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17일 오늘의 시대와 예언자 정신(10) 즈가리야

즈가리야 9:9-13, 마태오 25: 1-13


[즈가리야의 평화 신학]


        즈가리야서는 예언서의 하나이긴 하지만, 그 뜻을 풀이하기 힘든 8개의 환상 이야기가 담겨 있어 흔히 세상 종말을 상징적 언어로 설명하는 묵시문학의 범주에 포함하기도 합니다. 즈가리야 예언의 핵심은 바빌론 포로 이후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다윗 왕조 재건을 통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입니다. “그날이 오면 많은 민족이 야훼의 편이 되어 그의 백성이 되리라. 그가 너희와 함께 살리니, 너희는 그제야 나를 보내신 이가 만군의 야훼이심을 알리라. 야훼께서 다시 이 성전에서 유다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예루살렘을 당신의 수도로 뽑으시리라. 야훼께서 그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시리니 모든 사람은 그의 앞에서 잠잠하여라.”(2장 15-17절)


        그런데 다른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즈가리야의 예언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중흥을 얘기하지만, 동시에 역사의 주인은 야훼 하느님을 선포하면서 폐쇄적 민족주의 곧 자기 민족만을 생각하는 국수주의적인 태도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신들에게 많은 아픔을 주었던 아시리아, 바빌론, 그리고 페르시아와 그 이름만 달리했지 그 내용은 똑같은 또 하나의 제국의 탄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즈가리야 9장에 이르러 야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야훼께서 하드락 땅을 거쳐 다마스커스에 머물러 계신다. 이 아람의 수도도 이스라엘 모든 지파와 마찬가지로 야훼의 것이다. 국경도시 하맛도 그의 것이요 슬기가 뛰어난 띠로와 시돈도 그의 것이다.”(9:1-2절) 이스라엘을 둘러싼 주위 나라들이 모두 야훼의 것임을 선포하고 이어 대대로 원수관계로 살았던 블레셋 민족들, 에크론과 아스크론과 아스돗이 예루살렘의 여부스족처럼 한 족속이 되리라고 선언합니다.(7절) 사실 천년 넘어 조상 대대로 원수지간으로 살아온 족속들을 향해 자신들과 같은 족속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는 일은 너무나도 혁명적인 평화 선언입니다. 특히 우리와 같이 천년 넘어 한 민족으로 살아왔으면서도 지난 60년간의 반목과 질시를 깨지 못하고 원수 시 살아가는 분단 조국의 현실에 비교하면 이는 너무나도 놀라운 선언입니다.


        대대로 적으로 살아온 이웃 족속들과 하나가 될 것을 선언한 즈가리야는 이어 이렇게 외칩니다. “시온아 기뻐하여라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나귀를 타고 오시어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 군인들이 메고 있는 활을 꺾어 버리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큰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리시리라.(9장 9-10절)


        이는 예수님께서 생애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 입성을 예언한 말씀으로 복음서 저자들에 의해 인용되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평화의 축제 올림픽?]


        우리는 지난 주 국내적으로는 815 경축을 그리고 국외적으로는 올림픽경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특히 남한은 메달 순위가 처음에는 중국에 이어 2위에 머물다가 지금은 미국에 이은 3위 혹은 4위에 머물고 있어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가난한 나라들 특히 아프리카는 거의 메달을 따지 못하고 있습니다. 올림픽이 세계인들의 평화의 축제라는 처음 의도와는 달리 지금은 돈 많고 힘 있는 나라들의 국력 각축장으로 변해가고 있어 남한의 선전에 기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돈잔치로 보여 씁쓸한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동메달만 하더라도 세계 3위에 해당하는 엄청난 성적이건만, 우리 국민들은 지나치게 금메달 위주로만 기억하는 1등주의가 팽배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3월 티베트의 라싸에서 자유와 평화 그리고 티베트 문화와 전통의 생존을 요구하며 시위가 일어났고, 이 시위가 중국군대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되면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 티베트인은 말합니다. "올림픽은 지금껏 세계인의 축제로 자리매김해 왔고, 앞으로도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가 환호의 물결로 뒤덮인 그 순간에야말로 우리는 티베트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올림픽을 위해 4년간 노력해 온 선수가 금메달을 거머쥐는 순간에 느끼는 환희와 자유를, 60여 년 동안 티베트의 독립을 고대해 온 티베트인들도 똑같이 느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세계의 모든 이들이 보내는 박수갈채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세계인의 축제를 위해 인권이 말살된 티베트를 '잠시 잊겠다'는 얘기는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우리 또한 일제의 식민지 하에서의 올림픽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손기정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시상대에 올라야했던 그 민족의 비운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올림픽의 환호 속에 묻혀 있는 가난한 나라들과 소수민족들의 피맺힌 한의 소리에 대해 귀를 기울려야 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자유롭고자 한다면 타인의 억압된 자유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815와 반통일 반역사 MB정부]


