제활성화를 위해 부자들의 세금을 깎겠다고 정부가 발표하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부자들이 나서서 세금을 깎지 않도록 요구를 했습니다. 저는 우리 사회에도 이런 부자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 부의 공공의 책임성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고대합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부의 공공성을 알리는 의미에서 두 명의 부자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희년정신을 실천한 경주 최씨네]


        인터넷으로 저의 하늘뜻펴기를 듣는 경상도에 사시는 어떤 분이 지난 달 KBS에서 방영된 조선시대 최고의 부자 경주 최씨의 얘기를 보라고 해서 보았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이 시대에 부자들이 배워야 할 진정한 부자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집안은 12대에 걸쳐 400년 동안 전국에서 소문난 부자 집안이었습니다. 이 집안은 병자호란 때에 인조 왕을 도와 목숨을 바친 무사 최진립으로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부자는 남의 땅을 사서 이를 넓혀감으로 부자가 되는데 반해 이 최씨 집안은 관개시설을 개선하고 새로운 농법을 개발하여 생산성을 높여 소작인들과 함께 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가 보통 50년 길면 100년 기껏해야 3, 4대 내려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왕족이 아니면서 12대에 걸쳐 400년을 이어온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경주 최씨 집안이 400년 동안 부를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이웃이 잘 살아야 자신들도 잘 살수 있다는 집안 대대로 이어오는 부의 철학과 검소한 생활자세 때문이었습니다. 최씨 집안에 들어온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 한 벌만 주어졌습니다. 그래 헤어지면 이를 기어 입었습니다. 주위의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함께 겪도록 한 것입니다. 그럴 뿐더러 소작료는 다른 지주들에 비해 반만 받았고, 흉년은 부자들에게는 땅을 넓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흉년에는 절대로 땅을 구입하지 않았고 돈이 있어도 결코 만석 이상의 땅을 소유하지는 않도록 했습니다. 스스로 부의 한계를 정한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창고를 열었습니다. 이 때문에 전국에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 들었습니다. 하루에 백 명이 넘게 손님들이 머물 때도 많았지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독상을 차려 주었습니다. 사랑채가 다 차서 잠자리가 없게 되면 쌀 조금과 과메기를 주어 하인 집에 가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하인들은 그것으로 손님을 접대했고, 잠자리를 제공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집은 소작료를 면제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제시대를 만납니다. 이때에 12대 후손인 최준은 상해임시정부에 비밀리에 독립자금을 보냈고 그의 두 동생을 비밀결사조직인 대동청년단에 가입시킵니다. 이로 인해 본인도 옥살이를 하였고 임시정부의 간부였던 둘째 동생은 일제에 붙잡혀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해방 후 인재양성에 큰 뜻을 품고 전 재산 곧 선산과 자신의 살던 집을 포함하여 모든 재산을 송두리째 지금의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에 기부합니다. 지금 영남대는 어찌어찌하여 이병철씨의 손을 거쳐 현재는 박정희일가가 주인행세를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최씨 문중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지금도 매년 최씨 시조인 최진립의 제사를 드리고 나면 바로 직후 그 상을 마루로 내어와 전쟁터에서 함께 죽은 그의 몸종을 위한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 조선시대에는 양반이 상놈들에게 절을 한다고 해서 주위의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지금도 이 전통은 계속 지켜 내려오고 있습니다. 단지 부자 집안의 얘기가 아닌 많은 삶의 교훈들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 집안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예수의 희년정신을 누구보다도 앞서 실천하였습니다.


[희년정신을 실천한 유한일선생]


        또 다른 한 사람은 모범기업으로 얘기되고 있는 유한킴벌리의 전신인 유한양행의 설립자로 잘 알려진 유일한 선생입니다. 이분은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라 최씨 집안 마냥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쓴 독립지사였고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일제가 조선을 멸망시키려던 때에 기독교인 아버지의 권유로 10세에 미국으로 건너갔고 13세에는 박용만이 이끄는 한인군사학교에 가장 나이 어린 사람으로 참여하였고, 31운동 이후 서재필이 중심이 되어 모인 미주한인총회에 참석하여 독립결의문을 낭독하기도 하였습니다. 1942년에는 로스엔젤레스에 재미한인들로 구성된 무장부대 맹호군의 창설주역으로 비밀리에 활동하다 비밀 국토수복작전에 참가하였는데, 해방이 갑작스레 찾아오는 바람에 불발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유일한선생은 생전에 이에 대해 스스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업 활동을 했지만, 부동산 투기와 불로소득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개인 돈으로 건물을 사서 이용하다가 몇 년 후에 팔아 큰 차익이 생기자 노력 없이 생긴 돈에 당황하여 이를 사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습니다. 탈세를 하지 않았고 군사독재시대에 온갖 회유와 핍박에도 정치자금을 건네지 않았을 뿐더러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기업은 노동자의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주식을 액면가 10%의 금액으로 골고루 나눠주어 종업원지주제를 국내 최초로 실행하였습니다. 1971년 그가 남긴 유언장은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아들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는 말만 남겼고, 손녀에게는 대학졸업 때까지 학자금만을 주도록 하였고 딸에게는 묘소 주변 땅을 유한동산으로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고 나머지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였습니다. 그의 딸 유재라씨도 아버지의 희년정신을 본받아 평소에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돌보았고 남은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하였습니다. 경주 최씨 집안과 유한일선생은 모두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자들이었고 나라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재산을 모두 교육사업에 바쳤습니다. 저는 우리 사회에 이런 부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성서를 읽으면서도 정의를 추구하고 평화를 도모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경건생활은 강조하면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주라는 경제적 정의와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라는 사회적 해방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부동산법이 개정되고 세제가 개편이 되면 이것이 사회의 가난한 자들과 약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가져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내 월급과 내 재산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말라기서에 나타난 십일조 정신 그리고 예수님께서 처음 세상에 나오시면서 나자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희년정신 이는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임을 고백하고 우리는 이 땅에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로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가장 먼저 사랑하시는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삶이란 인간 혼자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만남 속에서 함께 만들어가는 합작품입니다. 인간의 삶이 거룩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 인간들을 필요로 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응답하는냐? 응답하지 않느냐? 그것은 개인의 결단에 달려 있지만, 이는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짓는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하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함이요 다른 하나는 그것을 손에 넣음이다. 후자야 말로 진짜 비극이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