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2일 겨울이 오기 전에

창 33:1-4; 디모테오 II 4:6-22


        오늘은 11월 첫 주일 어느덧 2008년도 겨울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라는 하늘뜻펴기 제목은 여러 해 다닌 향린교우들에게는 익숙한 제목입니다. 같은 제목과 같은 본문으로 2004년도와 작년에 했습니다. 초대 담임목사이셨던 김호식목사님께서도 이 제목으로 여러 번 하늘뜻펴기를 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 또한 향린교회 이전에 섬기던 교회에서도 여러 번 하였습니다. 이 제목으로 하늘뜻펴기를 시작한지가 15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매년 한 것은 아니지만, 2,3년에 한번 꼴로 하였습니다. 수십 년을 목회하신 분도 같은 본문 같은 제목으로 설교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왜 같은 본문과 제목의 하늘뜻펴기를 하는가?


[같은 본문과 제목의 하늘뜻펴기]


        그 배경은 이러합니다. 지금으로부터 93년 전인 1915년 미국 피츠버그제일장로교회를 담임하시던 맥카트니목사님께서 Come! Before Winter.라는 제목으로 하늘뜻펴기를 하셨습니다. 깊은 감동을 받은 교인들이 매해 이를 반복해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당회에서는 이를 아예 결의 사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 이 목사님은 그 교회에서 은퇴하실 때까지 37년 동안 매년 같은 제목과 본문의 하늘뜻펴기를 하셨습니다. 이 얘기가 미국과 세계 전역에 전해진 이후 수많은 목사들이 그의 하늘뜻펴기를 읽고 감명을 받아 같은 방식으로 하늘 뜻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는 같은 제목과 본문으로 된 하늘뜻펴기를 하니까 이번 주는 제가 편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실은 그 반대입니다. 왜냐하면 하늘뜻펴기란 내용도 중요하지만, 펴는 자의 영성이 더 중요하고 저는 사실 의미 없이 반복하는 일을 너무나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마찬가지이지만, 펴는 자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말씀의 깨달음에서 얻어지는 창조적인 열정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성령의 감동입니다. 이 열정과 감동은 주로 새것에서 나오지 이미 했던 옛것에서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같은 본문을 채택할 때는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영감을 찾아내야 하는데, 이 말은 자기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제가 4년 전 이 하늘뜻을 펴면서 저도 매년 반복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였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당회의 결의가 없었기 때문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제 마음 속에 반복에 대한 열정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몇 주 전부터 ‘겨울이 오기 전에’라는 단어가 제 머리를 감돌았습니다.


        신약성서 안에는 사도 바울로가 쓴 편지들은 대개 수신인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글은 바울로가 로마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믿음의 아들인 디모테오에게 보낸 개인 서신입니다. 그간 남긴 마지막 서신의 마지막 장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미 피를 부어서 희생제물이 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가 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내용은 그의 유언이기도 합니다. 그는 디모테오에게 세 가지를 부탁합니다. 마르코를 데려오고 자신의 외투와 책을 갖다 달라고 부탁하면서 겨울 전에 와 달라고 말합니다.


[겨울 전에 오라]