        올해의 815는 공식적으로는 63주년 광복절과 60주년 건국절이라는 두 개의 명칭을 걸었지만, 대통령의 경축사에서 63주년을 맞이하는 광복이라는 단어는 두 번 말해진 반면 나라의 회갑을 강조하는 건국 60은 10번을 말함으로 일제하의 독립운동을 역사에서 배제시키는 반역사 반민족적인 파행의 길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야 3당을 비롯한 독립유공단체들은 정부의 행사에 참여를 거부하고 백범 김구묘소를 참배하며 광복절 행사를 따로 진행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명박 정부는 국민적 단합을 해치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건국절을 강조하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광복절에 초점을 두면 핵심적인 인물이 되지만, 건국절에 초점을 두면 역사에서 사라지고 마는 상해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다가 미군정에게 냉대를 당하고 1949년 국군 대위 안대희에 의해 살해당한 백범 김구선생의 외침을 들어보면 그 이유가 선명하게 들어난다고 봅니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이 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의 독립,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으로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여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61년 전 백범일지에 밝혀 놓은 글이지만, 여전히 조국을 향한 그의 외침은 한 치도 틀림이 없습니다. 힘이 센 나라들에 의존하여 기생하려는 일부 권력자들이 임시정부의 존재를 부인하고 광복절을 건국절로 둔갑시키고 나아가 친일절로 만들려는 반민족 반평화 반역사적인 참담한 현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나와 내 가족들만 잘 살면 된다고 하는 이기주의에 물든 남한 백성들은 이에 대해 별다른 위기의식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남한이 그간 이룬 기적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라고 장밋빛 선언을 외치지만, 그 어디에도 오늘로 68일째 단식을 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고 있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의 외침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의 남한 국민의 역사의식]


        역대 대통령 중 대통령직을 가장 잘 수행했는가를 묻는 질문엔 응답자의 56.0%가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고 국민의 입과 귀를 틀어막았던 독재자 박정희를 꼽고, 이명박의 지지율이 31%가 됐다는 여론 조사 결과는 우리 국민의 역사인식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공권력을 동원한 폭력이 우리들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고 민주주의의 생명인 언론이 공권력의 폭력에 희생당하고 있는 것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소리를 외치지 못하는 오늘의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잘 산다는 것을 단지 물질의 풍요로만 인식하는 천박성에 빠져 박정희 이명박 정부가 말끝마다 외치는 경제라는 단어에 혼이 빠져 있습니다.

 

        여기 다시 한 번 백범 김구선생의 외침을 듣고 싶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한다.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한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 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저는 광복절과 건국절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광복절은 세계가 함께 살아가는 높은 문화의 힘을 추구하고 있는 반면에 건국절은 미국을 좇아 돈과 무기에서 남을 누르고 앞서겠다는 제국주의적 사고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경축사에서 이명박대통령은 법을 어기는 행위에 대해서는 자신을 포함에 누구에게도 관용이란 있을 수 없음을 실천을 보이겠다고 선언했지만, 이는 정말 소가 들어도 웃을 얘기입니다. 그는 이미 중한 법을 어기고 사회적으로 커다란 물의를 일으킨 재벌 경제범죄인들에게 815특사라는 미명 아래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그것도 재판부가 마지못해 겉치레로 선고한 사회적 봉사 활동 시간마저도 채우지 않은 사람들을 말입니다. 자신을 포함해서라는 단어를 붙였지만, 불과 며칠 전에 자신의 사촌 처형과 청와대가 연루된 언니게이트도 수많은 의혹들을 남긴 채 단순 뇌물사건으로 처리되고 말았습니다. 범법자에 대해 관용을 베풀지 않으려면 먼저 대통령 자신이 저지른 10번이 넘는 위장전입과 유령회사 설립을 통한 대학생 자녀 월급 지급, 그리고 BBK 사기사건에 대한 고백과 회개를 먼저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자신의 더러운 과거는 묻어 놓은 채 관용이 없는 법치국가를 세워나가겠다는 말은 후안무치의 발언입니다. 본래 나라의 법은 통치자가 스스로 잘 지키면 법을 강조하지 않아도 국민들은 스스로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법과 독재 권력]


