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9일 오늘의 시대와 예언자 정신(6): 제2이사야

이사야 51장 4-8절; 요한 11장 38-44절


        남 왕국 유다를 멸망시키고 왕을 비롯한 사회의 모든 지도자들을 노예로 끌고 갔던 바빌론제국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한지 60년이 지났을 때 엘렘의 작은 왕국 고레스는 아시리아 제국의 패망 이후 근동 지역을 양분하고 있던 미디안 제국과 바빌론 제국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첫 장을 열었습니다.


        이러한 세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예언자가 나타나 이 모든 세계적 사건들의 의미를 단순한 제국들의 힘에 의한 정치권력의 쟁투로 보지 않고 하느님의 구원사로서의 사건으로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야훼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할 것이며, 바빌론은 무너지고 고레스를 통해 장차 이스라엘이 시온으로 돌아와 예루살렘을 재건하게 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예언자의 외침을 우리는 이사야의 뒷부분 곧 40장부터 읽을 수가 있는데, 이를 제2이사야라고 부릅니다.


        흔히 제2이사야는 위로의 예언자라고 불립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첫소리를 이렇게 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시민에게 다정스레 일러라

이제 복역기간이 끝났다고

그만하면 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고

야훼의 손에서 죄벌을 곱절이나 받았다고 외쳐라.”(40장 1-2절)


        그 유명한 헨델의 오라토리아 메시야는 여기서부터 그의 음악이 시작합니다.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는 구절이 테너의 조용한 선율을 타고 반복됩니다. 이제 노래는 점점 커져가며 빨라집니다. 왜냐하면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 길을 훤히 닦아라.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

야훼의 영광이 나타나리니 모든 사람이 그 영화를 뵈리라.”(40장 3-5절)


테너의 힘찬 노래는 이어 웅장한 합창으로 이어집니다.


“너 시온아 높은 산에 올라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너, 예루살렘아, 힘껏 외쳐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저기 오신다.

주 야훼께서 저기 권능을 떨치시며 오신다.

팔을 휘둘러 정복하시고

승리하신 보람으로 찾은 백성을 데리고 오신다.

수고하신 값으로 얻은 백성을 앞세우고 오신다.

목자처럼 당신의 양떼에게 풀을 뜯기시며,

새끼 양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젖먹이 딸린 어미 양을 곱게 몰고 오신다.(40장 9-11절)


        그런데 노래로는 손색없는 이 구절들이 신학적으로는 약간의 문제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한 분은 창조와 역사의 주인이신 야훼 하느님임을 고백하지만, 실상 현실의 역사 안에서 이 일을 행한 사람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고레스 왕을 45장 1절에서는 “야훼께서 당신이 기름 부어 세우신” 사람이라고 추켜세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오른손을 잡아 주어 만백성을 네 앞에 굴복시키고 제왕들을 무장 해제 시키리라. 네 앞에 성문을 활짝 열어 젖혀 다시는 닫히지 않게 하리라. 내가 너를 이끌고 앞장서서 언덕을 훤하게 밀고 나가리라.”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메시야?]


        기름 부어 세웠다는 말을 히브리어로 옮기면 메시야가 됩니다. 침략과 살육을 통해 페르시아 제국을 시작한 고레스를 야훼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메시야’라고 부르는 일은 과연 정당한가? 야훼 하느님을 예배하기는커녕 그 이름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메시야라고 부르는 일이 신학적으로 타당한가? 그래서 제2이사야는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너는 비록 나를 몰랐지만 너를 무장시킨 것은 나다.” 무장시키시는 하느님? 단지 이스라엘 민족에게 도움이 되었는가 아니면 도움이 되지 않았는가라는 하나의 관점에서 야훼께서 선택한 메시야이고 아니고를 결정하는 것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편협한 판단은 아닌가요?


        역사적으로 아시리아제국과 바빌론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이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과연 있는가? 제국은 약소민족들을 점령하고 그 점령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 지배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다 같습니다. 다만 아시리아는 이민족들끼리 서로 섞여 사는 혼혈정책을 바빌론은 포로정책을 페르시아는 반대로 그 포로들을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선심정책을 편 것입니다. 고레스 왕의 해방정책은 약소민족들을 점령 지배하기 위한 하나의 선심성 통치 기술이었지, 약소민족의 정치적 독립을 위한 해방정책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각자의 신들을 섬길 수 있는 종교의 자유만을 허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국을 세우기 위해 자신의 칼을 피로 묻힌 그런 고레스에게 성서가 메시야라고 부른다는 사실에 오늘을 살아가는 한 명의 성서독자로서 일단의 저항감을 갖습니다.


