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일 오늘의 시대와 예언자 정신(9) 오바디야

오바디야 1:1-4; 마태오 7:13-14


        오늘은 우리 교회가 속한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와 일본 기독교단 동경교구 북지구에 속한 교회들이 정한 동아시아 평화주일입니다. 서울노회와 동경의 북지구는 8년 전 에 교류를 시작하며 특히 동아시아의 평화에 초점을 맞춰 여러 연대활동을 하여 오고 있습니다. 8월 첫 주일인 오늘 이를 위해 함께 예배드리기로 하였고 2주후 동경에서 진행될 한일청소년연합수련회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 한국과 일본은 인접한 국가로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운명적 관계 속에 있습니다. 근세 백년의 역사 속에서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대륙침략의 야욕을 꿈꿔 이루 말할 수 없는 인명의 살상과 재산 피해를 가져왔고, 그 여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교과서문제와 독도 영유권 주장 등으로 우리 사회를 소란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과거사 청산 문제는 우리 안에 이념논쟁으로 계속 남아 있습니다. 엊그제 30일에는 뉴라이트 계열의 서울대 경제학과의 이영훈교수의 특강을 자격증 연수를 위해 참가한 교사들이 집단적으로 거부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이는 그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시켜 이는 일본이 한국을 문명화시켰다고 얘기하고 광복절 대신 건국절을 주장하여 독립운동을 역사에서 배제시키는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야스쿠니 신사의 한국인 무단합사 철폐를 요구하는 법정 투쟁에 참여하며 평화교육을 위한 일본방문을 앞두고 상명대학교 고경일교수님과 학생들이 기금 마련을 위해 커리카쳐 행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우리 안의 평화의 문제는 단지 우리 국내만의 문제가 아닌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와 깊게 연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약하나마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를 성서의 평화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쌍둥이 민족: 유다와 에돔]


        오늘 우리가 읽은 오바디야 예언자의 글은 단 1장으로 되어 있는 구약성서에서는 가장 짧은 책입니다. 그런데 이 한 장의 내용은 거의 대부분이 에돔 사람에 대한 신탁의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에돔 사람들은 유대 남동부 곧 사해 건너편 지역에 살던 사람들로 유대와는 오랜 적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보면 에돔과 유대민족은 쌍둥이 형제인 에사오와 야곱의 후예들입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불화가 생깁니다. 에사오는 형으로서 장자의 축복권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배고픔을 이용한 야곱의 꾀에 넘어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먹고 맙니다. 그래서 흔히 에사오는 세상 물질 욕망에 눈이 어두워 영원한 생명을 팔아먹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에돔이라는 말은 ‘붉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여기에는 팥죽이 붉은 색이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고, 그들이 사는 산악지대의 산색깔이 붉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에돔은 주전 13세기부터 하나의 왕국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당시 북방과 남방을 연결하는 ‘왕의  대로’가 에돔의 중앙을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생기는 통행료가 국가수입에 대단한 몫을 차지했습니다. 출애굽 당시 모세는 이 왕의 대로를 통해 에돔 땅을 지나가기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왕국과 에돔왕국은 조상들의 형제갈등을 넘어 민족적으로도 반목관계를 형성합니다.


        다윗왕 때에는 유다민족이 에돔을 정복했던 경우도 있고 반대로 에돔은 바벨론과 함께 예루살렘 성을 멸망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유대 마카비우스 독립운동 시대 때에는 에돔 땅에 살던 이두메족을 크게 무찔렀던 적이 있었지만 이 반란을 잠재운 로마가 첫 번째 총독으로 유다인들이 혐오하는 이두매사람 안티파텔을 임명합니다. 그의 아들이 예수님 당시 유대를 철권으로 지배했던 그 유명한 헤롯대왕입니다. 유다와 에돔은 형제나라이면서 실제는 원수 관계에 있었습니다.


