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없는 한국 교회

이사야 61, 1- 2 ; 마태오복음 5, 1- 12


한  완 상 박사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오늘 제가 향린교회 와서 여러 자매 형제님들 앞에서 말씀을 증거 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홍근수 목사님 계실 때에 이곳에 와서 말씀을 증거 한 기억이 있는데 오늘도 와 보니 많은 사람들이 오시고 그간 교회가 질적으로 양적으로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제가 오늘 나눌 말씀 제목은 <예수 없는 한국 교회>인데, 이 제목을 걸고 좀 참담한 심정으로 여러분과 이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인터넷을 매일 들어가는데, 요즘은 아고라부터 들어갑니다. 아고라에 들어가면 여러 가지 기사들이 있지만, 저는 꼭 종교 토론방에 들어가 봅니다. 아고라 종교 토론방에 들어가 보면 제 가슴이 저려옵니다. 거기서 기독교는 ‘개독교’가 되고 목사는 ‘먹사’가 돼서 희화되는 모습을 보면, 자괴감과 부끄러움이 폭포수처럼 위에서 쏟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저는 그 시간이 기도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너 정신 차려!” 이렇게 돌들의 외침을 통해서,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그들이 돌이 되어서 우리에게 ‘개독교’라고 욕하게 하는, 하나님의 준엄한 질책 앞에서 저는 기도하게 됩니다.


      한국 교회가 왜 이지경이 되었습니까? 이에 대해 하나하나 말하자면 끝이 없습니다만, 간단히 말해 현상수준에서 본다면 욕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세습을 한다든지, 불투명한 재정운영을 한다든지,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톱-다운식 비민주적인 조직운영을 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구체적으로 총회장 선거나 감독 선거에서 스캔들로 나타난다든지, 또 일부 보수권력과 결탁한 힘을 과시한다든지, 그리고 확장주의적인 선교정책을 통해서 국가를 위태롭게 하고 국민을 아주 조마조마하게 한다든지, 또 입만 열면 파이팅을 부르짖으면서 승리주의적인 가치를 예찬한다든지, 이런 것들을 현상적으로 보면 그런 말을 들을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런 한국 교회 위기의 극대화된 징후들, 이런 징후들 뒤에는 무엇이 있기에 이런 것들이 나타나는 것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오늘 한국 교회, 물론 세계 교회도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소위 선교가 잘 된다는 한국교회에서 예수님이 실종되고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화화된 그리스도는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교리로 박제화 된 예수는 교회 쇼윈도에 아름답게 진열되어 있지만 역사의 예수는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갈릴리의 예수가 없습니다. 나사렛의 예수도 없습니다.


     오늘 향린교회를 보니 우리교회처럼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는데, 사도신경을 보면 거기에 역사의 예수는 없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그 다음 쭉 넘어가서 어디로 갑니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렇다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갈릴리에서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요? 사도신경을 보면 아무것도 하신 것이 없습니다. 병 고치신 것도 없습니다. 밥상공동체를 통해 절망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먹을 것을 준 것도 없고, 하늘나라의 꿈과 비전을 증거한 것도 없으며,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성령으로 잉태해서 돌아가신 것 밖에 없습니다. 그저 그 다음에 그리스도가 되는 것뿐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굉장히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 이곳 향린교회에 와서 저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역시 우리가 역사적인 예수를 만나려면 부자교회나 대교회 그리고 잘사는 교인들이 가장 불편하게 생각하는 메시지가 많이 모여 있는 산상수훈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신학도가 있다면 석사 논문으로 쓸 좋은 제목이 있습니다. 단 한 달, 네 번의 주일동안 대한민국 모든 교회의 주일 설교 제목을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날 설교의 텍스트가 구약인지 신약인지를 분류해 보고 역사적인 예수에 관계된 텍스트가 얼마나 있는지 조사도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 생각에 그것에 해당되는 것은 10%가 안 될 것 같습니다. 주로 50%가 구약에 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에 관해서도 바울에 대한 이야기가 많고 역사적 예수에 관한 이야기로 말씀을 증거 하시는 목사님은 많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산상수훈에 굉장히 좋은 이야기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두 가지만을 예로 든다면 역시 산상수훈의 백미는 팔복일 것입니다. 가만히 한 번 따져 보십시오. 그 여덟 가지 복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한국찬송가를 보면 교독문 74번에 마태복음 5장, 복 받는 사람은 작은 글씨로, 복 받는 내용은 큰 글씨로 인쇄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느낀 것인데요, 나이가 들수록 이런 점을 느끼는데 여덟 가지 복이 전부 한 가지 복이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복의 내용을 보면 ‘천국이 저희들 것, 위로받을 것,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 배부를 것,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 하나님을 볼 것,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 그리고 천국이 그들의 것’, 이렇게 복 내용을 보면 복 내용이 좀 산만합니다. 여러분 한 번 이것들을 중요한 순서대로 재배열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제일 먼저 나오겠습니까? 