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5일 ‘한 처음’에 담긴 새 세계의 염원

창 1:1-5; 요한 1:1-5


        요한복음을 제외한 마태오 마르코 루가 세복음서를 같은 관점을 갖고 있다는 뜻에서 공관복음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예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서는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이며 가장 먼저 씌어진 마르코복음은 예수 탄생에 관해서는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예수 탄생에 관련해서 한마디를 하긴 하는데, 이는 탄생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그의 탄생이 가진 의미를 매우 심오한 사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손가락이 아닌 달을 보라]


        요한복음 1장 1절로 18절을 요한복음의 서문(prologue)이라고 부르는데 이 서문은 구절 하나하나가 당대의 매우 심오한 종교철학의 사상을 담고 있어 오늘 이 시간에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다만 그가 선택한 ‘그 처음’이라는 단어를 통해 새 세계를 향한 그의 염원을 엿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은 흔히 영적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가 전하는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대로 손가락을 봐서는 안 되고 손가락을 통해 달을 보아야 합니다. 한 두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2장에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가 나옵니다. 흔히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이야기로 단순하게 이해하지만, 이는 요한이 의도한 바가 아닙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은 마치 혼인잔치와 같은데, 이 세상에 기쁨을 안겨다 주었던 이전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건 바로 당시 의 유대교 더 넓게는 헬라의 종교철학의 효력이 다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모세 율법에 근거한 유대교는 이제 끝이 났고 예수를 통한 새로운 영성이 시작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부대 곧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포도주 곧 새로운 사상과 영성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면서 예수에 의해 만들어진 포도주는 이전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맛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건 손가락에 해당할 뿐이고 예수에 의한 새로운 시대가 창조되고 있음을 에둘러 말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요한복음 5장에 예루살렘 성 내 베짜다 못가의 병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이 못가 주위에 있다가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이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나 다 나았다는 것인데, 38년 된 병자는 아무도 그를 도와줄 사람이 없어 저 혼자 못으로 걸어가는 사이에 딴 사람이 먼저 못에 들어가는 바람에 나을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 얘기를 잘못 읽으면 돈 있는 사람들은 하인들을 옆에 대기시켰다가 물이 움직이면 바로 고침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은 도와줄 사람이 없어 병 고침을 못 받는다는 빈익빈 부익부의 자본주의 삶의 방식을 정당화시켜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목사님들이 이런 식으로 이 구절을 해석합니다.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과 연계하여 병자들끼리의 신앙경쟁을 유도하기도 합니다. 이는 달은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보는 잘못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아예 새벽부터 그 안에 들어가서 서 있으면 되고, 서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은 그 안에 발이라도 미리 담그고 있으면 되지 않았을까?  천사가 물을 휘젓기 전까지는 그 몸에 물 한방울이라도 묻히면 안 된다는 규칙이라도 있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왜 하느님은 감질나게 한 사람만 낫게 하시는가? 세상은 자리가 없으니 ‘먼저 온 사람에게 먼저 혜택을 주는’ 원칙을 세워야 하겠지만, 하느님까지 그런 세상 논리를 좇아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느님께서 왜 사람을 차별하시느냐? 는 말이지요. 그것도 조금이라도 더 건강한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냐? 는 항의성 질문만 생겨납니다. 여기서 베짜다 못이나 병자는 사실 손가락에 해당합니다. 달에 해당하는 핵심단어는 ‘38년’입니다.


        신명기 2장 14절 이하를 보면 광야생활을 거의 마쳐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카데스바르네아를 떠나 세렛 개울을 건너기까지 삼십 팔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야훼께서 이미 맹세하신 대로 군인(곧 백성)들의 한 세대가 다 죽어 진지에서 사라져 갔다.” 그러니까 38년이란 기간은 모세의 영도 아래 애굽에서 나온 구세대가 다 죽은 햇수입니다. 이제 광야에서 헤매는 38년의 훈련기간이 끝나고 여호수아를 머리로 한 새로운 세대들에 의해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야훼 하느님은 새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 떠나라. 아르논 개울을 건너라. 내가 오늘로부터 만천하 백성으로 하여금 너희를 무서워하여 떨게 하리니, 너희의 소문을 듣는 사람마다 부들부들 떨리라.”(신 2:25) 38년 된 병자를 향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그러자 이 광경을 지켜본 유다인들은 부들부들 떨려 예수를 죽이고자 계획하는데 이는 “예수께서 안식일 법을 어기셨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시며 자기를 하느님과 같다고 하셨기 때문이다.”(요한 5:18)


        요한복음은 이런 식입니다. 진짜 전하고자 하는 얘기는 겉으로 드러난 얘기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영적인 복음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철학을 하는 사상가들이 좋아하지요. 그래 요한복음은 예수의 말과 행적을 말하고 있지만, 공관복음서에 같은 역사적 예수에 대해 별 관심이 없습니다. 탄생 얘기도 없고 족보도 없고 당시의 통치자가 누구인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비유에도 관심이 없고 주기도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의 아들로서의 낮아진 예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 그는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높아진 그리스도에 관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신은 그저 인간의 옷을 입고 왔을 따름이고 실제 속은 신이었다는 가현설(Dochetism)을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예수는 고통을 받는 인간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도 수난에 가장 큰 비중을 두어 12장부터 17장에 이르는 6장을 모두 십자가 죽음 직전의 하나의 하늘뜻펴기로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보다 근본적인 신학적 틀이 있는데, 그것은 ‘창조’입니다.


