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구유에 담긴 새 세계의 염원

이사야 11, 1- 9 ; 루가 2, 1- 7


조  헌 정 목사




        오늘은 성서주일입니다. 지난 가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는 공식적으로 성서라는 단어 대신에 성경이란 단어를 쓰도록 하는 결정을 했습니다. 성서면 어떻고 성경이면 어떻고 그 이름이야 무어라고 부르든 그 안에 있는 말씀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름 때문에 혼돈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던 목사님들은 이를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공동번역서는 그 표지에 ‘성서’라고 되어 있어 성서라고 부르지만, 공동번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서 번역본은 성경이라 부릅니다.


[성서와 성경의 차이?]


        그런데 한국교회는 무슨 이유 때문에 성서를 굳이 성경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서(書)와 경(經)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유학에서는 사서삼경 혹은 사서오경 하고 구분하여 부르는데, 그 차이는 무엇인가요? 인터넷을 찾아보니 공자 이전의 책은 경이라고 부르고 공자 이후의 책은 서라고 부른다고 되어 있더군요. 이 구분에 따르면 성서의 어떤 책은 공자 이전에 어떤 책은 공자 이후에 기록이 되었으니 양쪽이 다 맞습니다. 그러나 경이 더 오래되고 존경받을만한 책이다 라는 종교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성경이라는 단어를 고집하고,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꼭 그렇지 않지만, 목사들 세계에서는 성서라는 말을 쓰면 약간 불경스럽게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물론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책으로서 일반적인 책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으니까 성경이라고 부르자고 하는 일에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습니다만, 그러나 성서는 틀린 이름이고 꼭 성경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성서라는 말 속에 거룩할 성(聖)자를 써서 이미 다른 책과 구별하였는데, 거기에 경(經)자를 써서 이중적인 거룩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 2천년의 인간 역사 속에서 성서의 말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고 구원에 이르기도 하였지만, 오히려 성서의 말씀 때문에 엄청난 폭력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중세 때로부터 히틀러 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학살했으며 마녀사냥의 이름으로 종교성이 깊은 여성들을 불에 태워 죽였고, 동성애자들과 어린아이들을 구타하고 아프리카 사람들을 노예로 잡아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성서의 말씀에 근거하여 여성을 남성보다 하위 존재로 여겨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법적 지위를 주지 않았고, 인디언 원주민과 동물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정당시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독립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영국의 자유주의 사상가 토마스 페인은 성경을 혹평하여 말하기를 “성서의 절반을 차지하는 음탕한 이야기, 방탕한 삶, 잔인하고 사악한 율법 집행, 무자비한 복수 등을 읽을 때마다 그것이 신의 말이기보다는 악마의 말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성서의 역사는 인간을 타락시키고 잔인하게 만든 사악함의 역사이다.”(<이성의 시대>) 이는 너무 지나친 악평이지만, 당시 17,8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종교전쟁으로 인한 폐해와 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이성적 판단과 오성적 자유를 억누르던 사회상황을 이해한다면 그의 지적은 타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역사 속에서 부정적 역할을 했던 성서를 굳이 성경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배후에는 성경은 다른 책과는 달리 오류가 없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있고, 이는 하느님의 말씀의 책으로 들고 다닐 때에도 그냥 덜렁덜렁 들고 다녀서는 안 되고 가슴에 품어 거룩하게 들고 다녀야 한다는 성서문자 절대주의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잖아도 한국교인들의 성서 이해가 너무 탈정치화 비역사화 되어 있는데, 성경이라는 단어만 고집하면 이런 잘못된 견해가 더욱 굳어질 따름입니다. 우리가 읽어보지만, 사실 성서 안에는 종교니 정치니 하는 구분이 없습니다. 그냥 인간의 역사 이야기일 따름입니다. 그 당시 인간들의 세계관이나 언어가 신화화 되어 있기에 우리 눈에 종교적으로 보일 따름이지, 그들이 우리보다 더 종교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서의 사회정치적 해석의 중요성]


