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장벽을 부수는 공동체

민수기 27, 1- 4; 루가복음 3, 7-9


황  순 현/진  용 수 교우


        

        어느 때 부터인가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겁내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고 사람들에게 의견을 내는 일을 망설이게 되고, 모두 부질없는 짓이라 여기는 허무의 늪에 빠져있던 기간도 있었습니다. 근본을 따지자면 어릴 적부터 다중공포증이 조금 있어서 앉아서 잘 읽던 글도 일어서서 크게 읽어보라고 선생님께서 시키시면 하늘이 노래지고 글씨들이 춤을 춰서 더듬고 속삭이다가 오히려 시키신 선생님을 당황시킨 일도 많았습니다. 지금도 딱 그렇습니다. 어디 가서 기독교인이라고 말도 하지 않는 제가 여러 분들 앞에 서서 설교를 해도 되는 것인지, 혹시 말을 잘못해서 여러분들의 신앙심을 욕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러워지고, 성서공부를 통해서 단편적으로 들었던 생각을 서투르게 정리한 것이 행여 잘못된 생각이 아닐까 두려워집니다.

        제가 인용한 성경 구절들은 여러분 모두 한 번 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창세기 12장 1-3절은 아브라함이 신앙적 결단에 관한 유명한 일화이고, 루가 3장 7-9절 말씀은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명대사로 자주 회자되는 부분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라도 칭찬을 마다않는 아브라함의 결단과 자신을 찾아온 신도들에게 저주같이 퍼부은 세례자 요한의 독설, 일견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구절을 인용한 까닭은 회개의 참 의미에 대한 저의 생각을 정리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회개(悔改)’ 한자 그대로 풀면 깊이 뉘우치고 고치다란 뜻입니다. 그러나 다시 얼마나 깊이, 무엇을 뉘우치며, 어떻게 고쳐야 하는 것인가? 하고 다시 묻는다면 회개란 말 자체는 그 의미가 공허함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흔히 얘기하듯 세상사 짓은 모든 죄를 씻고 천국으로 가는 티켓이 회개라고 한다면 이런 의미로는 그 당위성을 설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예수에 대한, 교회에 대한 신앙적 믿음이 존재하지 않는 저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한 때 제 생각에 교회란 사람이 좋아서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적 예수님은 존경하고 그 뜻을 따를 만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구원 그거야 파스칼의 말처럼 믿고 죽어서 구원 받으면 남는 장사고 없으면 본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사 모든 죄를 씻는다는 회개에 있어서만큼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벽이 있었습니다. 지은 죄만큼은 이후에 아무리 후회하고 반성한다 하여도 그 만큼의 대가는 치러야 하고, 그럼으로써 저지른 사람이나 심판하는 사람, 용서하는 사람, 그리고 그 죄를 목격한 모두에게 그 죄의 의미가 긍정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 제 소견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회개하면 천국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인은 하늘 법만을 주장하며 땅의 법을 무시하는 참으로 오만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편적으로 떠도는 기독교적 가치들만을 알고 그 참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달한 결론이었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조금은 변화하게된 것은 성서공부 중 알게 된 한 예언자 때문입니다. 참으로 어이없게도 이 예언자는 자신의 뜻대로 회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생각에 멸망과 타락의 길로 빠져가는 자신의 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래 너희들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 노예의 삶에 순응하며 살아라’고 말입니다. 역사와 해석에서 안병무 선생님은 이 사건을 민족적 집단적 구원의 약속이 ‘고난을 통해서 회개하고 살아 돌아오는 개인’에게로 옮겨간 것으로 새기면서, 이후로 기독교가 민족적 한계를 벗어던지고 인류 보편적 종교로서 발전할 수 있게 된 전환점으로 평가할  만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목사님의 부연설명을 듣고서도 저는 매우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이 예언자를 일제침략기에 민족개조론 즉 ‘조선민족은 게으르고 무식하기 때문에 일본인에게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이 게으름을 고치고, 낡은 유교적 지식을 버리고 신지식을 배워야 식민 지배를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 자들과 동일시 하며 비난하고 한발 더 나아가 ‘만일 동시대에 이런 예언자가 있다면 제가 먼저 그를 향해서 돌을 던질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제 정의관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록 그 예언이 실현되었고 교회사적으로 그 의미가 적지 않다고 하여도 어찌하여 세상에서 젤 똑똑하고 고난의 여정 속에서 민족의 고유성을 지켜왔던 이스라엘 민족은 이 역사의 반역자를 시대를 앞서간 예언자로 받들 수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사석에서 촛불시위 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반민중적 정책들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진실을 보지 못하고 타성에 젖어 나락으로 빠져가는 민중의 현실을 탓하면서 말씀하신 임보라 목사님의 말씀도 제겐 충격이였습니다. ‘그리가면 낭떠러지인데 가시마세요 돌아오세요 아무리 외쳐도 못 듣는 건지 안 듣는 건지 외면하는 민중을 보면 차라리 다 같이 떨어지게 놔두고 한번 당해봐야 깨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순간 임 목사님께 돌을 던져야 하나 하는 고민을 잠시 하다가 어쩌면 이런 생각의 모습들이 제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에 근거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읽는 내내 심적으로 지적으로나 부딪히기만 했던 안병무 선생님은 물론이지만 조 목사님이나 임 목사님이 허튼 소리를 하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틀린건데 뭐가 틀린거지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옥편을 찾아가며 한자 한자 새기며 읽어야 하는 노자나 논어보다도 한글로 쓰인 성경이 읽기가 더 힘이 듭니다. 이런 고민은 성서 이해라는 원칙하에 성서를 통해서 더욱 깊이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지만 저로선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선생님께서 노장사상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계셨다는 조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어쩌면 다른 틀을 가지고 이 고민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디선가 함석헌 선생님께서 하느님을 ‘없으신 듯 계신 하느님’이라고 설명하셨는다는 기억도 나고, 함석헌 선생님도 노장 사상에 대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위험하긴 하지만 안선생의 저서에서 ‘하느님을 노장의 대도(大道)’로 무턱대고 바꿔놓고 읽어 보았습니다. 대도(大道)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지만 만물은 대도의 작용으로 생기고 성장하고 번영한다는 노자의 어귀가 기억이 났습니다. 창세기 인용구절과 너무도 흡사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역사적으로 실재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구요. 이런 식을 다시 읽어가다 보니 행여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됩니다만 그간 풀리지 않았던 고민들이 많이 정리 되었습니다.

