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끈을 놓지 말고

시편 85, 8- 13 ; 로마서 9, 1- 3


최 명수/홍 영진 장로


      하늘 뜻 펴기에 앞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새 교우 교육을 받은 지 한 달 남짓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 이 자리에 서기가 적절치 않다고 생각이 되어서 목사님 말씀하시는 걸 사양했습니다만 목사님께서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하시고, 사실인즉 향린교회에서 교인으로선 저 혼자 평양을 방문했기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북한 방문은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 연맹 초청으로 조선그리스도교 연맹과 남쪽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공동 주최로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공동기도회”를 갖기로 된 것입니다. 남쪽에선 우리 기장 쪽 목사님과 장로님들, 또 감리교 쪽에서 목사님과 장로님들 이렇게 해서 100명이 방북케 되었습니다.

      가는 길은 다행히 고려항공기를 전세로 해서 서해안 직항로를 통해 평양 순안비행장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김포공항을 이륙한 지 꼭 한시간만에 순안비행장에 착륙하고 보니 참으로 감회가 여러 가지로 착잡했습니다. 이렇게 가까운 곳을, 이렇게 힘들게, 이렇게 오랜만에 오다니 하고, 참 벅찬 가슴으로 트랩을 밟았습니다.

      숙소는 47층 되는 “양각도 호텔”이 되었습니다. 대개 외국 사람이나 특별한 관광객은 “고려호텔”이나 “양각도 호텔”로 배정된다는 것 같았습니다. 봉수교회에서의 예배는 도착한 다음 날로 시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봉수교회는 남한의 기독교단체에서 세워준 교회입니다. 처음엔 3,4백명 정도의 교회였는데 금년에 다시 남한 기독교 단체에서 1000여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로 확장 해 세워 준 교회입니다. 교회당은 남한의 웬만한 교회 못지않게 대리석으로 잘 지어진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들어섰을 때는 평일 아침인데도 3, 4백명의 교인들이 모여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교회 모습이 보이는 순간 퍽 감격스러웠습니다. 3,40년 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이 땅에, 동토의 이 땅에 꽃이 피다니, 참으로 기적을 보는 듯 했습니다.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예배 중에 성가대 찬양이었습니다. 60여명의 성가대의 찬양이 마치 러시아 어느 합창단과도 같은 훌륭한 수준으로 너무나 은혜로웠습니다. 또, 여성중창이며, 남성중창 등도 훌륭한 수준으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배 중에 성찬식이 있었습니다. 남북의 성도들이 모두 줄지어 앞으로 나가 성찬식에 참여했습니다. 저는 앞에 나가 성찬을 대하는 순간 견딜 수 없는 눈물이 북 받혀 올랐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십자가의 사랑이 이렇게 우리들이 만나 주 안에서 한 형제임을 확인하게 하는 것이구나’하고 참으로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가 많은 눈물을 흘리고 감격해 하는 것을 남쪽에서 간 기자들이 봤는지 예배가 끝나자 한 여 기자가 내게 쫓아와 몇 가지를 묻습니다. “여기 신도들의 신앙은 어떤 것 같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종교는 온상에서 자라면 부패하고 핍박을 받으면 발전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 분들은 참으로 신실하고 진솔한 신앙인이라고 봅니다.” 라고 했습니다. 저는 사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돈이나 재물을 앞세우고 우선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신앙생활은 오염되기 쉽고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생활을 하는 북쪽 사람들은 그야말로 신실하고 진솔한 신앙생활을 하기가 쉽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남한에서는 북쪽의 신앙인들을 의심하는 말들이 더러 있는데 저는 그렇게 보질 않습니다. 여기 찬송가와 성경책을 얻어 온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얻어서 절 주신 것인데, 찬송가는 우리들이 쓰는 곡도 많이 들어있고, 그 쪽에서 선곡해서 넣은 곡들이 있고 해서 400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쓰고 있는 공동번역 책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인쇄도 북한에서 인쇄된 책들입니다. 조선기독교연맹 중앙위원회 발행에 평양 종합 인쇄공장 제작으로 되어 있습니다.

