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시절의 후기는 1956년 후반부터 교회가 한국기독교장로회에 가입한 1959년까지 약 3년간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그들이 꿈꾸었던 공동체 생활을 실현하지 못함으로써 교회가 활력을 잃었던 최초의 '시련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생활 공동체가 해체됨으로써 공동체의 성격은 크게 변화했다. 생활 공동체가 해체된 데는 다음의 세 가지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첫째, 교인 숫자가 증가했다. 둘째, 창립 지도자들이 해외유학을 가게 되어 지도력에 변화가 일어났다. 셋째, 공동체의 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창립 지도자들간에 차이가 드러났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세번째 것이었다.


교인 증가와 교회의 성격 변화

향린은 규모가 큰 공동체를 지향하지 않았었다. 본래는 남산동에 모인 동지들의 가족이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새로운 교회가 시작되었다는 소문이 퍼져나감과 {야성}지를 통한 창립자들의 명성 등이 요인으로 작용하여 향린을 찾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1953년말에 이미 교인 숫자는 50명에 달했는데, 이 숫자는 1954년말에는 85명으로, 1955년말에는 135명으로 늘었고 1956년 전반기는 150명, 후반기는 120여 명 정도였다.
이렇게 불어난 교인 숫자가 공동체의 성격에 변화를 초래했다. 반수도원적인 공동생활을 하는 동지들의 모임을 의도했던 창립자들의 생각은 이질적 요소, 즉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고 외부에 생활 근거지를 둔 일반 교인들이 참가하게 됨으로써 수정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곧 '반(半)수도원적인 생활 공동체'가 '예배 공동체'로 변화한 것이다.
이렇게 교회의 성격이 변하게 되자 창립자들 사이에서도 교회의 목표와 운영방식에 있어서 의견의 차이가 노정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창립자 중 한 사람인 이종완이 교회를 떠났다. 기왕 예배 공동체일 바에는 평신도 교회를 포기하고 목회자를 초빙하여 일반교회로 운영하자는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의견 차이를 조정하기 위해 오랫동안 토론하였지만 끝내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이 차이는 이후에도 표면에 드러나곤 했다. 이때 상황을 안병무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

1954년, 55년경에 벌써 입체적 교회의 불가능성을 느끼고 그러한 교회를 이루겠다는 정열이 사라졌다. 곧 입체적 교회를 포기했다. '발전적'이라는 전제는 가지고 있었지만 헌신적인 공동체, 생활 공동체로서의 지향을 포기하고 모르는 동안에 기구적이고 사업적인 방향으로 (중심이) 옮겨졌다.

교인 증가로 인한 공동체 성격의 변화는 교회 구조에도 변화를 초래했다. 초기에는 직원회만 있었는데 1955년부터는 '교직원'이 임명되었고, 그 해 9월에 교직원 회장이 임명되는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교인들의 수가 많아지자 1957년에 '공의회' 제도를 두게 되었다. 이 '공의회'는 전교인이 회원이 되어 교회의 중요한 사항을 결의하는 기성교회의 공동의회와 같은 것이었다. '공의회'는 점차 늘어나는 교인들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수렴하여 의사를 결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곧 교회 민주화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1957년 1월 6일에 열린 첫 공의회에서 '잠정규약'이라는 교회 운영의 일반 지침이 마련되었다. 5조로 구성된 '잠정규약' 전문은 다음과 같다 :

제1조 : 본회는 향린교회 공의회라 칭한다.
제2조 : 본교회는 입적한 세례교인 또는 믿기로 정한 후 1년 이상 경과하고 본교회에 입적한 후 3개월 이상 경과한 만 18세 이상의 교인으로서 공의회를 조직한다.
제3조 : 공의회는 매년 1차 1월중에 정례회를 소집하고 또 수시 임시회를 소집할 수 있다.
제4조 : 정례 공의회에서 직원을 선정하되 전임 직원회에서 새로 선거될 직원수의 반수 또는 그 이상의 전형위원을 선출하여 이를 전형하게 한 후 공의회에서 승인을 얻게 한다. 직원의 임기는 1년으로 하고 원수는 해마다 전임직원회에서 결정한다.
제5조 : 직원 중에서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을 교직자로 추대한다. 추대할 교직자는 직원회에서 추천하여 공의회에서 출석교인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승인을 얻어야 한다. 교직자의 추대는 해마다 추천과 승인을 새로 받아야 한다.