        역사를 보면 독재자들이 가장 즐겨 쓰는 말이 법을 바로 세우겠다는 말입니다. 일제시대에 통치자들이 가장 즐겨하는 말이 법대로 다스리겠다는 말입니다. 군사쿠데타로 문을 연 유신군부독재시대에 통치자들이 가장 잘 쓰던 말이 법을 바로 세우겠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법들을 새로 고쳐 맨다는 ‘유신’이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만들어 내어 정적들을 죽이고 양심 있는 교수들과 언론인들을 해직시키고 학생들은 빨갱이의 덫을 만들어 감옥에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로가 어떠했습니까? 한명은 술자리에서 자신의 심복이 쏜 총탄에 의해 쓰러졌고, 다른 두 명은 감옥을 가야만 했습니다.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있지만, 원래 뒤가 구린 사람들이 법치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이 말은 국민을 기만하는 속임수임을 우리는 지난 역사의 경험을 통해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관용을 베풀지 않겠다는 말은 곧 자신의 뜻에 반대되는 사람들은 모두 제거하겠다는 수사적 언어에 불과합니다. 언론장악을 위해 모든 권력을 동원하여 KBS 사장을 해임하다 못해 체포하고 자신이 저지른 쇠고기 파동의 외교적 잘못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모든 책임을 PD 수첩에 떠안기는 행위는 너무나 비겁하고도 치졸한 행위입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관련하여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일방적인 협정을 맺고서도 거기에 대해서는 일말의 사과도 없이 이를 비판하는 상대방의 작은 실수만을 찾아내 이를 침소봉대하고 공권력을 사용하는 일이야 말로 독재 권력의 전형입니다. 법은 권력가들의 입맛에 따라 마음대로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고무줄과 같습니다. 권력자들이 법에 호소하기 시작하면 그건 이미 그 정권이 말기에 다 달았다는 하나의 신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가장 먼저 들고 나온 것이 법입니다. 안식일법 정결법 할례법 제사법 그것도 모세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 법의 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불과 30년 후면 그 화려하고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 자체가 폐허 더미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이권과 욕망충족에만 사로 잡혀 로마에 충성하는 길이 유대민족이 잘 사는 길이라고, 세계화를 향해 가는 길이라고 민중들을 현혹하며 법을 외쳤습니다. 그들을 향해 세례 요한은 속은 시체 죽어가는 냄새로 그득하지만 겉은 그럴싸하게 꾸민 회칠한 무덤 같다고 비난했고 예수님은 낙타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내는 협잡꾼이라고 비난하셨습니다.


        이번 이명박대통령의 815 경축사에서 가장 바람직한 주장이 녹색성장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환경을 떠올리는 녹색성장을 얘기하기 전에 자신이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한반도운하개발은 포기하겠다는 대국민 선언을 먼저 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재벌건설업자들과 투기자본가들은 운하개발을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산을 뚫고 강바닥을 헤집어 전 국토를 부동산 투기장으로 만들려는 흑심을 품고 있으면서 녹색성장 운운하는 것은 국민을 호도하는 또 하나의 BBK 사기입니다. 요즘 정부는 촛불의 배후로 지목하여 여러 진보계열의 단체 지도자들을 마구잡이로 끌어가고 있습니다. 보수언론에 맞장구를 치면서 심각한 공안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6,7,80년대 박정희전두환노태우군사정권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냈던 간첩단 사건이 터질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명박정부가 시작한지 이제 6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조금 기다리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요? 목사님 너무 신경과민하신 것 아닌가요?


[기독인은 이 시대의 카타리나와 토끼]


        사실 어떻게 보면 구약의 예언자들은 당시로 볼 때는 너무 신경과민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다는데, 혼자서 민족과 국가의 위기를 말하고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그래 나라의 지도자들은 모두 싫어했고 대중들 또한 싫어했습니다. 권력자들은 예언자들을 붙잡아서 회유를 해보기도 하고 때로는 생명을 위협하며 잡아가두기도 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은 시대를 읽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지혜로운 농부는 잎을 보면 나무 열매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천박한 실용주의가 가져올 사회적인 양극화 그리고 이로 인한 개인허무주의와 한탕주의가 뻔히 보입니다. 미국의 들러리 역할이 가져올 국제정치의 몰락도 뻔히 보입니다.


        저는 누구나 조금만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우리면 이러한 위기의식은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땅속 깊은 곳에서 일하는 광부들은 카타리나라는 새를 옆에 두고 일을 했습니다. 공기 중 산소가 부족하면 가장 먼저 죽는 것이 이 카타리나이기 때문입니다. 카타리나가 없이 광부들이 일을 하다가 공기 중에 산소가 부족한 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그 때가 늦은 것입니다. 예전 잠수함을 타는 부원들은 토끼를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같은 이치입니다. 저는 우리 향린인들이 바로 이 카타리나나 토끼와 같은 민감한 역사인식과 사회의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는 길이고 그래야만 내가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한 몸의 안일과 평안을 추구하셨다면 결코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필요는 없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오복음서 25장에 나타난 열 처녀의 비유 또한 이러한 위기의식에 대한 비유인 것입니다. 예전 유대시대에는 신랑이 도착하는 날이 불분명했습니다. 달빛이 환한 보름에 온다고는 했지만, 멀리서 오니 며칠이 걸릴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여기 신랑을 맞이하는 열 처녀가 있었습니다. 여기 다섯 처녀는 신랑이 낮에 도착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다섯 처녀는 밤에 올지도 모른다며 등불을 켤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신랑은 밤에 도착했습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던 처녀들은 기름을 나누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말합니다. “우리 것을 나누어 주면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다 모자랄 터이니 너희 쓸 것은 차라리 가게에 가서 사다 쓰는 것이 좋겠다.”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은 지혜로운 처녀들만 데리고 혼인 잔치에 참여하였다는 얘기입니다.