        그래 이런 후대의 비판을 감지한 제2이사야는 야훼의 이름으로 고레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야훼다. 누가 또 있느냐? 빛을 만든 것도 나요. 불행을 조장하는 것도 나다. 이 모든 일을 나 야훼가 하였다. 하늘아, 높은 곳에서 정의를 이슬처럼 내려라. 구름아 승리를 비처럼 뿌려라. 구원이 피어나게, 정의도 함께 싹트게 땅아 열려라. 이 모든 것을 창조한 것은 나 야훼다.”(45장 7-8절) 정의를 펼쳐나가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제국은 그 속성상 정의를 펼 수가 없습니다. 칼자루를 잡은 쪽의 정의는 펴겠지만, 약자의 정의는 결코 펼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고레스 또한 한때 기름 부음을 받은 종으로 불림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은 하느님의 눈에서 멀어져 갈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은?]


        고향으로의 귀환을 노래하고 위로를 전한 제2이사야는 이어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나라가 멸망한 비참한 현실을 목도합니다. “당신의 거룩한 성읍들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시온은 무인지경이 되었고 예루살렘은 쑥밭이 되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모여 당신을 찬양하던 곳, 그 웅대하던 우리의 성전은 불에 탔습니다. 야훼여 우리가 이렇게 되었는데도 보고만 계시렵니까? 당신의 그 연민의 정과 자비심을 어찌되었습니까?”(64장 7-11절)


        고통을 겪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그 고통에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할 때입니다. ‘내가 비록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위로하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없을 때입니다. “야훼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야훼께서는 나의 고생길 같은 것은 관심도 없으시다.”(49장 14절) 우리는 자신의 당하는 고난을 이해할 수가 없을 때, 그리고 그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절망합니다.


        사실 우리 인간이 어찌 인생의 모든 비밀을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 제2이사야는 우리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이렇게 전합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너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건 우리 기준에 맞춰 우리의 요구에 따라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기대를 갖고 하는 말입니다. ‘저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뜻대로 하세요. 저는 어느 쪽이든지 기쁨으로 받겠습니다.’라고 하는 전적인 신뢰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 이사야는 자기 뜻대로 안되었다고 항의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누가 바닷물을 손바닥으로 되었느냐?

누가 하늘을 뼘으로 재었느냐?

누가 땅의 모든 흙을 말로 되었느냐?

누가 야훼의 뜻을 좌우할 수 있었으며 그를 가르칠 수 있었느냐?”


그리고 하느님을 옹기장이에 비유하며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옹기그릇이 옹기장이와 어찌 말다툼하겠느냐? 옹기 흙이 옹기장이에게 ‘당신이 무엇을 만드는거요? 할 수 있겠느냐? 작품이 어떻게 작가에게 ‘형편없는 솜씨로군’ 하고 불평할 수 있겠느냐? 어느 누가 제 아비에게 ‘왜 이 모양으로 낳았소?’ 할 수 있겠느냐? 자기 어미에게 어찌 ‘이 모양으로 낳느라고 그 고생을 하였소?’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스라엘을 빚어 만드신 거룩하신 이.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이 손으로 하는 일을 이라 저래라 명령하는 것이냐?”(40:12-14, 45:9-11)


        먼저 우리는 고난을 받을 때에 우리는 흙이요 그릇이고 하느님은 옹기장이임을 분명하게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분명히 나의 삶에, 이 고난의 삶에 옹기장이의 뜻이 담겨 있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고백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위대한 창조와 새 역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고난 받는 백성의 입장이 아닌 창조주 야훼 하느님의 입장에 선 제2이사야는 저 위대한 신앙고백 곧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 사상>을 얘기합니다. 그때까지는 모두 힘과 권력에 기초한 세상 승리자로서의 메시야사상을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제2이사야는 고난 받는 종, 약자라고 패자라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을 향해 메시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이라는 틀을 구분하는 중요한 사상적 대 전환입니다.


        제2이사야는 모두 4편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를 전합니다. 그중 4번째의 노래는 예수님의 메시야상과 연결되어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소식을 누가 곧이들으랴?