        우선 겨울 전에 와 달라는 말은 어쩌면 겨울 전에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사는 것도 주님의 뜻대로 죽는 것도 주님의 뜻이라는 마치 세상을 초월한듯한 말씀을 하시기도 했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그는 인간적인 외로움에 괴로워하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처음 재판을 받았을 때는 한 사람도 자기를 도와주지 않고 모두가 자기를 버리고 가버렸다’고 속의 아픔을 말합니다.(16절) 구체적으로 이름을 언급합니다. 데마는 이 현세를 사랑해서 떠났다고 말하고 그레스겐스와 디도도 각기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주치의 역할을 했던 루가만이 함께 하고 있다고. 여기에는 배신감에 대한 아픔이 깊게 배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불구자를 고치고 2층 다락에서 떨어져 숨이 끊어졌던 청년을 살리는 기적의 소문을 듣고 바울로의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이 자기가 바라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임을 깨닫자 하나씩 둘씩 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독 데마만은 끝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 바울로 또한 그에게 마음을 주었고 그를 사랑했고 그를 향해 큰 기대를 품었습니다. 그런데 그마저 떠난 것입니다. 그래 바울은 큰 상처를 받았지요. 차라리 마음을 주지 않았더라면 상처도 적었을 터인데, 마음을 주었기에 상처가 컸습니다. 그래 오죽 했으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을 한 바울로 선생께서 ‘데마는 이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카로 가버렸습니다.’라고 강한 원망이 담긴 말을 글로 남겼을까요?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그런 배반감을 느낀 적은 없으십니까? 사랑하기에 많은 것을 주었지만, 배반의 쓰라림을 느꼈던 경우 말입니다. 물론 인간관계라는 것이 쌍방적이기에 나만이 절대로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도와주고 사랑을 베풀었던 사람으로부터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부정적 반응이 나왔을 때, 마음속에 차올랐던 분노의 기억들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너무나 당연히 여겨 가롯 유다의 배반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받아야 했던 배반의 아픔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3년이나 함께 했던 제자이자 워낙 성실하고 계산이 정확하여 재정을 맡았던 유다가 자신을 배신했을 때에 받았던 충격은 어쩌면 십자가 죽음이라는 사형 판결보다 더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왜 데마나 가롯유다는 존경하고 따랐던 스승들을 배반하였을까요? 그것은 겉으로 나타난 기적들만을 보고 자기 욕심을 따라 세상적인 것들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잘못된 기대를 갖게 되면 주님을 배반하는 경우가 생겨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날에 무엇을 입을까?]


        사람이 외로우면 추위의 고통은 더 크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로마의 어두컴컴하고 습기 찬 감옥에 갇힌 바울로는 외투를 갖다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단지 추위 때문이었다면 로마교회의 교인들에게 부탁을 하면 되었을 것입니다. 굳이 드로아스의 가르포의 집에 두고 온 외투를 가져오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을 보면 거기에는 아마도 사연이 담겨 있는 외투일 것입니다. 자기를 따르던 어느 제자가 손수 만들어 준 외투였을 것이고 그 옷에는 복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옷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몽둥이로 맞은 핏자국이 남아 있거나, 산길에서 맹수를 만나 옷이 찢어져 꿰맨 자국이 남아 있는 외투였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옷장을 열면 추억이 담긴 옷 한두 벌쯤은 있게 마련입니다. 저는 여행을 갈 때 꼭 가지고 가는 울긋불긋한 T셔츠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교인이 선물한 옷으로 15년도 넘었습니다. 제 딸애가 여행을 다녀온 사진을 보면 아빠는 맨 날 같은 옷만 입고 있다고 놀려됩니다만, 오늘 아침에도 그 옷을 흘끗 쳐다보면서 다음 여행지는 어디가 될 것인지에 대한 기대의 기쁨을 가져보았습니다.


        그런데 실상 바울로가 외투를 갖다달라는 이유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양에서는 그 시신에 평상시 입고 있던 옷을 입힙니다. 그래 보통은 나 죽었을 때에는 이 옷을 입혀달라고 유언으로 남겨놓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두 베옷을 입힙니다. 전통이 중요하긴 하지만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오늘 밤에는 집에 가시거든 옷장 문을 열고 내가 죽을 때에 입고 갈 옷은 어떤 것이 좋을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내나 남편에게 혹은 자녀들에게 미리 말씀도 한번 해 놓으시구요. 잘못하면 분위기가 썰렁해지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덤덤해져가는 사랑의 불길을 다시 한번 불러 일으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시구가 있습니다. “만일 단지 짧은 기간동안 살아야 한다면 이생에서 내가 사랑한 모든 사람들을 찾아보리라. 그리고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했음을 확실히 말하리라.” 주저주저하다가 하루 이틀 미루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들이 우리들 주위에는 너무나 많지요.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바울로 선생은 외투와 함께 양피지로 만든 책을 갖다 달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구약성서일 것입니다. 이 또한 읽으려는 것이 목적이겠지만, 굳이 손 때 묻은 성경을 갖다 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것 또한 죽음을 준비하는 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애용하는 책을 관에 함께 넣는 일은 당시의 습관이기도 했으니까요.


