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6일 오늘의 시대와 예언자 정신(7) 하바꾹

하박국 2장 2절-8절 마르코 8장 27절-33절


        이번 주에는 국가권력의 회개를 촉구하는 천주교의 정의평화사제단의 비상 시국미사를 시작으로 개신교의 시국기도회 그리고 불교와 원불교의 시국법회 등이 연달아 시청 광장에서 진행되었고 어제는 또 다시 오십만명이 모여 남대문으로부터 광화문까지의 거리를 촛불의 바다로 만들었습니다.


        목요일의 개신교의 기도회는 저희 교회에서 모인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국민주권 회복과 평화집회 보장을 위한 기장인 비상 시국기도회’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땅 끝이라 불리는 해남 부산 진주는 물론이고 제주도에서 까지 전국에서 4백명 이상의 목회자들이 이  예배당에 빽빽하게 모여 기도회를 갖고 목사 가운을 입고 명동을 거쳐 시청광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렇게 많은 목사님들이 거리기도회에 참여한 일은 1987년 이래 처음입니다. 기장의 전체 교회가 1,300여개 정도이니까 거의 3분지 1이 참가한 셈입니다. 사제단이나 불교계 모두 예상외로 참가가 높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현재의 정권이 얼마나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고 민족의 미래에 대한 위기의식이 얼마나 고조되어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날 이 자리에서 울려 퍼진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성명서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다시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려는가?]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기도의 행진을 이어 온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촛불민심을 공안 탄압으로 돌파하려는 어리석은 정부의 태도에 우려하면서 오늘 비상 시국기도회로 모였다. 최소한의 안전한 먹거리와 검역주권을 지키라는 국민들의 정당한 주장을 묵살한 채, 국민과 소통하겠다던 대통령, 깊이 반성한다던 정부 여당의 태도는 쇠고기 수입 장관고시 이후 돌변하였다. ‘국가정체성’ 운운하며 촛불민심을 공권력으로 무참히 짓밟고 있는 지금은 분명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폭력사태에 직접적 책임이 없는 시민단체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주요 관계자들을 체포하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비폭력 평화시위를 하는 시민들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가하고, 어린이로부터 팔순의 노인까지 마구잡이로 연행해 가는 지금의 현실은 분명히 인권의 위기 그대로다. 집회 결사 표현의 자유를 명시한 헌법적 질서에 기초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의 위기이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향해 소화기와 물대포를 뿌려대고 국민의 소리에 대하여 자신들의 귀는 막고 국민들의 입은 틀어막으려 한다면, 순수한 촛불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하고 ‘배후’ 운운하며 색깔론까지 동원하려 한다면, 문제의 근원이 자신들의 무능과 굴욕적 사대주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촛불을 든 시민들에게 그 책임을 돌리려고 한다면, 이는 스스로 민주정부임을 부정하는 태도이다.


        대통령과 정부는 끝내 다시 야만의 시대로 역사의 방향을 되돌리려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시간이 흐르고 있다. 국민을 섬기겠다던 대통령은 어디 있는가? 국민이 안심할 때까지 고시를 연기하겠다던 정부는 어디 있는가? 이제 국민들의 인내가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더 이상 당당하지 못한 태도로 국민들을 속이려고 한다면 대통령, 정부, 국민 모두가 불행한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중략)


        불교계의 외침 또한 매우 강경했습니다. 조계종의 교육원장 청하스님은 한눈으로 보면 촛불이 보이지만, 두 눈으로 보면 촛불 속에 영혼이 보인다고 하며 대통령이라는 샤람이 콩깍지가 씌어 한쪽 눈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미국산 쇠고기를 보면서 광우병은 보지 못하고 파안대소하는 부시의 웃음은 보면서 국민의 눈물을 보지 못하고 촛불의 허물을 보지만 자신의 잘못은 못 보느냐고. 그대는 어찌하여 두 뿔로 들이 받는 쇠귀신은 보지 못하면서 안 보이는 금송아지 꼬리만 보인다 합니까?’ 대통령을 야단치는 이 설법을 들으면서 저는 목사로서 그런 장로대통령을 만들어낸 책임이 나에게도 있다는 자책감을 가졌습니다.


