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5일 오늘의 시대와 예언자 정신(14) 에제키엘

에제키일 37:1-10; 마르코 16:1-7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어떤 비극적인 사건을 경험하면 우리들의 일상적인 세계는 여지없이 부서지고 맙니다. 이에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대응하지만, 크게 보면 보통 두 가지 반응으로 집약됩니다. 하나는 부정이고 다른 하나는 절망입니다.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때 사람들은 눈을 감고 외면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보고 싶은 쪽만을 바라봅니다. 모든 것이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때로 지나치면 심리적 몽상의 세계로 종교적 신비체험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파국 그리고 부정과 체념]


        제게는 90세가 넘어 홀로 사시는 이모님 한분이 계십니다. 일제 말기 신혼의 꿈이 채 깨기도 전인 어느 눈 내리던 겨울 밤 일본 유학을 다녀와 미래가 촉망받던 남편은 자신의 집을 찾아온 두 사람과 함께 홀연히 집을 떠납니다. 아내에게는 만주로 돈 벌러 간다고 했지만, 실은 독립운동에 나선 것입니다. 그 이후 70년 가까이 유복자 아들 하나를 두고 홀로 살아오셨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전투 중에 죽었다는 소식을 오래 전에 전해주었지만, 이모님은 여전히 살아있다고 믿고 계십니다. 아들 내외가 함께 살자고 해도 남편이 돌아온다고 믿고 신혼 때 살던 그 집을 떠나지 않고 계십니다. 수십 년 전 제가 고등학생 시절 사는 곳을 방문하여 대문을 삐꺽! 열고 들어가면 남편이 오시는가 하여 버선발로 뛰어 나오시곤 하셨습니다. 아직도 남편과 함께 살던 날 그리고 곧 돌아오겠다는 얘기를 하며 집을 떠나던 그날 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십니다. 이모님은 7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살고 계십니다. 현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기에 70년의 현실을 거부하고 계십니다. 이는 극단의 한 예이지만, 견딜 수 없는 파국적 사건을 당할 때에 현실을 외면하는 현상은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또 다른 반응은 절망입니다. 현실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의 희망은 없다고 여기며 삶에 대한 의욕을 포기하며 삽니다. 될대로 되라며 체념합니다.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고 술이나 도박에 빠지기도 하며 심하면 자살에 이릅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최진실씨의 죽음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잖아도 자살율이 높은 우리 사회가 최근의 경제파국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살에 이를까봐 걱정입니다. 미국에서 시작한 금융파탄이 어떻게 우리 사회에 미칠 영향력이 어떠할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처음 바다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파동은 작지만 이것이 해변 곧 주변으로 가면 커다란 파도가 되어 마을을 덮치듯이 미국에 의존적인 우리 사회에 미칠 영향력은 상당할 것이라고 봅니다. 지난 2,3년 열풍처럼 번져가던 펀드와 주식투자에 열중했던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상당수는 빚을 내어가며 투자했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지금도 조금만 기다리면 상황은 나아질 것이라고 기다리는 분도 많겠지만, 어떤 경제학자들은 이미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금융시장자본주의가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경제학자들이 내어놓는 수치와 경제 전망에 대해 상당한 신뢰를 갖고 있습니다만,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고 경제학자가 주식으로 부자 되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느 경제학자가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경제학이란 비행기 안에서 포도주를 먹으려고 하는데, 코르크 따개가 없을 때 모두가 자기 분야에서 의견을 제시한다. 그때 경제학자들은 ‘일단 코르크를 땄다 치자.’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경제학자들의 예측이라고 하는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얘기인 것인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아니 세계의 대국 미국이 이렇게 되리라고 어느 누가 예측했겠습니까? 소련이 무너진 이후 자본주의는 결코 넘어질 수 없는 경제 질서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제도는 그 어떤 것도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셈입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인류사회든 파국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연재해의 파국, 전쟁으로 인한 파국, 에이즈나 광유병과 같은 질병으로 인한 파국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종교의 참 역할이 있습니다. 참 종교 혹은 참 신앙이란 이런 파국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자살한 안재환씨나 최진실씨 모두 기독교인 것으로 보이고 있어 교회가 제대로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성공과 행복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불행과 파국이라는 현실 대응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은 아니냐?는 보이지 않는 항의를 받고 있습니다.