여러분 생각을 말씀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 ‘위로받는 것’, 이것은 제일 크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따라 오는 것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 이것도 제일 큰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배부를 것’ 이것이 무슨 제일 큰 복이 되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제일 큰 복이라고 한다면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라는 것인데, 천국이 그들의 것이면 천국의 주인이 되는 것이니 배부르고 위로받고 하는 것들이 전부 따라오지 않겠습니까? 이것보다도 더 본질적인 복, 다른 하나를 저는 7번째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곧 천국의 주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상황에서 그 집안의 장자가 되면 아버지 것은 자기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우리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집안의 아들, 딸이 된다면 그 집의 주인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것이 내 것이 되면, ‘긍휼이 여김을 받는다는 것’이든, ‘하나님을 보는 것’이든,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이든, ‘위로받는 것’이든 다 따라오는 것입니다. 사실 비본질적인 복들은 접어두고 본질적인 복을 하나 꼽으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받는 것입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올해 이 교회의 표어처럼, 바로 평화를 만드는 자,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만드는데 가장 강한 나라, 전쟁을 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부속품들을 만드는 공장을 경영해서 부자가 된 사람이, 교회에 와서 이것을 읽으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그러니 부자가 이것을 읽기는 참 어려울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말씀들을 읽기도, 생각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이것을 강조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들을 강조하는 교회는 다니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니 향린교회의 규모도 이정도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향린교회와 같은 교회가 2부, 3부, 4부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튼 이런 이야기는 정말 불편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편한 말씀을 역사적 예수가 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 역사적 예수가 없으니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팔복을 너무도 추상적으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하늘의 주인이 되는 것인데, 그것을 생각해 보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에 대한 것과 의를 위해 박해받는 사람에 대한 것, 이것들은 결국 같은 이야기입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박해받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가난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정확하게 주석을 하여 ‘극빈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가난하게 사는 노동자 수준이 아니라 가진 것이 너무 없어서 그저 하나님께 의지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상태를 ‘마음이 가난한다’라고 하여 추상화해서 탈색시켜 버렸습니다만 저는 최근에 나이가 들수록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가진 것 비워서 남을 채워주는 일을 하기에 더욱 가난해진 사람을 말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극빈’이 꼭 아니더라도 돈 많은 사람이지만 그것을 비워 나누어 주는 일을 함으로써 스스로 가난하게 되고, 평화도 만들고, 하나님도 보게 하고, 위로도 주고, 땅을 기업으로도 주고, 또 남 배부르게도 하며, 남을 불쌍히 여기고,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연결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여덟 가지로 이야기하신 것은 알아듣는 사람의 수준이 복잡하기 때문에 이렇게도 말씀하시고 저렇게도 말씀하시고, 그 강조점을 여러 각도로 다르게 맞추신 것이라 저는 생각됩니다. 이런 부분을 보면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에 대해 새삼 느낍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에서 바로 이런 예수님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평화를 만든다는 것은 평화를 지킨다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지만, 즉 군대가 필요하고 무기가 필요하지만, 평화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무기가 전혀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무기를 손에 들고는 평화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평화를 지킬 수는 있어도 결코 평화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인 교회는 평화를 빈손으로 만들되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올라 죽을 각오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곧 평화를 만드는 길입니다. 평화를 만든다는 것은 다시 한 번 말하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평화를 만드는 이가 되면, “너희들 다 죽어! 전부 다 고생해!”, 이런 말씀을 직설적으로 하지 않으시고 이 팔복 마지막에 가서 여덟 가지 이야기 하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  평화를 만드는 일, 정말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일, 그리고 의를 위해 헌신하는 일, 그렇게 되면 다름 아닌 욕먹고, 핍박받고, 박해받고, 슬프게 우는 것,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을 앞에 이야기 한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이렇게 여덟 가지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마지막 아홉 번째에 가서 그들이 박해받고 욕먹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예수님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무슨 군마나 좋은 차를 타고 찬란한 모습으로 퍼레이드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대형 교회들에서 소위 값싼 축복, 삼박자 축복을 말하는데, 팔복과는 전혀 다른 이 삼박자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예수의 말이 아닙니다. 