        제1성서(구약)는 히브리인들의 역사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의 고통스런 노예상태로부터의 벗어나는 해방의 투쟁사입니다. 노예해방의 투쟁사 속에 하느님이 개입하니까 우리는 이를 종교적 사건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만, 이는 분명히 사회정치군사적인 사건입니다. 제2성서(신약)의 시작은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의 삶이 요즘 우리가 이해하듯이 종교적인 영역에만 머문 사건이라면 예수님의 죽음에 로마당국이나 헤롯당원들이 연루될 이유가 없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분명 로마에 지배에 항거하는 정치범을 처형하는 사형법이었지, 일반 범죄인을 처형하는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단순한 종교적 가르침을 전하는 스승이었다면 산이나 들로 다니면서 진리의 말씀들을 가르쳤으면 되었지, 따르는 사람들과 더불어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 성전을 헤집고 권력자들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성전을 허물라는 과격한 발언을 하여 저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분명 사회정치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우리를 향해 교회의 빛과 소금이 아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서 이야기는 단순히 종교의 영역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고 인간 사회의 전 부분에서 일어나는 삶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루가복음의 예수탄생의 얘기 또한 그러한 폭넓은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루가가 이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는 예수님 사후 5,60년이 지나서 기록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의 지배에 항거하여 전쟁을 일으켜 그 결과 예루살렘 성이 로마군에 의해 초토화가 된 이후,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서 유대 동족들과 로마당국부터 박해를 받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루가복음 21장에 예수님의 예언을 빌어 그런 시대를 표현하였지만, 실상 그런 시대 속에 있었습니다. “너희는 잡혀서 박해를 당하고 회당에 끌려가 마침내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며 나 때문에 임금들과 총독들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 때야 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때이다.” 루가는 그런 박해와 핍박을 보면서 예수님과 사도들의 복음 활동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한적한 시골에 앉아 평화롭고 한가로운 상태에서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체는 평화롭게 보이고 단어들은 평범하게 들려 로마 안기부의 불온문서 목록 지정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그러나 진정 눈과 귀가 열려있는 사람이라면 능히 알아챌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탄생 ‘그 무렵’의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오늘 본문 말씀 2장 1절 첫마디는 ‘그 무렵에’라고 시작합니다. 어떤 무렵입니까? 앞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나요? 양적 시간인 크로노스의 관점에서 보면 헤로데가 유대의 왕으로 있었을 때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태어난 ‘그 무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질적 시간인 카이로스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무렵'에는 두 개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노래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부른 노래로 그 핵심적인 가사는 이렇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1장 51-53절)


        
두 번째의 노래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가리야의 노래로 그 핵심적인 가사는 이렇습니다. “아가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예언자 되어 주님보다 앞서 와서 그의 길을 닦으며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길을 주의 백성들에게 알려라. (그분은) 하늘 높은 곳에 구원의 태양을 뜨게 하시어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 예수께서 태어나던 ‘그 무렵’이란 바로 이러한 혁명의 노래가 하나는 갈릴래아의 한 이름 없는 여인에 의해 또 하나는 의로운 사람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사제 즈가리야에 의해 예루살렘 성안에서 각각 불리어지던 ‘그 무렵’인 것입니다.


        
‘그 무렵’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온 천하에 호구조사령을 내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황제 아우구스토라는 단어와 호구조사라는 단어가 던지는 의미를 보다 자세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로마의 반쪽을 지배하고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전투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100년간에 걸친 전쟁과 내분을 종결시키고 로마의 평화를 가져온 사람입니다. 그래 그는 당시 구원자라고 불리었습니다. 그래 그는 더 이상 ‘가이사’라는 칭호만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 로마의 지배자들도 ‘가이사’라고 불리었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는 이제 가이사라는 칭호 외에 또 다른 칭호를 얻게 되는데 그 칭호가 바로 아우구스토입니다. 신전들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온 세상의 구주'(
Ara pacis augustae).