야훼께서 팔을 휘둘러 이루신 일을 누가 깨달으랴?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 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 그렇다, 그는 인간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른 일도 없었고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었지만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혔다.” (1-9절)


        여기서 제2이사야는 고난의 피동성을 말하지 아니하고 이를 뛰어넘어 고난의 적극성 그리고 그 주체성을 탐구합니다. 그것은 그 고난을 받는 사람이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한 민족이든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왜 내가 남의 죄를 대신 짊어져야 하는가? 반문할 수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난까지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가 받는 고난에 대해 답을 피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우연이라고 답하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일입니다.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느님께서 관심하고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매를 드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서 제2이사야는 비록 하느님께서 선택한 민족이라 하더라도 다른 민족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고난이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아니 바로 그것이 선택의 이유라고 말합니다.


[고난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유대인 사상가 아브라함 헤셀은 ‘징벌로서 받는 고통은 인간에게 그 책임이 있고 구원으로서 받는 고통은 하느님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만 그 이유는 모릅니다.(예언자 250쪽) 왜 향린교회는 역사의 현장에 서서 그 아픔을 경험해야 합니까? 왜 다른 교회마냥 평범하게 예배당에 모여 손뼉 치며 하느님의 구원과 축복을 노래하고 손을 들어 축복을 비는 간구의 기도를 하지 않고 거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까? 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 이유는 모릅니다. 다만 우리는 그렇게 이 역사의 죄를 짊어지고 가도록 선택되어졌다는 고백 외에 다른 이유는 모릅니다.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우리민족은 고난을 타고 났다고 말합니다. 누군가가 담당해야 할 세계사의 하수구의 역할을 우리 민족이 담당하여 왔다고 말합니다. 그래 한반도의 모습이 마치 창녀의 자궁과 같다고 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그 이유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아는 것은 약소민족으로서 당하는 고난에서 한이 생기고 이 한이 쌓이면 우리에게 갖은 고난을 안겨준 강대국까지도 구원하는 비폭력에 기초한 평화의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역사이해입니다. 새 문명을 만들어내는 전혀 새로운 인간이해입니다.


        우리는 구약성서나 역사책을 읽으면서 간혹 질문합니다. 고대세계에서는 어째서 인간의 잔혹함에 항의하는 소리가 그토록 드물었을까? 어째서 그들은 왕이나 추장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여 사람을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들이 권력을 숭배하고 권력자들에게 복종하는 힘에 의한 승리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제국의 왕들은 말합니다. ‘왕의 말은 마치 신의 말씀과 같아 변경할 수 없다.’ 여기에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권력의 무상함을 얘기하고 권력자들의 건방진 행동과 백성들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비판했습니다.


        권력자들이 해야 할 일은 바름의 도덕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권력은 그 속성상 언제나 배가 고픕니다.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 심해지듯이 권력은 자신을 추켜세울 뿐 그 어떤 것 앞에도 무릎 꿇을 줄을 모릅니다. 군중들의 함성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술책일 따름입니다. 21년 전 오늘 전두환군사정권의 87년 6월 29일의 국민 앞에서의 항복 선언은 같은 패거리인 노태우군사정권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술수였습니다. ‘청와대 뒷산에 올라 촛불의 바다를 보면서 ’뼈저린 반성을 하고 있다.‘는 열흘 전의 이명박대통령의 발언도 위기를 잠깐 모면해보겠다는 일종의 기만이었을 따름입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영어문서에 의하면 하나의 discussion(논의)라고 표현된 것을 추가협상(negotiation)이라고 억지를 주장하며 쇠고기 고시를 강행했습니다. 끝까지 감추려고 했던 협상문에는 서명도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언론에 자물쇠를 채우고 살수차와 방패를 앞세우며 강경진압에 나섰습니다. PD수첩과 아고라와 동영상 아프리카를 억압하고 단지 고시철회를 외쳤다는 이유로 초등학생과 여성국회의원과 80대 노인들을 포함한 십여명을 닭장차 안으로 몰아넣었고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모두 폭력분자로 친북, 반미로 몰아가는 케케묵은 색깔론을 다시금 펼쳐가고 있습니다.


