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2일 남북화해주일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창 4장 1-8절; 루가 10장 25-37절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지키기 힘든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고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원수 사랑]


        만일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액면 그대로 실행한다면 세상은 우리를 없애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우리의 원수들을 증오하고 그들을 박멸하려고 하는 기본 체제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게 되면 세상은 우리를 체제를 전복하려는 자로 곧 범법자로 고발하고 우리에게 위협을 가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바로 이어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은 결코 우리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들은 원수 사랑에 대해 말할 때, 당시 사랑을 뜻하는 일반적인 그리스어 즉 가족간의 사랑을 가리키는 ‘스토르게’(storge)나 정열적인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eros)나, 친구들과 이웃들 사이의 애정을 가리키는 ‘필리아’(philia)를 사용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아가페’(agape)를 사용했는데, 이 용어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무조건적이며 보복하지 않는 희생적 사랑을 뜻하는 말입니다.(<예수의 평화 영성> 존 디어 )


        이 ‘아가페’의 사랑은 우연한 사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공의와 사랑이 결국 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우리의 굳은 결단을 뜻하는 용어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과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랑하겠다는 사랑이고 이 사랑은 아래로부터가 아닌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겠다는 우리의 신앙 고백은 바로 이러한 아가페의 원수 사랑을 회복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창세기의 처음 부분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인간의 근본적인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하느님이 이 세상을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창조하셨다는 신앙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 하느님을 대신해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책임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를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첫 인간을 아담과 하와로 말하고 이 인간들은 본래 에덴이란 동산에서 하느님과 함께 어울려 살았는데, 그만 먹지 말라는 선악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그곳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인간의 세계 안에 고통과 죄가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형제 살해 이야기의 어제와 오늘]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 창세기 4장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만 형이 단순한 시기심으로 동생을 살해하는 매우 끔찍한 얘기를 전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 속에 여러 가지 신학적인 해석을 필요로 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성서는 에덴동산 밖에서 일어난 가장 첫 번째 사건으로 형제살육의 얘기를 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인간역사라고 하는 것이 바로 살육과 전쟁의 역사로 점철되고 있는데, 실상 서로 죽이는 그들은 형제라는 사실을 함축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정세를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는 화약고는 중동과 한반도입니다. 중동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간의 충돌은 단순히 두 민족 간의 대립이 아닌 그 배후에는 서구 기독교세력과 중동의 이슬람세력이 있어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 또한 38선을 대칭하여 남과 북 그리고 그 배후에는 각각 대륙세력인 중국과 러시아, 해양세력인 미국과 일본이 자리 잡고 있어 이곳 또한 언제나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위험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이 두지역의 공통점은 이렇게 원수시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본래는 한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배다른 형제 이스마엘과 이삭의 후예들입니다.


        이에 반해 남과 북은 단군의 한 후예들입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문화나 언어의 배경은 비슷하지만 종교가 다르고 말이 다릅니다. 그러나 남과 북은 말도 같고 문화도 같습니다. 그들은 이천년 만에 다시 만나 다투게 되었지만, 우리는 5천년을 같이 지내오다가 이제 서로 다툰지 불과 60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 사이에도 장벽이라는 것이 있어 왕래가 자유롭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족끼리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남북은 오고가는 일은 커녕 생사의 소식조차 모르는 것이 태반입니다. 인간의 비극에 이런 비극도 없습니다. 이메일 하나면 집 안방에서 아프리카 저 끝까지도 소식이 단 순간에 오고가건만 그저 걸어가도 반나절이면 걸어갈 수 있는 지척에 있는 가족들의 생사를 알 수 없다니 비극에 이런 비극은 없습니다.


        형제살인. 중동에서는 자유와 독립운동 그리고 테러와 보복이라는 이름으로 얼굴도 비슷한 형제들이 서로를 죽이고 있습니다. 반면 한반도는 과거 58년 전에는 3년간의 전쟁을 통해 수백만의 인명을 살상하였지만, 그 이후로는 총탄에 의한 살해보다는 빨갱이와 불순분자라는 이념에 의한 살해, 그리고 굶어 죽어 가는데도 모른 채 하는 간접살해가 조용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같은 뱃속에서 나온 형제임에도 남쪽 형제들은 30개월 이상 된 쇠고기는 먹지 않기를 바라고 있고 북쪽 형제들은 고기는커녕 옥수수 죽이라도 배부르게 먹어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고 살아갑니다.