        
지금도 남아 있는 비문에는 “아우구스투스 시저는 아버지 제우스, 온 인류의 구원자, 신의 섭리를 이루는 존재, 나아가 모든 인간의 기도보다 위대한 존재” 그리고 그의 생일은 온 세상의 구원의 복음을 가져다준 날로 기억됩니다. “우리는 그분이 모든 사물의 시초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이 무질서에 빠지고 혼돈으로 치닫고 있을 때 그분은 다시금 그 모든 것을 회복하셨으며, 전 세계에 새로운 형태를 부여하셨다. 우리 모두의 선한 운명이여, 생명과 활력의 시작이니, 모든 도시가 만장일치로 신성한 그분의 탄신일을 한 해의 첫 날로 책정하노라.”(리차드 호슬리, 크리스마스의 해방, 62쪽)


[예수 탄생 이야기의 역사적 모순]


        옥타비아누스 그는 ‘아우구스토’라 불리는 신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신의 자리에 올라섰음을 세상에 알리고 보다 효율적인 통치와 보다 많은 세금징수를 위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에 가서 등록을 하라는 호구조사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실상 이 구절은 많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우선 아우구스토의 시대에 호구조사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고향에 가서 등록을 하라는 것은 몇 달씩 생업을 전폐하고 여행을 해야 하는데 이는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골(Gaul)이라는 로마 황제 때에 호구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무려 40년이나 걸리는 대과업이었습니다. 만에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호주 한사람만 가면 되었지, 온 가족이 가야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만삭의 여인을 데리고 말입니다.


        
루가의 이야기는 역사 기록으로는 또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께서 태어나던 때는 1장 5절에 의하면 유대의 헤로데 대왕이 다스리던 때였는데, 2장 2절에서는 예수께서 태어나던 때에 시리아에는 총독 퀴리노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퀴리노는 기원후 6-7년에 재임했던 사람이고 헤롯대왕은 그 보다 10년 전에 기원전 4년에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을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설명하는 루가의 얘기는 모순입니다. 그렇다면 루가가 거짓의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인가? 그건 아닙니다. 지금 루가가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면 이것은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두개의 서로 다른 평화의 대칭]


        지금 저자 루가의 마음속에는 로마의 황제 곧 신이라 추앙받는 아우구스토와 아기 예수를 서로 대칭하여 설명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모두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황제 아우구스토는 로마의 평화는 영원하리라고 선포합니다. 여기 아기 예수 또한 평화를 약속합니다. 즈가리야가 예언한 것처럼 “예수는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하늘의 천사들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여기 두 개의 평화가 있습니다. 하나는 로마인들이 구세주라고 찬양하는 아우구스토가 말하는 위로부터의 평화, 그리고 당시 루가를 비롯한 수많은 피식민지인들이 바라는 밑으로부터의 평화.


        
아우구스토가 말하는 평화는 폭력과 살인이 전제된 전쟁의 승리와 점령지에서의 약탈과 억압에 기초한 평화입니다. 그건 지배자 소수의 평화를 말할 따름입니다. 왜 저자 루가는 분명하지도 않는 시리아에는 퀴리노라는 총독이 있었다는 설명을 덧붙이는 것일까? 자신의 얘기가 역사적으로 옳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퀴리노 또한 전쟁의 승리자로 기억되는 군 사령관 출신이었습니다. 헤롯대왕, 아우구스토, 퀴리노 그들의 통치는 피의 대가로 얻어진 평화였고 이 평화는 또 다른 폭력과 피를 부르는 악순환의 평화였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루가는 새로운 평화의 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평화의 왕은 이들과는 출생에서부터 달라야 했습니다. 로마의 변방 중의 변방 이름 없는 곳부터 시작합니다. ‘갈릴래아 나자렛 동네’ 지금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하고 익숙한 이름이지만, 당시에는 지도상에 표시조차 할 필요가 없는 무명의 땅이었습니다. 더구나 ‘갈릴래아’는 예전부터 예루살렘의 중앙권력에 불만을 품고 하느님의 직접 통치를 꿈꾸는 사상가, 혁명가들이 모여 살았던 불온한 지역입니다. 그 안에 있는 나자렛 동네. 말이 좋아 동네이지 예수님 당시에는 삼 사십여 채의 집들이 띄엄띄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신학자도 있습니다.(James Robinson,
The Sayings Gospel Q.) 나자렛. 그러나 이 이름은 구약성서에서는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히 간택되어지고 그의 일생은 하느님만의 영광을 위해 살았다고 하는 나실인 삼손을 떠올리게 하는 지명입니다.