      3박 4일의 예정이었습니다. 다른 시간에는 대개 그 쪽에서 보여 주고 싶은 것들만 안내하면서 보여 주는데, 외국 손님이나 관광객들에게 보여주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의 생가라든지 주체사상탑, 개선문, 만경대, 소년 학생궁전 등 여러 곳을 안내받았고 마지막엔 묘향산을 갔는데 날씨가 좋지 않아 산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제일 궁금한 것은 그 쪽 경제사정이라든지 국민들의 생활이 어떤가 하는 것이었는데 대체로 우리가 여기서 느끼는 것과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우선, 에너지가 많이 부족해서 절전하느라 밤이 아주 어둡습니다. 물자도 근검절약하는 것이 아주 뚜렷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휴지 한 장도 넉넉하게 둔 곳이 없었습니다. 만찬장 식탁에도 여섯 사람이 둘러앉은 자리에는 한 장씩 곱게 접어서 6장만 접시에 놓여 있습니다. 호텔 방에도 너댓장만 곱게 접어서 접시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곽 채로 놓고 흥청거리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그렇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분간이 잘 안됩니다만. 평양시내는 공공건물로 꽉 차 있고 조금 변두리로 가면 아파트들이 나옵니다. 차창으로 보면 유리를 끼지 못한 창들, 심지어 창살이 부러져 나간 창들도 드문드문 보였습니다.

      제가 개성도 두 번 가 봤는데 개성은 더 심했습니다. 제일로 눈에 띄는 것은 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중교통 수단이라는 것이 무괘도차라고 버스처럼 생겨가지고 전력으로 다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쩌다 드문드문 보이기 버스가 드문드문 보이는 것 하고, 지하철이 있다고 하는데 타보지는 못했지만 전력난 때문에 제대로 운행이 될까 싶었습니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차타기도 어렵지만 돈 때문에도 많이 걸어 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허름한 옷차림에 십리고 이 십리고 하염없이 걷다가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쉬는 사람들,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하염없이 걷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볼 땐 참으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이건 일제 시대 말 궁상스럽던 우리들의 인간상들이었습니다. 도시 사람들이 곡식이 부족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배낭을 메고 시골에 가서 얻어 이고 지고 십리 이 십리 길을 걷거나 목탄차라고 나무를 때서 가는 버스에 간신이 매달려 다니던 생각이 불현듯이 떠올랐습니다. 어쩌면 ........ 한 땅덩어리에 살면서 한 쪽은 밑이 째지게 가난해서 굶어 죽어 가는데 한 쪽은 먹고 남은 쓰레기가 넘쳐나 버릴 데를 걱정하는 지경이니 ...... 이것은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서 우리들은 한 민족이요 한 형제라는 데 큰 비극이 있습니다.

      돌아올 무렵, 국민일보의 한 기자가 와서 묻습니다. “이번 여기 온 소감이 어떻습니까?” 하고요. 저는 그랬습니다. “내가 오랫동안 마음에 안고 있는 성경말씀이 있는데, 로마서 9장 3절 말씀으로 “나는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 라는 사도 바울 선생의 이 무서운 고백이 있는데 나는 여기서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통일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노력하고 일구어 가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의연히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겠지만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요즘은 남북문제를 경제 논리로 하겠다고 합니다. 도대체 이 나라는 어떻게 되어서 장로들이 대통령을 하면 남북문제가 험악해집니까? 누가복음 11장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느 나라든 갈라져서 싸우면 쓰러지게 마련이고 한 집안도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는 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의연하게 기다리는데 바라는 통일은 오지 않고 이 민족 위에 멸망의 재앙이 찾아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분단은 반세기가 넘어 63년이 되었습니다. 민족의 동질성이 무너지고 점점 이질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혈육을 같이 한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한탄하지 않겠다.” 사도바울 선생의 이 뜨거운 가슴을 우리 함께 공유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최명수 장로)


        저는 오늘 오키나와 평화기행을 같다 온 경험을 여러분과 나누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임보라 목사님과 한세욱 선교부 간사와 장남의 최명수 장로님, 청남의 김지수, 희청의 양명희, 청신의 이영나, 새청의 김재원과 조남원, KSCF의 도임방주, 제 3세계 그리스도 연구소의 고상균 그리고 저 이렇게 11명이 같이 다녀왔습니다. 희년여신도회와 장년여신도회 외에는 모든 신도회가 다 모인 것이지요. 다양한 신도회가 함께 여행을 한 것도 참 좋았습니다. 다음에 여신도회의 참석이 꼭 있었으면 합니다.