[성경말씀대로 살아본 1년]


        최근 성서에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책이 나왔습니다. 영어 제목으로는 Living Biblically for One Year 우리말로는 ‘(미친척하고) 성경말씀대로 살아본 1년’이란 제목으로 나왔습니다. 뉴욕에 살면서 남성 패션잡지인 ‘에스콰이어’의 편집자인 A J Jacobs 라는 사람이 어느 날 엉뚱한 생각을 실천에 옮기게 됩니다. 1년 동안 성경의 말씀대로 살아보는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4년 전에도 엉뚱한 생각을 하여 수십권으로된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을 통독하고 ‘한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카’(The Know-It-All)를 펴낸 적도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제이콥스는 유대인이긴 하지만, 종교적 생활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자유주의적인 분위기에서 자라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태도를 갖고 있는 불가지론자입니다.


        다만 그는 지금까지 가장 많이 팔린 성서를 자기의 편리에 따라 말씀을 취사선택하는 방법이 아닌 극단적인 문자주의 방식을 통해 현대사회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몸소 체험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요한의 묵시록까지 꼼꼼하게 읽으면서 실천항목 700여가지를 뽑아냅니다. 물론 그중 마태오복음 19장 12절과 같이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된 자도 있다’는 식의 극단적인 비유적인 말씀은 실천항목에서 제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2005년 9월 1일부터 1년 동안 수염도 깍지 않고 수천년전 유대인들이 입던 옷을 입고 샌들을 신고 다녔습니다. 매달 초하루에는 나팔을 불라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 양이나 소의 뿔로 만든 쇼파르라는 나팔을 불기도 하고 생리를 한 여자와는 일주일동안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 아내와도 신체접촉을 피했고, 심지어는 그런 여인이 앉았던 자리에 앉으면 부정을 탄다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 접이식 미니의자를 갖고 다니면서 집안에서뿐만 아니라 지하철 안에도 갖고 다녔습니다.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아파트 안에다 초막을 짓고 살기도 했고, 간음한 자를 돌로 치기 위해 돌멩이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레위기의 말씀을 따라 벌레를 먹어보기도 하고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 사진도 찍지 않고 TV 시청은 물론 인터넷 검색도 삼가고, 이스라엘로 가서 직접 양을 치는 목자가 되어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일들 때문에 그는 수많은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많은 유익도 얻어 냅니다. 한 번도 기도해보지 않았던 사람이 하루에 세 번 기도를 했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지키면서 하루에도 수백가지의 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일 중독자였던 그가 안식일을 지키는 일을 통해 쉼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수입의 십일조를 드림으로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도 합니다. 불평하지 말고 험담하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면서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는 능력을 키웁니다.


        그는 구약성서의 이삭남기기나 열매남기기는 최초의 사회보장정책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초대형교회 목사들이 만들어내는 ‘부자되는 복음’에 대해 비판하기도 하며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면 그것 자체로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다는 얘기도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종교가 나를 딴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이 세상에 더 단단히 발을 딛고 서 있게 해줄 때도 많으니 희한한 일이다.’ 그는 여전히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자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는 1년간의 경험을 통해 어떤 거룩함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교우 여러분께서도 이 책을 한번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그가 경험한 이야기들이 매우 흥미롭기도 하지만, 성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리라고 봅니다.


[미움과 용서]


        죽음을 준비하는 외투와 양피지 책을 부탁한 바울로 선생은 또 한 가지를 부탁하는데, 이는 물건이 아닌 마르코라는 사람입니다. 마르코는 누구입니까? 마르코는 바르나바와 바울로가 안티오키아 교회의 파송을 받아 1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 함께 출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행 초기에 너무 힘들다고 중도에서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에 2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에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다시 데려가기를 원했고, 바울로는 이에 반대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28절은 이에 대해 이렇게 짤막한 얘기를 전합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심한 언쟁 끝에 서로 헤어져서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바울로는 실라를 택하여 각각 길을 떠났다.’