        오바디야의 예언은 1절 처음부터 에돔에 대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주 야훼께서 에돔에 선고를 내리신다. 자 일어나 에돔으로 쳐들어가자 나 이제 너희를 세상에서 가장 못난 나라로 만들어 가차 없이 멸시를 받게 하리라.”(1-2절) 그런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한동기인 야곱의 후손을 무참히 죽인 죄로 너희는 치욕을 당하고 영영 망하게 되었다. 오랑캐가 예루살렘 정문을 부수고 밀려 들어 약탈하여 서로 나누어 가지던 날, 너희는 도와  주기는커녕 도리어 한통속이 되었다. 동기인 유다가 재난을 당하는데, 너희는 고소하게 여기고 유다 백성이 망하는데 흐뭇해하며 몸을 뺄 수 없는 궁지에 몰리는데, 마구 입을 놀려대는가 하면 내 백성이 참변을 당하는데 오히려 그 성문으로 밀려들어 ‘잘도 고생하는구나’ 하며 고소해 하고 처참한 일을 당하는데 그 재물에 손을 대며 너희 동기들이 도망치는데 길목을 지키다가 쳐죽이며 몸을 뺄 수 없는 궁지에 몰리는데 겨우 살아남은 자마저 남의 손에 팔아넘기니 너희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 너희가 저지른 만큼 너희는 당하리라.” (10-15절)


[쌍둥이 나라: 한국과 일본]


        어떤 점에서 한국과 일본은 유대와 에돔마냥 쌍둥이의 나라입니다. 우선 언어에 있어 그 구조가 같은 알타이어 계통이고 핏줄로도 같은 몽골리안 계통입니다. 교류도 많고 전쟁도 잦아 피가 많이 섞여 있습니다. 그래 외국사람이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을 구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수십만 년 전 빙하시대에는 한반도와 일본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쌍둥이의 나라입니다.


        그렇지만 이웃에 위치하고 있는 관계로 친목보다는 반목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이조 수백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일본은 계속 우리나라를 침범하였습니다. 일종의 해적단과 같이 남해의 해안지역 마을을 급습하여 재물을 빼앗고 여인들과 어린이들을 납치하였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왜란을 통해 한반도 지역 전체를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 35년동안 우리를 힘으로 정복하여 식민 지배통치를 하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였지만, 결과적으로 패망의 책임은 일본이 지지 않고 결국 우리가 지게 되어 우리나라는 남과 북으로 분단이 되는 비극을 겪으며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습니다. 분단으로 인한 폐해가 얼마나 큰지 이루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일본은 핵폭탄의 피해를 이용하여 세상 사람들은 일본을 전쟁의 침략국이 아닌 전쟁의 피해국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요즘도 6자회담을 보노라면 가끔 화가 치미는데, 일본은 북한과 미국이 가까워지려는 것을 방해하며 일본인 납치문제를 꺼냅니다. 도대체 일본이 그간 한반도에서 행한 그 모든 포악한 행위들, 곧 국토를 유린하고 북한 전 주민을 납치한 식민지지배를 회개하지 않는 그 뻔뻔스러움에 분노가 치밉니다. 독도영유권주장도 그러합니다. 일본 식민지 시대를 제외하고 독도가 자기들의 땅이었던 적이 언제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자국의 양식 있는 학자들마저 독도는 우리 땅임을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틈만 나면 이 문제를 들고 나옵니다. 그 뻔뻔스러움에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지금 일본은 세게 경제대국 중 하나입니다. 일본은 패망 후 거의 경제성장의 희망이 끊어져 있었는데, 한국전쟁으로 인한 특수경기를 통해 지금의 경제성장의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의 근면성에 경제부흥의 근거를 얘기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흘린 피를 통해 부강을 이룬 나라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일본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좋게 볼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궁극적으로 보면 적대시할 적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할 나라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저는 일본은 모두 3번을 가보았습니다. 한번은 15년 전에 동경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갔었고, 두 번째는 4년 전 바로 서울노회와 북지구교회와의 선교협의차 갔었고, 3번째는 2년 전 서울노회 통일사회부 평화기행으로 오끼나와를 다녀왔습니다. 일본의 극히 일부분만을 본 것에 불과합니다. 일본에 관련해서는 몇 권의 책을 본 적은 있습니다만, 피상적인 지식에 불과합니다. 하늘뜻펴기를 준비하면서 이원복교수가 만화로 풀어쓴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 두 권을 구입해서 보았습니다. 만화로 되어있지만, 그 내용이 충실하고 매우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더군요.