[시대의 파수꾼이 되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등잔의 기름을 저는 자신의 삶과 이 사회를 바라보는 위기의식이라고 해석합니다. 단추를 잘못 끼었으면 바로 풀고 바로 다시 바르게 끼어야지 일단 끼던 거니까 다 끼고 보자 하여 끝까지 갔다가 그제서야 매었던 단추를 다시 풀어 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도 그리하는 것이 통탄한 일이거늘 한 국가나 민족 전체가 그런 길을 간다면 그것이야 말로 파국입니다. 조선 말기에 일본이 조정을 돕겠다고 군대를 파견했을 때, 우리는 이미 그 야욕을 눈치챘어야 했습니다. 미국이 동아시아 평화를 이유로 군대를 계속 주둔시키고 군사기지를 확장시키고 사격장을 넓혀달라고 요구할 때, 10년 20년 후에 그것이 가져올 국가적인 위기를 눈치채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인들은 예수님을 따라 이 시대의 위기의식을 먼저 읽어내고 이에 대처해야 합니다. 물론 이는 힘든 일입니다. 남에게 비난을 받아가며 앞장서서 움직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몸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촛불의 역할이고 자신의 몸을 녹여 부패를 막는 소금의 역할이며 자신의 몸을 썩혀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밀알의 역할입니다. 초와 소금과 밀알이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직분을 망각한 일종의 죄악입니다. 기독교인은 세상 사람에 앞서서 세상 사람들이 당할 그 위기를 미리 앞당겨 느끼고 알리는 시대의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히틀러 나치 정권에 저항했던 마틴 니묄러 목사님이 쓴 <전쟁책임 고백서>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나찌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프카니스탄에 침묵하고 이라크에 침묵하고 티베트에 침묵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문제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기륭전자 비정규 노동자들이 당하는 고통은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비켜 가면 그것이 바로 나의 문제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만든 흑표라는 전차가 외국에서 호평을 받아 수출계약을 맺었다는 기사를 보면서 고민합니다. 분명 그 전차는 누군가를 죽이는 무기로 사용될 터인데, 돈 얼마를 벌겠다고 고기 몇 점을 더 먹겠다고 무기를 팔아먹는 이 나라에 국민으로 아무런 죄의식이나 위기의식 없이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 정당한 일일까?


        저는 지난 2년 전에 평택 미군기지 근처 논두렁에서 주민들과 함께 있다가 다른 사람이 붙잡혀가는 것을 가로막다가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3일 구류를 산 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지난주까지 계속 재판을 받아왔습니다. 지난 2년 동안 대여섯번 법정에 출두를 했습니다. 지난 월요일에 120만원의 벌금을 받고 바로 항소를 한 상태입니다. 당시 같이 붙잡혔던 20명의 평화활동가들과 함께 재판을 받아 왔습니다. 모두 50만원에서 150만원까지 벌금형을 받았는데, 저는 판사가 너무 부조리하게 재판을 진행하여 항의를 한 적이 있는데, 괘씸죄가 첨가되어 다른 사람에 비해 많은 벌금을 받았습니다. 저야 벌금을 얼마든지 낼 수 있지만, 함께 벌금형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하루하루를 일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노동자들입니다. 그날 우리들이 붙잡혀간 날은 대규모의 집회가 있었던 날이 아닙니다. 불과 수십명의 나이든 주민들과 수십명의 평화지킴이들이 수로를 막기 위해 포크레인을 앞세운 수천명의 무장 경찰병력과 마주섰던 날입니다. 아무런 폭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갔고 구류를 살았고 2년간에 걸쳐 재판을 받았고 거기에 벌금까지 받았습니다. 촛불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가 선량한 시민들이자 하루하루 일해 먹고사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만 카타리나와 토끼와 같은 위기의식을 느꼈던 사람들이며 등잔에 기름을 준비했던 사람들입니다.


        평화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즈가리야가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고 군인들이 메고 있는 활을 꺾어 버리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고 할 때, 나는 그저 구경만 하면 되는 것인지?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나는 길가에 서서 종려가지를 흔들며 환호만 하면 다 되는 것인지? 예수께서 원하시는 일이 과연 그것뿐인지 자주자주 생각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