[신앙 혁명은 파국으로부터]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에제키엘 예언자야 말로 파국으로부터 새로운 신앙의 혁명을 창출해낸 사람입니다.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삼십년 되던 사월 오일이었다. 나는 그때 그발 강가에서 포로들 속에 끼여 있다가 하늘이 열리며 나타나는 신비스런 광경의 발현을 보게 되었다. 그달 오일은 바로 여호와긴 왕이 사로잡혀 온지 오년 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 부지의 아들 에제키일 사제가 바빌론의 그발 강가에서 야훼의 말씀을 받았다. 거기에서 그는 야훼의 손에 붙잡혔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제키엘 예언자가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가 그의 나이 삼십세, 그리고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왕을 비롯한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붙잡혀 그발 강가에서 살기 시작한지 5년째 되던 해에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책의 머리말에 불과한 평범한 보고 같지만, 실은 이 안에는 당시의 사고로 본다면 매우 놀랄만한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그날 부지의 아들 에제키엘 사제가 바빌론의 그발 강가에서 야훼의 말씀을 받았다.’라는 구절에 있습니다. 성서에는 수많은 예언자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그들의 예언을 기록한 책도 여러 권이 있지만, 바빌론이라는 나라에서 야훼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것은 에제키엘이 최초입니다.


        당시 유대사람들의 하느님 인식은 예루살렘 성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떼어 놓고 야훼 하느님을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 믿음은 예루살렘 성전이야 말로 야훼 하느님이 거하시는 유일한 집이었고 그곳이 우주의 중심이었다고 믿었습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온 우주의 주인이신 야훼 하느님이 성전이라는 한 장소에 매여 있었습니다.


[광야의 움직이는 하느님과 성전 골방에 갇힌 하느님]


        물론 이는 출애굽 직후 광야생활에서 믿었던 본래의 성막 정신에 어긋나는 믿음입니다. 광야에서의 야훼 하느님은 한 장소에 매이신 분이 아니라 백성들과 함께 움직이시는 하느님이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백성들의 갈 길을 인도하시는 하느님 움직이시는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래 지금도 십계명을 받은 시내 산이 정확히 어딘지 모르고 있습니다. 성서가 모세의 무덤이 어디인지 모른다고 밝히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다윗 왕에 의해 왕권이 확립되고 솔로몬 왕에 의해 성전이 지어지고 그 안에 법궤가 안치된 이후 좋은 의미로 시작한 야훼 하느님 경배 신앙은 결국 성전 안에만 머무시는 하느님으로 변질되고 만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교권과 전통이 하느님을 한 장소에 가둬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좌지우지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성전의 교권과 전통을 향해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비판했고, 예수님 또한 성전에 묶어두려는 교권적 하느님 신앙을 비판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영이시니 이산에서도 말고 저 성전에서도가 아닌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시거나, 채찍을 들어 성전을 깨끗케 하시거나 성전의 벽을 허물라는 말씀은 곧 야훼 하느님을 인간의 제도와 틀로 가두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치시기 위한 방식이셨습니다. 정치권력은 기회만 되면 독재를 하려고 하듯이 교회 권력 또한 하느님을 인간의 제도와 틀 안으로 묶어두려고 하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또한 유혹 속에 있습니다. 교회에 와야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이 계시다고 믿는 분이 많습니다. 입술로는 하느님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속에 계시다고 말하지만, 기도는 교회에 와서 해야만 효력이 더 크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시간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임하시는 시간을 일요일 오전 11시에서 12시 사이로 보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월요일이나 토요일에는 자신들이 바쁘니까 하느님도 바쁘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진정 우주의 주인으로 그리고 영으로 고백한다면 우리가 가는 어디에든지 우리가 찾는 어느 시간이든지 하느님은 그곳 그 시간에 계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진정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제키엘 사제가 바빌론의 그발 강가에서 야훼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은 정말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당시 유대 백성들은 절망 가운데 있었고, 야훼 하느님을 버리고 바빌론의 마르둑 신을 경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훼 하느님이 예루살렘 밖에도 존재한다는 이 사실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사고의 전환이요 신 인식의 변화입니다. 예루살렘이든 바빌론이든 요단강이든 그발 강이든 백성들이 있는 그곳에 야훼 하느님이 현존하신다는 믿음은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또 다른 신앙 혁명]


