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교육주일

두 가지 길

전도서11, 7- 12, 1; 마태오 6, 24-34


한  문 덕 목사


       


오늘은 교회학교 주일입니다. 교육부서가 예배를 주관하고, 유치부부터 청소년까지 모두 어른들과 함께 예배합니다. 평소에는 유아부, 유치부, 어린이부, 청소년부 각각 다른 장소에서 따로 예배하기 때문에 거의 만나볼 기회가 없다가 일 년에 한번 이렇게 전체가 모이게 됩니다. 이런 자리를 통해 우리 향린교회 교우들이 자라나는 우리 향린의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좀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뒤에 있는 한지공예로 만든 예쁜 등불은 청소년부가 지난 여름 수련회 때 만든 것이고, 1층 향우실에서는 유아부의 사진들이 전시되고, 오늘 예배 중에는 청소년들의 수련회 소감발표와 교육부서의 지난 교육활동을 영상으로 보는 시간이 있습니다. 교회학교 주일예배를 통해 향린에서는 어떤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지 알아보고, 우리 아이들이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올곧게 자라기 위해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교육부의 각 부서를 담당하시는 교육부 전도사님들도 챙겨주시고, 교육부 교사들에게도 수고한다는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향린교육에 열정을 가지고 교사로 봉사하겠다는 결단을 가지시면 더욱 좋습니다.

교회학교 주일을 맞아 향린의 교육이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 아이들을 부모로서, 신앙의 선배로서, 향린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동시에 교육은 사람됨의 가장 중요한 것이고, 죽음을 맞이해야 끝나는 것이기에 우리 자신들의 수양과 신앙성숙에 대해서 성찰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1873년,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한 수도원의 도서관에서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양피지 사본이 발견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디다케”로 알려져 있는 이 책은 제목으로 보았을 때, 열두 사도들의 교훈이 담긴 책자인 것 같지만 사실은 100년경 시리아 지방의 어느 시골 교회의 그리스도인이 편집한 규범서입니다. 이 책 덕분에 100년경의 작은 시골교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 책은 신앙의 지침과 교회 전례, 교회의 규범, 예수의 재림 등 교회 전승들을 모아 만든 교회의 규범서입니다. 그리고 이 규범서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생명으로 가는 길과 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두 길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δο? δ?ο ε?σ?, μ?α τη?????? ?ωη?????? κα? μ?α του θαν?του, δια?ορ? δ? πολλ? μεταξ? των δ?ο ?δων.)


우리교회도 교회의 운영과 활동에 관한 정관이 있고, 새 교우 강좌에서 향린교회의 평신도 목회에 대해 소개하면서 정관에 대해서도 함께 공부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새교우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향린교회의 역사와 목회에 대해 배우고, 자신의 삶과 신앙을 되돌아보고 향린교회의 한 일원으로 정체성을 가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100년경의 시리아 지방의 작은 교회에서도 이 규범서를 읽으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세워 갔을 것입니다. 이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길을 딱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생명으로 가는 길이요, 또 하나는 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런 이원론적 구분방식은 명확하고 단순합니다. 애매모호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 길을 말하는 것은 당연히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는 명령입니다. 당연히 생명을 택하라는 것이고, 또 누구나 생명으로 가는 길을 택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길이 생명의 길이고, 어느 길이 죽음의 길인가? 하는 물음이 이어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이 명확하게 나뉜다면 그리고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생명과 죽음은 단순히 생물학적 차원의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물학적으로는 모든 생명체는 죽음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만사를 생명과 죽음/선과 악/행복과 불행/아름다움과 추함 등등으로 구분하고 그 중 한쪽을 택하여, 한쪽을 좋아하고 다른 쪽을 배척하는 이원론적 윤리관은 동서고금에 널리 퍼져 있고 우리들 마음에도 자리 잡고 있지만, 사실 이 양 극단은 같은 동전의 앞뒷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옛 이야기는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통 죽음을 경험하면 누구나 슬픔에 젖게 마련이고 눈물이 흐르지만, 삶과 죽음이 동전의 앞뒷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장자는 자신의 아내가 죽었을 때, 북을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습니다. 향린교회에 탤런트 전지현씨가 출석하면 전지현씨를 보기 위하여 많은 남성 새교우들이 몰려오겠지만 어항의 물고기는 저를 보나 전지현씨를 보나 얼른 도망갈 것입니다. 선과 악/ 행복과 불행/ 아름다움과 추함/ 삶과 죽음은 이렇게 상황에 따라, 제각기 가지고 있는 기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은 선과 악/ 생명과 죽음의 문제를 나누어서 보고, 생명과 선을 해치는 죽음과 악의 문제에 민감하게 대응하여 왔고, 대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악과 죽음이 우리의 삶의 미치는 비극의 크기가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국전쟁과 지난 군부독재시절, 오늘날 이명박 정부가 보여주는 퇴행적 모습에서 악과 죽음이라는 비극의 비참함을 이미 경험하였고 또 경험하고 있습니다.