        사실 이번 평화 기행을 가게된 것은 순전히 의무감 때문이었습니다. 10월에 12일간을 학회와 회의 때문에 직장을 빠져야 되는 관계로 휴가를 내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선교부 고문장로인데 평화기행 자체가 무산되는 것은 막아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가게 된 것이지요. 한편으로는 전쟁문제, 미군 문제, 위안부 문제는 알고 있는 내용이고, 꼭 오키나와까지 가야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같다 오고 난 지금 제 생각은 잘 갔다고 왔고, 인원에 문제가 없으면 또 가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오키나와 평화기행은 저에게 소중한 경험이었고 좋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지금도 여러 가지 보고 느낀 내용이 한번 씩 다시 떠오르곤 합니다. 며칠 동안을 일상의 삶과 단절하고,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들을 역사의 현장에서 향린 교우들과 같이 느끼고 고민하는 과정은 영성훈련과는 또 다른 소중한 훈련과정 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프로그램을 가져야 되겠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오키나와는 과거 전쟁의 참혹함과 현재의 전쟁 위험성을 같이 보여주고 있고, 게다가 아주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을 가지고 있어, 인간이 저지른 만행이 더욱 더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러한 곳입니다. 또한 일본이면서도 일본의 식민지같이 느껴지는 오키나와는 일본에 의해 고통을 당했던 우리와 같다는 동료의식을 느꼈던 것인지 오키나와의 역사를 알게 되면서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곳입니다. 오키나와는 일본에서도 가장 못살고, 실업률이 높으며, 이혼률이 높다고 합니다. 전쟁의 참혹한 경험과 미군기지의 존재와 가장 낙후된 사회경제적 여건이 일본이 보수화되어 가는 가운데 오키나와가 진보성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묵었던 기노완 세미나하우스도 좋았고, 저희의 평화기행을 안내한 기노완 센터의 일꾼들(상근은 3명이고 비상근이 18명이이라고 들었습니다.)은 오끼나와 평화운동에 헌신적이고 중심이 되는 분들이었습니다. 아침에 세미나하우스에서 식사를 날라 주시던 분이, 헤노코 기지 건설 저지를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저희에게 자세히 그간 경과를 설명해 주는 것을 보고 반갑기도 하고 고맙게도 느꼈습니다. 그리고 안내와 강연을 맡으셨던 그 외의 다른 분들도 오키나와 평화운동에 가장 중심이 되어 헌신하는 분들이라, 말과 태도에서 정성과 진정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첫날은 히메유리 자료관, 한국인 위령탑, 평화의 초석, 오키나와 현립평화자료관을 방문하였는데 처음 들린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에서 저는 깜작 놀랐습니다. 1930년대 오키나와 여자 사범학생들이 조회하는 것을 찍은 사진이 제가 학교다닐 때 조회하던 장면과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해방이 되서도 일제시대의 일본과 똑같은 교육을 받았구나하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곳에서 학생 222명, 교사 18명이 육군병원 호나자 간호에 동원되어 136명이 전쟁터에서 숨졌다고 하는데, 전쟁 체험자가 해마다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젊은 세대에게 전쟁의 참상을 알려주기 위해 1983년에 만든 히메유리 평화기념 자료관에서 생존자인 할머니가 나와서 견학 온 학생들에게 직접 그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외에 평화의 초석, 오키나와 현립평화기원자료관을 방문하였습니다. 1945년 3월~6월 일본 정부가 본토 방어 시간을 벌기 위해 오키나와에서 민간인 총동원령을 내려 미군의 북상에 저항하면서 ‘철의폭풍’으로 불리는 치열한 전투에 휘말렸으며, 당시 오키나와 인구의 4분의1인 12만 명의 민간인이 숨졌다고 합니다. 결국 5월 22일 일본군은 주민을 방패삼아 남부 철수를 단행하였고 미군에게 내몰려 자살의 벽에 몸을 바다에 던져 목숨을 잃었는데, 그 자리에 평화기원자료관을 만들었습니다. 공원 구석에 별도로 한국인 위령탑이 있는데 피해자 한국인이 가해자 일본인과 같은 장소에 이름을 새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에서 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1975년 건립되었는데, 친일파 시인인 이은상 씨가 쓴 시가 추모탑에 새겨져 있었고, 추모탑 옆에 일본 군인이었던 박정희 대통령 이름이 아주 크게 새겨져 있어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둘째날은 도카시키섬에 갔습니다. 섬의 정상을 가보니 우리나라의 한려수도와 같이 아름다운 섬들이 주위에 널려 있고 에메랄드 빛의 바다가 널리 펼쳐져 있었습니다. 329명의 주민이 강제된 집단 자살이 행해졌던 집단자결비가 있는 곳에 가 보았습니다. 1945년 3월 26일, 미군함대가 도카시키 섬 주변을 새까맣게 포위한 상태에서 주민들은 절망에 빠져 스스로의 목숨을 끊어야만 했습니다. 비 옆에 적혀있는 1945년 4월 2일자 LA 타임즈 조간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집단 자결의 실상, 여기서 있었던 일...