        
폭력과 제국의 지배자, 그러나 신이라 추앙받는 황제 아우구스토의 명령에 의해 갈릴래아 나자렛 동네의 한 이름 없는 한 부부가 살던 곳을 떠나 본래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힘든 여행을 떠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따라 움직이니 통치자는 권력의 짜릿한 맛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 배후에 계시는 하느님의 계획안에 있었습니다. 아참!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으니 부부라고 말하기는 힘들겠군요. 약혼관계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배가 부어올라 만삭이 되었으니 사람들을 만나면 약혼자가 아닌 결혼한 아내라고 소개해야지요.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손가락질에 야유에 지나치면 속도위반을 했다고 돌에 맞을 위험도 있었으니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마태오에게 있어서는 요셉과 마리아가 처음부터 베들레헴에 살고 있었으니 굳이 이런 얘기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었으나 루가는 요셉과 마리아가 나자렛에 살고 있었으니 약간의 역사 수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 역사 기록이 없는 로마 황제의 호구조사령이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금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루가가 역사를 왜곡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2천 년 전 그 옛날에 루가가 도서관도 인터넷도 없는 상황에서 거의 백년이 지난 역사 사실을 확인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10년 20년의 차이정도는 루가에게 있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정작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 사실로서의 Historie가 아닌 역사 해석으로서의 Geschichte가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말구유에 담긴 저자 루가의 의도]


        황제 아우구스토가 말하는 평화와 예수가 말하는 평화를 대조하여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을 연결하면서 동시에 대조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필요했는데, 그래서 선택한 단어가 바로 ‘말구유’입니다. 저는 이 단어의 선택이야 말로 성령의 역사라고 믿습니다. 구유는 잘 쓰는 말이 아닙니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잘 쓰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공동번역에서만은 말구유 대신에 ‘말 밥통’ 아니면 최소한 ‘말 여물통’이라고 번역했어야 옳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 또한 번역자들 사이에 의견 조정이 쉽지 않았겠지요. 그리고 우리가 ‘포대기’라고 읽는 이 단어를 다른 성서번역에서는 모두 ‘강보(襁褓)’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한자사전을 찾아보니 ‘어린애를 업을 때 두르는 포’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 그러했다고 들었지만, 유대에서는 아이들이 태어나면 그 뼈를 바로 펴기 위해서 천으로 둘둘 말았는데 그때 쓰는 천을 말합니다. ‘강보’ 순수한 우리말로 포대기 그러면 좋지 않아요? 하여간 좀 유식해 보이려고 그러는지 그래야만 아기 예수의 폼이 더 난다고 생각했는지, 최신 새 번역 표준판도 여전히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누였다’고 고집을 합니다. 언제나 이 고집이 꺾이려는지... 아마 그 때가 예수께서 오시는 때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에서 강보나 구유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말구유’라고 번역한 것만은 매우 탁월한 번역이라고 칭찬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희랍어 본문에는 말이라는 단어가 분명하게 나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희랍어 단어 Φaτνη란 단어가 마구간이나 여물통 양쪽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영어나 독일어 성서는 모두 manger 혹은 Krippe라고 번역하여 그냥 동물들의 ‘여물통’으로만 되어 있습니다.


