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1일 대림절 넷째 주일

동방박사에 담긴 새 세계의 염원

이사야 60장 1-6절; 마태오 2장 1-12절


        성탄절은 교회가 지키는 종교적 축제일이지만, 요즘은 교회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도 함께 즐기는 세속적인 축제가 되었습니다. 남한 인구의 20% 정도가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백화점들과 빌딩 그리고 서울의 거리들은 크리스마스 등불로 차있어 외국 사람들이 보면 우리나라가 기독교국가로 착각할 정도입니다. 물론 이는 종교적 이유가 아닌 하나의 상술입니다. 들뜬 분위기를 만들어 소비자들의 주머니를 열도록 하려는 의도입니다. 올해는 경제 한파로 경기가 위축되어 있지만, 미국에서는 보통 우리가 대림절로 지키는 한달동안에 한해 매상의 40%를 올려왔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러한 추세를 타고 있다고 보입니다. 미국 가정들은 선물을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쌓아두었다가 25일 아침에 포장을 뜯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성탄절 아침이 되면 정작 중심이 되어야 할 아기 예수는 간데없고 선물만 남아 있습니다.


        성탄절은 하느님께서 아기 예수를 선물로 주신 날이고, 또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예물을 드린 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끼리 그간의 고마운 마음을 선물에 담아 주고받는 일은 좋은 일이긴 하지만, 너무 상업화되어가는 것은 문제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오 헨리의 작품에 ‘성탄절 선물’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가난하지만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는 부부의 이야기이지요. 성탄절이 다가오자, 두 사람은 각기 걱정을 합니다.오랫동안 실직 상태에 있어 호주머니는 비어 있었지만, 서로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꼭 선물을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 고민하던 남편은 아내의 머리빗이 너무 낡아 빗살이 몇 개 빠져버린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차고 있던 시계를 팔아 예쁜 머리빗을 샀고, 아내는 남편의 시계 줄이 낡아 곧 떨어지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름답고 긴 머리카락을 잘라 시계 줄을 샀습니다. 성탄절 아침 그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서로의 선물을 내놓았습니다. 물론 선물은 서로에게 소용이 없는 선물이 되고 말았지만, 사랑을 확인한 부부는 서로 부둥켜안고 행복의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입니다. 너무 상업화되고 물질화되어가는 오늘에 되새겨 보야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탄생 이야기 속에 드러난 마태오와 루가의 신학적 차이]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식도 실은 잘못일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성탄절에 관련한 상식도 그러합니다. 아기 예수를 경배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은 동방박사와 목자들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동방박사는 마태오복음에 나오고 목자는 루가복음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답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디서 태어났습니까?라고 물으면 우리는 흔히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틀립니다. 왜냐하면 이는 루가복음에 의한 답이고 마태오복음에는 동방박사가 찾아간 곳은 마구간이 아닌 그냥 집이니까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대답하자면 마구간에서도 태어났고 집에서도 태어났습니다라고 해야 답이 맞겠지요. 그리고 동방박사도 흔히 3명이라고 알고 있지만, 성서는 복수로만 되어 있지 세 명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드린 선물이 3개였을 따름입니다. 예수가 태어날 때,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가 살던 마을도 루가복음에서는 갈릴래아 나자렛이고, 마태오복음에서는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의 성탄 이야기를 비교해보면 매우 흥미로울 뿐더러, 두 사람의 신앙과 신학의 차이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우선 아기 예수를 처음 경배한 사람들의 차이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루가복음에서 아기 예수를 가장 처음 경배한 사람들은 밤중에 베들레헴 성 밖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입니다. 당시 냄새가 많이 나는 양들을 치는 목자들은 천한 직업으로 여겨졌습니다. 게다가 그날 밤중에 베들레헴 성 밖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은 주인이 아닌 비정규직 피고용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당시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결국 루가는 예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가장 낮은 계층의 목자들이 아기 예수를 처음 찾아온 사람들이라는 얘기를 함으로써 ‘낮아진 예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 마태오는 동방박사들이 등장합니다. 동방은 어디를 말하는가? 오늘날의 메소포타미아 지방, 창세기에 나오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의 근원지가 되는 에덴동산이 있다고 여겨지는 곳입니다. 그런 신비스런 장소에서 온 박사들. 이들은 천체의 움직임을 통해  하늘의 뜻을 알아내고 세상의 미래를 점쳤던 현자들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이 귀한 예물을 갖고 아기 예수를 경배한다는 말은 ‘높아진 예수’를 보여줍니다.