[기독교인의 오만과 편견]


        대통령은 한 개인 이전에 국민 모두를 대표하는 지도자입니다. 그간 이명박씨가 보여준 종교편향성은 단순히 이명박 개인의 편향이 아닌 실제는 기독교전체가 갖고 있는 편향이자 오만입니다. 서울시장 시절에는 ‘서울시를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기도를 드렸고, 소망교회 인맥을 청와대의 내각에 앉히고 역대 대통령이 극력 삼가던 취임예배를 드렸습니다. 위가 그러하다보니 아래 또한 그러하여 청와대 경호처장은 ‘정부 부처를 복음화하는 것’이 꿈이라고 공공연하게 얘기하고 비서실에선 정무직 공무원의 종교성향을 조사하고, 경찰청장은 경찰복음화 대성회를 홍보하는 포스터에 조용기목사와 나란히 등장했습니다. 이번 경찰폭력의 배후로 지목받고 있는 어청수 경찰청장 또한 매우 보수적인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극심한 창피를 느낍니다.


        게다가 해양수산부가 제공하는 전국지도에는 뒷골목에 숨어 있는 작은 교회까지 다 이름을 게재하면서 봉은사, 조계사와 같은 대 사찰을 포함하여 절은 모두 뺐습니다. 불교는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교이며 우리 민족의 과거를 지켜온 종교입니다. 불교를 부정하는 것은 우리의 과거 역사를 부정하는 일과 같습니다. 관리자 한 개인의 실수라고 변명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겠다는 일과 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갖는 최소한의 품격은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배려’입니다. ‘내가 저 사람 입장이라면 어떠할까?’ 하며 입장과 처지를 바꿔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태도야 말로 인간됨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종교인이, 그것도 나라 전체를 이끌고 가는 지도자가 그런 기본적인 소양도 갖추지 못했다고 하는 점에서 기독교 전체가 회개하고 또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촛불을 든 사람들을 ‘사탄’이라고 부르는 죄악까지 범하는 것입니다.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탄’이라고 부르고 그것도 정부의 한 부처를 책임진 지도자 목사가 그렇게 했다는 사실에 상당한 비애를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남한 기독교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이후 일부 보수교인들은 한국교회협의회나 저희 교회 게시판에 비난의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펼치신 정의와 평화 생명의 하느님 나라 선교를 교회 성장으로 착각하고 있고 개종과 혼돈하고 있습니다. 마치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교회만 나오면 그것이 곧 하느님 나라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지요. 이명박대통령 또한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의 희생자이지요.


[새가 하늘을 나려면]


        저는 미사와 기도회와 법회에 참석하면서 이는 단순히 종교간의 화합이라는 상징성을 넘어 앞으로 이 사회에 미칠 영향력이 상당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소녀로 대변되는 촛불 자체만으로도 앞으로의 우리 사회에 미칠 영향력이 상당하듯이 신부와 목사와 스님과 교무님들이 한 자리에 앉아 한목소리를 외쳤다는 사실만으로도 남한의 정신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크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종교계의 대사회적 비판력이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썩게 만드는 황금만능주의의 환상을 깨트리는 종교의 근본 진리인 생명의 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지게 된 것입니다. 이는 사회뿐만 아니라 종교계 자체를 위해서도 매우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지금은 작은 물결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는 민족 대통합과 종교 화해의 거대한 물결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래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애굽 왕 파라오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신 분이 야훼 하느님이셨듯이 이명박대통령을 교만케 하신 분도 야훼 하느님이 아니신가 생각합니다. 파라오가 처음부터 정말 회개하였다면 10가지 기적적 재앙들이 어떻게 생길 수 있었겠으며 과월절 축제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명박씨가 처음부터 진정 회개하였다면 지금과 같은 저항의 축제(protest + festival = protestival)라는 기묘한 촛불 국민운동이 두 달간이나 계속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의 교만과 완악함으로 인해 지금 우리 국민들 사이에는 민족의 주체성이 깨어나고 먹거리에 대한 반성과 한반도의 환경을 생각하는 생명사상이 움트고 있고 어린 중학생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민주주의의 근본이 서게 되었고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대중매체의 농간의 실체가 어떠한지를 깨닫게 되었고 종교간의 대화와 화합의 기틀을 마련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힘든 시간이지만, 지내놓고 보면 우리 국민 수준을 한 단계 상승시킨 축복의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새가 껍질을 뚫고 나올 때에는 고통이 있지만, 그러나 하늘을 날개 될 때에는 그 고통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거국적인 종교인들의 평화집회가 시작한 날은 바로 수만 명의 전투경찰들이 촛불을 든 시민들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한 다음날부터였습니다. 종교계가 이때를 기다린 것은 아니고 그 이전에 이번 주 집회를 계획하고 있었지만, 폭력적 상황이 벌어졌고 이 일을 기화로 시청 앞 광장을 경찰이 원천봉쇄한 그 다음 날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시대를 읽는 파수꾼들]