        
저는 루가가 이 단어를 매우 의도적으로 선택했다고 봅니다. 그냥 동물들의 밥통이 아닌 말의 밥통의 의미로 선택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 밥통에 아기 예수가 누였다는 것과 그냥 여물통에 아기 예수가 누였다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말은 유대에는 흔치 않는 동물입니다. 나귀나 소는 흔했지만, 말은 흔치 않았습니다. 말은 전투용입니다. 그리고 당시 말은 로마 군사력의 상징입니다. 긴 창을 들고 휘몰아치는 로마의 기병대는 당시 적들을 쳐부수는 최고의 전투력이었습니다. 로마 황제를 대변하는 권력의 상징입니다. 옛날부터 ‘떡의 집’이라고 불릴만큼 목초가 풍부했던 베들레헴에는 로마기병부대가 주둔했었습니다. 그러면 아기 예수가 이런 로마의 군사력의 상징인 말의 밥통에 누였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풀 대신에 날 대신 잡수어 달라는 헌신의 의미인가?


[이사야의 평화선언과 말밥통]


        전 여기서 예언자 이사야가 꿈꾸었던 평화의 노래를 다시금 듣고 싶습니다.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이고 예수는 다윗의 먼 후손입니다.) 야훼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 그는 가난한 자들의 재판을 정당하게 해주고 흙에 묻혀 사는 천민의 시비를 바로 가려 주리라.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이고 성실로 띠를 띠리라. 늑대가 새끼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수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사자와 송아지가,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어 그 새끼들이 함께 뒹굴리라.” 늑대는 새끼양을 먹고 표범은 수염소를 먹고 자라고 사자는 송아지를 먹고 자라고 곰은 암소를 먹고 자라는 육식동물입니다. 이들이 함께 뒹굴라면 무슨 일이 먼저 있어야 합니까?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이들의 식성이 육식에서 초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함께 뒹굴 수 있지. 배가 부를 때에 함께 뒹굴며 놀다가 배가 고프면 잡아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육식이 초식으로 바뀌어야 가능합니다. 그래 이사야는 이어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리라 젖먹이가 살모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젖 뗀 어린 아기가 독사의 굴에 겁 없이 손을 넣으리라. 나의 거룩한 땅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육식동물의 위가 초식동물의 위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까? 위와 창자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사회적 구조를 뒤집어야 합니다. 조금 개혁해서는 바꿔지지 않습니다. 혁명적인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여기서 루가가 제시하는 그 혁명적인 방법이 바로 아기 예수가 로마 기병대인 말의 먹이로 나서는 일입니다. 평화의 왕 사랑의 원천인 하느님의 아들이 이들의 먹이가 되어 저들의 위장 안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내부구조 곧 전쟁과 살인과 약탈로 점철된 그 폭력의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저는 루가가 제시하는 아기예수가 말밥통에 누인 이 그림 속에 그리스도인들이 찾아가야 할 평화의 길이 제시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말하면 루가가 꿈꾸었던 이 혁명은 이백년이 지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고 봅니다. 물론 이것이 교회의 권력화를 가져온 또 다른 악의 시작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만.


        
늑대 표범 사자 곰은 모두 약소민족들을 잡아먹는 애굽과 바빌론과 페르시아와 그리스와 로마의 제국을 말합니다. 오늘도 돈과 경쟁에 기초한 시장자본주의 제국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미국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과 한통속이 되어 함께 움직이는 세계 십몇 위의 경제대국 남한도 포함됩니다. 아프리카나 남미 동남아시아의 제3세계의 눈으로 보면 남한은 사자나 표범은 아닐지언정 그들이 사냥하고 먹고 지나간 먹이를 재차 공격하는 삵쾡이의 제국입니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 것인가요? 어떻게 사는 것이 말밥통에 누워있는 삶이 될까요?


        
말밥통은 역사를 뒤집어 없는 혁명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동시에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이보다 더 낮은 자리는 없습니다. 야훼 하느님은 사람이 되어 낮아지셨고 그리고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말밥통에 누이심으로 가장 낮아졌습니다. 낮아짐 그것은 비임입니다. 사회학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평등의 시작입니다.