[본문과 상황의 상관관계]


        우리는 지난 주 루가가 단순히 낮아지신 예수를 설명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말구유와 관련한 당시의 역사 이야기를 추적해서 그가 품고 있는 새 세계의 염원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마태오복음에서의 동방박사와 관련한 당시의 역사 이야기를 추적해서 마태가 품고 있는 새 세계의 염원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요즘 <바람의 화원>이라는 드라마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림 이외에는 역사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 신윤복을 두고 그가 여자일지로 모른다는 가상 하에 쓴 이정명의 소설을 갖고 만들었는데, 문화재 위원장까지 나서서 ‘역사왜곡’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래 ‘사실(fact)에 입각한 허구(fiction)’라는 팩션(faction)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정조 임금이 하루는 김홍도와 신윤복에게 ‘동제각화(同題各畵), 곧 같은 화제(畵題)로 각자의 그림을 그려오라고 명합니다. 두 사람은 저자거리로 나가 무엇을 그릴까 고민하다가 선술집에서 낮술을 한 잔 하면서 대화를 나눕니다. 김홍도가 말합니다. “저 주모 얼굴을 좀 봐라. 밤낮으로 술을 팔아서 얼굴에 피곤이 덕지덕지 붙었지 않느냐? 술장사가 잘 안 되나보다. 아이고, 저 양반놈 좀 보게. 대낮부터 취해가지고 헤롱헤롱대니, 아이고 꼴좋다! 저 얼굴 저 표정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지 않느냐?” 그러자 신윤복이 스승의 말을 받아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화폭에 담아야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홍도는 인물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의 성정(性情)이 다 드러난다고 본 반면에 신윤복은 인물만 갖고는 그 사람을 다 알 수 없고 그가 놓여 있는 배경을 봐야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신윤복은 평상 위에 물로 새 그림을 그려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새는 이렇게 있으면 그저 새일 뿐입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이 그림만 봐서는 알 수 없지요. 허나 이렇게 새장을 그려 넣으면 이 새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 마음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학문적 용어로 말하면 본문(text)과 상황(context)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같은 단어 같은 말이라도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말구유라는 단어를 그냥 읽으면 이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여물통에 불과하지만, 2천년 전 로마 식민지 시대에 베들레헴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넣고 보면 전혀 다른 의미가 드러납니다. 바로 이것이 성서를 제대로 읽어나가는 방식입니다. 그냥 겉으로 나타난 문자로만 이해하면 안 되고 그 안에 숨어 있는 내용을 끄집어내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신학자와 목사가 하는 일입니다.


        흔히 아는 대로 마태오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루가는 이방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 마태오는 구약성서를 많이 인용합니다. 복음서 전체 구성 틀도 모세5경에 맞춰 예수님께서 5번에 걸쳐 하늘뜻을 펼칩니다. 예수 탄생의 이야기에서도 헤롯의 유아살해 이야기와 이를 피해 애굽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 또한 모세의 삶의 궤적과 유사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설명함에 있어서도 마태오는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고 그 세대도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숫자 40에 맞춰 있습니다. 반면 루가는 예수로부터 시작해서 모세 아브라함을 거쳐 아담 그리고 하느님에까지 연결하고 그 세대수는 거의 두 배에 이릅니다.