        선악과의 원죄를 짊어짐으로써 인간은 만물의 영원한 생성화육의 법칙 즉 영원한 생명의 나무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즉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스스로를 이탈 시킬 수 있게 된 역사적 인간 즉 유한한 인간이 분별의 지혜로서 세운 바벨론 탑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여도 이 또한 인가의 속성을 닮아 유한한 것임을 깨닫고 영원한 진리에 순응하는 것이야 말로 영원한 생명의 법칙, 복의 근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의 결단은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언자의 자기 민족에 대한 절망선언은 참 절망이 아니라 고난의 날들로써 타락해 멸망의 길로 들어선 민족이 스스로의 근본을  깨우치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올 것이며, 지금은 멸망의 길로 이끄신 하느님의 뜻이 이윽고 다시 약속의 길로 인도하시리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너무 민족의식이라는 좁은 분별로 이를 헤아리려 했던 게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하게 됐구요.

        세례를 통해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려 자신을 찾은 신도들에게 한 세례자 요한의 말씀은 회개는 그러한 것이 아니고 꽃이 시들어 열매를 맺듯 스스로의 현재가 허망하고 가치 없는 것임을 깨닫고 스스로를 일신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하느님의 축복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독사의 자식 즉 악의 근원으로 여겨야 하며, 진리를 마주함에 있어 스스로 쌓은 모든 인간적 가치들은 하찮은 돌멩이와 같은 것으로 여겨야 하며, 그리 여긴다면 목에 칼이 올려져 있듯 즉각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란 선악이라는 분별을 통해서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마주했을 때 이에 어긋나는 스스로의 모든 것을 제거하고 온 몸으로 진리에 부합하려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요즘에야 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여기고 끊었던 독서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금 살피면서 미처 몰랐던 의미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음을 깨닫는 재미가 솔솔합니다. 그중에서 성경인용문과 어울리는 구절이 있어서 소개하며 마칠까합니다.

        “고로 귀한 것은 천한 것을 뿌리를 삼고, 높은 것은 얕은 것을 바탕으로 삼게 마련이다”라는 말입니다. 스스로 옳고 바른 길을 원한다면 스스로를 그름에 자리에 둬야 한다는 역설, 즉 회개의 자세와 통하지 않나 합니다. 하느님이 너의 현재를 버리고 떠나라는 명령에 고희 노구를 이끌고 광야로 나아갔던 아브라함의 결단도 이러한 생각에서 가능했던 것이 아니였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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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하늘뜻펴기를 위해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로부터 사실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서 본 일이 없어 두려울 따름이나 용기를 가지고 시작하려 합니다.