        형제는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자리매김을 해야 할 관계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일은 스스로의 인간성을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 무엇이 우리를 이런 지경으로 몰아넣었습니까? 형제인 북한의 국기를 들고 흔들면 감옥에 가지만, 얼굴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나라도 멀어 도대체가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대다수의 국민이 가보지도 못한 미국의 국기를 들고 흔들면 환영을 받습니다. 대통령부터 얼굴 색깔도 다르고 말도 달라 겉으로는 도대체가 한 형제로 보기가 힘든데,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부르지 않는 별장에 가서 하루 밤을 보내는 형제의 우애를 과시했습니다. 그리고 진짜 혈육인 북쪽과는 얼굴도 보지 않겠답니다. 우리 국민 가운데 4분지 일이 이산가족입니다. 지금도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나 아버지 그리고 함께 한 밥상에서 밥을 먹고 한 이불을 덥고 자라났던 형제나 자매를 원수라고 부르도록 강요받는 비정상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가정들이 각기 사연들을 갖고 있습니다만, 오늘 이 시간에는 저희 교우인 유호명집사님의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올해 고희를 맞이하셨지만 지금도 일을 하시면서도 통일운동의 현장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몸으로 뛰는 것은 바로 집사님이 어렸을 때 겪은 너무나 비극적인 한 사건 때문입니다. 작년에 한 잡지에 집사님의 인터뷰 내용이 실렸습니다.


[자매간에 총부리를 겨눈 이야기]


        일제시대에 집사님의 부모는 조선 땅에서는 먹고 살기가 어려워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원자폭탄이 투여된 나가사키에서 살았는데, 폭탄이 떨어질 때 산에 굴을 파고 숨어 있어 다행히 피해는 입지 않았습니다. 그래 집사님은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광복을 맞이해 귀국선을 타고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부산에서 평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둘째 누이는 일본 교포 남자의 고향인 당진에서 살림을 차렸고 나머지 가족은 아버지가 탄광에서 일하게 되어 평양 사동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625가 터졌습니다. 그때 집사님은 13살이었습니다.


        집사님의 회고입니다. “언제나처럼 대동강 옆 개천에서 동무들과 미역도 감고 놀고 있는데, 군복에 총을 메고 우리 쪽으로 군인들이 오는 거야. 국군 간호장교 대위인 여군 한명이 앞서고 남자 호위병 서넛이 카빈총을 들고 뒤따르고 무서웠지. 우리 쪽으로 와서 우리 어머니 집이 어디냐고 물어 보는거야. 자세히 보니 당진에 살던 둘째 누이야. 어이구 이 녀석 많이 컸네. 그러면서 껴안더라고, 반가웠지. 그리고 집에 함께 들어가는데 동네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몰려왔지. 그때 셋째 누이가 둘째 누이 들어오는 걸 봤대.”


        그때 인민군 간호장교 소좌인 셋째 누이는 인민군과 함께 후퇴하지 못하고 집에 숨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누이는 군의관 장교인 사귀는 남자의 영향으로 인민군 간호장교가 되었고 둘째 누이는 어릴 때부터 나이팅게일을 존경해 국군 간호장교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 엄마가 빨리 숨어라 해서 인민군 누이는 치마저고리를 입은 채로 장롱과 벽 사이 좁은 틈에 숨었지. 혹시라도 장롱 속이 보이지 않게 넷째 누이가 가로막고 있었지. 어머니 아버지는 딸이 오니까 반가우면서도 한편 불안한 거야. 서로 반가워하고 인사하고 있는 와중에 숨어 있던 인민군 누이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거야. 국군 누이를 핏줄보다 적으로 생각했나봐. 죽여 버리겠다고 외치면서 권총을 들고 국군 누이를 향해 겨눴어. 국군 누이는 멍하니 서 있고 뒤에 서 있던 호위병들이 인민군 누이를 향해 총을 겨누었지.“


