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8일 송년주일- 브솔의 시냇가

삼상 30: 1-4, 19-24; 마태오 12장 28-30절


        한해를 마감하는 주일이 되면 교우들이 자주 인용하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루가복음 13장 6절 이하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화과나무를 심고 열매가 나기를 3년이나 기다렸는데, 열매가 나지 않자 포도원지기를 시켜 아예 잘라버릴 것을 얘기하자., 포도원지기가 하는 말이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만일 그 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 버리십시오.’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본래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만, 이를 개인의 신앙생활에 적용해도 좋은 말씀입니다. 그래 송년주일이 되면 목사님들도 주로 이 성서 구절을 중심으로 하늘뜻펴기를 합니다. 제목은 ‘금년 한해만 더 기다리소서.’


        저는 주님께 죄송하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내년에는 더 잘해보겠다는 의미에서 드리는 이 기도는 참으로 중요하고 또 권장할 만한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도가 매년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성서의 말씀은 딱 한해만 기다려보고 그래도 열매가 안맺으면 잘라버리는 심판이 임합니다만, 우리들은 매년 반복을 합니다. 저는 올 한해쯤은 이런 기도를 드렸으면 합니다. ‘주님 제가 하느라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부족하지만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열매라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어떤 세상 열매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결심이나 변화된 삶의 가치관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죽을 때에 후회하는 3가지]


        사람이 늙어 죽을 때가 되면 공통으로 후회하는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베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가난하든 부하든 죽을 때가 되면 ‘그렇게 악착같이 모아봤자 별것도 아닌데 왜 좀 더 베풀고 나누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가장 크다고 합니다. 둘째는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그때는 내가 옳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그때 좀 더 생각하고 그때 좀 더 여유를 갖고 참았더라면 내 인생이 좀 달라졌을텐데’ 라며 후회를 합니다. 셋째는 좀 더 과감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인생이라는게 지내고 보면 별 것 아닌데, 그 차이라는게 별 것 아닌데 그때 왜 그렇게 불안해하며 너무 안일하게 산 것에 대해 후회를 합니다. 좀 더 과감하게 좀 더 용기있게 새로운 것을 향해 좀 더 모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아시는 분은 알고 계시지만, 김경숙/윤주삼 집사님의 둘째인 태나양이 대학을 졸업하고 두 개 세 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아 세계일주 배낭여행을 떠난 지 거의 일 년이 되어갑니다. 유럽은 물론이요 아마존밀림 등 오지까지 다니고 있고, 소매치기도 당하였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부모님들은 다음 달 돌아올 때가지 가슴조리며 사시겠지만, 저는 그가 참으로 자랑스럽고 부럽습니다. 기껏해야 8,90년 사는 건데 우리 인생에 뭐가 남겠습니까? 나이가 들어 젊은이들에게 뭔가를 준다고 할 때 할 수 있는 얘기가 뭐가 있겠습니까? 인생에 남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열매라는 것 또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단식영성훈련이 있는데, 이 또한 한 번도 해보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한번 도전해볼만한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죽음은 삶의 문제]


        오늘은 일 년의 마지막 주일이면서 우리 곁을 떠나간 사랑하는 이들을 기억하는 추모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벽부터 저녁늦게까지 수고하고 노력하지만, 정작 죽음이야 말로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삶의 문제입니다. 요즘은 종교의 역할이 행복이니 성공이니 하는 현세에 직결되어 있지만, 본래 종교는 죽음에 대한 명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들의 영혼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리가 이러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삶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삶의 문제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바로 해결하면 삶의 바른 길이 보이고 의욕이 생깁니다. 죽음은 내일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문제입니다.


        크게 보면 인생을 살아가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세상적인 업적을 이루기 위해 애태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목표가 있는 것은 좋은데, 그 목표가 세상적이다 보니 만족함이 없고 항상 분주합니다. 일이 없으면 불안해하는 형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하루하루 순간순간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에는 연연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한 것으로 그에게는 만족이 있는 것이고 이에 대한 평가를 세상이 아닌 절대자 신에게 맡깁니다.