[한국과 일본의 차이]


        영국이나 불란서는 이웃나라이면서 다른 점도 많지만 기독교를 믿는 나라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고 하구한 날 쳐들어가고 침략당하는 동안 어느 정도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한국과 일본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아주 쉬운 예로 우리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동시에 쓰지만 일본은 젓가락만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젓가락도 놓는 방식이 달라 우리는 상하로 놓지만, 일본은 옆으로 놓습니다. 의식주에도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옷을 보면 한복은 치마가 끝이 넓게 퍼진 반면 일본여서의 기모노는 폭이 좁아 걷는 모양새가 다르고 그 모양새는 결국 여성들의 가정과 사회의 역할을 다르게 합니다. 방바닥도 우리는 온돌을 놓아 뜨뜻하게 하지만 일본은 습기가 많아 짚으로 만든 다다미를 깔고 삽니다.


        한국 사람은 밥을 풀 때는 그릇에 넘치게 푸지만, 일본 사람은 그릇에 반이나 될까하는 정도로 풉니다. 음식도 우리는 맵고 짜게 먹는데 반해 일본 사람은 매우 싱겁고 달착지근하게 먹습니다. 우리는 뜨거운 국물을 좋아하지만 일본은 미지근한 미소국을 먹습니다. 찌게는 우리는 가운데 놓고 여러 사람이 먹지만 일본 사람은 서양 사람과 같이 음식을 가운데 놓고 여러 사람이 함께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대인 관계에서도 한국사람은 직선적이고 솔직합니다. 반면 일본사람들은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말이 있듯이 겉으로 하는 말과 속으로 하는 말이 다릅니다. 그런 면에서 일본 사람들은 미국사람들과 닮았습니다. 겉으로는 아주 친절하고 매우 공손합니다. 그러나 속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는가 조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국과 일본이 무력에 기초한 국가라는 점에서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침범한 유럽인들은 그곳에 살던 수백만의 인디안들을 죽이고 미국을 건설했습니다. 폭력 위에 평화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기독교국가이지만 폭력을 정당시하는 문화가 그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총기 소유가 법으로 보장된 나라입니다. 미국인 한 사람당 평균 3개의 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미국사람 집을 방문하면 우리가 도자기를 수집하여 전시하는 것 마냥 총을 수집해 놓은 집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은 어떠합니까?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릴 정도로 유교의 예에 기초한 선비의 나라입니다. 반면 일본은 사무라이가 지배하던 나라 곧 칼이 지배하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총과 칼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 대화를 직선적으로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만약 상대방에 대한 적의를 그대로 드러내게 되면 이는 곧 상대방의 모욕이 되고 이는 총 혹은 칼에 의한 결투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미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은 매우 기분이 나쁜 경우에도 그리 심한 욕을 하지 않습니다. 심한 욕을 하게 되면 그건 바로 죽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화가 나도 그 화를 표현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큰 욕이 바보(바카)와 짐승(칙쇼) 정도입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아무리 격한 감정이 일어나도 총과 칼이 근처에 있지 않기에 그대로 드러내고 싸우게 되고 때로는 주먹질을 하게 됩니다. 말이 격해지면 내가 너 죽이고 말겠다고 하지만, 이것은 말에 그치고 맙니다. 미국에서 유학생들이 화가 나서 한국식으로 ‘I kill you.'라고 말했다가는 큰 곤욕을 치룹니다.