        나는 누나들 다릴 붙잡고 엉엉 울었지. 금방 누구라도 죽을 것 같았으니까. 자식들은 울면서 바짓가랑이 잡고 말리고, 어머니는 왜들 그러냐고 통곡을 하면서 절대 방아쇠 당기지 마라. 니들 중 한명이라도 죽는 거 원치 않는다. 당장 총을 내려놓아라 말리셨는데, 그게 어머니 마음이고 우리 마음이었어. 동네 사람들 몇몇은 방에 들어와 있고 문 밖에서 보는 사람도 있고 방 안 상황이 험악했지. 이게 딱 우리 민족의 아픔이고 현실이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국군 누이가 호위병에게 총을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럴 수 없다고 머뭇거리자 단호하게 재차 외쳤다. ‘당장 내려놓지 못하겠어“ 그제서야 호위병들이 총을 내려놓았고 인민군 누이도 총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부모님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군 누이에게 말했다. ”오늘 이일은 없었던 걸로 하고 작은애를 도망하게 하자. 동네사람들도 다 못 본 거다.“ 국군 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인민군 누이는 치마저고리 차림 그대로 뒷간으로 난 쪽문을 박차고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것이 가족이 본 누이의 마지막 모습이었지.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그리고 14후퇴가 시작했고 국군누이가 중공군이 몰려오니 내려가자고 했고 그때 같이 갔으면 안전하고 빠르게 피난할 수 있었지만 부모님들은 인민군 셋째 누이를 두고 갈 수가 없어 계속 버티고 버티다가 할 수 없어 결국 피난길에 올랐고 그것이 또 하나의 이산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리곤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전까지 부지런했던 아버님은 그때부터 허구한 날 술만 마셨고 어느 날 셋째 누이를 한 번만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 집사님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형과 함께 절대 술을 마시지 말자는 약속을 했고 지금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곤 어머님은 메리야스 보따리 장사를 하시다 길에서 쓰러져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님도 셋째 누이를 한번 보고 죽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런데 집사님께서는 이런 비극적인 가족사를 안고 있지만, 처음부터 통일운동에 앞장섰던 것은 아닙니다. 집사님은 자신이 변화된 경험을 이렇게 말합니다. “1989년 임수경이 텔레비전에 나오던 때야. 한참 통일바람이 불던 때였잖아. 그때 일하던 중에 우연히 TV를 보는데 임수경이가 ‘우리는 하나다’라고 부르짖고 어릴 때 뛰어놀던 대동강, 모란봉, 평양 시가지가 나오는데 셋째 누이 생각이 나면서 충격을 받았지. 그래서 연세대학교 집회에 한번 가본거야. 거기서 문익환목사님이 앞에 나와서 열사들 이름을 하나씩 부를 때, 그 자리에서 회개를 했어. 난 그 전까지 데모하는 학생을 보면 폭도들이라고 했거든. 그날 정말 통곡을 했지. 김도향의 노래 있잖아.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내가 딱 그런 놈이었어.


[예수님 당시의 국가보안법]


        이글을 저는 몇 번 읽었습니다. 그때마다 목이 메였습니다. 원-- 세상에 부모님과  누이와 동생들과 이웃들 앞에서 서로 적이라고 총을 겨누다니 말입니다. 이런 나라가 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을까요? 이건 인간의 세상이 아닙니다. 동물들도 그렇게는 살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 이하, 동물 이하의 벌러지(벌레)같은 인생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잘 먹고 잘 입어보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벌러지가 잘 살면 그래 얼마나 잘 살겠습니까? 자기 옳다고 주장하지만 이념이라는 것은 이렇게도 무섭습니다. 자기 성찰을 잊어버리는 순간, 역사 인식을 멈추는 순간 인간은 이렇게 전락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남과 북은 서로 그렇게 원수시 여겼습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의 지배아래 있어 서로 다른 나라는 아니었지만, 솔로몬 왕 이후 수백 년 동안 남쪽은 유대왕국 북쪽은 이스라엘 왕국으로 갈라져서 수없이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북왕국이 먼저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고 얼마 있지 않아 남왕국도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이제 나라도 없어졌으니 서로 형제간에 화목하면 좋으련만, 북쪽 왕국을 점령했던 아시리아의 혼혈정책으로 인해 남쪽 사람들이 북쪽 형제를 죄인으로 정죄하고는 예루살렘 성전에 접근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 북쪽 사람들도 할 수 없이 사마리아 성전을 만들고 거기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서로 상종도 하지 않는 원수관계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때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들어가 한 여인과 대화를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국가보안법을 어긴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안고 루가복음의 유명한 얘기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얘기가 시작합니다. 한 유대인 율법선생이 예수님을 떠보기 위해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율법서에 무어라고 적혀 있느냐?’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율법교사가 묻습니다. 이렇게 묻는 이유는 당시 율법교사들 사이에 이웃에 대한 정의를 내리느라고 논쟁이 심했는데, 이 율법교사는 예수님과 더불어 이 부분에서 한번 율법 논쟁을 벌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를 이미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완전히 논쟁의 초점을 뒤엎어버리는 이웃에 대한 새로운 얘기를 펼쳐나가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갔고 또 레위사람도 그러했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 하고 부탁하고 떠나갔다. 얘기는 매우 간단합니다. 겉으로만 본다면 이는 어쩌면 오늘날에도 쉽게 일어날 수 있는 구제의 한 장면입니다.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사회정치적 상황]