[나의 신앙생활 시작- 구원이란?]


        저희 집은 종교와는 전혀 관계없는 집안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잠시 교회를 다닌 것이 전부였던, 제가 다시 교회를 다니게 된 계기는 저의 아내와 자녀, 그리고 형제들이 모두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의 무언의 압력에 따라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으나, 하느님의 섭리를 알지 못하고 그저 몸만 교회에 왔다가는 형식적인 나이롱 교인이었습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 읊는다고 나도 모르는 사이 점점 하느님의 말씀으로 조금씩 채워져 가고 어느새 교인들과 함께 길거리에서 “불신지옥, 예수천당”,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를 외치면서 전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제 자신의 변화에 저 뿐만 아니라 가족모두 놀라워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생활은 항상 반복적으로 흘러가면서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저의 아내가 “당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세요?” 하고 저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 전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전에 그렇게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하고 외쳤지만, 정작 제자신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죠. 단지, 내가 하느님을 믿지 않고 살았다는 죄를 알고, 그것을 깨달아 죄를 회개한다고 과연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열심히 교회에 참석하고 봉사를 한다고 과연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교우 여러분들도 각자의 구원에 대한 생각은 있겠지요. 소외된 이웃을 위하고, 평화를 위하고, 정의를 부르짖는 것도 구원을 향하는 하나의 길이 될 수도 있겠지요. 결국 구원은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깨달음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매고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갈 때 그 길 이 보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의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 세상을 떠나기 전, 그 때가 오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오랫동안 행복한 구원의 울타리에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제 아버님의 함자가 ‘구’자 ‘원’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이지요.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누구나 자신만의 멍에, 바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무언가를 짊어지고 간다는 것은 요즘세상에서 보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도 예수님을 알기 전이나, 후나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향린에서의 신앙생활]


        저는 전주에 있을 때 TV와 인터넷 매체를 통하여 향린교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서울로 인사발령을 받아 올라왔으며, 8월경부터 향린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설교, 국악찬송, 다함께 하는 축복기도, 오후 특강 등 여러 면에서 기성교회와는 다른 모습을 보면서 향린교인으로 등록을 하였지만, 향린공동체의 일원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날이 가면 갈수록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향린에 정착하기까지는 본인 스스로 잡초 같은 자생력이 없으면 정말 힘든 것 같습니다. 나만을 위한 신앙생활을 위해 혼자 위로를 받으려고 했었다면, 벌써 향린을 떠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여기에 참석하신 새 교우님께 한 말씀 드립니다. 적극적인 참여와 친교는 향린공동체 일원으로 생활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할 길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래도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는 교회에 잘 적응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이렇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여러 교우님이 계시지만 특히 서형식 교우와 ‘향린 힘씨’라는 별명 부여받은 함용호 교우라고 생각하며 다시 한 번 감사하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주일마다 또 다른 2차가 준비 되어있기 때문이기도 하죠.

        제가 향린교회에 등록하기 전인 작년 9월에 조 헌정 목사님의 설교 중에 “살아있는 교회는 배우고 봉사하기 위하여 바쁘지만 죽어가는 교회는 지내기가 편안하다”, “살아있는 신도는 배우고 봉사하기 바쁘지만 죽어가는 신도는 지내기가 편안하다”라고 말씀하시며 신앙이 살아있는 교인이 되시길 바라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 말씀 따라 살아있는 교인이 되자고 부족하지만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매주 금요일에는 한문덕 목사님의 성서공부를 마치고 심야버스를 이용하여 전주에 내려가고, 주일날 새벽에 전주에서 올라와 예배를 드리는 힘든 여정을 겪고 있으나, 힘듬보다는 기쁨이 더 넘치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이 향린에서 느끼는 하느님의 은혜라 생각합니다.


