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공동체 주일

우리 안에 잠든 예수

시편 89, 11- 16 ; 마르코 4, 35- 41


이  병 일 목사



[선택과 판단을 요하는 삶의 모습들]


      지난 13일, 전태일 열사의 38주기 추모일에 헌법재판소는 종부세에 족쇄를 채웠습니다. 이강국, 민형기, 이동흡, 김희옥, 목영준, 이공현, 송두현. 이 사람들은 종부세 일부 위헌판정을 한 사람들입니다. 헌재는 종합부동산세 세대별 합산과세는 위헌, 주거목적 1주택 장기보유자 과세는 헌법불합치로 판정하였습니다. 헌법재판소에서 불과 몇 개월 만에 자기들의 판정을 뒤집은 것은 바로 그들 9명 중에서 8명이 종부세 과세 대상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김종대 부과대상X, 조대현 부과대상이나 적은 재산>

      그 전 주에는 미국의 버락 오바마가 여러 가지 난관을 뚫고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요즘 곳곳에서 열리는 토론회나 포럼의 주제는 오바마 대통령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오바마가 전 세계와 우리나라에 미칠 영향은 상당히 크겠죠.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오바마는 미국 대통령이며, 따라서 미국인의 이익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개신교의 각 교단마다 가을에 총회를 하는데, 대한기독교감리회(기감) 감독회장의 선거문제로 감리교단이 파행을 겪고 있습니다. 김국도와 고수철 목사가 서로 합법적인 감독회장이라고 주장하면서 힘겨루기와 재판을 하고 있습니다. 고수철 목사가 김국도 목사를 상대로 서울동부지방법원에 낸 직무방해금지가처분신청 첫 심리에서 최성수 판사는 ‘목사님들이 십자가는 지려 하지 않고, 어쩌면 세상보다 더 더티한 플레이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했고, ‘40일 금식기도하면 해결되지 않겠는가?’라고 조롱하는 듯한 말을 했습니다.

      지난 여름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에 7월 3일(목) 촛불집회는 개신교가 주관하였습니다.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때에 그 주관을 누가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로 참여 주체들 간에 옥신각신하였습니다. 그 전후에도 시청광장에 촛불교회를 세우는 문제, 그리고 최근에 촛불교회 창립의 문제까지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과연 무엇을 위해서 촛불집회를 하고 촛불교회를 세우는가 하는 본질적인 고민을 하게 됩니다.


[선택과 판단의 근거는?]


      가까이 혹은 멀리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몇 가지 사례를 나열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 속에 내가 있다면,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서 선택과 판단의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결정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연인으로서의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바탕에 무엇이 있습니까? 요즘의 세태를 반영하는 말이 있습니다. ‘불의는 참을 수 있으나, 불이익은 절대로 참지 못한다.’ 내 삶의 모습, 우리 공동체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실제로 이러한 논쟁과 대립은 우리 공동체 가까이에도 혹은 내부에도 있는 것은 물론입니다. 강남향린교회는 지금 교회운영위원회에 관련해서 한창 논의 중에 있고, 재개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목회자-장로 임기제, 분가선교, 교회정관을 비롯한 교회의 제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교우들의 교회생활에 관한 세세한 문제들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향린교회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일이나 교회 내부적인 일이나 교회가 대외적으로 하는 일, 그리고 우리의 삶과 인식이 미치는 모든 범위에서 나의 선택과 판단의 근거는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할까요?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