[----- 사체 혹은 빈사상태가 된 일본인(도카시키섬 주민)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발 디딜 곳도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쓰러져 밀집되어 있었다. ”낡은 옷을 찢어서 만든 천을 이어서 목을 졸라맨 여성과 아이가 적어도 40명은 있었다. 들려오는 유일한 소리는 상처를 입고도 죽지 않았던 어린 아이들이 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전부 200명 정도였다.”

------ 구조되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한 일본인들(도카시키섬 주민들)은 ‘미군인은 여자는 폭행하고, 고문하고, 남자는 죽여 버린다고 일본병사들이 말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미국인이 의료준비를 하고 식료와 피난소를 차려주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자신의 딸을 교살했던 노인은, 다른 여성이 위해를 당하지 않고 친절하게 다뤄지는 것을 보고 한없이 후회하고 있었다.]


        도카시키섬에는 배봉기 할머니가 있던 위안소, 白玉의 塔, 아리랑 위령비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의 현(縣)으로 복귀 되면서 배봉기 할머니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 편입되면서 도카시키섬 주민들도 주민등록을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본적을 알 수 없는 조선 여성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 알려졌고, 배봉기 할머니는 고국에 ‘되돌아가기 위해’ 강제연행 당한 사실을 말하고 일본에서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배봉기 할머니가 살던 빨간 기와집, 이제는 집주인이 지붕개량을 해서 바뀐 집 앞을 걸어보았습니다.

        도카시키섬의 아리랑비는 재일교포 영화감독인 박수남 감독의 영화「아리랑의 노래」를 찍은 촬영장에 세워졌습니다. 조선에서 오키나와에 종군위안부로 강제 연행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조선인 위안부문제를 적극적으로 일본사회에 알려 실태를 고발한 다큐멘터리인데 영화제작 후 10년 후에 오키나와 주민들이 돈을 모아 이 공원을 조성했습니다. 도카시키섬에는 7명의 조선인 일본군‘위안부’가 있었는데, 그 중 세분의 유골은 백옥의 탑에 함께 합장되었다고 합니다.(그동안의 위안부로 강제동원된 여성의 숫자는 최저 5만 명에서 많게는 20만명에 달하며 위안부의 비율을 추정한 결과 조선인 51.8%, 중국인 36.0%, 일본인 12.2%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쟁에 관여하였고, 아프간, 이라크 전쟁의 발진기지로 이용되어 왔습니다. 오키나와에서 날아간 무기로 인해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오키나와는 미군기지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전쟁의 희생자들에게는 가해자의 입장에 서게 됩니다.

        3일째에는 헤노코 기지를 방문하였습니다. 후텐마 비행장 대체시설 부지 예정지이며, 이를 저지하기위해 싸우고 있는 생명을 지키는 모임 텐트를 방문하였습니다. 저희가 방문한 날은 한동안  매주 토요일 모이던 집회를 중단하였다가 다시 모임을 갖는 뜻있는 날이었습니다.(1995년 10월21일 후텐마 기지의 미군이 12살 소녀를 성폭행한 사건이 발생했고, 사건 발생 한 달 뒤 8만5천 명의 오키나와인이 그동안 쌓여왔던 미군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였습니다. 사건 발생 1년 뒤 96년 12월2일 미-일 양국 정부는 기노완시의 후텐마 기지를 오키나와에 반환하는 대신 캠프 슈와브 앞 헤노코 바다를 메워 그리로 비행장을 이전하자는 계획을 발표합니다. 오키나와에서 헤노코 계획이 발표된 뒤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은 97년 1월27일 헤노코 주민들은 ‘생명을 지키는 모임’을 결성하여, 그때부터 캠프 슈와브 정문 앞에서 매주 토요일 저녁 기지 이전 반대 촛불시위를 벌였습니다. 비폭력의 방식으로 11년째 계속되는 헤노코 투쟁은 헤노코 바다를 메워 기지를 만드는 것을 지연시키고 저지하여, 미-일 양국 정부는 캠프 슈와브 앞을 매립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조만간 육지에서 공사가 시작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면서 주민들은 공사 저지를 위한 새로운 시위 방식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바다에서의 공사는 비교적 쉽게 막을 수 있었지만, 육지에서 기지 입구를 원천봉쇄한 뒤 공사를 강행할 경우 공사 저지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막 농성장 앞에는 부드러운 모래사장이 있고, 모래사장의 한가운데를 사람 키만 한 높이의 철조망이 가로지르고 있었습니다. 헤노코 항구 바로 옆까지 주둔하고 있는 캠프 슈와브의 철조망입니다. 철책 곳곳에 기지 건설을 반대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색색의 리본이 수천 개 매달려 있는데 저희도 그곳에서 리본을 달고 주변의 쓰레기들을 치우는 일을 도왔습니다. 점심은 미리 준비해 온 자료로 만든 식사를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소개하고 음악 연주 등 프로그램을 가졌는데 처음 보는 분들이지만 오랫동안 같이 일해 온 것 같은 동료애를 느꼈습니다.