감히 말씀드린다면 그것은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실 때 예수님을 시험한 이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주기도문 또한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명 경구, 명 비유, 명 연설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여기서 보니 주기도문을 우리나라 가락에 맞추어 노래로 부르는데 참 좋았습니다. 여러분 주기도문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 역사 속, 이 시간 속, 그리고 이 육체 속에 이루어지는 것, 전반부는 그것입이다. 후반부는 하나님 나라를 딴 곳에서 구하지 말고 바로 너희의 삶 속에서 구하라 라는 것입니다. 또 그것을 그렇게 말하면 추상적인 것이 될 수 있으니 그 당시 청중의 수준을 생각해서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일용할 양식’, 즉 기본적인 생존권에 필요한 먹는 것, 이것 없이 하나님 나라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 사실 10년 먹을 양식 가지고 하루를 사는 사람들은 이것을 기도하기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 먹을 것에 감사하는 삶, 하루 먹을 생존권을 확보하는 문제, 이런 것들은 우리 삶에 너무도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빚 진자를 탕감하는 것, 즉 ‘우리가 우리에게 빚 진자를 탕감해주듯이, 주님! 우리의 잘못을 탕감해 주소서!’ 하는 참 구체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빚 준 사람은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추상적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라고 해서 굉장히 추상화되어 있는데, 그것의 원래 뜻은 ‘빚진 자에게 빚을 탕감해 주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탕감해 주소서’ 라는 매우 구체적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얼마나 구체적인 세상의 이야기입니까?

그리고 ‘탐욕과 교만, 독선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것은 참 뜻 깊은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가진 자나 안 가진 자나 피할 수 없는 유혹입니다. 그것은 또한 사람이 좀 힘쓰고, 가진 것 있고, 명망이 있으면, 가장 빠지기 쉬운 유혹입니다. 이 중에서도 조심해야 할 것이 독선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세상에서 제일가는 독선가로 만들어 그 독선자 예수의 말씀을 증거 하는 것이 소위 ‘선교’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독선으로 완전히 화장해 예수 안 믿는 곳에 가서 그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의 상황을 전쟁이 일어날만한 위험한 지경으로 만듭니다. 저는 예수님이 그것을 그런 뜻으로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은, 나같이 비우고 나같이 십자가의 고난을 지고 텅텅 비워서 남을 채워 주는 그런 삶을 살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못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그 구절이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인데 그것을 교리화하니 전혀 다른 침략자의 논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학자들이 말하는 케노시스, 즉 빌립보서에 나오는 케노시스입니다. 당신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본질을 갖고 계시지만 하나님과 동등함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자기를 비워 스스로 사람이 되고 스스로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탐욕과 교만과 독선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짜로 먹여주고 병고쳐주니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그렇게 몰려든 군중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 저분을 우리의 왕으로 만들자!’ 요즘말로 하면 ‘우리 대통령으로 만들자, 그러면 빵 문제, 경제 문제, 정치문제 모두 다 해결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물러 나와 산으로 가셔서 조용히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그 길을 가는 한국 교회 목사님과 신도들은 몇이나 됩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그 탐욕과 독선의 구조로부터 해방되기를 벗어나기를 기도했습니다. ‘다만 악에서 구해 주소서.’ 그 유혹에 빠지는 것도 정말 심각한 문제이지만 내가 안 빠지더라도 그것이 구조화되고 제도화되어 굳어졌을 때, 그것이 우리를 억누르고 가둬두며 우리의 기본권을 유린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구조로부터 구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주기도문의 전반부는 하나님의 원칙, 즉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어떤 것이냐’ 라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인식이 없으니 교리만을 찾게 되고, 그래서 이런 중요한 것들이 한국 교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탐욕과 독선의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 하는 그 고백을 할 때에, 부활의 그리스도는 추상화된 그리스도가 될 수 없습니다. 비워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께서는 그렇게 ‘비우셨기’ 때문에 부활로 ‘채워진’ 것입니다. 부활은 탐욕과 독선의 제국 권력을 끝장내는 ‘종말(eschaton)’입니다. 이 ‘종말론(eschatology)’이라는 것은 ‘내가 죽고 천당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이 세상의 구조화된 악을 끝장내는 운동’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그 로마의 학정 속에서도 찬송을 부르면서 카타콤에서, 혹은 처참하게 처형될 때에 그 신앙의 불길을 계속 지필 수 있었던 것은 그 ‘종말(eschaton)’의 구체적인 활동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의 시작은 예수의 갈릴래아 사역이었습니다. 