        그날 밤 향린 교우인 전국YMCA 사무총장이신 이학영님은 다른 회원들과 함께 ‘눕자 행동’을 펼치시어 경찰들 앞에 드러누우셨다가 팔 골절상에 이마를 찢어지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다른 회원들은 머리에 금이 가는 등 수 십명이 엄청난 폭행을 당했습니다. 통일뉴스기자인 조성봉교우 또한 다쳤고 길을 막고 시민을 잡아가던 경찰에 항의하던 함용호교우가 붙잡히자 함교우를 구하고자 항의하던 서호성교우님이 대신 끌려가 3일 구류를 살고 나왔습니다. 강남향린교회의 안진걸교우님은 그간 참여연대 회원으로 그리고 광우병대책위원회 조직팀장으로 많은 수고를 하다가 시민들이 무자비하게 구속되자 이에 항의하다가 구속된 지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향린공동체 교회들은 지난 수요일 부당한 구속을 고발하고 조속한 석방을 위해 청계천 광장에서 비가 오는 가운데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지금 두 달 넘게 진행되는 촛불집회로 인해 1,000여명이 구속되었고 폭력진압으로 인해 1,500여명이 병원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물론 전경들도 여러 명이 다쳤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정부는 회개는커녕 집에까지 좇아가서라도 시위자를 체포하고 최루액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70년대 군사독재정권을 방불케 하는 강경진압을 선포하였습니다. 하루 밤 사이에 촛불을 든 모든 시민들은 폭도가 되었고, 사람 몇 명 죽어도 별로 하소연할 수도 없는 공안정국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시청 앞 광장은 전투경찰들의 닭장버스로 원천 봉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종교인들이 움직인 것입니다. 종교인들이라고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종교인들은 하바꾹 선지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시대를 읽어가는 파수꾼과 같습니다.(2장 1절) 파수꾼은 작은 움직임에도 민첩하게 반응하고 성안 사람들의 생명을 책임지기에 위급한 상황 속에서는 자신의 몸을 던지게 됩니다.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그의 생애 마지막 3년 동안 엘살바도르에서 군사정권을 향해 살육과 불의를 중지할 것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의 하늘뜻펴기는 방송을 통해 전국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는 한 주간동안 군인들이 자행한 학살을 고발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회개와 평화와 정의를 요청하고 있음을 선포했습니다. 암살 위협이 높아지자 그는 살바도르 민중들 속에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980년 3월 23일 그는 대성당에서 군인들에게 살인하라는 명령에 복종하지 말 것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참된 정의를 실천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했습니다. “


        어떤 군인도 하느님의 법에 어긋나는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없습니다. 아무도 비도덕적인 법을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이름과  고통당하는 민중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여러분에게 명령합니다. 억압을 멈추십시오.” 그 다음 날 오후 로메로 대주교는 강론을 마치고 십자가 상 앞 바로 제단에 서 있을 때, 성당에 난입한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전경들이나 군인들 또한 상관의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있지만, 이보다 더 큰 명령인 하늘의 명령이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비폭력과 평화를 외치며 드러누운 사람들을 짓밟고 방패로 내리찍고 곤봉을 휘두르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상관이 아무리 명령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드러누운 사람을 한 명 한 명 연행해 갈수는 있지만, 그 위를 짓밟고 가면서 방패와 몽둥이를 휘두르는 야만적 행위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설사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 중이라도 적이 백기를 들면 폭행하지 않는 것이 국제법이거늘 적도 아닌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국민인 그것도 드러누운 시민을 폭행한 야만적 행위는 결코 용서받을 수가 없습니다. 동물도 서로 싸우다가 한쪽이 꼬리를 내리고 물러서는 의사를 표명하면 더 이상의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누워 있는 사람을 폭행한 이 부분은 동물보다 못한 행위입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동료를 치료하고 있던 시민마저 방패로 내리 찍었습니다. CNN방송은 이러한 폭력적 상황을 계속해서 방영하고 있습니다. 경찰이 시민을 폭행하는 나라에 관광객이 오겠습니까? 이는 세계의 비웃음을 살 야만과 후안무치의 소행입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의 남한 사회의 발전을 위해 어청수 경찰청장 이하 중대장 급에 이르기까지 그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제부터는 전경들이라 하더라도 평화 시위의 방식으로 들어 누운 시민은 결코 폭행하지 않겠다는 선서를 하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느님의 정념(pathos)에 사로 잡힌 사람들]