어젯밤에는 저희 교우이신 전국 YMCA 사무총장이신 이학영교우께서 비폭력평화의 상징으로 경찰 앞에 맨 몸으로 누웠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이들을 군화발로 짓밟고 방패로 내리찍고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이학영교우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골절상 등 심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통일뉴스의 기자로 일하는 조성봉교우도 기자완장과 모자를 쓰고 있음에도 방패로 찍어 심하게 다쳤습니다. 400여명이 구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국민들의 자유와 민주의 저항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주에는 가톨릭과 불교와 기독교의 종교인들의 항의 집회와 거리기도회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거짓말과 선의의 거짓말]


        오죽하면 미국의 워싱톤포스트지마저 25일자 사설에서 이명박대통령은 쇠고기 검역 주권을 포기함으로써 그동안 부시의 애완견으로 불리었던 영국의 블레어총리의 강력한 적수(strong contender)로 등장했다고 비아냥거렸겠습니까? 이제 이명박대통령은 단지 대한민국 국민들의 조롱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라 세계인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통령은 나라의 수장으로서 일을 집행하는 사람으로서의 고충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꼭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저 또한 목사로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데, 지난주에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의의 거짓말을 했습니다. 고시를 발표했던 지난 목요일 저녁 저는 20여명의 향린교우들과 함께 광화문 사거리에 세 시간을 넘게 앉아 있었습니다. 때는 저녁 9시, 온다던 김밥은 오지 않고 배가 슬슬 고파오기 시작했습니다. 점심시간에 교회 들리셨던 한 집사님께서 우리들에게 풍성한 점심을 사주시어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9시가 넘어가자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나이 지긋하시고 인상 좋으신 한 할아버님이 제 앞에 덜컥 앉으시면서 하는 말씀이 ‘나이든 양반을 찾아 다녔는데, 여기 계셨군요.’ 그리고는 손에 들고 오셨던 김밥 두 줄과 물 한 병을 꺼내시는 것입니다. 아니 바로 옆에 저보다 10년 이상이나 선배이신 김태준집사님도 앉아 계셨는데 왜 저를 선택했는지 지금도 의문입니다.


        하여간 저는 배도 고픈 김에 이게 웬 떡인가 ‘광야의 만나’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생각하며 김밥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손주가 몇 명입니까?’ 아니 아들딸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웬 손주 이야기? 준모가 제 옆에 앉아 있었는데, 그를 나의 손자로 보았던 모양입니다. 김밥까지 이미 얻어먹었는데, ‘손주 없어요’ 할 수는 없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두 명이요.’ ‘아니 겨우 두 명이요. 저는 다섯입니다. 그 광우병인가 하는 것 10년이나 지나 발병이 된다잖아요. 그래서 저는 손주들을 위해 나왔습니다.’ 그래 조금 자신이 생기셨든지. ‘그래 올해 나이는 어떻게 되십니까?’ 드디어 곤혹한 순간이 왔습니다. 이분은 분명 60은 훨씬 넘기셨는데, 내가 올해 55세라고 하면 얼마나 실망할까 생각하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또 다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무려 다섯 살을 더 붙여서 ‘60이요.’ ‘아니 겨우 60이요. 난 나보다 위인 줄 알았는데. 난 해방동이 64세요. 00띠요’ 한국 분들 있잖아요. 자기보다 아래로 확인되면 그때부터 목소리에 힘 들어가는거. 통성명은 안했지만 위아래를 확인하신 이분은 맛있게 김밥을 먹고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자신이 아닌 손주를 위해 광화문에 나오셨다는 한 할아버지의 얘기. 저는 그분이 무척 존경스러워 보였습니다.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은 쇠고기라는 먹거리 자체에 대해 야훼 하느님의 창조자연신앙의 입장에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광우병과 먹거리]