그 둘이 그렇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근본주의적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역사적 예수로부터 떼어냈습니다. 한편 가장 세련된 소위 고등교육을 받은 신학자인 불트만만 하더라도 그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그에게 예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꼭 한번 반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구체적 삶속에서 예수를 만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도 필요하고 예수도 필요하여 그 둘이 하나로 합쳐져 놀랍고도 폭발적인 힘을 통해서라야 한다는 사실을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 교회에 예수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을 또 하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작년까지만 해도 적십자 총재를 지냈는데, 그곳에서 매해의 식목일마다 북한 적십자 청소년들과 남쪽의 청소년들이 금강산에서 ‘친목(우정)의 나무심기’를 했습니다. 가기 전에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뽑아서 발대식을 하는데, 그 때에 외치는 구호가 ‘화이팅!’이었습니다. 또 사람들은 언젠가 쓰나미로 인한 한국인 구조봉사대 발대식 때에도 그렇게 ‘화이팅!’ 하고 외쳤습니다. 이 말은 개인적으로 제가 가장 듣기 거북해 하는 구호중의 하나입니다. 당시에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 심으러 갈뿐입니다. 그것도 평화의 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다시 구호를 외칩시다!” 그리고 이어서 “사랑! 봉사! 평화! 이렇게 외칩시다. 그리고 앞으로는 다시 ‘파이팅’이라는 경쟁을 유도하는 구호는 외치치 말도록 합시다.” 라고 덧붙였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요람에서 무덤에까지 경쟁으로 점철된 이 세상에 살면서 도대체 또 무엇이 모자라서 불을 지른단 말입니까? 대체 주님께서 언제 ‘화이팅’ 하셨습니까?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에게 자본주의 가치관이 알게 모르게 집어넣어주는 고약한 습성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벗어나야 합니다. 어떤 교회가 큰 교회입니까? 교회는 어떻게 자라야 하는 것입니까?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것은 ‘화이팅’ 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비움의 삶을 땅 끝까지 가서 전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땅 끝까지 증인이 되어라’라는 한국 교회 세계선교 전략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가장 예수를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예를 들어 백악관에서 매일 성경공부 하는 부시 같은 사람은, 무기도 없는 나라에 무기 있다고 생각하고 착각하고 들어가서, 세계무역센타를 박살낸 장본인도 아닌 후세인을 잡아 죽이며, 그곳을 점령하고 이겼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항공모함을 타고 드디어 임무완성을 했다면서 십자군 전쟁의 승리를 선포했습니다. 저의 느낌과는 달리, 그날 엄청난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오늘의 예수 없는 교회의 승리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승리주의자란 분명 ‘시이저’입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고 하는 이것은 시이저의 말입니다. 그러나 시이저 사후 불과 40년 후에 오셨던 예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주일날 베데스다 연못가에 가서 38년 동안 줄곧 고생한 절름발이 환자에게 가서 ‘일어서라, 침상을 던지라, 그리고 자유로운 두 다리로 가거라!’ 이것이 예수의 말씀이지,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이것은 예수의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가 없으니까 ‘시이저’가 돌아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예전의 저는 예수의 고난을 추상적으로 인용하기도 하고 그랬지만, 요즈음에는 예수가 잡히시던 그 광경이 생생하게 상상되곤 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자기의 스승을 보호하기 위해 칼을 차고 나갔다가 말고가 자신의 스승을 체포하려 할 때에 칼을 꺼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 그는 참으로 대단한 비서실장, 경호실장, 그리고 총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누구도 그렇게까지 보호를 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갔는데 말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스승의 안전, 주인의 안전을 가장 잘 지킨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며 그에게 칼을 칼집에 다시 꽂으라 하셨습니다. 예수는 여기까지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뒤돌아서십니다. 저 또한 여기까지만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야 그것을 다른 차원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생략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베드로야! 내가 그 칼에 죽는걸 봐라. 그 칼에 의해서 내가 끌려가는 것을 봐라. 그 칼에 의해서 내가 얼마나 조용하게, 존엄하게 끌려가는지를 봐라’라고 말씀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예수님은 보여주십니다. 그 순간부터 골고다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며 돌아가시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의 길입니다. 평화를 만들려면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평화는 없습니다. 그래야만 이 세계의 악순환이 깨집니다. 그 악순환의 고리는 칼로 깨는 것이 아닙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깨는 것은 바로 예수께서 말씀 안하신 그 부분,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을 보아라!’입니다. 힘이 없는 것 같이 보이는 그 ‘무위無爲’. 즉 아무것도 안하는 것 같지만 엄청난 생각을 만드는 부활의 씨알이 그 안에서 잉태되어 폭발적인 힘을 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돌아가셨기 때문에 부활은 불가피합니다. 그 부활의 신앙이 오늘 2000년 후 서울 향린교회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