        그런데 이학영사무총장님 이하 YMCA 회원들은 물대포와 군화 발과 방패와 곤봉 앞에서 어떻게 들어 누움으로 저항하겠다는 비폭력 평화의 용기가 나왔을까요? 이는 신앙의 힘이라는 말 외에 다른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불의를 향한 하느님의 정념(pathos)에 사로잡혔다는 얘기 외에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몸을 움츠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본능입니다. 그런데 폭력 앞에 죽기를 다짐하고 누었다는 것은 죽음을 넘어선 부활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개인을 넘어선 인류 구원에 대한 굳은 신념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비폭력이 폭력을 이긴다는 굳건한 평화사상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입니다. 자기를 넘어선 절대 신에 대한 신앙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저는 청계천에서 경찰서 앞에서 평택에서 평화를 기원하는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의 얼굴에서 바로 그러한 용기와 담대한 신념을 보아 왔습니다.


        예언자들이란 바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른 소리를 외치고 행동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예언자들입니다. 동양의 유교나 도교 그리고 그리스 철학세계에서의 지혜로움의 상징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냉정한 인간형(homo apathetikos)이지만, 히브리인들의 성서의 세계 안에서의 예언자는 동정하는 인간(homo sympatheitokos)입니다.(<예언자> 헤셀 467쪽) 하느님이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곧 약자와 고난당하는 자들이 아파하면 그 아픔이 하느님께 전달이 되고 이 아픔은 하느님의 아픔이 되어 예언자들의 마음속에 심어집니다. 이 하느님이 아파하는 마음(pathos)이 넘치는 파도처럼 한 인간에게 엄습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냉정한 인간형 이성적 인간형으로 남아 있지 못합니다. 맨 몸으로 권력자에 담대히 서서 외치는 동정형 인간이 됩니다. 그래 그들의 외침은 때때로 천둥소리처럼 울리고 감정적으로 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전능하신 분의 감정을 인간의 언어로 저와 같이 설교라는 미명으로 길게 설명하려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함을 느낍니다. 대신 그들은 몇 마디의 짧은 말로 감정을 표출합니다.


        하바꾹 예언자 또한 그러합니다. “야훼여,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이 소리 언제 들어주시렵니까? 호소하는 이 억울한 일, 언제 풀어주시렵니까?” 1장 1절부터 시작하는 그의 외침은 무엇 때문인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처음부터 감정에 북받치는 항의하는 소리만 들립니다. “어인일로 이렇듯이 애매한 일을 당하게 하시고 이 고생살이를 못 본 체 하십니까? 보이느니 약탈과 억압뿐이요 터지느니 시비와 말다툼뿐입니다.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졌습니다. 못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등쳐먹는 세상,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1:2-4)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


        하바꾹이란 이름은 ‘포옹 혹은 껴앉다’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하바꾹을 포옹하였다는 말인지 아니면 하바꾹이 민중들의 아픔을 껴안는다는 의미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고 다만 예루살렘 멸망 직전 활동했던 예언자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유대 땅의 부정과 불의를 고발하면서 못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등쳐먹는 세상,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다고 고발합니다. 그가 오늘 이 남한 땅에 살고 있다면 무엇이라고 외치겠습니까? 비정규직 노동자의 잘못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왜 그들은 똑같이 일하고도 봉급은 더 적고 권리는 보장받지 못하고 부당하게 해고를 당하지만 재벌들의 힘은 점점 더 세어지는 것입니까? 라고 외치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그 사람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왔기에 서울 시내버스 값을 70원이라고 대답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태양계를 대표하는 외계인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대한민국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서울 시내버스 값을 모르지요? 그 사람은 재벌의 아들로 손꼽는 부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 한 사람의 재산이 다른 모든 국회의원들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많다고 하지요. 그런데도 그는 서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구호를 내 걸고 서울에서 뽑힌 국회의원이 되었고 이제는 여당에서 두 번째로 표를 많이 얻은 대표위원이 되었고 차기 대통령 후보 중의 한사람이라고 말한다지요. 이게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가난한자와 부자의 현실이고 정치계의 현실입니다. 버스 값을 70원이라고 말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일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백성을 위한 일을 할 수가 있지요? 착한 사람을 등쳐먹고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란 단지 사기꾼이나 군부 독재자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바로 이런 현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저는 앞으로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될 사람은 의무적으로 6개월 정도는 달동네 판자촌에 가서 살도록 하는 법 규정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하바꾹이 외칩니다. 그러자 야훼 하느님이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바빌론을 일으키리니 그들은 사납고 날랜 족속이라... (그들은) 고관쯤은 우습게 여기고 임금은 노리개로 삼으며 그 어떤 성채건 하찮게 여기고 토성을 쌓아 점령하리니 제힘을 하느님처럼 믿다가 죄를 지은 자들은 바람에 날려가듯 사라지리라.’(1:6,10) 하바꾹이 의인들이 고통당하는 이 부당한 세상이 언제나 좋아지겠느냐?고 한탄조로 하느님께 항의하자, 하느님의 답인즉 이제 바빌론을 통해 그런 못된 유대지도자들을 쓸어버리겠다고 말합니다.