[마태오 족보에 담긴 혁명]


        우리는 지난 주 루가의 말구유라는 단어 속에 담긴 새 세계를 향한 그의 혁명적인 꿈을 엿보았습니다. 그런데 마태오 또한 이에 못지않은 새 세계를 향한 혁명적인 꿈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복음서 첫머리 1장 예수의 족보 속에 분명히 담겨 있습니다. 본래 남성들의 이름만 등장하도록 되어 있는 예수 족보에 여성 4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여성들은 모두 문제의 여인들입니다. 물론 이 문제의 배후에는 남성들의 기만과 폭력이 숨어 있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예수의 조상 가운데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 속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다. 이건 보통 스캔들이 아닙니다. 다윗왕의 고조할머니가 되는 라합은 가나안 예리고성의 창녀였습니다. 그 다음 다윗왕의 증조할머니가 되는 룻은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한 경력이 있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왕의 후계자인 솔로몬왕의 어머니는 밧세바인데 이 여인은 본래 다윗의 휘하에 있던 헷사람인 우리야 장군의 아내였습니다.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사이에 다윗이 불러들여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여기서 마태오 저자는 다른 세 여자의 경우와 같이 ‘다윗은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우회하여 말하지 않고 밧세바라는 여인의 이름은 빼고 ‘아예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직격탄을 날려버립니다. 소위 말해 다윗왕의 신화의 껍질을 단 한방에 날려버린 것이지요. 아브라함이라는 단일조상의 피로 엮어진 선민사상에 대해서도 이 여인들이 모두 이방여인임을 밝힘으로 이것 또한 허구임을 폭로합니다. 물론 동시에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 또한 이 더러운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 오셨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마태오는 매우 혁명적이고 독자들로 하여금 앞으로 예수를 통해 전개될 활동이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듯 극도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어 요셉과 마리아의 얘기가 나오는데, 마태오와 루가는 아기 예수는 남녀의 관계에서가 아닌 성령에 의한 수태였음을 말합니다. 이 또한 예수에 의해 도래할 역사의 변혁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는 구약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는데, 사실 ‘동정녀’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이사야서의 히브리어 단어는 처녀만을 뜻하지 않고 결혼유무와 상관없는 ‘젊은 여인’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처녀가 아이를 낳게 되는 이 과정의 이야기에서 마태오와 루가는 다른 방식으로 이 갈등을 풀어나갑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마리아가 고민한 장면은 없고 요셉이 혼자 고민하고 그리고 천사의 방문을 통해 요셉이 결단합니다. 반면 루가복음에서는 요셉의 얘기는 없고 천사의 얘기를 들은 마리아만 혼자 고민하고 결단합니다. 그러고 보면 마태복음은 남성적 시각을 반영하고 있고 루가복음은 여성적 시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루가의 이런 여성적 관점은 이후에도 계속 나타납니다. 이렇게 보면 루가 또한 남장을 한 여성일수도 있다는 팩션(faction)도 가능합니다.


[동방박사와 사회적 상황]