      오늘 본문은 강남향린교회에서 ‘하늘뜻펴기’를 통해서 마가복음을 읽으면서 나누는 순서에 따른 것입니다. 본문의 제목을 공동번역성서에는 ‘잔잔해진 풍랑’이라 하고, 새번역성서에는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다’라고 합니다. 제목은 내용을 요약하기도 하지만, 그 의미를 미리 규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강조하기 위하여 자연현상을 좌지우지하는 능력이 예수님에게 있음을 말하려는 것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이 기적은 ‘자연기적’으로 분류하여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 일반적으로 믿기지 않는 일도 믿어야 하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라고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만일 지금도 그러한 믿음을 억지로 소유하려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믿음조차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제자의 본질은 따름인데, 똑같이 행하는 것인데, 우리 중에서 누가 바람과 파도를 꾸짖고 명령하여 잠잠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고 성서의 이야기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야기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이야기 속에 감추어진 의미는 해석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이 이야기에서 바다는, 바람이 몰아치고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는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신 하느님의 뜻을 구현해야 하는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바다 위에 예수님과 제자들을 태우고 있는 배는 우리가 저마다 관계를 맺고 있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시대의 풍조에 의해 침노당하는 우리의 현실]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한 척의 배 위에서 무리들에게 비유로 가르칩니다. 뿌려진 씨와 결실의 비유, 등불의 비유, 저절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 겨자씨와 겨자풀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모습과 그 나라의 주체인 무리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새날이 시작되는 저녁에 배를 타고 맞은편으로 건너가자고 합니다. 바다를 건너는 것은 유대인들의 지역으로부터 이방인들의 지역으로 선교의 장이 확대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사건은 그 배 위에서 일어납니다.

      어두운 바다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태운 배의 항해를 순탄하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거센 바람이 일어나고 파도가 배를 덮쳐서 배는 물에 잠길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한 배를 탄 모든 사람들에게 위기의 순간입니다. 그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번역된 성서에는 “거센 바람”이라고 했는데, “큰 바람[?νεμο?]과 폭풍[λα?λαψ]”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단순히 비슷한 단어를 반복하면서 강조하려는 의도보다는 더 분명한 마가의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바람[?νεμο?]은 단순한 바람이라기보다는 “교훈의 풍조, 사조, 공허”(엡 4:14)라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공동체가 처한 현실이나 오늘날 우리 공동체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갈등이나 논쟁의 중심에는 시대를 좌우하는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이 긍정적이라면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고, 부정적인 것이라면 풍조[tendency]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나 이전에 여러분이 했던 논쟁에서 내가 주장했던 근거가 무엇이었습니까? 지금 우리와 관련된 모든 일상의 부분에서 우리를 잠식하고 있는 시대의 풍조는 ‘자본주의적 이익의 극대화’입니다. ‘불의는 참을 수 있으나, 불이익은 절대로 못 참는다.’

      다급해진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배 뒤에서 잠자는 예수님을 깨우고 투덜거립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당신은 우리를 돌보지 않습니까?” 도움을 간절히 청하는 부르짖음이기도 하지만, 도와주지 않는 것에 대한 원망과 비난이 들어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일으켜져서 바람을 꾸짖고 바다에게 명령합니다. “고요하고 잠잠해져라.” 그리고 곧바로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왜 무서워 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제자들은 큰 두려움에 두렵게(놀라게) 되어 서로에게 말했다.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가 에게 복종하는가?


[배 뒷전에서 잠든 예수님과 제자들의 몰이해]


      어두운 바다에서 폭풍을 만난 배, 그 속에 제자들과 예수님이 타고 있습니다. 그 배는 바람과 파도에 의해서 물이 차게 되었고, 곧 침몰할 지경이 이르렀습니다. 제자들이 처한 상황은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에도 수시로 일어나고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을 극복하고 벗어나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바로 그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제자들의 모습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서 생각해 봅시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맞은편으로 갈 때에 예수님을 데리고 갑니다. 제자의 도리는 예수님을 데리고 가는[παραλαμβ?νω] 것이 아니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확대해서 말한다면, 배 안에 있는 그대로 데리고 간다는 것은 예수님을 자기 공동체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야훼 하느님을 그 속에 가두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자기의 교회에 가두고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는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교회라는 조직을 유지하고 운영하기 위한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게 된 교회들의 모습에 대한 비판으로 생각해도 되겠죠.