        이 두 종류의 인간형을 사회학자 에릭 프롬은 존재형 인간과 소유형 인간으로 말합니다만,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여 좀 쉽게 말하면 순례형과 피난형입니다. 이 두 형은 돌아갈 목적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순례형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고향을 염두에 두고 있어 세상 짐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피난형은 세상에 매여 있어 갖고 다니는 물건이 많습니다. 어깨에도 한 짐, 등에도 한 짐 그리고 양손에도 가득. 들 수 있는 한 다 듭니다. 사용할 때는 좋은데, 풍경을 감상할 겨를이 없어 여행의 즐거움이 없습니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과도 깊은 대화를 나눌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교회에도 이 두 부류가 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별 볼일도 없는데 급히 나가는 피난형이 있는가 하면 이사람 저사람 만나 여러 얘기를 나누다가 천천히 돌아가는 순례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유형인간인 피난형이나 존재형 인간인 순례형은 그냥 살아갈 때는 큰 차이가 없고 오히려 소유형의 인간이 더 성공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대세가 판가름납니다.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 바다에서 발생한 해일로 수십 만 명이 사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현재 감리교회 분규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모 대형교회 목사는 이들이 죽은 것은 예수 안 믿어 죽었다고 해서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예수의 ‘예’자도 모르는 181명의 어부로 이루어진 모건 바다집시들은 모두 무사하였으니 이 일은 어떻게 해석할는지 의문입니다. 이 바다집시들은 일 년 내내 인디안 해양에서 떠돌아다니며 고기잡이를 하다가 12월이면 태국해안가의 오두막에서 생활합니다. 이 종족의 원로들은 오랫동안 내려오는 바다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바닷물이 빠르게 줄어들었다면 그것이 사라진 양만큼의 물이 다시 밀려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바닷물이 갑작스럽게 빠져나가면서 많은 고기들이 물 없는 바닥에서 펄떡이고 있었습니다. 어부에게는 애쓰지 않고 고기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실제 다른 서부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우스 수린 섬에 있던 집시 촌장은 물이 해변에서 갑작스럽게 빠져나가자 모든 사람에게 섬 중앙에 있는 사원으로 달려가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눈앞에 펄떡이는 고기에 눈이 팔렸더라면 고기 몇 마리는 공짜로 잡을 수 있었겠지만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예수께서 말씀 하신 어리석은 부자 농부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오늘 밤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 추수의 수확이 많은 것을 기뻐하며 창고를 더 크게 지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 말입니다.


[추모 이야기]


        제게는 사촌 동생이 몇이 있는데 남동생은 하나입니다. 조헌장이라고 이름도 거의 비슷합니다. 할아버님께서 제게는 깨우침과 법(憲)을 바르게 하라는 뜻에서 정(正)이라고 지어주고 그에게는 이를 넓히라는 의미에서 장(張)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나이 50도 안되어 이 땅의 삶을 마쳤습니다. 80년 5월 광주항쟁 마지막 날 정부군의 공격이 있던 그날 저녁 도청에서 빠져나온 이후 동료들과 함께 목숨을 바쳐 투쟁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항상 괴로워하면서 술을 마시더니 끝내는 한 많은 삶을 마쳤습니다. 장례가 성탄절이어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 대신 저기에 초를 켰습니다.