        오늘의 성서본문은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에 헤로데 왕이 당황하고 예루살렘 전체가 술렁거렸다고 말합니다. 헤로데는 누구인가? 그는 이두메 출신으로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는 로마에 충성을 맹세하고 엄청난 뇌물을 통해 권력을 유지해온 폭군입니다. National Geographic 12월호는 헤롯왕에 관련한 특집을 내었는데, 유적지 발굴을 통해 그의 궁전과 요새들이 얼마나 웅장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로마 황제의 숭배자’라고 곳곳에 남겨 있는 비문에 새겨놓았을 정도로 로마에 절대 충성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헤로데 왕이 당황하였다는 말은 그 뒤를 후원하고 있는 로마가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헤롯이 당황하고 예루살렘이 술렁거렸다는 이 말은 예수 탄생이 단순히 종교적 사건으로만 한정되지 않고 사회적 정치적 사건이었음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아기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다고 해서 정치권세자들이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는 오늘날 아기 예수 탄생이 종교적 사건으로만 제한되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마태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교회의 타락과 그리스도 신앙의 변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예수의 탄생은 분명 정치 권력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커다란 사건이었습니다. 그래 헤로데는 후에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 일대에 군대를 보내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리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사실 이 기사는 역사사실로 보면 문제시 되는 기사이지만, 헤로데는 권력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두 아들과 아내까지도 살해한 폭군이었으니까 능히 이런 일도 행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예수가 태어날 당시는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이 폭군 헤롯왕이 죽자 유대 전역에서는 즉각 폭동이 일어났고 이때 대중들의 반란은 메시아적 행태를 취했습니다. 다시 말해, 폭도들은 자신들 가운데 한 명을 뽑고 그가 마침내 자신들의 자유를 되찾아 줄 ‘유대인의 왕’이라고 공포했던 것입니다.(리차드 호슬리, 크리스마의 해방, 다산글방 1989. 100쪽) 따라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를 찾아 왔다‘는 동방박사의 발언은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단순한 종교적 발언이 아닌 이는 베들레헴에서 혁명이 일어난다고 하는 사회정치적인 발언입니다.


        이는 동방박사에 대해 좀 더 알아보면 더욱 뚜렷해집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동방이라는 말도 애매한 말이고 박사라는 단어도 애매한 단어입니다. 당시 유대사람들에게 있어 동방은 페르시아제국의 후예인 파르티아제국을 뜻합니다. 박사라는 말도 단순한 현자 혹은 점성학자 이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선 박사를 뜻하는 그리스어 마고스(magos)는 주로 마술사 즉 점성가나 꿈풀이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로마문화권에서는 다른 의미로도 쓰이는데, 박사들(magoi)은 정치-종교 고문의 역할을 담당했던 정부 관리를 칭하는 단어였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에서 그들은 최고위층에 속했으며 천체의 움직임을 보고 하늘 신의 뜻을 해석하여 왕의 정치군사적 행동에 대해 조언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호슬리, 109쪽 이하) 그러니까 동방박사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 이후 알렉산더 왕국이 분할되고 이어 신생 로마제국이 등장할 그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들이 세운 파르티아제국에서 온 사절단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합니다.


[헤롯에게 날라든 신발]


        여기서 우리는 ‘동방’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정치적인 뉘앙스를 잡아내야 합니다. 동방이 있다면 서방이 존재합니다. 지금까지 유다왕국과 깊은 관련을 맺어온 나라들은 주로 동방의 제국들입니다.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제국들입니다. 유럽 서방의 힘이 유대까지 온 적은 없었습니다. 남방의 애굽 아니면 동방의 제국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의 알렉산더대왕이 동방으로 진군하여 페르시아제국을 무너뜨린 이후 동방과 서방이 합쳐진 거대한 그리스문화권을 세웠고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서방 세력인 로마제국이 유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대는 문화나 언어 종교에 있어 동방에 속합니다. 인종으로 보더라도 피부색이 흰 백인계가 아닌 검은 쪽인 흑인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은 백인들의 세력인 서방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바라는 자유와 해방은 동방으로부터 올것으로 기대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실제로 헤로데 왕 통치 초기에 동방 파르티아제국의 후원으로 군사 쿠테타가 일어나 헤로데가 로마로 피신을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헤로데에게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 났습니까? 우리가 그를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는 발언은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발언이었습니다. 이 발언은 마치 지난 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있었던 기자회견장에서 부시대통령을 향해 날라 온 두 개의 신발과도 같이 현 통치자를 경멸하고 무시하는 매우 도발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이는 헤롯과 로마의 폭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 동방으로부터의 해방의 세력을 기대하고 있었던 당시 백성들의 기대를 표현한 말입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자신들이 바빌론제국의 포로로 있었을 때, 그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었던 은혜의 나라였습니다. 당연히 당시 유대 백성들은 동방의 파르티아제국이 나서서 지금의 서방 로마제국과 이방인 헤롯의 지배를 끝장내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정치역사적 상황에 동방박사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방의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와 경배하고 귀한 예물을 드립니다. 황금 유황 몰약은 모두 당시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들로 왕에게 드리는 값진 예물입니다. 여기서 유대백성들에게는 혼란이 일어납니다. 지금의 폭력적인 식민지 지배체제를 끊고 해방을 얻으려면 동방의 박사들이 그 일을 해야 하는데, 바로 그 해방의 새 역사를 가져오리라 믿었던 동방의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왕으로 경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절한다고 하는 이 구절은 단지 루가가 목자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하였다는 구절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결국 이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는 단순히 이 세상만이 아닌 저 하늘나라까지도 다스리는 우주의 통치자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통치는 군대에 의한 폭력적 방식이 아닌 하느님이 이 땅에 내려오시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사랑으로 세상을 바꾸는 혁명을 말합니다.