        또한 그발 강가에서 야훼 하느님이 나타나셨다는 사실은 장소에 매이지 않는 신 인식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고 또 다른 혁명적 신앙고백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야훼 하느님은 자기를 따르는 백성들에게 절대로 고통스런 일을 허용하지 않고 나라가 멸망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신앙을 갖고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 에제키엘은 아니다! 하느님은 때때로 개인적인 비극 사건과 민족적인 파국도 허용하신다!고 외친 것입니다. 그발 강가에서 야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얘기는 파국의 현장 안에서 하느님은 일하고 계신다는 선언입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왕이 포로로 잡혀오고 자유를 빼앗긴 극단의 상황 속에서도 야훼 하느님은 활동하시고 계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야훼 하느님은 웅장하게 올라간 성전의 첨탑 안에서만 활동하시는 분이 아니라, 깨어지고 부서지고 무너진 잿더미 속에서도 새로운 생명을 키워내기 위해 일하시고 계신다고 선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보여준 잘라진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싹이 나온다는 희망, 곧 고통의 현장 안에 함께 아파하시는 하느님을 얘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종교적 환상의 이야기는 사회적 상황으로부터 읽어라]


        그리하여 에제키엘은 몇 개의 환상을 보게 되고 이 얘기들이 계속하여 등장합니다.  1장에서 그는 하느님의 현존하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번갯불이 번쩍이는 속에서 짐승과 사람의 모습이 혼재된 네 개의 얼굴과 이리 번쩍 저리 번쩍하는 바퀴와 날개를 보게 되고 그 위로 옥좌 같은 모습이 보입니다. 그는 이 모습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자신이 하느님을 보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마치 야훼의 영광처럼 보였다.”(1장 28절) 그러나 성서 전체를 통틀어 이것이 하느님의 모습을 가장 자세하게 묘사한 기록입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이런 환상적인 이야기나 기적 이야기를 읽을 때에 나도 이런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거나 혹은 아예 이는 오늘날의 과학적 세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허무맹랑한 소설의 얘기로 내쳐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서의 이런 비과학적이고 비상식적인 이야기를 대할 때에 이 언어 자체와 이 언어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로 가득 찬 성서의 구절을 대할 때에는 ‘무엇 때문에 이런 식으로 썼을까를 물어야 합니다.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행위와 관련하여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하느님은 정말 이런 일들을 하셨을까가 아니라 왜 당시의 사람들은 하느님이 이렇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믿었을까?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진짜 이야기는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서의 환상이나 기적 이야기들은 실제로 벌어지고 본 사건을 기술한 것일 수도 있고 민간전승을 그대로 적어 놓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런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진의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손가락을 보지 말고 그 가리키는 곳을 보아야 합니다. 기적과 환상의 얘기들이 전하고자 하는 얘기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느님은 새로운 삶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는 얘기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적 그 자체 현상 자체에 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적과 신앙 사이에는 언제나 주기적인 긴장상태가 있습니다. 분명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신앙적인 새로운 각성을 얻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기적의 경험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을 할 때 수많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광야생활에서 끊임없는 불평과 불순종을 하게 됩니다. 불과 3일이 지나지 않아 먹을 물이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심지어는 야훼 하느님을 버리고 송아지 상을 부어 만들기도 합니다.