        광우병은 초식동물인 소에게 동물사료를 먹이면서 생긴 질병입니다. 그러면 왜 소에게 동물사료를 먹이는가? 그것은 이익에 눈이 어두운 목축업자들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운동을 하면 살이 빨리 찌지 않으니까 좁은 공간 안에다 집단으로 몰아넣고 사육을 합니다. 그러다보니 질병이 생기면 전염이 쉽게 일어나니까 이를 방지하기 위해 사료에 항생제를 넣습니다. 그리고 파리가 소등에 앉으면 자꾸 소가 꼬리를 움직이고 그러면 살이 빠지니까(하루에 250그램이 빠진답니다.!!!) 파리떼를 죽이기 위해 비행기로 살충제를 살포합니다. 이 모습은 마치 독구름이 위에서 내려오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목장의 바닥은 똥덩이들로 질퍽질퍽합니다. 옥수수와 콩 사료를 먹지만 이것들 또한 제초제에 절여진 것들입니다. 우리가 먹는 소는 성장촉진호르몬과 항생제와 살충제와 제초제 그리고 극심한 스트레스에서 자라납니다. 사람도 이런 상태가 되면 겉은 멀쩡해도 속은 암덩이가 자랍니다. 이렇게 자란 소들의 고기가 안전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의 부시정부는 우리도 먹고 있으니 당신네들이 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밀어붙이고 있고 이에 발맞추어 이명박정부는 MBC가 보도한 주저앉은 소와 광우병은 관계가 없다는 억지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물론 소가 주저앉은 이유는 광우병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2004년부터 광우병 의혹을 지닌 앉은뱅이 소(downer cow)를 잡아 상품화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2007년 1월 휴메인 소사이어티(Humane Society)가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웨스트랜드-홀막 육류회사 도축장에서 앉은뱅이 소를 잡는 장면을 촬영한 동영상이 공개되자, 시중에 팔려나간 쇠고기 7천 150t을 부랴부랴 거둬들이는 대소동이 일어난 바 있습니다. 만약에 미국정부가 소가 주저앉은 것은 이명박정부가 주장하는대로 그냥 다리에 힘이 없어서 혹은 골절상을 입어서 그런 것이다라고 생각했다면 그런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난 주 목요일에도 미국농무부식품안전국은 텍사스주에서 광우병위험물질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쇠고기를 회수하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뇌생체조직검사를 하기 전까지는 광우병과 치매가 구분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일대학교의 신경병리학과장 로라 머니딜레스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놀랍게도 치매 환자 가운데 13%가 광우병환자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2007년도에 치매환자가 5백만명이나 되고 그중 6만명이 치매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 내에서 최근 들어 심장질환이나 뇌졸중으로 죽는 환자는 매년 줄어들어가고 있는 반면 치매로 죽는 환자는 오히려 33%가 증가하고 있다고 하니 실제는 광우병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언론에도 가끔 나오지만 2,30대 청년들에게도 치매환자가 늘어나고 있는데 이분의 주장은 이것 또한 치매가 아닌 광우병과 유사한 병으로 보고 있습니다.


[광우병과 치매]

        이에 일말의 사회적 책임을 느낀 캘리포니아의 한 축산업자가 자체 예산으로 자기네 공장에서 도축되는 소는 모두 광우병검사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환영해야 할 미국정부가 오히려 이를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도대체 두려워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30개월 된 쇠고기가 안전하다고 하지만, 절대로 백악관이나 청와대 식탁에는 올라가지 않습니다. 자기네들은 안전하다고 말은 하면서 실제는 먹지 않습니다. 저는 먼저 대통령이하 모든 각료들이 공개적으로 30개월 이상 된 미국산 쇠고기를 먹는 시범을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겠다면 저는 제 돈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먹는 쇠고기는 평생 먹을 수 있도록 제공을 할 용의가 있습니다.


        저는 이번 기회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차라리 고기 줄여 먹기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채식주의자가 되자고 주장하지는 않겠지만, 오늘날 육식이 갖는 위험성에 대해 좀 더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에 여러 책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권이라도 읽어보시고 먹거리에 대한 관심을 높이시고, 그리고 우리 식탁에 오르기까지 닭과 오리 돼지 소와 같은 동물들이 얼마나 혹사당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고기를 먹어야 건강해진다는 통설에서 해방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건 옛날 얘기이고 이제는 이것들로부터 오는 질병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축산업과 지구 환경]


        지구생태학적으로도 소의 사육은 문제가 심각합니다. 현재 지구상에는 13억 마리의 소들이 있고 이 소들은 지구 땅덩이의 4분지 일을 차지하고 있고, 수억의 인간을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의 곡물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축산업은 지구환경과 인간의 건강과 우리 문명의 경제적 안정성에 유례없는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축산업은 세계의 굶주림과 오염과 삼림벌채와 사막화를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며, 야생 생물의 멸종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짐승들은 엄청난 양의 메탄가스를 방출하는데, 이것은 지구온난화의 또 하나의 중요 요인입니다. 글자 그대로 축산업은 지구의 장래를 위협하고 있다.