        요즘은 덜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자동차 접촉사고가 나서 서로 삿대질을 하고 큰 소리로 싸우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미국 같으면 총을 차에 갖고 다니는 경우가 많아 살인으로 번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사람과 일본사람이 겉으로는 매우 친절하지만, 속을 드러내지 않는 민족이 된 그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총과 칼이라는 폭력문화가 그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근세 백년의 역사 속에서 일본에 이어 미국이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나라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 또한 어쩔 수 없이 그들이 폭력성을 닮아가고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일본인의 특성]


        일본인의 특징은 남의 것을 모방하고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음식에서도 돈까스 고로께 카레라이스 같은 것이 외국 음식을 일본화 시킨 것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등이 다 이런 식입니다. 정치는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천자를 모방하여 왕의 칭호를 덴노(천황)으로 바꾸고 중국식 국가 제도를 그대로 본떴고 중국의 한자를 받아들이되 이를 자기 식으로 개조하여 가나글자가 나왔고 경제 또한 서양식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재벌이라는 서양에 없는 공룡을 만들어냈습니다. 우리의 재벌은 이 일본을 본 딴 것입니다. 종교 또한 그러하여 본래 고유종교인 신토(神道)가 있었지만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교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불교는 매우 다릅니다. 이렇게 남의 것을 모방하다 보니 일본은 없다라는 말도 나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의 어린이교육은 한 민족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어머님들이 자녀들이 학교에 갈 때 자주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학교에 가면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과 복종을 가르칩니다. 유대인 어머니들은 뭐라고 말할까요? ‘모르는 것이 있으면 손들고 물어봐라.’ 배움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미국사람들은 특별히 하는 말은 없지만, Have a good day! 하니까 재미있게 놀다 와라 그런 정도입니다. 반면 일본 어머니들은 뭐라고 얘기할까요? 일본 어린이교육 1장 1절이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입니다. 저녁 때 친구 집에 가서도 그 집에서 밥을 먹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 신체적 접촉을 매우 꺼립니다. 여러분도 자주 경험하시겠지만, 극장이나 비행기의 좌석에 팔걸이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런 경우 한국 사람들은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얼마 전에 KTX 기차를 탔는데 제가 먼저 앉아 있었는데 후에 30대의 젊은 친구가 자리에 앉자마자 양쪽 팔걸이에 손을 턱 얹는 것입니다. 사실 엄격히 말하면 그 팔걸이의 반쪽만 자기 것입니다. 그래 은근히 화가 치밀어서 제가 제 팔굼치를 뒤의 빈공간에서부터 살살 집어넣어 성가시게 해서 밀어낸 적이 있습니다.


        몇 년 전 일본기차 여행 중에 이를 알아보기 위해 기차 첫 칸부터 끝까지 한번 죽 걸어보았습니다. 90% 이상이 팔을 얹지 않아 비어 있습니다. 팔을 얹고 있는 경우는 부부사이이거나 가족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기차에 타보면 거의 대부분 팔을 얹고 있습니다. 사실 이는 혼자 의자에 앉을 때는 팔걸이가 되지만, 기차와 같은 공공의 경우에는 양쪽 의자의 경계선이지 팔걸이용이 아닙니다. 심한 경우에 어떤 사람은 발을 쩍 벌리고 앉아 저의 영역 안으로 무릎을 집어넣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만 더 얘기하지요. 제가 오키나와를 갔을 때, 한 젊은이가 길 한모퉁이에 서서 담배를 피고 있는데 개인용 재떨이에 재를 털고 꽁초를 그곳에 담아 주머니에 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길을 가면서는 물론이고 실내에서도 담배를 마구 펴댑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습니다. 길을 무심코 가다보면 담배 연기가 제 얼굴로 한꺼번에 몰려 오는 경우도 있고 담배불에 손이 스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길에다 꽁초를 버리는 것은 예사이고 심지어는 차 운전 중에 불을 끄지 않은 채 그대로 창밖으로 내 던져 따라오던 뒤차 창문으로 들어가 교통사고를 유발하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저는 담배는 기호식품으로 보지만 담배를 피울 때는 이런 예의는 지켜야 한다고 봅니다. 지하철에서 신문을 읽을 때, 우리는 신문을 크게 펴서 읽지만, 일본사람은 신문을 접고 접어 책 크기로 만들어 읽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태도는 우리가 분명 배워야 좋은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인의 종교성]