        갈멜산에서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과 대항하여 불로 송아지 제물을 태워 야훼 하느님의 승리를 선언하고 3년간의 가뭄을 그치고 비를 가져온 엘리야 선지자마저 이런 일이 있자마자 이세벨왕후가 자신을 죽이려는 한다는 얘기를 듣자 산속으로 도망하고 낙심하여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수많은 기적사건을 경험했고 보았습니다. 심지어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자로의 시체가 예수의 명령으로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것까지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께서 잡히시자 도망을 쳤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절망하며 옛 생활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에서 배우는 것 하나는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성서가 계속 강조하는 것은 가끔 생겨나는 초자연적 현상 그 자체가 아니라 현상을 통한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곧 하느님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세상에 계속하여 관여하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기적이나 환상은 우리에게 믿음을 심어주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따름이지 그것이 믿음의 목표는 아닙니다. 참 믿음이란 남은 보지 못하고 자신만 보았다 하더라도 그 보이는 것을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태도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계속해서 경험하는 삶의 실망과 실패와 절망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일어서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손길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에제키엘은 대단히 환상적이고 몽상적인 예언자입니다. 에제키엘을 읽노라면 현실감각이 없어질 정도입니다. 이렇게 상징적인 언어를 쓰는 것은 당시의 사회정치적 상황이 억압적인 상황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은 포로들의 사제로 지도자입니다. 지배정권으로부터 끊임없는 감시의 눈길 속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묵시문학의 일종입니다. 제가 환상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이를 단순한 신비적이고 심리적인 하나의 현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환상이라는 단어 너머에 숨어 있는 역사의 진의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는 유배지 바빌론에서 새로운 역사를 펴나가야 했습니다. 절망과 체념에 빠진 백성들에게 희망을 제시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역사 인식과 하느님 이해가 필요했습니다. 이전의 역사인식과 하느님 이해로는 오늘의 비참한 현실을 설명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선 그는 역사를 감싸고 있던 군더더기들과 껍데기들을 여지없이 벗겨내고 감추었던 과거 역사의 누추한 진실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주 야훼가 말한다. 네 족보를 캐어보면 너는 가나안 출신이라 네 아비는 아모리인이요 어미는 헷 여인이다.(16장 3절) 네가 나던 일을 말하자면 네가 세상에 떨어지던 날 탯줄을 잘라줄 사람도 없었고 목욕시켜 줄 사람도 없었으며 포대기에 싸줄 사람도 없었다. 너를 애처롭게 모아 친절을 베풀어줄 사람이 없었다. 너는 들에 내버린 개구멍받이 신세였다. 그런데 내가 지나가다가 피투성이로 발버둥치는 너를 보고 핏덩어리야 살아라 들풀처럼 자라나거라 하였더니 너는 자라고 커서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 너는 내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너는 네 아름다움을 믿고 명성을 미끼로 삼아 몸을 팔았다. 지나가는 아무에게나 몸을 내맡겨 마구 놀아났다. 애굽에도 몸을 팔았고, 아시리아사람들과 바빌론 사람들에게도 몸을 팔았다. 이 창녀야! (16장 35절) 나는 너를 간음하고 자식을 죽인 죄인으로 다스리리라.”


[집단 운명론과 개인의 책임]


        물론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한 철저한 부정은 새 예루살렘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이 새 예루살렘은 이전 예루살렘과는 하느님을 만나는 방식이 완전히 다릅니다. 이전에는 선민사상에 기초한 무조건적인 민족구원이었습니다. 개인의 윤리와 도덕이 어떠하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할례를 받았고 때를 따라 성전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면 구원이 온다는 저절로 구원관이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입니다. 그러다가 나라가 멸망당했고 성전은 초토화되었고 자신들은 외국에 포로가 잡혀와 노예가 되었습니다. 구원의 희망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이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조상들의 잘못으로 그들은 벌을 받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잘못이라면 상황을 바꿀 수도 있겠지만, 조상들의 죄 때문이라면 그건 결코 벗겨낼 수 없는 운명입니다. 이 비관적 운명론이 당시 그발 강가에서 살아가고 있던 유대인들의 역사이해였습니다.


        여기에 에제키엘 사제는 ‘아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아비가 설익은 포도를 먹으면 아이들의 이가 시큼해진다.’ 이런 속담이 너희 이스라엘 사람이 사는 땅에 퍼져 있으니 어찌 된 일이냐? 사람의 목숨은 다 나에게 딸렸다. 죄지은 장본인 외에는 아무도 죽을 까닭이 없다.”(18장 1-2절) “나는 너희 하나하나를 너희의 행실대로 다스리리라.”(18장 30절) 집단의 죄가 아닌 개인의 잘잘못을 따지겠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불행을 조상의 탓으로 돌려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운명적 자세를 경계하는 말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 앞에 독립된 한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이는 개인주의는 아닙니다. 이는 안병무선생이 말한대로 절단된 현실에서 개인의 각성과 그 책임성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구체화될 때에만 이를 극복할 새 가능성이 싹트리란 것을 절감한 것이지(역사와 해석 안병무 155쪽) 개인이 갖는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하여 이후 그가 본 두 개의 중요한 환상 곧 37장에 나타난 마른 뼈 환상과 40장 이후에 기록된 새로운 성전 환상은 모두 민족 구원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른 뼈 환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죽음의 뼈들이 서로 붙고 근육과 살과 피부로 뒤덮이고 숨결이 깃들면서 그들은 살아났고 벌떡 일어섭니다. 이는 백성들의 한탄 “우리의 뼈는 마르고 희망은 사라져 끝장이 났다.”(37:11)에 대해 이스라엘 나라가 새롭게 태어날 것이라고 하는 하느님의 응답인 것입니다. 단지 한 개인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들 제 발로 일어서서 굉장히 큰 무리를 이루었다.’는 선언을 통해 민족의 부활, 민중의 부활을 말합니다. 바빌론의 억압의 지배 세력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민족과 민중 부활은 남과 북으로 나눠진 분단 민족이 하나 되는 것을 선언합니다. 마른 뼈 환상 직후 야훼 하느님은 ‘유다와 그와 한편이 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쓴 막대기와 ‘요셉 에브라임과 한편이 된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쓴 막대기를 붙여 하나로 만드는 통일 조국의 환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37장 15절 이하)