        그런데 이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단순한 구제는 아닙니다. 우선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라는 장소 설정에 주의할 필요가 있고 강도라는 단어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리고는 헤롯왕의 겨울궁전이 있는 곳이고 세리장 자캐오가 살던 도시로 일종의 귀족들의 휴양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를 왕래하는 사람들이란 주로 정치권력에 끈을 대면서 살아가던 권력지향적인 사람들과 부자들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서에 기록된 강도들이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그런 파렴치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싸우던 독립군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얘기 속에서 강도만난 사람이란 어쩌면 서민들을 쥐어짠 뇌물을 들고 가던 부자요 로마에 아부하던 매국노였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왜냐하면 돈만을 강탈하는 단순강도라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았다’는 구절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사제와 레위인들]


        그리고 이곳을 지나가는 사제와 레위인들 예루살렘 성전에 몸담고 있는 종교인들이긴 하지만, 정치적 현실 권력에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부정한 사람들이라는 암시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 이들은 자신들의 직분을 망각하고 본인의 안전만을 생각하면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피해갔습니다. 핑계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피를 만지는 것은 자신들을 더럽히는 율법에 어긋나는 부정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성전에 관련된 중요한 일을 위해서 가고 있다. 조금이라도 지체해서는 안 되고 그리고 여기서 머뭇거리다가 내가 만약 다치기라도 한다면 이 일은 그르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보다 큰일을 위해 난 이 자리를 빨리 피해야 한다. 그리고는 속으로 기도하면서 지나갔을 것입니다. ‘주님 그의 생명을 지켜주세요.’ 어쩌면 오늘 우리는 중국에서 일어난 지진 그리고 버마에서 일어난 해일로 인한 이재민들의 아픔의 소식을 듣고 있고 북한에서 사람들이 굶어간다고 하는 얘기를 들을 때에 그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주님 그들을 지켜주세요. 유엔을 통해서든 정부를 통해서든... 주님 아시다시피 저는 다른 일로 바쁘고 그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 미약합니다.’


        사실 우리는 북한의 어려운 얘기들 들으면서도 그렇게 어려우면 국방비를 줄이고 핵개발을 하지 않으면 되지 않아! 라고 쉽게 말합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요. ‘아니 나가서 일하면 되잖아.’ 사실 교회에 와서 돈 얼마를 요청하는 노숙인들을 보면 대체로 신체들이 건강합니다. 그래 저도 속으로 부화가 날 때도 많고 왜 건강한데 일을 하지 않느냐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만, 알고 보면 나름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속사정들이 다 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한데 건강이 좋지 않다든가 정신적으로 일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왜 그분들이라고 떳떳하게 일을 하면서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속사정들이 있습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들이라고 세상을 향해 떳떳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금, 우라늄, 석탄을 비롯한 천연자원도 풍부합니다. 일설에는 상당한 양의 석유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계 최강의 미국이 군사적으로 위협을 하고 철저하게 무역규제를 하고 있는 한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한해 두해도 아니고 60년을 그렇게 하면 어느 나라고 견디기가 힘듭니다. 항복하면 될 것 아니냐고 얘기하지만, 여러분이 그 입장이라면 항복하겠습니까? 가난한 사람이 버틸 수 있는 단 하나는 스스로에 대한 자존심입니다. 북한은 빵과 자존 사이에서 자존을 먼저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죽더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마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고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배가 고프면 돌로 빵을 만들어 먹으면 되잖아!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하며 이를 물리치지 않았습니까? 물론 예수님도 빵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빵을 위해 영혼의 자유를 포기하고 물질의 노예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물질의 노예가 된 대통령]