[성서공부: 슬로브핫의 딸들]


        제가 향린에 와서 처음으로 임보라 목사님의 “여성의 눈으로 성서읽기” 성서공부를 접하게 되었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모든 것이 새롭고 나 자신 또한 거듭나고 있음을 확실히 느끼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 기억에 남는 “슬로브핫의 딸들”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성서를 보는데, 굳이 여성의 눈으로 봐야한다고 전제하고 있는 이 성서 배움 마당은 하나의 도발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움 마당에는 사실 여성분 보다 남성분의 참여가 더 많았습니다. 여자나 남자나 모두 같은 인격체로 태어나고 같은 시대에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생활하며 남녀 조화를 이루며 평등이 지향되야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사회의 흐름보다도 한창 더딘, 많은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남성 우월주의 혹은 남성 중심주의로 인한 차별이 곳곳에 남아 있음을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성서의 이야기에 나와 있는 많은 여성들의 상황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의 이야기는 어찌 보면, 현재의 여성들은 유산상속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냥 새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결과가 아닌 과정을 중심으로 놓고 본다면, 자신들이 가질 수 있는 마땅한 권리에 대한 쟁취의 과정이 성서에는 자세히 남아있지 않지만, 많은 견제 속에서 이루어낸 지난 한 과정 속에서 얻어낸 성과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시대에서도 아들과 딸 간에는 같은 양의 재산을 분배하고 그 가운데 제사를 지내는 자식에 한해서만 5분의 1을 더해주도록 균등분배를 행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은 “남녀차별 없이 재산을 균분해서 상속할 것”을 규정하고 있으며, 이는 조선시대에 “남녀평등 상속제”가 시행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퇴계 이황의 어머니, 아내, 며느리는 혼인할 때 자신의 가문으로부터 평등하게 재산을 분배 받았고, 이 재산이 퇴계 학문을 닦는 데 경제적 밑거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여성의 강한 재산권을 가능케 한 “남녀평등 상속제”로 인해 조선시대 여성의 지위는 높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얘기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존재하고 있는데 서울 YMCA의 기만과 이에 대한 해결을 촉구하는 여성회원들의 투쟁을 다룬 “슬로브핫의 딸들”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총 회원 중 60%가 여성인 서울YMCA 에서는 남성들만 총회에 참석하여 남성위주로 운영되고 있어 여성회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참정권을 부여 해달라는 투쟁을 그린 것으로, 기독교와 유교문화가 공존하는 상태에서 기독교에 권위주의적 가부장적 제도가 합쳐져서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남한의 기독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교리인 자유와 평등 모든 인간의 대한 사랑 등이 왜곡되어 전해지게 되고, 이렇게 만들어진 교회와 사회의 많은 곳에서 차별의 문화가 생겨나고 그로 인해 약하고 힘없는 여성들이 부차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큐멘터리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목사안수를 거부하는 목회자, 특히 여성은 남성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아주 보수적인 생각이 기독교의 교리보다는 오랜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지금 우리 마음 어디 한구석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금 생각 해 보게 합니다.

        가정에서는 아들과 딸을, 직장에서는 남직원과 여직원을, 사회에서는 여성과 남성을 차별하고 있지 않는지…. 또한 향린에서 이러한 모습을 느낀 적은 없는지, 혹시 내 안에 편견은 없었는지…. 이제는 남성 여성 모두가 동반자적인 자세를 가지고 사회적 의무와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같이 고민하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양성평등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더 나아가 양성평등을 넘어서, 어떠한 성으로든지, 남성, 여성, 양성, 중성, 등등 차별받지 않는 인간평등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은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스스로 십자가를 매고 자신과 싸우며 끊임없이 나아가듯, 차별 없는 인간평등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역경을 헤치고 실천하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신지체장애인 공동체(라르쉬)를 설립한 장바니에의 “함께 장벽을 부수는 공동체”라는 글을 끝으로 저의 부족한 하늘뜻펴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우리는 함께 장벽을 부수고, 함께 상처에 노출되며, 함께 하나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독특성과 개인적인 은사들과 창조성이 말살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활발해지고 고양되는 연합을 향해 거듭나기 위해서 모든 이기적인 힘들은 죽어야 합니다.


        디프리히 본히퍼는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죽이고,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세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을 우리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자신들의 상처와 은사를 가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공동체는 사람들을 배려해주고 그들이 자라도록 돕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동체는 또한 우리도 자랄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서 우리가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동체는 서로에게 자유를 줍니다. 공동체는 서로에게 신뢰를 줍니다. 공동체는 강한 지지와 도전을 줍니다. 일단 우리가 공동체 안에 있으면 형제와 자매들이 우리에게 보내집니다. 우리를 화나게 하는 사람도 있고,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공동체는 각 사람을 모두 돌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심지어 우리에게 골칫거리인 그들을 환영하고 그들을 경청할 때 성장이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모두가 함께 장벽을 부수고, 함께 하나가 되어 나아가는 향린 공동체가 되길 기원합니다. 이제 "슬로브핫의 딸들"의 일부분을 잠시 보신 후, 침묵기도를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