[마른 뼈들이여 일어서십시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냉철하게 판단하면 한 민족 한 문화 한 언어를 갖고 있는 남과 북은 대화가 단절되어 있습니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적대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남과 북은 미국인 크리스토퍼 힐을 통해 서로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직접 만나 같은 말인 우리말로 대화하면 이해하기도 쉽고 분명한데, 북쪽에서는 이를 영어로 얘기하고 이 영어는 철책선을 넘어 또 다시 한국어로 통역이 됩니다. 이 중간에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던 결국 남과 북은 미국에 의해 조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를 알지 못하는 남녀의 결혼이 중매쟁이에 의해 결정되게 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지만,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 형제나라가 겉으로는 두 개의 독립국가로 존재하지만, 실은 미국에 의해 두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어지고 있다는 현실은 참으로 서글픕니다.


        나아가 남한의 대통령에게 전시작전권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독립국가가 아님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느냐 사는냐 하는 전쟁을 치르는데, 남에게 결정을 미루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목숨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게다가 우리 땅에서 똑같은 죄를 저질러도 미군은 우리의 사법제도로 다스릴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미국은 1등 시민이요 우리는 2등 시민임을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남한은 미국의 허락 없이는 그 어느 것 하나도 진행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미군의 포 사정거리가 더 길어졌으니 훈련장을 더 내어놓으라면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조상 대대로 농사짓고 평화롭게 살던 농부들을 그 땅에서 몰아내고 있습니다. 평택의 대추리가 그러했고, 지금 파주의 무건리가 그러합니다.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나요? 무슨 잘못이 있나요? 우리 민족의 다툼으로 인한 죄요 잘못입니다. 아니 우리 자신의 죄요 우리 자신의 잘못입니다. 나의 책임입니다.


        저는 참 교회는 이 땅의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여야 한다고 믿고 있고, 특히 향린교회는 바로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 시작된 교회입니다. 모든 교회들이 성공과 행복과 부자가 되기 위해 저쪽의 넓은 길을 간다할지라도 향린교회는 이 길 곧 민족의 아픔을 대신 당하는 갈릴리의 민중들과 함께 하겠다는 신앙고백을 하고 좁은 길을 걸어왔습니다. 역사는 말합니다. 안전을 추구하는 개인이나 민족은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고, 오직 하늘의 가치를 추구할 때만이 영원할 것이라고.


        다음 주일 우리는 또 다시 이 땅의 진정한 평화를 갈구하며 고통 받는 파주의 무건리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기 위한 현장예배를 드립니다. 신무기의 개발로 사격장을 넓히기 위해 땅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가는 농민들을 내어 쫓는 이 죽음의 군사주의에 저항하고 여기에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이 있다는 하느님의 외침을 대변하기 위해 나아가고자 합니다. 마른 뼈가 일어서서 한 무리가 되는 환상이 단지 책에 기록된 에제키엘의 환상이 아니라 오늘 이 땅에 살아 움직이는 우리의 향린신앙고백으로 만들기 위해 나아갈 것입니다.


        에제키엘를 통해 야훼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내가 준 땅 조상들이 살던 땅에서 그들이 살게 될 것이다. 자자손손, 길이 그 땅에 살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을 것이다. 이 계약은 영원히 깨지지 아니하리라.”(37:25-26)는 말씀의 실현을 위해 나아가고자 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시어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부활한 나를 만나려 하거든 세상의 권력과 명예와 부로 가득 찬 예루살렘이 아닌 역사의 현장, 민중들이 고통 받는 저 현장에서 만나자고 그리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음 주 모두 무건리에서 만나 뵙기를 바라고 한 주간도 주님의 평화의 영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