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20일 오늘의 시대와 예언자 정신(8): 나홈. 스바니야

스바니야 3장 1-7절; 루가 9장 1-9절


        12명의 소 예언자들 가운데 바벨론 포로 직전의 유다 사회의 문제를 다른 세 명의 예언자로는 하박국, 나홈, 스바니야가 있습니다. 이들이 남긴 예언은 우연히도 모두 석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언자 하박국은 지난 하늘뜻펴기에서 다루었고 오늘은 나홈과 스바니야를 함께 다루려고 합니다. 그것은 이 두 예언자가 남긴 글이 짧고 같은 시대 같은 장소에 살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언자 스바니야가 자신의 백성들인 유대 왕국의 부패와 부정의를 고발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고 있는 반면에 예언자 나홈은 근동을 지배하던 아시리아 제국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나홈에 관하여는 단지 출신지만을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 스바니야는 4대에 걸친 조상들의 이름을 언급함으로 출신 배경을 밝히고 있고 그가 예언을 하였던 시대가 어떤 시대였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스바니야는 ‘아몬의 아들 요시야 왕이 유다를 다스릴 때’(1절) 활동하였다고 말합니다.


[시대적 상황]


        이 짤막한 서술에는 함축된 역사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우선 아몬왕은 그의 선대인 므나쎄 왕과 한 묶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열왕기하 21장 2절에서 므나쎄 왕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므나쎄는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그릇된 정치를 폈다. 야훼께서 이스라엘 사람 면전에서 쫓아 낸 민족들의 역겨운 풍속을 따라 부왕 히즈키야가 허물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웠고 이스라엘 왕 아합을 본받아 바알 제단을 쌓았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고 하늘의 별들을 절하여 섬겼다... 그리고 왕자들을 불에 살라 바칠 뿐 아니라 점장이와 술객을 두었고 혼백을 불러내는 무당과 박수를 두었다... 므나쎄는 이스라엘을 그릇 인도하였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저지른 악이 야훼께서 자기들 면전에서 멸하신 민족들보다 한층 더 심하였다.”(2-9절)

        

        한마디로 므나쎄 왕은 우리가 가장 악한 왕으로 알고 있는 아합 왕보다 더 악한 왕이었고 이방 민족보다 더 나쁜 죄를 지은 왕이라고 말합니다. 이 므나쎄 왕의 뒤를 이어 아몬 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이 아몬왕에 대한 성서의 설명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아몬은 이십 이세에 즉위하여 이년간 다스렸다. ... 그는 부왕 므나쎄가 그러했듯이 야훼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하였다. 부왕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 부왕이 숭배했던 우상을 숭배하였다.”(열하 21:19-21절) 이것이 전부입니다. 성서의 기록에 의하면 유대 왕들 중 가장 악한 왕이 므나쎄이고 그의 아들 아몬 또한 이에 못지않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몬왕은 즉위 2년 만에 쿠데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의 아들인 요시아가 왕으로 옹립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8살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일단의 개혁세력에 의해 섭정 정치가 이루어졌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요시야 왕의 31년의 역사를 이렇게 한마디로 결론짓습니다. “그는 야훼의 눈에 드는 바른 정치를 폈다. 모든 일을 태조 다윗을 본받아 한 발짝도 어긋나지 않고 그대로 살았다.”(열하 22장 2절)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정반대되는 손자가 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악한 왕으로 대변되는 므나쎄와 아몬 그리고 바른 왕으로 대변되는 요시야의 판단 기준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므나쎄와 아몬의 시대는 민족들의 역겨운 풍속을 따랐고, 산당과 바알 제단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별들을 전하고 왕자들을 불살라 바치고 점장이와 술객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이는 모두 이방신들을 섬기는 종교적인 행위로 이해됩니다. 그러면 요즘말로 한다면 대통령이 불교의 절을 가거나 무당을 불러 굿을 하면 이는 악한 왕이 되는 것이고 교회를 나오면 선한 왕이 되는 것입니까? 만약 이 성서 구절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성서는 자기종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면 다 죽여도 된다고 하는 살인교서장과 다름이 없습니다. 실제로 중세기독교 역사는 그렇게 이해하였기에 기독교를 거부하는 원주민들을 모두 죽였고 십자군 전쟁 또한 같은 이유로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타 종교인들을 모두 적으로 보는 성서 이해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성서의 문자 너머에 주목하라]


        여기서 우리는 이 구절 뒷면에 숨어 있는 실제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야훼 신을 섬기라는 율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신들을 섬기는 왕들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물어 보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왕들이 갖는 첫 번째 목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떻게 하면 나라를 부강하게 하여 백성들을 배부르게 할까입니다. 그래야 백성들로부터 불평불만이 없어지고 자신도 편안하게 통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주변의 강대국 사이에 끼인 작은 나라입니다. 자원도 국방력도 충분치 않습니다. 살길이라고는 강대국들과 잘 지내면서 떡고물을 얻어먹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별로 없습니다. 다른 말로 눈치를 잘 살펴야 합니다. 요즘은 이 눈치 외교를 프렌들리 외교정책이라고 고상하게 표현합니다.