        쇠고기 협상을 보면 이명박대통령은 빵을 위해 국민의 자존을 포기하고 스스로 물질의 노예가 되기를 자처한 사람입니다. 지난 주 이명박대통령이 국민들이 들고 일어난 촛불을 보고서야 잘못했다고 고개를 숙였지만, 제가 보기에는 아직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명박대통령의 정책은 비지네스 프렌들리니 선진화니 말은 그럴싸하지만 내용은 별게 아닙니다. 초창기 미국 부시대통령의 정책을 미국 언론에서 ABC정책이라고 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Anything but Clinton 전임 클린톤과 다르면 뭐든지 좋다. 그게 8년 만에 정권을 잡은 공화당의 부시 정책이었습니다. 이명박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Anything but 노무현입니다. 국민이 뽑아준 김대중정권과 노무현정권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며 이 두정권이 이룬 모든 것을 다 무로 돌리고 뭐든지 반대로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를 바라보고 하는 방향을 잡는 것인데, 과거를 기준으로 무조건 반대만을 고집하는 것은 정책이 아닌 이유 없는 반항입니다. 이 이유 없는 반항이 결국은 국민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대통령은 아직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대운하도 지금 국민들의 여론이 80%가 넘으니까 안하겠다. 그렇게 사나이답게 말하면 좋은데, ‘국민이 원치 않으면 안하겠다.’ 어떻게든 꼼수를 피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별 이상하고 해괴한 별명을 얻는 것입니다.


        북한에 대한 정책도 그러합니다. 달라고 손을 내밀면 그때 주겠다. 먹을 것 갖고 사람을 몰아세우는 일은 참으로 치사한 짓입니다. 형제가 둘이 있는데, 형은 먹을 것이 많고 동생네는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는 것을 동네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은 동생이 와서 무릎 꿇고 도와달라고 하기 전에는 줄 수 없다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말합니다. 여러분이 동생이라면 가서 손을 내밀겠습니까? 우리가 돕더라도 받는 사람의 자존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생색을 내다  보면 오히려 역효과만 나는 것을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남을 도울 때에는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매우 조심스럽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장로대통령께서는 교회 안다니는 사람도 다 아는 이 유명한 구절도 모르는지, 공개적으로 도와달라고 얘기해라 그러면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제 미국과의 핵협상이 잘 진행되면서 미국도 쌀을 보내겠다고 하고 테러국명단에서 삭제할 예정입니다. 이제야 이명박 정부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뭔가 주겠다고 하지만 북쪽에서는 냉담한 표정입니다. 아마 남북한 경제협력은 이명박정권 하에서는 상당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쩌면 북한의 풍부한 천연자원들은 중국 미국 일본의 차지가 될 것이고 남한은 남들이 북치고 장구 치고 난 다음에 설거지나 하러 갈 것 같습니다. 실용을 해야 할 곳에서는 쓸데없는 오기를 부리고 조금 오기를 부려할 데 가서는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품었던 마음]