        바르나바와 바울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떠한 사이였습니까? 함께 안티오키아교회를 섬겼던 동역자였습니다. 선교여행에서 죽음의 고개를 함께 넘었던 끈끈한 동지였습니다. 바울로에게 있어 바르나바는 동지 그 이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르나바의 후원이 없었다면 바울로는 고향 다르소에서 그저 무명의 한 인간으로 그 삶을 마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로는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거듭났지만, 과거 교회를 핍박했던 악명이 그를 끝까지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바르나바가 적극적으로 그를 변호하여 안티오키아교회에 동역자로 불러온 것입니다. 오늘날 바울로는 예수 다음으로 때로는 예수 이상으로 추앙받고 있는데 이 모든 공로는 전적으로 바르나바에게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로에게 있어 바르나바는 대 은인입니다. 그러니 바르나바의 소원을 한번 들어주어 마르코를 선교 여행에 다시 한번 데려가는 일이 무슨 큰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바울로는 한번 실망한 사람에게는 다시는 마음을 열지 않는 고집불통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로는 마르코라는 인간은 두 번 다시 쳐다보지 않으리라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죽음을 앞둔 이 로마 감옥에서 마르코를 보기를 원합니다. 마르코가 복음을 위해서 목숨도 아끼지 않고 많은 일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바울로는 후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코는 내가 하는 일에 꼭 필요한 사람이니 그를 데리고 오시오.’ 직접 만나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그를 복음사역의 동역자로 받아들이고 격려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일은 어찌 보면 아주 간단한 일인 것 같지만 과거의 상처에 사로 잡혀 경우에 용서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필리핀 민중혁명 당시 핵심적 역할을 했던 마닐라교구장이었던 하이메 신추기경은 접견시간마다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며 찾아오는 여인을 귀찮아했습니다. 결국 추기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톨릭교회에는 환상이나 메시지가 오면 그것이 진짜 하느님으로 온 것인지를 확인해야 하는 규정이 있소. 당신이 진짜인지 확인을 해야 하겠으니 내가 가장 최근에 고해한 죄가 무엇인지를 하느님께 물어 알아맞히면 내가 당신을 인정하겠소.” 일주일 그 여인이 다시금 나타났습니다. 약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래 하느님께 여쭤보았소?” “네” “뭐라고 하시던가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시더군요.”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으니 이 답이 맞는 답입니다. 우리의 죄를 하느님께서 기억하시지 않는데, 우리가 형제자매의 잘못을 기억한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저도 문득문득 저에게 아픔을 주었던 사람들의 잘못들이 기억나곤 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용서를 생각하곤 합니다.


        바울로는 죽기 전에 마르코와 화해를 하고 용서를 빌고자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슴 뭉클한 순간이 많이 있지만, 미워하던 두 사람이 서로 만나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서로 손을 내밀고 눈물을 흘리며 포옹하는 순간처럼 아름답고 감격적인 순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만남의 기쁨]


        에서오와 야곱. 세상에 둘도 없는 형 아우이지만, 동생 야곱의 간계로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형 에서오는 그를 죽이고자 했고, 야곱은 이를 피해 20년 동안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제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형이 그를 용서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그는 형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그러자 형이 400명의 부하들과 함께 오고 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이 사백 명이 자신을 환영하기 위한 사람들인지 아니면 복수의 칼을 휘두를 자객들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 그는 밤새 필사적인 기도를 하는데, 이 장면을 야뽁 나루터의 천사와의 씨름이라고 하지요. 야곱은 이곳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고 형 에서오와 감동의 장면을 연출합니다. 서로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울음을 터뜨립니다. 수십년동안 떨어져 있던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이 만나는 장면은 눈물 없이는 볼 수가 없습니다. 이명박정부가 들어서서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금강산에 면회소가 완성되었음에도 이산가족의 만남은 더 이상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일은 참으로 안따까운 일입니다.


        내일부터 목요일까지 한국교회협의회 대표 100명이 조선기독교도 연맹의 초청을 받아 평양봉수교회를 방문하고 기도회와 함께 성찬식을 갖습니다. 저와 최명수장로님께서 함께 다녀올 예정입니다만, 본래 저희 일행 중에는 송환되지 못한 장기수 한분이 북에 있는 가족과의 만남을 위해 함께 갈 예정이었습니다만, 정치적인 이유로 성사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죽기 전 아버지가 50년 만에 아내와 자식을 만나 용서를 빌고 만남의 기쁨을 갖는 일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제 이산가족 1세대들의 삶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루속히 이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남은 질문 하나는 과연 디모데오가 이 편지를 받자말자 즉시 마르코에게 연락을 하고 외투와 양피지 책을 찾아 함께 로마를 향해 떠났을까? 하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갔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디모테오가 에베소 교회에서의 중요한 회의나 제직 임직식이 있어 서너 주일을 지체하다가 배를 놓쳤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 겨울을 지나 봄에 로마에 갔다고 가정을 해보십시다. 감옥을 찾아가 바울로를 면회하러 왔다고 하니까, 간수가 말하기를 그는 지난 겨울에 처형당했다고 말합니다. 디모테오는 그 순간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 속에서 땅을 치고 후회를 했을 것입니다. ‘아 그때 만사를 제쳐놓고 떠났어야 했는데...’