        요즘에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방식은 자국의 군대주둔과 무역통제이지만, 이전 고대의 신화적 사회에서의 지배 방식은 종교입니다. 자기들이 믿는 신을 믿도록 함으로 약소국을 지배하였습니다. 실제로 이방 신을 믿도록 하려면 이방 신당이 서야하고 신당이 서면 이방 사제가 들어가게 되고 이방사제는 자연적으로 백성들의 소리를 통제하기에 왕들은 이방사제들과 가까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고대사회에서 이방신전이란 단순히 종교적인 영역에서만 머물지 않고 정치적인 영향력까지 행사하게 됩니다. 정치와 종교는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이 성서를 비롯한 고대의 종교적 경전을 읽어나가면서 빠지기 쉬운 가장 큰 함정이 바로 여기에 이것입니다. 성서를 비롯한 경전들의 기록은 요즘 우리가 말하는 정치가 배제된 종교 서적이 아닙니다. 개인의 심령을 치료하기 위한 심리서적은 더 더욱 아닙니다. 당시의 종교 정치 문화 이념을 비롯한 모든 인간 역사가 혼재된 기록입니다. 아니 단지 인간 역사의 기록이 아닌 신의 입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하늘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구약성서는 유대 왕들의 치적을 국민소득이 얼마였냐고 하는 숫자나 물가나 실업률의 경제적 수치로 판단하지 않고 야훼 하느님의 눈에 들었느냐? 들지 않았느냐로 판단합니다. 여기서 야훼 하느님의 눈은 모세의 율법을 말하는데, 이 율법에는 안식일법, 정결법, 할례법, 십일조법과 같은 종교법도 있지만, 희년법, 안식년법과 같은 약자 보호를 원칙으로 하는 사회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서의 세계 안에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가 없습니다.


[예수의 병고침과 마귀축출 기적의 참 의미]


        우리가 읽은 루가복음서의 9장의 말씀을 보시면 더욱 확실합니다.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를 한 자리에 불러 모든 마귀를 제어하는 권세와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병자를 고쳐주라고 보내시었다.” 그리고 6절에 ‘열두 제자는 길을 떠나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며 이르는 곳마다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를 고쳐 주었다.’ 자 어떤 종교인들이 이 남한 땅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 주었다면 누가 제일 좋아하였을까요? 물론 고침을 받은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들이겠지요. 그 다음으로 좋아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인들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백성들의 근심을 덜어주었으니 나라가 평안해지고, 정부가 지불해야 할 병원비를 절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루가복음서는 바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놀라고 어리둥절해 한 사람은 다름 아닌 헤로데 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행한 기적을 보면서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기도 하고 엘리야가 다시 왔다고도 말합니다. 세례 요한은 누구입니까? 그는 헤로데의 불의와 부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선 예언자였습니다. 그래 헤로데는 그를 붙잡아 옥에 가두었고 옥에서도 계속 비판의 소리를 멈추지 않자 끝내는 목을 베어버렸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누구입니까? 아합 왕과 이방 여인 이세벨 왕후의 부정과 불의를 고발하고 폭력적 권력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워 승리한 예언자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 베어 죽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소문에 들리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헤로데는 불안에 휩싸입니다.


        분명 예수와 그 제자들이 하신 일은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는 일이었지만, 이에 대해 헤로데 왕이 두려워했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세례 요한과 엘리야가 다시 나타났다고 말한다면 이 마귀축출과 병 고침 사건은 단순히 성전이나 기도원 안에서만 행해지는 요즘 말로 하면 심리 영성 치료나 육신적인 병 치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 지배자들이 두려워하였다는 말은 이것들이 종교적 사건이 아닌 정치적 사건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성전 안에서 예배나 기도나 찬양에만 열심을 낸다고 하면 권력자들이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지요. 오히려 잘 한다 잘한다고 손뼉을 치며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청 광장으로 나와 시국미사와 기도회나 법회를 드린다고 하면 놀라고 두려워 할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서가 말하는 마귀나 병은 오늘 우리가 말하는 정신병 환자나 육체적인 고통이 따르는 질병이 아닌 사회적 병, 집단적 한의 병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활동하던 시대 그리고 이 복음서가 기록되던 시대는 어떤 시대였습니까? 로마의 통치를 반대하던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고, 그리고 급기야는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문자 그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초토화시켜 버린 극도의 식민지 억압 사회였습니다. 귀신 축출과 병 고침의 사건은 이 땅의 불의의 인간 역사를 끝장내고 새로운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된다고 하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끼리만 통하던 사회적 은어(隱語)였던 것입니다. 이런 사회적 은어를 통치자들은 유언비어(流言蜚語)라고 말합니다.