        예수님의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읽으면 저는 언제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개인으로 보면 누구나 사마리아 사람이 될 수 있지만, 하나의 민족 단위로 보면 오늘날의 유대인은 누구이고 사마리아 사람은 누구인가요? 세계 10위권에 육박하는 국력을 자랑하는 남한이 유대인이고 북한은 남한으로부터 천대받고 세계에서 따돌림 당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아닌가요? 예수님은 유대인이 피를 흘리고 있으니 당연히 도와야할 동족 유대인은 도망을 가고 오히려 핍박을 받는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을 돕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유대인들을 향한 분노가 있을 법 한데, 이 사마리아 사람은 전혀 그런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마음에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가엾은 마음이란 긍휼의 마음이고 이는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자궁의 마음입니다. 곧 어머니가 자식에게 품은 마음이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해 품는 마음입니다. 어떻게 그에게 그런 마음이 생겼을까요? 사제나 레위인이 갖지 못했던 그 아픈 자와 하나 되는 마음을 그는 어떻게 가질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 자신이 바로 그러한 폭력의 희생자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당한 사람만이 고통당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여기에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산상수훈 말씀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가난 그 자체가 복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난을 겪은 사람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만이 갖는 긍휼의 마음이 있습니다. 이 긍휼의 마음이 있어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고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 가난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을 얻으려면 당장은 손해입니다. 물질로 손해이고 시간으로 손해입니다.


        가난의 마음을 품었던 사마리아 사람, 그는 자신의 여행 계획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값진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부었습니다. 어쩌면 이것들은 자신의 장사품목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온몸의 상처에 부었으면 상당한 양을 소비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이익이나 안전에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나귀에 태워 여관에 가서 밤을 새워가며 치료를 하고 그가 어느 정도 회복을 하자 아침에 출발하며 여관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지불하겠으니 그가 완전히 회복되도록 돌보아 주시오.’ 생면부지의 사람이요 더구나 자신을 괴롭히고 핍박하는 유대인입니다.


        예수님은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당당하게 묻는 유대인 율법선생에게 아니 지금 우리들에게 ‘너도 가서 그렇게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원수시 여긴다면 더욱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사람의 관계는 원수의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핍박을 받았다면 더욱 그리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 또한 로마로부터 유대인들로부터 이중의 핍박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전 언젠가는 이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사람을 도왔던 것처럼 북한이 남한을 돕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움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도움만 베풀고 사는 사람도 없고 도움만 받고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도울 수 있을 때 도우시기 바랍니다. 전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도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시기 바랍니다.


[남북나눔 헌금 약정]


        오늘 주보에 남북나눔 헌금 약정서라는 종이를 나눠드렸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이를 모두 꺼내시기 바랍니다. 연필도 꺼내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하겠다고 미루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때요 결단의 때입니다. 이제 침묵의 기도를 할 터인데, 약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일회성이 아니고 1년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남북화해주일이니까 상징으로 하는 것 아닙니다. 이는 진정 북한주민을 위해 기도하자는 것이고 통일을 위해 기도하자는 말입니다. 내 힘으로 하자는 거 아니고 위로부터 임하는 하느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의 힘으로 하자는 말입니다. 매주일 조금씩 하시든 한 달에 한번 모아서 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바라기는 돈이 목적이 아닌 기도가 목적이니까 월정보다는 주정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원치 않으신다면 이름은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러분이 쓰신 약정서는 아무도 보지 않을 것입니다. 헌금계수위원도 보지 않을 것이고 저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접혀진 상태 그대로 모아서 여기 제단에 올려놓고 1년 동안 형제사랑과 통일을 위한 우리의 결단과 헌신기도의 상징으로 삼겠습니다.


        김태준집사님은 북에서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며 몇 년 전부터 아침을 굶으시면서 남북나눔을 하십니다. 우리가 이 정도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모두가 기도와 더불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제 어떤 집사님이 제게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에 비하면 기도훈련이 부족하니 매일 저녁 10시에 온 교인들이 각자 집에서 기도하는 훈련을 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셨는데, 매우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저녁 10시부터 약 15분은 우리 모두가 기도하는 시간으로 정하겠습니다. 교우들의 사정을 보시면서 기도하시고 남북화해와 통일 그리고 세상 평화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침묵 기도 후 3절 찬송을 부르는 동안에 쓰신 종이를 접어서 가운데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가운데 줄에 있는 분들이 봉헌궤가 지나갈 때에 모은 약정서를 넣으시기 바랍니다.


        이 헌금을 갖고 어떻게 도울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오늘 목회운영위원회를 통해 논의하겠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가난한 마음, 아픈 자와 하나 되는 자궁의 마음이 오늘 여러분의 마음이 되어 하늘나라를 소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함께 주신 말씀 생각하며 조용한 마음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