어느 길이 생명의 길이고, 어느 길이 죽음의 길이냐를 따지고 묻기 전에 이미 죽음의 길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들의 아픔 때문에 선과 악/ 생명과 죽음을 구분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죽음과 고통의 길에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는 이들이 바로 우리 어린이 청소년들입니다. 


잠시 동영상을 보고 설교를 이어가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초딩으로 산다는 것” [EBS 지식채널 e]


목회마당에도 썼지만 도스트예프스키가 “아이의 눈물 하나 흘리게 하는 대가로 천당에 가는 일이라면 차라리 천당을 거부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 한국의 교육 실태를 보면 우리 모두는 천당을 거부하고 먼저 아이들의 눈물을 닦는 일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입시 지옥은 아이들을 죽음의 길로 몰고 있습니다. 10대 후반기 청소년들의 사망 원인 첫 번째가 교통사고이고, 두 번째가 자살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학업 스트레스’와 ‘성적에 대한 교사와 부모의 꾸지람’이 자살 충동의 주된 원인이 되는 것은 한국 사회만이 갖는 특징입니다. 성적을 비관한 아이의 자살이나, 입시에 실패한 아이의 자살 소식을 듣고도 우리사회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실패자나 낙오자의 희생은 경쟁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죽음의 문화 속에서 아이들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향린교회의 아이들은 어떨까요? 향린 어린이부의 아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간단한 촌극으로 꾸며보았습니다. 잠깐 보시겠습니다.


장면 1 [성철이네 집]


성 철  :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엄마, 아빠! 부처님 오신 날부터 어린이날까지 5일간 재량 휴업일로
              학교 안가요. (두 손을 번쩍 올리며)대~한민국 만세! (갑자기 힘없이) 그런데 학교가면
               바로 시험 본대요~~~

아 빠  : 모처럼 놀이공원에 데려 가려고 했는데.... 시험공부 해야 한다니... 하긴 평일에도
             놀이터에서 노는 애들 보기도 힘드니...

엄 마  : 당신도 참! 요즘은 유치원 애들도 바쁜 세상인데 초등학생들이 놀 시간이 어디 있어요?

아 빠  : 그래도 애들이 놀아야지 어떻게 공부만 하나...

엄 마  : 놀아도 학원가서 놀아야지 놀이터에서는 못 놀아요.

아 빠  : 그게 무슨 소리야?

엄 마  : 친구들이 죄다 학원에 있거든요.

아 빠  :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우리 애도 그렇게 키워야 한다고?

엄 마  : 적어도 남들 하는 만큼은 해야죠. 그렇게 해 놓고 나서 특별한 것 더 시키더라도 ...

아 빠  : 그래도 주일은 지켜야지...

엄 마 : 어쩌면 우리 애들은 대학 들어갈 때까지 만이라도 근처 교회에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

해 설  : 우리 아이들이 사는 세상을 아이들이 만들었다면 과연 어떠한 모습일까요? 지금과 같은
              모습일까요? 우리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엄마, 아빠가 만든  세상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장면 2 [어린이부 예배실]

<1막>

윤선생 : 얘들아 6학년 형과 누나들이 예배시간에 엎드려 있으면 어떡하니

         똑바로 앉아서 예배드리자... 저 앞에 도현이는 바로 앉아있지 않니...

성  화 : 어제도 밤늦게까지 공부 했어요. 힘들어서 나도 모르게 ...

윤선생 : 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길래 그러냐?

성  화 : 저는 6학년이서 그런지 학교 끝나고 6시간을 더해요.

         다들 하기 때문에 안 할 수도 없어요.

경  준 : 저 4학년 애는 4시간 더할 거예요. 3학년은 세 시간 더하고요....

         엄마 아빠 따라서 교회에 왔지만 주일 날 만이라도 푹 쉬고 싶어요.

         교회에서라도 쉬어야 해요.

성  화 : 엄마 아빠 회의가 있고 봉사를 맡은 날이면 4시쯤 되어야 집에 가요.

         어떤 때는 주일날이 더 피곤해요. 일주일에 하루도 못 쉬잖아요.

경  준 : 어른들은 주5일 근무도 한다는데 아이들은 주5일 공부 없나요...