        복음서만이 아니라 성서 전체에 걸쳐서 기록된 기적의 이야기들은 요즘 우리가 말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종교적이고 개인의 화복에만 머무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기적 사건들의 앞뒤 성서 이야기를 유심히 살펴보면 이는 당시의 사회구조 곧 지배계층이 약자 민중을 지배하는 그런 상하 구조의 틀을 뒤흔드는 혁명적 행동들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오늘의 스바니야]


        예언이란 복음서의 말씀들이 식민지 시대 속에서 사회적 은어였던 것과는 달리 적나라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스바니야가 자기의 지도자들에게 외칩니다. “이 저주받을 도성아 야훼께 반항이나 하는 더러운 도성아 압제나 일삼는 도성아 불러도 듣지 아니하고 징계를 해도 코웃음만 치는구나. 귀하신 몸들은 성 안에서 사자처럼 으르렁 거리고 판사들은 벌판을 주름잡는 늑대처럼 뼈도 안남기도 사람을 씹어 삼킨다. 예언자들은 제 잘난 멋에 사람들을 속이고 사제들은 성소를 더럽히며 법을 짓밟는다.”(3장 1-4절)


        ‘귀하신 몸들은 성 안에서 사자처럼 으르렁거린다.’란 표현을 들으시면서 생각나는 것이 없으십니까? 사자들이 으르렁거리려면 야생에 나아가 호랑이나 늑대를 상대로 으르렁거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성 안에서 으르렁거립니다. 이는 권력자들의 비겁함을 비웃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는 사자와 같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경찰차와 컨테이너로 산성을 쌓아놓고 그 안에서만 으르렁거립니다. 성 밖으로 나오지를 않습니다. 대화를 하자고 촛불을 든 자기 백성을 향해서는 군화 발과 곤봉과 방패로 으르렁댑니다. 그리고는 성 밖인 국외에 나가기만 하면 사자의 으르렁거림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프렌들리 프렌들리 하면서 꼬리를 흔드는 애완견으로 변합니다. 신문을 보면 이명박대통령이 국민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손을 잡고 큰 웃음을 짓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고 부시대통령이나 후쿠다 총리와 함께 있을 때만 웃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아부의 결과가 쇠고기 파동이고 우리보다 훨씬 경제력이 약한 나라들도 하지 않은 쇠고기 검역주권의 포기입니다. 지금도 미국 안에서는 소의 결핵으로 소환과 폐기 소동이 벌어지고 있지만, 우리나라가 이 결핵균이 있는 병든 소의 고기가 들어오는 것을 막을 방법은 하나도 없습니다. 미국 수출업자의 양심을 믿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청와대와 국회의사당 안에서만 으르렁대는 권력가들, 국민을 향해서만 큰소리치는 권력자들 사실 그 인생이 불쌍할 따름이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는 우리 국민들이 안쓰러울 따름입니다.


        지난주에는 독도 사건이 터졌습니다. 사실 독도에 대한 일본 정부의 영유권 주장은 지난 수십년동안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계속 있어왔던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일본 정부가 이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교과서에 싣겠다고 나온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명박씨 개인의 역사인식 부재가 자초한 결과입니다. 후쿠다 일본 총리가 이명박씨를 직접 만나보고 나서 이런 사람이라면 해도 괜찮겠다고 본 것입니다. 실용 곧 돈만 되는 일이라면 자기 양심이고 민족자존심이고 역사고 뭐고 다 팔아먹는 이명박씨의 장사꾼 심리를 본 것입니다. 이명박씨가 일본에 가서 후쿠다 총리에게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과거사는 묻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아니 지가 뭔데 그간 일본이 한반도에 저지른 과거의 죄악들을 묻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런 권리를 주었습니까? 여러분이 그에게 그런 권리를 주었습니까?