        동아시아에서 유교가 한국과 중국에서는 꽃을 피웠지만 유독 일본만은 유교가 발달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유교란 충효를 바탕으로 위계질서를 중히 여기고 군주에 대한 절대 충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충성을 바쳐야 할 군주는 바로 왕 한 사람뿐인데, 일본에는 명목상의 통치자인 덴노라는 천황과 실질적인 통치자인 쇼균이라는 장군이 있었기에 공자 맹자 운운 하다가도 결국은 덴노의 말씀을 따르라는 이상한 결론으로 가고 맙니다.


        지금도 일본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세계에서 가장 앞선 선진국의 하나이지만, 위계질서가 분명하고 윗사람에게 복종하는 일본인 본 모습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역사에는 한 번도 민중혁명에 의해 정권이 무너진 적이 없습니다. 419학생의거 5월의 광주항쟁 610항쟁이나 최근의 촛불집회 같은 것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물론 많은 민중봉기가 있었지만, 이는 굶주림과 착취에 견디다 못해 들고 일어나 지배계층의 잘못을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었지, 프랑스의 대혁명이나 러시아나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같이 정권자체를 뒤엎고자 하는 민중봉기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일본의 문화와 종교를 이해하고 야수쿠니 신사 문제를 보면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야스쿠니 신사]


        야스쿠니 신사는 도쿄[東京]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전국 8만여 개에 달하는 일본신사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큰 신사입니다. 야스쿠니는 말 그대로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즉 호국신사이자 황국신사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몰자를 호국의 영령 곧 신으로 제사하고, 여기에 천황의 참배라는 특별한 대우를 해줌으로써 전쟁 때마다 국민에게 천황숭배와 군국주의를 고무, 침투시키는 데 절대적인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 일본의 젊은이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전쟁터로 떠났을 만큼 모든 가치의 기준을 천황에 대한 충성 여부에 두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1947년 일본은 신헌법에서 정교분리를 규정한 뒤에도 야스쿠니신사가 종교시설이자 전몰자 추모시설임을 인정하였고, 1960년대 말부터는 야스쿠니신사를 국가의 관리 아래 두자는 법안을 계속 제출하여 오고 있습니다. 비록 여론에 밀려 번번이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갈수록 이러한 주장들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1978년에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비롯한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합사되는 일이 발생하자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일본의 보수 우파 세력은 'A급 전범은 연합국이 일방적으로 규정한 것일 뿐, 일본 국내법상으로는 범죄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등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부채질하였습니다. 1985년에는 나카소네가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참배하였고, 2001년에는 고이즈미 총리가 참배하여 국제적인 비난이 되고 있습니다.