         안식일은 원래 쉰다는 뜻 아닌가요?

아이들 : 맞아요! 우리도 쉬고 싶어요.

해 설1 :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어려움이 많군요.

         교회가 먼 아이들은 한 시간 넘게 걸리고, 지각할 때도 있구요...

         엄마 아빠랑 집에 가 저녁밥 먹고 나면 졸리고.. 숙제도 해야 한다는데....

         집 가까이 있으면 동네 친구들과 놀 수도 있고, 컴퓨터나 게임도 하고,

         숙제도 빨리하고.... 좋겠지요.... 어린이들의 다른 경우도 보십시오.


<2막>

윤선생 : 얘, 성화야 넌 예배드리다 말고 어디 가니?

성  화 : 물 좀 마시게요. 엄마 아빠랑 시간 맞춰 오느라고 물도 못 마셨어요 

윤선생 : 빨리 갔다 와... 아니 너 경준이는 또 뭐 때문에 나가려하니

경  준 : 화장실이 급해요. 오늘은 전철로 오다가 늦어서 바로 예배실로 왔어요.

윤선생 : 빨리 다녀와라. 아니 달님이 너는 또 어디 가니?

달  님 : 핸드폰 좀 받게요. 오늘 친구들이랑 만나기로 했거든요...

윤선생 : 하필 예배시간에 핸드폰이냐? 아니.... 준철아... 너는 또 뭐하니?

준  철 : 아까 전철에서 하다만 게임 끝내게요....

윤선생 : (앉아 있다 벌떡 일어난다) 어유... 내가 악몽을 꾸고 있는지...미친 것은  아닌지.... (기도하
                는 손으로 이쪽저쪽 왔다 갔다 하며)주님, 저를 바로 세워 주십시오. 돌아버리겠습니다.
                 이 아이들 좀 바로 되게 해주십시오. 성령께서 어린이들과 부모들과 교사들의 마음속에
                 역사 하시어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키워주는 주일학교가 되게 해주십시오.

해 설  : 그런데 기쁘게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교사들에게 힘을 주는

         아이들도 많아요...  그 아이들을 살펴봅시다.


장면 3 [향우실]


짱  뚱 : 짱뚱아 우리 집에 갈 때까지 같이 놀자. 1층에서 숨바꼭질 하자

예  진 : 그래 좋아! 그 다음에는 술래잡기다.... 저기 언니들도 같이 하자고 하자.

짱  뚱 : 응 그러자. 그런데 예진아 너는 교회 다니는 게 좋아?

예  진 : 그래! 나는 예배 때에 찬양 드리는 것, 또 찬양 연습하는 것 제일 좋아..

         그리고 아빠 기다리면서 이렇게 신나게 놀 수도 있잖아.

짱  뚱 : 나도 교회 오는 것은 좋은데 집이 멀어 차안에서 좀 지루해.

         그래도 친구들 만나고 선생님 만나는 게 좋지만.

예  진 : (해죽해죽 웃으며) 차타고 오면서 끝말잇기 해 봐 시간이 금방 간다구.

         나는 일주일에 교회에 세 번 다녔으면 좋겠어.

짱  뚱 : 뭐라구?!! 널 누가 말리겠냐? 그래 세 번 다녀라 다녀!!(함께 웃는다)

민  수 : 야 너희들 뭐가 그리 재밌냐?  나도 좀 끼자.

짱  뚱 : 글쎄 예진이는 교회를 일주일에 세 번씩 다녔음 좋겠대.

민  수 : 나도 그런데. 난 주일 날 만 되면 선생님과 친구들이 보고 싶어서

         아빠 엄마보다 먼저 서둘러 대장노릇 하잖아.

예  진 : (웃으며) 그렇구나. 얘들아 너희들은 교회에서 뭐 할 때가 제일 좋으니?

민  수 : 교회에 오면 궁금한 것은 뭐든지 물어보고 마음대로 말할 수 있으니 좋지.

짱  뚱 : 맞어. 숙제나 시험도 없고 거기다 선생님이 가끔 시원한 아이스크림과

         짜장면도 사주시고 말이야.

민  수 : 친구들과 함께 분반공부 할 때 선생님이 쉽고 재미있게 가르쳐주시니까

         성경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잖아.

짱  뚱 : 그래 민수는 역시 대장이구나? 우리 얘기 그만하고 숨바꼭질 같이하자.

아이들 : 좋아, 시~~작!!!( 퇴장한다)

해 설1 : 잘 놀아야 잘 큰다고 하더니 역시 아이들은 신나게 놀면서 자라는 거죠.