[실용주의에 감추인 거짓들]


        일제 식민지 35년 동안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얼마마한 피해를 보았습니까? 징용 징병으로 끌려가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죽어간 사람들이 수십만 수백만이요. 일본 군대의 성노리개로 끌려가서 희생당한 우리의 누이들만 해도 수만명에 달합니다. 지금도 십년을 넘게 매주 수요일 정오에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 정신대 할머님들의 항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니 이명박씨가 언제 정신대 할머님들이 모여 살고 있는 만남의 집을 방문하고 그분들의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고 위로의 얘기를 했나요? 꽃다운 나이에 전쟁터로 끌려가 하루에 20명도 넘는 일본 군인들의 성적 욕망의 노리개로 희생당하면서도 죽지 못해 살아간 그들의 수치와 고통과 한을 한순간이라도 느껴보았다면 그런 발언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독립군의 자손들은 부모님들이 일찍이 집을 떠남으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교육받지 못해 가난의 대물림 속에 지금도 변변한 일자리도 없이 막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의 고통이나 한에 대해서 얘기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지가 뭔데 과거는 묻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일본이 제대로 죄에 대한 고백을 하고 용서를 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도 일본은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잘못했다고 하는 말을 하지 않고 있으며 틈만 나면 그것이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정당했다고 망언을 일삼고 있습니다. 독도 망언도 그런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명박씨는 자신이 일본에서 태어났기에 일본에 대해 호감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무책임한 얘기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6,70년대 부정과 편법 정치뇌물이 판을 치던 유신독재시대에 건설회사 사장을 지냈다고 한다면 그의 인간됨이 어떠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누누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습니다. 오직 돈만 알았지 인간됨, 사랑, 고뇌, 양심 그리고 민족과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감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 부동산 투기를 위해 열 번도 넘는 위장전입을 하고 유령회사를 만들어 대학생 자식들에게 월급을 주어 세금을 떼어먹고 건강보험을 챙겨먹었던 것입니다. 돈 있는 사람이 너도나도 하는 위장전입 그래 한 두 번은 저도 이해합니다. 그러나 열 번이 넘는다면 그건 돈에 환장한 사람이 아니고는 하지 못할 짓입니다. 그래 이전 김대중 노무현정부가 역사를 바로 세우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만들어 논 모든 부처들을 통폐합하여 버렸습니다. 시야가 좁아도 너무 좁은 것입니다. 정말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 지금도 대사를 불러들이는 감정대응만 하고 있지, 외교적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자꾸 얘기하면 열만 오르니까 그만 하렵니다.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오늘의 법조계]


        ‘판사들은 벌판을 주름잡는 늑대처럼 뼈도 안 남기기도 사람을 씹어 삼킨다’는 스바니야의 예언의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나는 것이 없으십니까? 우리는 지난 주 또 다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부조리한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삼성에 몸담고 있던 김용철변호사가 구체적 자료를 갖고 고발을 해도 몇 달 동안을 뭉개면서 별다른 몸짓을 보이지 않던 검찰이 국민의 힘에 밀려 마지못해 특검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9개월에 걸친 형식적인 조사를 한 결과 판사가 묻는 기초적인 질문에도 답변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니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형 몇 년을 구형했지만, 속으로는 그동안 받아먹은 떡값 때문에 무죄가 되기를 바랐기에 답변을 피했던 것이겠지요.


        여러분 판사나 검사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십시오. 강한 자와 재벌 앞에서는 벌벌 기고 약한 국민들에게는 불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고 있습니다. 삼성의 경우에는 구체적인 증거제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법적 용어를 들이대면서 시간을 끌어주어 삼성 자회사 내의 모든 자료들과 컴퓨터 증거들을 인멸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한 것과는 전혀 딴판으로 이번 촛불집회 배후를 조사한다는 일에는 영장제시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사회적 공의를 위해 일하는 참여연대의 현관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전격 수색을 하고 힘없는 네티즌들의 컴퓨터를 빼앗았습니다.


        삼성 특검에 할당된 검사는 특별 검사 1명에 검사보 2명 모두 3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저 영어 단어 하나 의도적으로 번역했다는 MBC PD 수첩에는 검사를 5명이나 할당했다고 하지요. 현재 이명박정부는 법의 공정한 판단과 국민들의 언론 자유를 묶기 위해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일어난 사건을 보십시오.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들이 다수를 점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지난 16일 MBC <PD수첩>의 광우병 방송에 대한 시청자 사과 결정을 내렸고 다음날인 17일 YTN 주주총회는 문을 걸어 잠근 채 대통령 언론 특보를 사장으로 앉히는 안을 30초 만에 통과시켰고 다음날인 18일에는 방송통신위원회가 신태섭 한국방송(KBS) 이사를 퇴출시켜버렸습니다. 신태섭 이사는 KBS 정연주 사장의 해임을 반대해서 현 정부의 미움을 샀던 사람으로 대학의 허락을 받지 않고 한국방송 이사를 한다고 대학에서 해임을 시키자 대학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는 이유로 이사직에서 해임을 시켰습니다. 불과 2주 만에 대학과 방통위에서 동시에 해임된 것입니다. 이거야 말로 완전히 짜고 치는 고스톱이지요. 이것뿐입니까? 조중동의 왜곡된 언론을 견제하기 위해 이들 신문에 광고를 실은 기업에 항의한 누리꾼들은 출국금지를 당했습니다. 현 정권이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얼마나 불법을 행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언이란 곧 권력 비판의 언론의 자유이다]