[인생 성공은 우선순위 정하기]


        후회막급(後悔莫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작할 수 있다면 세상에 늦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며 내일은 아직 오지 않는 시간이며 오늘만이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시간이 있고 없고는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하루가 30시간이 된다하더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여전히 시간이 모자랄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하루가 15시간으로 준다 하더라도 이웃을 위한 봉사의 시간은 충분할 것입니다.


        바울로는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돈이야 아꼈다가 한꺼번에 쓸 수 있지만 시간은 모아 놓았다가 한꺼번에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라는 말입니다. 정작 중요한 일을 지금 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중요한 일은 시간을 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일은 하루이틀 미룬다고 해서 무슨 큰 일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성서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느님께 기도하는 일을 지금 당장 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큰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저녁 가족들과 함께 사랑의 대화 시간을 갖지 않는다고 해서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하지 않고 하루이틀 미루다보면 결국은 커다란 곤경에 빠집니다. 견딜 수 없는 인생의 허무감이 밀려오고 가족들과의 마찰은 점점 심해집니다.


        마귀 대장이 인간들을 신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기 위해 3명의 부하를 뽑아 일감을 맡겼습니다. 떠나기 전에 어떤 일들을 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첫 번째 마귀가 말합니다. ‘나는 인간들에게 가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응 그건 좋은 생각인데 말이야, 이미 저들 마음속에는 신과 같은 어떤 선한 존재가 있다고 하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고 있거든. 이 방법은 몇 사람밖에 효과가 없을거야.’ 두 번째 부하에게 묻습니다. ‘자네의 전략은 어떤 것인가?’ ‘예  저는 지옥이란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응 이것도 좋긴 한데, 이미 저들이 사는 세상에는 지옥과 같은 것들이 존재하고 있거든. 이것도 몇 사람 밖에는 효과가 없을거야.’ 세 번째 부하에게 묻습니다. ‘자네의 전략은 무엇인가?’ ‘예 나는 신을 위한 선한 일들은 천천히 해도 된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우선 자신의 급한 일부터 먼저 하고 교회 일이나 이웃을 위한 선한 일들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그렇지 이 방법은 가장 효과적이야.’


        예수님의 비유말씀에도 이와 비슷한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잔치를 열고 많은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밭을 사고 소를 샀으니 지금은 갈 수 없다고 답합니다. 세상은 점점 복잡해져가며 분주해져 가고 있습니다. 먹고사는 일에 분초를 다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요즘같이 주식과 환율과 부동산 값이 하루에도 몇 번씩 요동을 치는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여기에 한번 말려들면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생명과 영원에 관련된 중요한 일들은 눈으로 보이거나 손으로 만져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긴급한 일들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들이 바로바로 눈앞에 보입니다. 하나를 해결하면 또 하나의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끝도 없이 계속됩니다. 여기에 삶의 유혹이 있고 신앙생활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중요한 일의 긴급함과 긴급한 일의 사소함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진실로 성공하는 사람이고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정의의 월계관을 향해]


        본 훼퍼목사님은 교회에는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를 구하는 두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값싼 은혜는 십자가 고난의 훈련 없이 말로만 믿고 눈앞의 이익만 얻으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값비싼 은혜는 보이지 않는 정의와 평화 생명의 세계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제 겨울이 오기 전에.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진즉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루 이틀 미루다가 결국 인생을 헛살았다고 후회하지 말고 주님께서 지시하시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향해 나아가십시다. 사도 바울로는 자신이 달려야 할 길을 다 달렸고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 월계관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준비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정의의 월계관이 보이시나요?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