[세계인권선언과 남한사회의 현실]


        지난 주 수요일은 세계인권의 날이자 인권선언 60돌을 맞이하는 뜻 깊은 날이었습니다. 그날 청와대근처를 지나가다보니 인권관계자들이 그곳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습니다. 청와대가 인권을 유리하는 예전 시대로 돌아온 것입니다. 잃어버린 10년 운운거리며 국가보안법의 망령을 되살리고 KBS MBC YTN 등의 모든 언론을 장악하여 국민의 귀와 눈을 막으면서도 겉으로는 북한 인권을 앞세우며 남북화해의 상징인 개성공단의 문을 닫게 하면서 한반도의 전쟁 불안을 일으키는 곳이 또 다시 청와대가 되었습니다. 내년 예산에 경찰청의 진압장비에는 추가로 수십억 원을 투입하면서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직은 반으로 축소시키려하고 있고 안기부법 개정을 통해 모든 국민을 입과 귀를 통제하려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입에서는 인권과 민주주의란 말 대신에 법치와 경제라는 말만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법치와 경제는 오직 힘 있고 가진 자들의 말잔치일 따름이지 사회적 소수자들과 경제적 약자들에게는 생존권마저 위협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적인 경제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유럽과 미국의 모든 나라들은 부유층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매겨 거둔 다음 이를 서민들과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균배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정부는 그 반대로 부자들의 세금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고 비정규직 제한법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려 하고 있고 기초생활자의 밥값을 줄이려 하고 있고 60세가 넘은 고령자의 최저임금을 10% 깎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벼룩의 간을 빼어먹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경기부흥과 고용확대라는 명분이야 좋지요. 벼룩의 간을 빼어먹기 전에 먼저 대통령 이하 모든 청와대나 정부기관의 고급관료들 그리고 국회의원들이 먼저 나서서 자신들의 봉급을 깎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청와대 안에서 자전거나 한번 타는 쇼나 시장바닥에 가서 서러운 할머니를 안는 그런 쇼는 집어치우고 대통령이 장로라고 하니까 성서의 말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외치는 이 말씀이나 귀담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60년 전 유엔은 “우리는 모든 인류가족에게 그들이 원래부터 존엄성과 남들과 똑같은 권리와 남에게 빼앗길 수 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주는 것이 자유롭고 정의로우며 평화로운 세상의 밑바탕이 된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회는 거꾸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피땀으로 일구어놓은 인권과 민주주의마저 무로 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교과부가 만들어 1만여개의 초중고등학교에 배포한 현대사 영상물에는 4.19혁명을 4.19데모로 폄하하고 이승만 박정희 전대통령의 부정선거나 독재에 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고 80년대에선 광주항쟁과 87년 6월항쟁을 뺐습니다. 2000년에서는 55년간의 남북군사대결을 평화와 대화로 돌아서게 한 6.15남북정상회담을 빼고 대신 이명박씨의 서울 시장 시절의 치적을 언급한 ‘청계천의 어제와 오늘’이 들어갔습니다. 항의를 받아 회수한다고는 하지만, 이건 누가보아도 너무나 치졸한 일이자 용서받지 못할 역사왜곡입니다. 이는 현직 통치자의 인식을 그대로 드러낸 한심한 사건이고 두고두고 회자될 작태입니다. 이런 얼빠진 인간들에 의해서 우리 아이들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배운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옵니다.