        

        코넬대학의 데이비드 피멘틀의 추정에 따르면, 미국에서 가축의 먹이를 완전히 풀로 바꾸면 1억 3천만 톤의 곡물이 절약되어 4억이 넘는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는 십억 이상의 사람들이 먹을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우리 건강에도 도움이 되지만 결과적으로는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행위도 되는 것입니다. 제3세계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곡물부족으로 굶주리고 있는 동안 산업화된 나라들에서 수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심장마비와 뇌졸중과 암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병들의 원인은 부분적으로 쇠고기의 과잉소비에 있습니다.


        쇠고기 문제뿐만이 아니라 근본 체제에 있어 지금 우리 앞에는 죽음과 절망이 놓여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군사제국이 자유경쟁이라는 미명아래 엄청난 자본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너무나 거셉니다. 여기에 이익에 눈이 먼 기업 재벌들과 권력가들이 한 패되어 활개를 치고 있고,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은 부자 만들어 준다는 말 한마디에 현혹이 되어 아무 생각 없이 표를 던지고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어디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정, 공동체, 비폭력]


        요한복음의 라자로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개인이 죽었다가 살아난 부활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라자로의 부활을 통해 요한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는 딴 곳에 있습니다. 이러한 오늘의 죽음의 세력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향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서 유다인들이 예수를 죽이려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라자로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예수께서 그곳으로 가겠다고 말하자 제자들이 이렇게 반문합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그리로 다시 갈 수는 없습니다.”라고 반대합니다. 그러자 예수는 라자로를 ‘우리 친구’라 부르며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말하자 이에 토마는 ‘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 하자.’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정, 공동체, 그리고 비폭력적 사랑에 관련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무대에서 곧 사라지고 마르타와 마리아가 주요 인물로 등장합니다. 라자로는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 왜 이 말을 하는가? 당시 유대인들은 사흘이 지나면 영혼이 몸에서 떠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사흘이 지났다면 영혼이 떠난 것이고 나흘이 지났다면 이미 라자로는 이 땅에서 사라졌고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끝났다는 말입니다. 그래 자매는 울부짖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 이 자매들은 예수를 따랐고 예수의 능력을 믿었던 여성제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마저도 이 순간만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죽음을 믿었습니다. 마치 오늘 우리들이 마르타와 마리아 마냥 예수를 믿는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실상은 남을 밟고 올라서야 얻어지는 돈과 권력과 명예의 죽음의 문화를 따르듯이 말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무덤 앞에 서서 ‘돌을 치워라’고 명하십니다. 마르타는 시체 썩은 냄새가 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그리고는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라자로야 나오너라’고 명하십니다. 여기 무덤을 걸어 나오는 라자로는 2천년전 팔레스틴의 베다니아라는 동네에 살았던 한 개인이 아닙니다. 죽음의 문화 속에서 죽어지내는 우리 모두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라자로가 무덤에서 나왔지만, 그는 수의에 싸여 있습니다. 무덤 밖으로 나왔지만, 지금 그는 수의에 둘러싸여 들을 수도, 볼 수도, 말할 수도, 자유롭게 걸을 수도 없습니다. 수의를 완전히 벗기까지 그는 여전히 죽음의 문화의 희생자로 남아 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명하십니다.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성서기자는 라자로가 다시금 살아나서 얼마를 더 살다가 죽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남아 있는 것은 예수님의 세 마디 명령입니다. ‘돌을 치워라.’ ‘라자로야 나오너라.’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는 명령입니다.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여러분과 하느님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죽음의 문화, 곧 폭력과 이기적 욕망의 돌을 치우시기 바랍니다. 이웃들 사이를 가로막는 경쟁과 시기의 돌을 치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오너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을 얼굴을 감싸고 있는 수건은 무엇인지 손발을 묶고 있는 끈들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시고 이를 하나하나 벗겨내시기 바랍니다. 눈을 벗겨 영원을 보시고 귀를 벗겨 하늘의 소리를 들으시고 입을 열어 참을 말하시고 손과 발을 벗겨 자유의 발걸음으로 아픔과 고난의 현장으로 나아가십시오. 이것이 예수께서 보여주신 부활의 길입니다.


        주신 말씀 기억하며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