        현재 야스쿠니신사에는 총 246만여 명의 전몰자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고, 그 옆에는 유슈칸이라는 박물관이 있어 대형 함포 등 각종 병기, 자살특공대인 가미카제[神風] 돌격대원의 동상, 군마와 군견의 위령탑, 군함과 전투기 등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쟁 유물과 전범의 동상 등 10만점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전시되어 있고 수많은 군인들의 사진을 붙여 놓았습니다. 전체를 다 살펴보려면 한나절이 걸리는 박물관이지만, 그 어디에도 전쟁으로 인한 참화의 모습이나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는 야스쿠니신사의 상징인 흰 비둘기가 평화를 의미하는 것과는 반대로 이 전시물들은 전쟁을 미화하고 전쟁의 죽음을 영웅화시키고 신격화시키고 있어 실제는 전쟁을 촉구하는 전쟁박물관입니다. 이 박물관 마지막 출구에는 아주 큰 글씨로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당신은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전쟁에 참가하여 일본 천황을 위해 죽어서 그리고 신이 되라고 촉구합니다. 저는 그 글귀를 보면서 온 몸에 소름이 끼쳐 왔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인 합사는 분명 철회되어야 합니다. 당시 본인과 가족들의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을 뿐더러 그들이 2차대전을 일으킨 A급 전범들의 공범자가 결코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와 신사 쪽은 문제 해결에 나서기는커녕 합사된 한국인의 명단조차 공개하지 않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일본 안에는 평화를 원하는 국민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그러하듯이 일본도 점차 국수주의자들인 우익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일본 정치인들은 겉으로는 평화를 말하지만, 속으로는 전쟁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혼네와 다케야마의 정치를 펴고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최근 남한의 뉴라이트 운동은 일본의 우익단체인 ‘새로운 역사교과서 만드는 모임’에 협력하여 (1) 중국·동남아시아의 일본의 전쟁을 구미·러시아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었고 (2)‘종군위안부’ ‘남경대학살’은 없었고 (3)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서 일본의 아시아 침략이라는 말을 빼는 일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러한 일본의 우익세력들은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일본의 재무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오바디야는 유대의 이웃나라이자 쌍둥이 국가인 에돔의 심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편협한 국수주의가 아닙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야훼 하느님은 단순히 유대민족의 구원에만 관심하는 분이 아니신 이 세계의 모든 민족의 구원에 관심하시는 분이심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와 국적을 떠나 이 세상의 모든 압박받는 사람들의 아픔의 소리에 관심하시며 자유와 정의를 세워나가시는 분이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좁은 길]


        예수님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며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다고 말씀하십니다. 멸망의 문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입니까? 멸망은 곧 사망이며 인간의 집단적인 사망은 전쟁을 통해서 옵니다. 이 세계는 백년 사이에 두 번의 커다란 전에 큰 전쟁을 치렀고 우리는 일본의 의해 이 전쟁에 휘말렸고 그리고 해방 5년도 되지 않아 남북전쟁을 치렀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우리는 심각한 분열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점점 호전적이 되어갑니다. 왜 사람들은 인간이 인간을 살해하는 전쟁을 지지하는 것입니까? 왜 사람들은 얄팍한 애국심과 국수적인 민족주의에 매몰되어 전쟁을 지지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단지 다국적 기업들과 군수산업이 말하는 돈의 유혹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적들에 대해 갖고 있는 뿌리 깊은 두려움 때문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하느님, 생명의 하느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그렇게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성서가 진리의 길로 고백하는 비폭력과 사랑 대신에 돈과 무기의 힘을 더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에 이르는 좁은 길을 걸어갈 때, 마치 우리는 멸망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우리가 멸망에 이르는 넓은 길을 걸어갈 때는 우리가 생명을 향해 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수천 수백만명이 틀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수가 옳을 것이라고 하는 수자논리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정부가 잘못을 범할 리가 없다고 믿는 맹목적이고 무비판적인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그의 짧은 생애를 통해 대중들과 반대되는 길을 걸었습니다. 인기에 영합하여 세상 지도자들과 손을 잡는 힘에 기초한 평화의 길이 아닌 비폭력에 기초한 평화의 좁은 길을 택하시었습니다. 세상 권력가들은 그를 귀신들렸다고 말하고 체제를 뒤흔드는 선동가라고 비난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를 부활토록 하셨습니다. 이는 좁은 길의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전쟁과 제국의 폭력에 저항하여 생명을 선택하고 평화를 선택하고 비폭력의 길을 택하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평화의 길을 기억하며 동아시아의 평화주일을 맞아 기장의 서울노회와 동경교구 북지구교회가 함께 작성한 [평화의 공동기도문]을 읽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