        이거야 말로 엎친데덮친 격입니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입니다. 하바꾹은 이전부터 바빌론제국이 주변 약소국가들을 마구 짓밟고 약탈하고 정복한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 이렇게 항의합니다. “야훼여 어찌하여 그들을 재판관으로 세우셨습니까? 하느님도 그들을 일컬어 제 힘을 믿고 멋대로 법을 세우는 무섭고도 영악한 족속(7절)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바꾹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의로움을 펴기 위해 악한 자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또 다른 악한 자들을 들어 쓰시는 일이 과연 정의의 방식이란 말인가? 부조리한 현실에 놀라 있는데, 거기에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이 덧씌워졌습니다. 유대의 지도자가 아무리 나쁘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우리 민족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을 바로잡기 위해 이민족 바빌론의 악한 세력을 이용하시다니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 아닌가요? 그래 또 다시 항의합니다.


        “나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때려잡는데 잠자코 계십니까?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 고기로 만드시고 왕초 없는 벌레로 만드시어 그자들의 낚시에 걸리게 하십니까?”(14절) 그때 하느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네가 본 일은 때가 되면 이루어진다. 끝 날은 반드시 찾아온다. 쉬 오지 않더라고 기다려라. 기어이 오고야 만다. 멋대로 설치지 마라라. 나는 그런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2:3-4)


[하바꾹이 본 환상]


        하느님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환상을 보여주며 그 일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라는 예언만 던져줍니다. 여기서 하바꾹이 본 환상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이 환상을 보고나서 ‘화를 입으리라’는 경고만 할 따름입니다. “화를 입으리라! 남의 것을 먼지까지 긁어모으고 남의 것을 전당잡아 치부하는 것들아,”(2:6) 이주노동자들의 가냘픈 임금을 착취하는 부당업주들과 악덕 가난한 자의 고혈을 팔아먹는 고리대금업자들이 있습니다. ‘화를 입으리라 저만 잘 살겠다고 남을 등쳐먹는 것들아!’ 이곳저곳 선량한 시민들의 재산을 탐내는 주식과 부동산 사기꾼들이 설치고 있습니다. ‘화를 입으리라 죄 없는 사람의 피를 빨아 성읍을 세우는 것들아’(2:12)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은 이라크 국민들의 피를 빨아 그곳에 엄청난 미군 기지를 세우고 있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미국대사관은 바로 이라크 국민들의 피가 들어간 궁전을 개조한 것입니다. ‘화를 입으리라! 이웃에게 술을 퍼 먹여 곯아떨어지게 하고는 그 알몸을 헤쳐 보는 것들아’(15절) 탐욕에 물들어진 우리의 밤거리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화를 입으리라! 나뭇조각을 보고 ‘일어나십시오’ 돌멩이를 보고 ‘그만 주무십시오’ 하는 자들아!” 점과 부적과 미신에 빠진 오늘의 우상 사태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심판을 예언하고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는 하바꾹이지만, 그 마음은 조급합니다. 왜냐하면 그날은 쉬이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 이 하바꾹의 말씀이 사도 바울로의 로마서 1장 17절에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말을 바울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표현대로 하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서 저는 로마서의 ‘믿음’이란 단어보다는 하바꾹서의 ‘신실함’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느끼게 되는데, 왜냐하면 믿음은 곧잘 행위와 대비되기 때문입니다.