[이주민과 코피노]


        인권에 관련하여 할 말은 많지만, 오늘 우리 남한 사회에서 가장 큰 인권사각지대에 놓인 계층은 이주노동자와 이주민들입니다. 이주 노동자들에 관해서도 할 말은 많지만, 이주민에 관련하여 한 가지만 언급하겠습니다. 우리가 시골로 여행을 하다보면 결혼하지 못한 농촌 총각들을 위해 <베트남 여자 소개합니다.>라는 현수막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요즘은 그 문구들이 매우 심각한 언어들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우리 남한사회의 인권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베트남 숫처녀와 100퍼센트 결혼성사>, <베트남 처녀결혼-초혼 재혼 장애인 환영>, <처녀와 결혼-완전후불제>, <100퍼센트 사후보장>(만약 병이나 다른 이유로 죽더라도 다른 여자를 주겠다는 말) 이런 문구도 있습니다. <베트남 처녀는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65세까지 완전 성사>(아니 다 늙은 사람이 무슨 정력이 있다고 젊은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만약 다른 나라에 여행을 갔는데, 이런 글귀를 보았다고 합시다. <한국숫처녀와 100퍼센트 결혼성사>, <남한처녀와 결혼-완전 후불제>, <Korea처녀결혼-초혼, 재혼, 장애인 환영>, <한국처녀는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65세까지 완전 성사> 언젠가 뉴욕타임스에 남한의 늙은 총각들 십여명이 공항에 내리자마자 곧장 집단장소로 가서 여인들의 얼굴보고 신부감을 고른 다음 한 시간 통역을 통해 말 몇 마디 나누고 첫날밤을 치룬다는 르포기사가 실린 적이 있어 얼굴이 화끈거렸던 적이 있지만, 이거 해도 너무 한 것 아닙니까? 이러고도 우리가 백의민족이니 홍익인간이니 평화를 사랑하는 백성이니 이 따위 말할 수 있습니까? 인간이하가 아닙니까?


       
이미 다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코피노’(Kophino)의 급증으로 남한이 또 다시 국제적 망신을 사고 있습니다. 코피노는 Korean과 Philiphino의 합성어입니다. 한국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들을 말하는데, 이 코피노들은 한국인 유학생과 관광객이 순간의 쾌락만 좇다 떠난 자리에 버려진 이들로 대부분 가난한 미혼모 밑에서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 요리우리 신문은 최근 ‘코피노 급증’이란 제목으로 한국 남성을 은근히 조롱, 비난하는 기사를 크게 다뤘습니다. 예전 자신들이 동남아 성매매여행으로 비난받던 그 자리에 지금은 남한사람들을 속죄양으로 밀어 넣고 있습니다. 5년 전 1000명 수준이던 코피노가 최근 1만명 정도로 늘어났다며 한국인에 대한 현지인의 반감이 확산되고 있어 심각한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나서 입양이라도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림절과 웨이터]


        이제 오늘의 하늘뜻펴기를 끝맺고자 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이자 인권주일입니다. 주님은 이 땅의 폭력적 구조를 끊고 진정한 평화를 이룩하시기 위해 말밥통 안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죄인이라고 따돌림을 당했던 사회적 소수자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 운동을 펼치셨습니다. 그러다가 권력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를 부활토록 하셨고, 그 부활은 제자들의 복음 활동을 통해 계속 증언되어져 왔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에게 이 부활 증언의 사명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를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단지 12월 25일을 기다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탄축하예배를 기다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유치부의 재롱과 성가대의 칸타타 연주를 기다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차를 기다리고 애인을 기다리는 그 기다림이 아닙니다. 이 기다림은 우리들 자신을 말밥통에 누이는 행동의 기다림입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웨이터(waiter)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기다리다(wait)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는 본래 노예제도 하에서 주인이 밥을 먹을 때에 그 옆에서 심부름을 하기 위해 수건을 들고 대기하고 있던 하인을 말합니다.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니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주인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눈치 채어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웨이터,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루가복음 17장에도 나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농사나 양치는 일을 하는 종을 데리고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오면 ‘어서 와서 밥부터 먹어라’로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오히려 ‘내 시중부터 들고 나서 음식을 먹어라’하지 않겠느냐? 그 종이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하고 말하여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진정 주님을 믿고 따른다면 우리 또한 남이 잘 가지 않는 좁은 평화의 길을 걸어간 후에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이 고백이 바로 오늘 주님 오심을 준비하며 행동하는 우리들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