      게다가 예수님은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의 맨 뒤 고물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배의 조타수나 선장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뒷전에 물러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앞에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들이 이끌고 가는 배의 꽁무니에 있을 뿐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그곳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잠들어 있다는 것은 일어나기[?γε?ρω] 이전의 상태입니다. 부활하셔서 지금도 활동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 이전의 죽음의 상태에 있는 예수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은 어떤 상태입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고 예수님에게 “선생님”[διδ?σκαλο?]이라고 합니다. 선생이라는 호칭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당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직도 누구인지를 잘 알지 못했다고 하는 구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선생 이상의 존재이며 하느님의 권능을 가진 분임을 보여주면서, 예루살렘의 사도 공동체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병행구에서는 이를 의식해서인지 “선생”을 “주님”(8:25)으로 바꿉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제자들은 “아직도”[ο?πω] 믿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몰이해와 불신앙을 책망하면서 안타까워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바로 그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없다는 말을 듣는 것은 엄청난 아이러니입니다. 또한 “아직도”라는 말은 이미 예수를 따르겠다고 결단하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예수님과 같은 배에 타고 있으면서 예수님이 가자고 명령한 맞은편으로 가는 제자들의 모습은 결코 그들만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겸허히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부딪히는 수많은 갈들과 논쟁의 상황에서 선택과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함께 가려고 하는 것을 방해하고 대적하는 바람과 폭풍을 헤치고 몰아치는 파도를 넘어서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그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며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잘 알고 있으며 성실하게 따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스스로 진보적이며 열려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거나 그의 가르침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려는 기회를 갖지 않으려 합니다. 반면에 소위 보수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열심히 배우려고 하지만, 그 내용은 편협한 교리에 매달려 스스로 생각하고 묵상할 겨를도 없이 목사에게 의존하는 형편입니다. 목사를 예수님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나의 사고와 아집에 갇혀 있는 예수님, 나의 뜻대로 움직이고 조종할 수 있는 예수님, 내가 원하는 대로 하면서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예수님, 부활하여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무덤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잠든 예수님, 나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나 윤리를 가르쳐 주는 선생으로서의 예수님일 수도 있습니다. 혹시 내가 알고 있다고 하는 그 예수님이 전혀 다른 예수님일 수도 있고, 우리가 믿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믿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너무 심하게 말했나요? 그러나 우리의 삶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 소위 보수적인 사람들보다도 더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스스로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판단의 근거를 들여다봅시다. 어두운 밤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겸손하게 배우고 예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같은 배에 있었던 제자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악한 영을 내어 쫓고 온갖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치유하는 것을 바로 옆에서 보았습니다. 나병환자를 고치고 그가 살던 곳으로 당당히 복귀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갈릴리 논쟁이라고 하는 논쟁을 통하여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을 꼼짝 못하게 아무 말도 못하게 하는 것을 보았고, 그 논쟁들을 통하여 예수님과 공동운명체가 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특히 높은 산에서 열둘로 선택되어서 예수님의 최측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로 가르침을 받고 또한 특별 과외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여전히 세상의 풍조와 폭풍에 몰려든 파도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는 책망을 들어야 했고,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가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할 때까지도 예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배반하고 부인하였고, 모두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어떨까요?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이 때로는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하물며 그 열둘도 그랬는데...... 실망하지 맙시다.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신 믿음이 우리에게 있는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깨닫고 따라갈 수 있도록 함께 애씁시다. 우리가 선택하고 판단하는 근거로서 지금도 여전히 살아서 우리와 함께 활동하시는 예수님이 되도록 나를 돌아봅시다.

본문 바로 앞에서 마가는 예수님이 많은 비유로 가르쳤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비유에서 우리는 믿음이 무엇이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작은 씨앗에 희망을 거는 것이다. 땅 속에서 죽은 것 같은 씨앗의 미래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씨를 뿌리는 일이다. 믿음은 암담한 현실에서도 희망의 빛을 보는 것이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결과를 보는 것이다. 믿음은 세상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고, 믿음은 절망의 상황에서도 신의 약속을 또렷이 듣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씨는 벌써 세상에 뿌려졌다. 지금은 실패하는 것 같으나, 종래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확이 있다. 믿음은 땅 속에 죽어 있는 씨에서 미래의 생명을 보는 것이고, 그 매장된 씨앗에서 생명의 약동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