         예수님이 누구보다도 사랑한 어린이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거나

         속상하게 하지 말고 어린이들의 든든한 그늘이 되어주어야겠어요.

         교회학교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세상 가치로부터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을 나누는 하나님나라의 삶터가 되어야겠어요.


향린 어린이들도 끝없는 경쟁을 요구하는 이 사회 속에서 아파하고, 힘들어 합니다. 그 여파로 교회에서의 예배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교회는 작은 위안이 되고 있네요. 교회 오면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 물어보고, 마음대로 말할 수 있으니 좋고, 숙제나 시험이 없고, 찬양이 있고, 친구들과 신나게 놀 수 있답니다. 어린이들에게는 교회가 작은 위안이 되지만 학년이 차츰 올라갈수록 교회의 예배에 나오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 교회는 그리고 우리 어른들은 어떤 교육을 해야 할까요? 교육은 교육대상자로 하여금 바람직한 행동의 변화를 유도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대상자를 훈련시키고, 학습시켜서 변화를 유도할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의 주위의 환경을 변화시켜서 원래 가지고 있던 놀라운 능력을 끌어 낼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해야 할 우선적인 것은 바로 우리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마음껏 나래를 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전도서의 말씀이 바로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린이, 청소년들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야 합니다. 자신들의 청춘을 즐겨야 합니다. 가고 싶은 데도 가보고, 보고 싶은 것도 보아야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대로 해야 합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가 되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하루하루를 신나게 살  줄을 알아야 합니다. 전도서 저자가 말하는 삶의 충만한 의미를 우리 어린이 청소년들이 느끼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교육에서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가 평화인데 함석헌 선생님은 “평화”의 “평”이라는 글자의 깊은 뜻을 설명하시면서, “막힌 기운을 뚫게 하는 것!”, “시원한 정신 상태”, “답답함이 없는 정신의 자유”라고 하셨습니다. 아침 7시에 등교해서 밤늦게 귀가하고, 과외와 학원을 다람쥐 챗바퀴 돌듯이 다니는 우리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무슨 평화가 있으며, “답답함이 없는 정신의 자유”가 있겠습니까? 생명의 약동력을 느낀 이들만이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고, 자신의 권리를 지켜내는 민주시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당함에 저항하는 용기 또한 자신이 하고픈 것을 해 보았던 경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향린교회가 우리 아이들에게 이러한 공간이 되고 있는지, 세심하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향린의 어른들과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자녀의 행복을 위해 충분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는지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향린교회 청소년부 아이들과 5년간 함께 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이 바로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과연 우리 청소년들이 자신들 마음대로 살고 있는가? 왜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의 행복을 지켜주지 못하는가? 아이들의 숨통을 조이는 방해물들을 하나씩 없애 주려고 노력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우리 아이들을 위해 가장 먼저 바꿔야 할 가장 중요한 교육환경은 바로 우리 어른들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중학생으로,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올라가면서, 신앙의 중요성보다는 학교와 학원의 수업과 과제가 더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신앙을 소홀히 하게 되는 아이들을 보면서, 저는 우리 어른들의 신앙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다수의 어린이, 청소년들은 어른들의 말씀을 듣고 배우지 않습니다. 어른들의 말씀은 한쪽으로 듣고 한쪽으로 흘려버립니다. 그 대신 어린이, 청소년들은 어른들의 행동을 보고 따라합니다. 곧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울입니다. 아이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어른들이 그렇게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향린교육과 우리 아이들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신앙입니다. 신앙은 그리스도교 진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와 전폭적인 신뢰 그리고 그에 따른 행동이 어우러진 상태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교 진리에 대해 얼마나 알고 동의하는가? 또 그 진리를 나의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여 삶의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 어린이 청소년들은 우리의 말을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보고 따라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고, 그것이 생명의 길이며, 그렇게 하였을 때 다른 모든 것도 곁들여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들은 하느님과 재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먼저 구해야 할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우선 안정적으로 먹고 입고 살아가는 문제에만 빠르게 대처하였습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나머지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되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은 잘 모르시는 말씀이라고, 낭만적인 생각이라고 치부하였습니다. 이웃을 향한 나눔과 섬김, 공동체를 위한 자기 부정과 희생보다 행복은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세상의 논리에 우리의 몸이 기울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 또한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흔들리는 갈대처럼 신앙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향린교회는 어느 교회보다 민주적이 되려고 노력하고, 인권과 민족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더 낳은 신앙으로 성숙하려고 노력하는 교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자리에서 옳은 말을 많이 합니다. 공동체의 무리 속에 묻혀서 거리로 나가 독재타도를 외치기도 합니다. 불의에 참지 않고 잘못되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냅니다. 이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몸에 평화와 정의와 민주가 익숙해지는 데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들은 아직 민주라든가 섬김이라든가 하는 가치들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타인의 무지와 탐욕과 불의에 민감해야 하지만 우리 자신의 무지와 탐욕과 불의에도 민감해야 합니다.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어느새 가부장적 권력을 행사하는 나의 몸에 대해 성찰이 필요합니다. 박노해 시인이 썼던 “이불 홑청을 꿰메면서”라는 시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불 홑청을 꿰메면서