[별에 담긴 또 하나의 혁명]


        결국 마태오는 바로 앞에서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요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라고 말한 숨은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방박사라는 단어와 더불어 동방박사들을 인도했다고 하는 별 또한 단순히 당대의 점성술의 신비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도 새 세계를 향한 염원이 담겨 있는 단어입니다. 세상을 구할 위인이 탄생할 때 큰 별이 뜨거나 떨어졌다는 얘기는 어느 민족에나 나오는 얘기입니다. 이는 비과학적인 덜 배운 사람들의 신화가 아니라, 이 땅의 역사는 하늘의 주관자의 손에 달려 있다는 옛 사람들의 믿음의 표현방식이었습니다. 당시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기록한 유다전쟁사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 함락시 유대인들이 압도적인 로마군에 맞서 일 년이 넘도록 투쟁할 수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 위에 일년동안 계속 떠 있었던, 칼처럼 생긴 별 하나와 혜성’이었다고 말합니다.(호슬리 120쪽) 별은 그냥 하늘에 떠 있는 별이 아니라, 인간의 운명과 세상의 역사를 바꾸는 힘이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에도 별은 구원과 해방 그리고 새로운 세계의 여명의 빛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희 빛이 왔다.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 민족들이 너의 빛을 보고 모여들며 제왕들이 솟아오르는 너희 광채에 끌려오는구나. 머리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아라. 모두 너에게 모여 오고 있지 않느냐? 너의 아들들이 먼데서 오고 너의 딸들도 품에 안겨 온다.” 마태오는 별을 따라온 동방박사들을 통해 지금의 폭력과 억압의 구조를 끊고 새 역사의 여명이 도래하고 있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반도에 있는 남과 북의 백성들에게도 이러한 희망의 소식이 필요합니다. 38선 분단의 벽을 넘어 우리의 아들들이 남과 북의 가정으로 돌아오고 우리의 딸들이 각자의 품에 안기는 새로운 하느님의 구원의 빛이 오고 있다는 희망의 선포가 필요합니다. 헤롯와 로마의 통치자들을 당황하게 하고 예루살렘 성을 술렁거리게 할 동방의 박사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통치자들을 당황하게 하고 시청을 술렁거리게 할 동방의 박사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불법과 편법으로 이루어진 MB식의 성공과 부자의 신화를 폭로하고 진정한 메시아를 선포하는 마태오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아기 예수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 이제 사흘이 남았습니다. 성탄절 전날 동방박사를 아기 예수로 이끌었던 그 별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별을 따라 우리 모두 자기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세상에 나아가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그분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습니다.”라고 외침으로 세상에 파묻혀 지내는 이 백성에게 일깨움을 주고 절망에 빠진 이 민족에게 구원과 해방의 기쁨을 안겨다주는 오늘의 동방의 박사들이 되기를 기도한다면 지나친 요구가 될까요?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