        오늘 여기 초를 켜신 분 가운데 교우이셨던 홍순명교우님이 계십니다. 교회 다니신 기간이 짧아 모르시는 분도 많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가장 웃어른이셨습니다. 홍순명할아버님은 평화와 통일을 위한 평화연대 명예이사장으로 계시다가 지난 3월 12일 98세의 일기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꿈에도 소원은 오직 통일이라 열망하시던 홍교우님은 자신의 집을 평화연대 사무실로 내놓으시고 95세까지 거리시위에 참가하시는 등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하시었습니다.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교직생활을 하시다가 한때 여운형 선생의 조직에 참여하여 좌익으로 몰려 두 번이나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이로 인해 자녀들은 많은 고통을 겪어 이민을 떠났고 부인마저 20여 년 전에 사별하시어 그간 외롭게 지내시었습니다. 자녀들이 미국으로 오라고 하였지만, 통일운동에 참여하시기 위해 이를 거절하시었습니다.


        5년 전 이런 얘기를 하신 것이 글로 남아 있습니다. "난 공산주의를 모르오. 독립과 통일만이 내 꿈이오. 올해 나이로 아흔세 살인 나에게 소망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어머니의 소식을 듣는 일이다. 나는 외아들이었지만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더구나 어머니의 묘소가 어디인지도 모른다. 고향 어디인가에 있을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도 알고 싶다. 내 고향은 평안북도 신의주시 붕서동 225번지이다. 나는 이곳에서 1911년 2월9일 태어났다." 이제는 하늘나라에 가시어 꿈에도 그리던 어머님을 만나셨으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지금 홍할아버님이 남기신 통일운동의 업적을 생각하면서 우리들 주위의 이산가족의 한을 안고 살아가는 수백만의 사람들의 아픔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다.


        올해는 이명박정부의 반통일정책 그리고 실용주의라는 허울 안에 감추어진 신보수주의의 이념대결정책, 일제 때의 상해임시정부나 독립운동을 격하시키고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근대화의 이름으로 미화하고 이승만정권이나 박정희정권의 독재를 모두 건국과 경제건설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치장하는 어리석은 일들을 계속 자행하고 있고, 오늘 국회에서 한나라당은 국민의 인권과 언론자유를 제한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을 벼랑 끝으로 내어 몰고 소수 재벌을 위한 법규들을 폭력적인 힘으로 밀어붙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듯이 역사는 더디 가는 것 같지만 분명 정의와 평화의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2천 년 전 성령의 힘에 의해 마귀의 악한 세력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을 때부터 우리에게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와 있는 것입니다.


        올해는 특히 경제성장이 다른 어떤 것보다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자연히 분배와 독점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들이 사회적 갈등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다윗의 생애 가운데서 일어난 한 사건을 통해 이 부분을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무심(無心)]


        다윗의 생애는 한마디로 파란만장한 삶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들에서 양을 치던 어느 날 갑작스레 불려나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던 그때로부터 골리앗장수와의 대결과 승리, 이로 인한 백성들의 인기상승 그리고 이를 시기한 사울왕의 살해 위협 심지어는 그를 위해 악기를 연주하는 도중에도 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십여 년 가까이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광야 이 끝에서 저 끝으로 계속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끝내는 더 이상 도망할 곳이 없어 원수인 블레셋 민족에 망명을 하고 때로는 미친 듯 위장을 하여 목숨을 부지하였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왕의 신하가 되어 시글락이라는 곳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부하 600명과 함께 살아가던 때입니다.


        어느 날 블레셋의 아기스 왕이 이스라엘 민족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다윗도 함께 나갈 것을 요청합니다. 다윗은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처합니다.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은인의 청을 거절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의 형제들을 향해 칼을 휘두를 수도 없습니다. 후방에서 어영부영 눈치껏 있다가 돌아올 생각을 하고 일단 참가합니다. 그러자 다행스럽게도 블레셋의 장군들이 다윗이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만약에 후방에서 우리를 돕는 척 하다가 우리를 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가 망명했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를 신임할 수 없으니 그를 돌려보내십시오.”