[하바꾹의 ‘신실함’과 바울로의 ‘믿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서 믿음은 바울로가 로마서에서 율법의 행위를 비난하기에 곧잘 행위가 배제된다고 하는 통념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이 믿음은 행위가 전제된 믿음입니다. 입으로만 믿는 것이 아닌 손과 발로 온 몸을 다해 하느님과 동행하겠다는 의지의 실현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시작인 신실함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신실한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생활과 행위에 근거하는 평가입니다. 그런데 이를 바꾸어 그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면 뭔가 입으로만 외치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사실 기독교 역사에서 굵직굵직한 획을 그었던 사도 바울이나 마르틴 루터는 모두 바로 하바꾹의 외친 이 한 구절에서 신앙의 깊은 깨달음을 얻었던 사람들이고 세상 권력의 힘에 대항하여 새로운 신앙 운동을 펼쳐갔던 것입니다.


        이 의로운 자들의 신실한 신앙에 기초하여 하바꾹 예언자는 우리에게 매우 놀랄만한 말로 자신의 예언을 급작스럽게 마감합니다. 3장 끝부분에 이르기까지 그는 바빌론을 들어 유대 사회를 처 없애겠다는 야훼 하느님께 매우 거칠게 항의합니다. ‘야훼여 어찌하여 우리 물귀신에게 화를 내십니까? 어인 일로 병거를 타고 말을 몰라 우리를 쳐부수시러 오십니까?... 입술이 떨리고 뼛속이 녹아내리며 아랫도리가 후들거립니다.’(8-16절) 재앙의 그날을 바라보며 하바꾹은 어찌 할 바를 모릅니다.

        

        그렇게 두려움에 떨던 하바꾹예언자가 갑작스레 감사 찬양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있는 양떼는 간 데 없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야훼 안에서 환성을 올리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3:17-19)


        심판의 두려움에 떨던 사람이 갑자기 감사의 찬송을 부르는 이 급격한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을까요? 이성적인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이는 종아리를 걷고 회초리를 맞던 아이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아픔을 느끼면서도 도망을 가지 아니하고 어머님의 품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의인의 신실함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행위입니다. 자신의 모든 인생이 철저하게 실패한 후에 자신의 모든 계획과 의지가 불타버린 그 폐허의 현장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고귀한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시선은 오늘에 있지 아니하고 다가오고 있는 내일에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본문은 너무나 유명한 구절입니다. 교회 좀 다녔다고 하는 분은 이 본문으로 열 번도 넘게 설교를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세례자 요한 혹은 엘리야 혹은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베드로의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답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예언자와 그리스도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문자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야를 뜻하는 그리스어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예언자들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로 메시야라 불리었습니다. 결국 그들도 문자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이 말하는 예언자와 베드로의 고백인 그리스도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가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일 것이라는 고백 속에는 세상 힘에 기초한 남을 지배하는 승리자로서의 기대가 담긴 고백입니다. 반대로 베드로가 고백한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 속에는 섬김과 희생이라는 신앙의 승리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전자가 높아지는 메시야라면 후자는 낮아지는 메시야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리스도라고 답을 하기는 했지만, 그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임을 예고하자 베드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습니다. 이때 예수는 그를 사탄이라고 하며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지금 기독교 안에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만, 이렇듯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만 생각하며 고백하는 신앙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야훼 하느님을 고백한다고 해서 같은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사탄이라는 꾸지람을 받는 베드로와 같이 세상 힘과 물질에 기초한 자기 욕망을 채우려는 성공적 가치를 추구하여 높아지려는 신앙인들이 있는 반면에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부활이라는 영원의 가치를 갖고 자신의 생명을 바쳐 섬김과 희생이라는 하늘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낮아지고자 하는 신앙인들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을 묻는 곳은 다름 아닌 필립보의 가이사리아라 지방을 향해 가던 도중이었습니다. 가이사리아는 헤롯대왕 때에 신축하여 필립보 때에 완성한 로마황제 가이사리아를 기념하여 세운 도시입니다. 그 중심에는 로마의 신전이 있었고 가이사리아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세상의 부와 출세를 원하는 사람들이 가는 도시입니다. 지금 예수는 이 도시 주위에 있는 마을을 향하여 가면서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아니 이는 초대 예수공동체 그리고 오늘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의 결단의 촉구이기도 합니다. 필립보의 가이사리아를 향할 것인지? 아니면 그 주위 곧 이 도시를 세우고 유지하기 위해 변방 마을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을 향하여 갈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물음은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의 실존을 향한 질문입니다. 삶의 가치 기준을 묻는 질문입니다. 성공의 신화를 좇아 허덕허덕이며 평생을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낮아지고 비움으로 자유인의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바꾹과 같이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있는 양떼는 간 데 없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야훼 안에서 환성을 올리렵니다.”하는 살아 꿈틀거리는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