박노해


이불 홑청을 꿰메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겆이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 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달라 물달라 옷달라 시켰다


동료들과 노조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 준 대로

아내를 야금 야금 갉아 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 근로자였었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표창장이

고양이 꼬리에 매단 방울 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허울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위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쳐지는 이윤추구처럼

나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투쟁이 깊어 갈수록 실천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 낸다


노동자는 이윤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 홑청을 꿰메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유교적 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칫하면 그 자체가 하나의 권력으로 작용합니다. 그리스도교적인 평등을 말하려면 이런 것도 세심히 살펴야 합니다. 올해 청소년부 여름수련회에서 “학교에서의 체벌은 필요한가?”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였습니다. 학교에서의 체벌을 반대하는 입장에 섰던 우리 교회 김명진 학생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때리면 그것은 폭력이고, 사람을 때린 가해자는 범죄자입니다. 그런데 왜 학교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때리면 그것은 폭력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청소년의 말에 깊이 공감했고, 우리 향린교회 청소년이 조리 있게 말하는 모습에 마음이 무척 흐뭇했을 뿐만 아니라 많이 배웠습니다. 혹시 제 자신이 어른의 이름으로 어린이나 청소년의 인권을 무시한 적이 없는지 살피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는 민주적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민주적 언어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을 못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이 판치는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향린의 어린이, 청소년들을 생명으로 이끄는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바로 첫째는 자신이 생명의 길에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이웃과 더불어 먹고 마시기를 즐겨하신 분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소홀히 여기신 적이 없습니다. 그의 기도문에서 인간사와 관련된 첫 기도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님을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먼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인간은  땅만을 바라보며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동물이 아닙니다.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있지만 언제나 하늘을 올려다보며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본향이 하늘임을 기억하는 이들입니다. 우리 어른들이 바로 예수님이 알려 주신 참된 인간의 길에 서 있어야 하고 생명 살리기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생명의 길에 선 뒤에  우리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교육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끝까지 믿어 주는 것입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어른의 눈으로 볼 때, 아직 미숙한 점이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그 미숙함을 벗고 성숙할 때까지 지지해주고 격려해 주면서 끝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 어른의 역할입니다. 올림픽으로 인해 국민들이 위로도 받고 흥분도 합니다만, 이번 올림픽에서 몇 가지 극적인 순간이 나왔는데 그것은 아마 일본과의 준결승전에서 보여준 이승엽의 역전 홈런이었을 것입니다. 축구에 국민스타 박지성이 있다면 야구에는 이승엽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런데 이승엽은 예선경기 내내 부진하였습니다(25타수 3안타). 그러나 김경문 감독은 그를 끝까지 믿어 주었고, 이승엽은 결국 좋은 결과를 내었습니다. 아마 이승엽이 좋은 결과를 내지 않아도 김경문 감독은 계속 4번을 주었을 것입니다. 연세대, 고려대 인맥으로 가득한 한국 축구에서 명지대 출신이고 땅딸만한 박지성이 세계적인 선수로 발돋움할 수 있게 한 뒤에는 히딩크 감독의 믿음이 있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교회학교 주일에 진짜 배워야 할 사람들은 유아, 유치, 어린이, 청소년부 학생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어른들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하고 우리가 잘 살아야 합니다. 과거의 배운 지식과 경험으로 함부로 미래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새로운 것을 민감하게 받아들여서 자기 것으로 삼는 우리 어린 새 인류에게 배워야 합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에 이르는 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죽음에 이르는 길입니다.”라고 시작하는 디다케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생명의 길은 이렇습니다. 첫째로, 당신을 만드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둘째로 당신 이웃을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시오. 또 무슨 일이든지 당신에게 닥치기를 원하지 않는 일이거든 당신도 남에게 하지 마시오.” 귀가 따갑게 듣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묻겠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며,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않는 사람을 눈이 따갑도록 본 적 있습니까? 없다면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됩시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길을 가셔서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가 우리의 선생님이시기 때문이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보았기 때문이며, 그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