        그래 다윗은 못이기는 척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마도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위기를 벗어나게 해 주신 하느님의 인도를 찬양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집에 돌아와 보니 자신이 살던 마을은 쑥대밭이 되어 집은 온통 불타 없어지고 자신의 가족들은 모두 끌려가고 한명도 없는 것입니다. 다윗과 함께 한 600명의 사람들이 모두 바닥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라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죽음의 사선을 수없이 넘었던 사람들입니다만 이 순간만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붙잡혀간 최악의 상황이 전개되자 그만 넋을 놓고 쓰러지면서 울부짖습니다. 격분한 나머지 몇 사람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공동체가 위기를 당하면 서로 힘을 합쳐 그 위기를 벗어나야 하지만, 사람들은 책임을 물어 내부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이 때 다윗이 취한 행동은 먼저 그들과 대화하자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골방에 들어갔습니다. 이때의 모습을 성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곤경에 빠지게 되었으나 자기의 하나님 야훼를 믿고 힘을 얻었다.’ 그리고는 사제 에비아달의 도움을 받아 600명의 부하들과 함께 추격에 나섭니다. 허겁지겁 쫓아가다가 브솔 시냇가에 도착을 했는데, 3분지 일에 달하는 이백명이 더 이상 나갈 힘이 없다고 주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을 하겠다고 집을 나선지가 여러 날이 되어 제대로 잠도 자보지 못하고 계속 강행군을 하여왔기 때문입니다.


        그래 힘에 부친 나이 들고 병약한 부하 200명을 남겨두고 400명이 계속 추격전을 펼칩니다. 그러다가 벌판에서 쓰러진 애굽 소년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차림새도 남루하고 이미 병이 깊어 죽음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다윗은 그를 치료합니다. 먹을 것을 주고 물을 줍니다. 한시가 급한 위기상황 속에서 이런 한가한 행동은 분란을 야기 시키기도 합니다. ‘아니 지금 우리가 이렇게 한가롭게 다 죽어가는 놈을 보살피고 있어야 합니까? 한시라도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해야 합니다. 그놈들이 우리의 아내들을 겁탈하고 우리의 자식들을 노예로 팔아넘기기 전에 빨리 그들이 있는 곳을 알아내야 합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닙니다. 판단력이 빠르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들은 자주 그런 말을 합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확실하지도 않는데, 이리저리 뛰어다녀야만 하는 것입니까?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란 동물은 나아갈 방향을 알지 못할 때 무조건 뛰고 보는 유일한 동물이다.’ 뛰는 것도 중요하지만 방향은 더 더욱 중요합니다. 때때로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를 때, 우리는 숨을 고르고 땅과 하늘에 호흡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죽음 직전에 있는 사람을 돕는 것 그것은 어떤 일보다 앞선 일입니다. 강도 만나 신음하는 사람을 도운 사마리아 사람을 기억하는 것은 그가 행한 선한 행동이 아니라, 그가 행한 무심(無心) ‘빈 마음’ 때문입니다. 신음하는 소리 속에 자신의 아픔을 동일시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쓰러져 있는 저자가 누구인가? 내가 저 친구를 돕다가 나도 강도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갖고 있는 이 물건들은 나의 전 밑천인데... 하는 생각 이전에 그에게는 저 고통의 소리가 바로 자신 안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입니다. 그리하여 그를 치료합니다. 비용에 상관하지 않고 치료합니다. 이 마음이 무심의 마음이고 사태판단 이전에 일어나는 본연의 마음입니다. 행위를 의도하는 마음 이전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진정 강도 만난 사람을 향한 이웃 사랑의 마음입니다.


        지금 다윗이 보여주는 마음은 바로 이러한 인간 본연의 마음입니다. 바로 저 거의 죽어가는 애굽 소년은 바로 자신이 광야에서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해 쓰러져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바랬던 자신이었음을 본 것입니다. 병에 걸려 주인으로부터 버림받고 사흘을 먹지 못한 채 그곳에 쓰러져 있었다면 그는 거의 죽은 몸이었고, 그가 정신을 차리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이 감동한다고 하더니 이 소년이 바로 자신들의 아내와 아이와 재산을 빼앗아간 그 아말렉의 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안내를 받아 흥청망청 술에 취해 놀고 있는 그들을 모두 쳐부수고 빼앗겼던 모든 것을 되찾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작은 자를 돕는 그 마음이 살 길을 연 것을 봅니다. 그건 허비가 아니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우리가 자비의 마음과 연민의 마음을 품는 이유가 있습니다. 브라질의 주교 돈 헬더 까마라는 이런 말을 합니다.