        이 곳에서 차량으로 이동하여 시키마 미술관과 오카나와 국제대학 헬리콥터 추락지를 방문하고, 저녁에는 [오키나와 알기: 전쟁과 여성]이라는 제목으로 ‘군폭력 반대 오키나와 여성행동’ 공동 대표인 다카니로 스즈요님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20년 넘게 미군 성범죄 피해 여성에 대한 법률·의료 지원과 상담, 그들의 아이들을 돕는 활동을 해왔고, 미군 기지의 구조적 문제점을 알리면서 평화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오키나와 나하시 시의원으로 15년간 활동하기도 한, ‘골리앗’ 미군 기지에 맞서온 오키나와인들의 인내와 힘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되는 분입니다. 강연의 내용도 좋았고 늦게까지 진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들은 내용 중 저를 부끄럽게 여기게 만든 것은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의 만행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했을 때였습니다. 일제시대의 일본의 만행,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분노하면서도, 정작 우리나라 군인이 외국에 나가서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변영주 감독은 낮은 목소리1, 낮은 목소리 2, 숨결이라는 3편의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다큐멘타리를 7년간 만든 감독인데, 숨결이라는 영화에 대한 대담에 보면 2006년 피스&그린보트 프로그램에 위안부 할머니이신 이용수 할머니와 같이 초대되어 참여하게 되었답니다.(피스&그린보트 프로그램은 한국의 환경재단과 일본의 피스보트가 같이 참여하여 만든 프로그램으로 2005년부터 10년간 프로그램을 갖기로 하여 진행 중에 있으며, 아시아의 화해와 화합을 가로막고 있는 역사 문제를 비롯하여, 동북아시아의 사회, 문화, 환경 문제를 열린 시민사회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 대안을 찾기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피스보트는 일본을 토대로 한, 세계적인 NGO로써, 평화, 인권, 평등 및 지속 가능한 발전을 장려하고 환경을 존중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피스보트의 주요 활동들은 큰 여객선의 선내에서의 평화 교육과 세계 곳곳의 기항지에서의 현지 시민 사회 파트너들과 만드는 교류등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피스보트는 1983년 세계 2차 대전 전후에 있었던 일본 군사 침략에 관한 일본 정부의 역사 교과서 검열에 분노한 일본의 학생들이 모여서 설립하였습니다. 첫 항해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름처럼 평화를 나르는 배로써 계속 항해하고 있습니다.)

        이용수 할머니는 쎄고, 자기 주장이 강하고, 화를 잘 내서 주변에 싫어하는 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당히 정치적 판단이 뛰어난 분이셨다고 합니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마을 주민학살에서 살아남은 2분이 생존해 있는데 그 중 한 분의 증언을 듣는 프로그램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용수 할머니는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너희 한국도 똑같이 저지르지 않았느냐 라고 몰아갈 것 같은 걱정에 안절부절 하였다고 합니다.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 때 한쪽 다리를 잃은 할머니가 증언을 하고 나니까, 이용수 할머니가 그 증언을 다 듣고 손을 들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온 위안부 피해자인데, 매 주 수요일에 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너희도 한국대사관 앞에 가서 항위 시위를 해라, 항의 시위를 하지 않으면 보상이나 사과를 받지 못한다. 원한다면 방법을 알려주겠다.”