[옛 창조, 새 창조]


        요한복음 1장 1절 가장 맨 처음에 등장하는 단어가 ‘한 처음’입니다. 흔히 '태초에‘라고 번역되어 있는 그리스어 En arche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창세기 1장 1절 가장 처음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저자 요한은 창세기의 야훼 하느님의 창조에 버금가는 새로운 창조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창조라는 전체적인 신학적 틀에 맞춰 복음서의 얘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래 창세기에서 7일 동안 이 천지가 창조되었듯이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통해 예수께서는 7개의 이적을 행하시고 7개의 하늘뜻펴기를 하시고 7개의 <ego eimi>라는 ‘나는 나다’ 라는 야훼적인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문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이 보다 더 개혁적이고 더 혁명적인 사상은 없습니다. 갈릴래아에 기초하여 예루살렘에 대항하는 공관복음서의 지리적인 대결 신학구조를 떠나 그는 우주적 차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빛과 어둠이라는 우주적 대결로 말하면서 빛 자체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새로운 세상, 새로운 우주가 탄생하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요한복음의 첫 선포입니다. 여기서 우리말 ‘말씀’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로고스’(Logos)는 당대 헬라종교철학의 대 주제였습니다. 로고스는 절대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었고, 세상을 존재케 하는 역동적인 힘이었으며 동시에 이성적인 세상 질서 그 자체였습니다. 그냥 말씀이라고 번역하기에는 보다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말 번역 ‘말씀’은 문자적인 언어로 오해될 소지가 많은 번역입니다.


        요한은 이 로고스는 창조 전부터 계신 분이셨고, 이 로고스를 통해 세상 모든 것이 나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고 말하고 그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었고 어둠이 이 빛을 이겨 본적이 없다는 우주적 승리의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이 본 새 세계입니다. 세상의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빛으로만 가득 찬 세계. 예수를 알고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계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전 것 곧 모세에 의한 율법의 시대가 끝나야 합니다. 이 율법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신의 이름으로 가난한 자와 약자들을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차별과 분리의 법입니다. 그래 당대 유대의 최고의 학자이자 높은 자리에 있던 니고데모와 당대 다섯 남자로부터 버림받아 여섯 번째 남편과 살아가던 사마리아의 천대받는 여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예수를 통해 하나 되는 공동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강한 자, 힘센 자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모세 율법의 시대는 가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근거한 은총과 진리의 시대가 도래함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절 우리가 축하하는 것은 단지 예수 탄생만을 축하하기 위함이 아니요, 세상 어둠을 물리치는 빛과 생명의 세계가 이미 2천년 전부터 시작하여 계속 진행되어져 오고 있음을 확인하고 고백하기 위함입니다. 여기 우리의 일이 있습니다.


[썩지 않을 열매를 맺는 사람들]


        그 일이란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장 11-12절)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16절)고 말씀하십니다.


        한국의 ‘테레사수녀’라 불리우는 엠마 프라이징거 이야기이다.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1959년 당시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한센병자들을 돌보겠다며 20대의 꽃다운 나이에 이곳에 왔습니다. 당시 그에겐 결혼을 약속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잘생기고 자상한 의사였다. 그는 처음 1-2년만 봉사한 뒤 고국으로 돌아가 결혼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한센인들의 모습을 본 이후 그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의 남자친구에겐 자신 말고도 아내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많았지만, 한국에선 한센병 환자를 돌보아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 땅에 머문지 어언 50년 이제 그의 나이 76세가 되었다. 그는 우리의 옛 시절을 돌아보며 이런 얘기를 한다. “내가 처음 이곳에 도착할 당시 한국은 너무 가난했어요. 그리고 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불철주야 달려왔고 그래 지금은 풍족해졌어요. 그러나 저는 가난해도 서로 나눌 줄 알았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자기만을 위해서 살면 행복은 늘 자기 밖에 있지만, 누군가를 위해서 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행복 안에 있게 되지요.”


        요한이 꿈꾼 새 세계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이렇게 사랑의 화신이 되어, 세상의 빛이 되어 살아가는 그 세계를 꿈꾸었습니다. 그래 요한이 본 예수는 지금도 저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외치고 계십니다. “아 목마르다.”(요한 19장 28절) 조금 있으면 목숨이 끊어져 죽으실 분이 물을 마신다고 해서 얼마를 더 사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목말라 하신 것은 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을 위한 사랑뿐만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것의 나의 계명이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