        예언자들의 예언이란 모두 시대를 고발하는 것들입니다. 야훼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권력자들의 부정과 불의를 고발하고 있고 주변 제국들의 포악함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예언을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이는 권력 비판의 자유 곧 언론의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책을 불태우는 곳에서는 결국 사람을 불태운다."고 시인 하이네는 말했습니다. 인권의 역사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인권이 침해당할 때 가장 처음에 일어나는 일은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한다는 것입니다. 권력은 맘에 안 드는 표현을 불태워 없애버리거나 혹은 그전에 그런 얘기를 할 사람들부터 때려잡는 것입니다. 가깝게 일제가 그러했고 히틀러가 그러했고 박정희 전두환 유신독재시대가 그러했습니다. 미국에도 이런 시대가 있었습니다. 1950년대 매카시라는 상원의원이 "내 손에 공산주의자 명단이 있다"고 떠들어댔고, 근거도 없는 그런 주장에 사회가 발칵 뒤집혀 빨갱이 색출에 나섰던 적이 있습니다. 수많은 영화 예술인들이 여기에 희생을 당했고, 레이건 전 대통령은 이때 동료를 거짓 고발한 사람이었습니다. 미국의 인권과 언론의 역사에 수치로 남아 있습니다.

 

       인권의 역사에서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강조는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일찍이 프랑스 인권선언은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소통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권리들의 하나이다. 따라서 모든 시민은 자유롭게 말하고 쓰고 인쇄할 수 있다"고 했고, 올해로 60주년을 맞은 세계인권선언도 시민들이 사상·양심·표현의 자유를 행사함으로써 정부와 국가들을 비판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원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언서는 그 시대의 언론의 자유를 보여주는 하나의 인권선언문입니다. 왕과 귀족들과 사회의 지도자들을 향한 비판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3천 년 전 신화가 지배하는 고대사회에서 왕이 곧 법이었던 전제군주 시대에서 왕을 고발하고 사회의 지배자들을 비판했던 기록들이 바로 예언서인 것입니다. 성서가 다른 종교의 경전과 분명하게 다른 것 하나는 바로 이렇게 약한 자의 인권을 억압하는 잘못된 권력자들을 향해 쓴 소리를 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국내의 권력자들만이 아닌 세계 제패를 꿈꾸는 제국주의를 향해서도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선포하였습니다. “피로 절은 이 저주받을 도시야, 협잡이나 해먹고 약탈을 일삼고 노략질을 그치지 않더니 들리느냐? 저 채찍질 소리 병거 바퀴 돌아가는 저 요란한 소리 기마병이 말 타고 달려든다. 다치는 사람은 수도 없고 주검은 너저분하게 널려 있다. 오호라 아시리아의 임금아 네 목자들은 영영 잠 들었구나 네 용사들은 깰 수 없는 잠에 빠졌구나,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느냐? 네 상처는 나을 길이 없고 얻어터진 자리는 아물 길이 없다. 내내 너의 행패를 당하던 사람들이 네가 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손뼉을 치며 고소해 하리라.”(나홈 3장 1-3, 18-19) 제국 아시리아를 향한 예언자 나훔의 말씀입니다. 오늘 세계 제패를 꿈꾸는 제국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물론 예언자들의 소리는 단순히 권력자들과 지배계층을 비판하는 땅의 소리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느님 나라를 향한 약속의 성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오늘의 시대는 권력과 출세와 인간의 욕망이라는 어둠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말씀대로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스바니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면서도 그의 예언을 이렇게 마감합니다. “그날이 오면, 예루살렘에 이렇게 일러 주어라. 시온아 두려워 말라. 기운을 내어라. 너를 구해 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신다.”


        이제 저도 여러분에게 오늘의 마지막 말씀을 남깁니다.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 안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현실을 담대히 붙잡으십시오. 그 안에 하느님의 은총이 숨어 있습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십시오. 주님께서 앞서서 걷고 계십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