        청중들 사이에 감동의 물결이 퍼져갔다고 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진정한 정의와 평화와 연대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오키나와 평회기행의 목적도 정의롭고 진정한 평화의 연대를 이루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광복회가 전쟁과 여성을 위한 인권 박물관을 반대하는 것이나, 요즈음 진행되고 있는 현대사 강의를 보면 역사를 올바로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오키나와의 기노완센터처럼 우리 교회도 과거의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에게 전쟁의 참혹함과 평화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일제 시대도 겪었고 한국전쟁을 겪었으며 분단으로 전쟁의 위험성이 항상 있는 나라로, 평화에 대한 염원이 저 절실한 나라입니다. 이러한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떤 면에서는 더 행복합니다. 이 사회의 모순이 우리의 양심이 잠들지 않도록 계속 다그치기 때문이며, 고난 속에 있는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학생 시절에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실망하여 고민하고 있을 때 디트리히 본회퍼의 옥중서간 중에 다음의 내용이 나에게 기독교인이 무었인지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주었습니다. 본회퍼도 나치스 지배하 독일의 고난 속에서 그러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도 이교도도


인간은 곤궁 속에서 신에게로 가고,

구원을 애원하고, 행복과 빵을 구한다.

병과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구한다.

인간은 누구나 기독교인도 이교도도 모두 그렇게 한다.


인간은 곤궁 속에 있는 신에게로 가고,

가난하고, 욕을 보고, 몸 둘 곳 없고, 먹을 것 없는 신을 발견하고,

죄와 약함과 죽음에 삼켜진 신을 본다.

기독교인은 고난 속에 있는 신과 함께 있다.


신은 곤궁 속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찾아오신다.

육신과 영혼을 그의 빵으로 배불리고.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죽고,

그들을 모두 용서하신다.



고난 속에 있는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성서 본문인 시편 85편은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얻은 해방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바빌론 포로 시대 후 이스라엘이 국가를 복구하고 나서 쓰여진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회개하는 백성에게 평화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현존이 되돌아 올 것이라는 것을 믿는 내용입니다..


나는 듣나니, 야훼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그것은 분명히 평화, 당신 백성이 당신을 따르는 자들, 또 다시 망령된 대로 돌아기지 않으면 주시는 평화로다.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맟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땅에서 진실이 돋아나오고 하늘에선 정의가 굽어 보리라.

야훼께서 복을 내리시리니 우리 땅이 열매를 맺어 주리라.

정의가 당신 앞을 걸어 나가고,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 가리라.


        저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용기있는 삶을 보면서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 것을, 정의가 앞장서서 걸어가고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 가는 것을 지금 봅니다. 저는 위안부 할머니의 꿈은 이미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1992년 1월 8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처음 수요시위를 시작한 이래 꾸준히 진행한 수요시위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주고, 세계로 그 깨우침을 확산하면서 지속되고 있습니다.

        평화의 끈은 향린교회와 기노완센터와 연결되었습니다. 우리 교화를 방문하셨던 모찌즈키 사토미 목사님과 오카나와 그리스도교학원대학 교목으로 계시는 김영수 목사님과 향린교회의 조헌정, 임보라 목사님이 튼튼한 버팀목입니다. 우리는 이 이어진 평화의 끈의 잡고 평화를 지키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오키나와 평가기행을 다녀온 나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생활은 변한 것이 없이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전쟁의 참혹함,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 헌신적인 평화운동가들의 모습들이 계속 잊혀지지 않고 떠오릅니다. 지금은 변한 것이 없고, 그게 언제가가 될지는 모르지만 나는 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평화의 끈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키나와 평화기행이 저에게 준 선물입니다.

        오키나와섬 인근 미야코섬에서 우리가 방문하기 한달 전인 2008년 9월 7일 일본군 위안부 추모비인 '아리랑 비' 제막식을 가졌습니다. 요나하 히로토시라는 일본인 남성이 어린 시절에 본 위안부의 모습을 잊을 수 없어 자신이 소유한 땅을 추모비 건립을 위해 기증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상하게 이 이야기를 들은 후, 이 위안부의 상상 속의 모습이 자주 떠오르곤 해서, 다시 오키나와 평화기행을 하게 되면 이 섬을 방문하여 위안부 할머니의 아리랑 비를 보려고 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