        위험이 따르지 않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니라.

        희망이란 잃을지도 모를 사랑을 믿는 것

        의심 중에서도 사람을 신뢰하는 것

        하느님의 손길을 믿고 어림잡아 뛰는 것이니라.


        과학적 분석과 이성적 비판만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신뢰가 먼저입니다. 손을 내어 맡길 줄 아는 신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신뢰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부터 시작합니다. 다윗의 오만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앙적으로 추앙받는 이유입니다.


[브솔 시냇가]


        오늘의 얘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가족을 되찾고 그들이 소유했던 엄청난 물건을 전리품으로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승리의 나팔을 불며 돌아올 때, 한편 브솔 시냇가에 남아 있던 200명은 이제나 저제나 동료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이 붙잡혀 갔는데도 전혀 힘을 쓰지 못해 남자로서 비참한 생각마저 듭니다. 생각보다 더디 오는 저들을 기다리며 무언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혹 전투에서 진 것은 아닐까, 우리가 함께 했더라면 이길 수도 있었는데, 우리 때문에 진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과 죄책감에 싸여 있을 때, 그들은 승리의 노랫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들 또한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만남의 기쁨을 나눕니다.


        그런데 이때 어떤 이해타산에 밝은 약삭빠른 친구들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이 친구들은 우리와 함께 가지 않았고 목숨을 걸고 전쟁에도 참가하지 않았으니 우리가 얻은 전리품을 나눠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처자식들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때 다윗의 깊은 신앙의 영성이 빛을 발합니다. ‘동지들, 야훼께서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았소. 우리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그 강도떼를 우리 손에 부쳐주시지 않았소? 그러니 야훼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어떻게 그럴 수 있겠소.’ 다윗은 단호하게 잘라 말합니다. ‘결코 그럴 수 없소. 싸우러 나갔던 사람의 몫이나 뒤에 남아 있던 사람이나 모두 똑같이 분배해야 하오.’


        요즘 분배에 관련하여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얘기가 많습니다. 자신의 능력만큼, 드린 노력만큼 누릴 것을 누리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원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 또한 모두 위로부터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지 애당초 누군가 태어날 때 손에 쥐고 온 사람도 없고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필요에 따라 나누는 사회가 바른 민주주의의 사회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서가 그리고 예수께서 걸어가시고 주창했던 삶의 길이 어떤 쪽이었는가는 재삼 언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오래전에 이 사무엘상 30장의 다윗의 이야기를 읽고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 누구나 꼭 건너가야 할 시냇가가 있는데, 그 시냇가의 이름은 브솔 시냇가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도착하면 돈 많이 번 사람, 적게 번 사람, 지식이 많은 사람, 적은 사람, 교회를 크게 한 사람, 적게 한 사람. 모두 모아 섞어서 똑같이 나누어 줄 것이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 똑같은 하느님의 자녀로 설 것이라는 믿음이고 그리고 어차피 이런 일들이 영원한 세계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면 지금부터 그렇게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그래야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충격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요?


        그럼 우리 모두 브솔 시냇가에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파송의 말]


자기가 가진 능력과 가능성을 힘 있는 자에게 보태며 달콤하게 살다가 자연사할 것인지, 그것을 힘없는 자와 나누며 세상의 불공평, 기회의 불평등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할 것인지, 혹은 평생 새장 속에 살면서 안전과 먹이를 담보로 날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포기할 것인지 새장 밖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가지고 있는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하며 창공으로 비상할 것인지는 여러분이 스스로 결정할 몫입니다. (한비야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