같은 해에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교직자' 제도를 만들었다. '교직자'는 행정상의 최종 결정권자로 말하자면 기성교회의 당회장과 같은 직책이었다. 교직자는 공의회를 사회하였는데, 물론 목사가 아닌 평신도였다. 초대 교직자로는 장하구가 선임되었으며, 1958년에는 이영환, 장하구, 홍창의가 공동으로 교직자직을 맡았다. 1959년에는 이영환, 장하구가 이 직책의 책임을 졌다.
이러한 제도의 변화는 교회가 생활 공동체에서 예배 공동체로 그 성격이 변화되면서 필연적으로 따라온 것이었다. 교인들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활 공동체에서와는 다른 성격의 지도력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제도화 과정은 어쩔 수 없는 흐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향린이 기성교회와 같이 된 것은 아니었다. 향린은 여전히 평신도 교회였다. 비단 목회자가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라 교회의 방향과 사업을 포함한 전반적인 삶에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또 결정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립 지도자들의 해외유학

반수도원적 생활 공동체가 예배 공동체로 바뀌면서 초기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서 여러 제도 개혁을 시도했지만 창립정신은 차차 변화되어 갔다. 이와 함께 창립 지도자들의 나이가 3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각자 전공과 직업에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을 투여해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해외유학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이들에게 주어지자 하나 둘씩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신앙운동의 열정이 넘쳐 흐르던 1952년에는 유학의 기회가 주어져도 사양했던 데에 비추어 보면 이는 동지들의 신앙 열기가 상당히 식어 있음을 보여 준다. 제일 먼저 유학을 가게 된 사람은 장하구였다. 당시 숭실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장하구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1955년 4월에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떠났다. 그 뒤를 이어 곽상수가 1955년 9월 3일에 전공인 음악을 더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으며, 홍창의도 10여 일 후인 15일에 당시 재직하고 있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자매학교인 미네소타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곽상수, 홍창의 두 사람은 거의 같은 때 유학을 가게 되어 환송식을 같은 날에 가졌다. 창립 지도자들의 해외유학은 공동체를 집단적으로 이끌어 오던 지도력의 공백을 초래했다. 그런데 장하구가 8개월만에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약 반년 후 안병무마저 유학을 떠나자 그는 혼자 교회를 이끌어 가게 되었다. 곧 향린은 창립자들의 집단지도체제에서 장하구가 이끌어 가는 1인 지도체제가 되었다.


창립 지도자들간의 목표 이해의 차이

한편 공동체의 목표에 대해서 창립자들간에도 의견이 서로 달랐다. 이 차이가 초기에는 두터운 동지애와 열성에 묻혀 있었지만 함께 살아가면서 점차 그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외선교를 우선적인 것으로 내세우는 사람이 있었던 반면, 중세기 수도원의 내밀(內密)한 신앙의 훈련과 삶을 더 우선적인 것으로 내세우는 사람이 있었다. 직업과 가계(家計)는 각자 자유로이 운영하면서 교회활동만 공동으로 하자는 사람이 있었던 반면, 각자의 수입을 모두 모아 필요한 만큼만 타 쓰고 나머지는 공동기금으로 하여 선교에 힘을 기울이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와 같이 공동체에 대한 기대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이를 통일시키는 것이 초반기부터 당면한 중요한 과제였다. 하지만 이 통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동지애와 선교의 열정으로 이 차이를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이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것은 결국 전술한 바와 같이 공동체 생활의 해체로 이어졌다. 그래서 향린은 생활 공동체보다는 수준이 낮은 교회 공동체로 존속하게 되었다.
공동체 생활이 깨진 상태에서 창립 지도자들이 하나 둘 해외유학을 떠나자 홀로 남은 안병무는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졌다. 교회 창립자들은 여럿이었지만 사실상 주도적인 인물이었던 안병무는 무엇보다도 생활 공동체의 실패로 인한 좌절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동지들이 한울타리 안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새벽과 저녁에는 기도회와 명상의 시간을 갖고, 낮에는 각자의 직업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고 때로는 공동으로 선교사업을 펼치는 새로운 공동체운동을 꿈꾸었다. 그는 자기들의 새로운 신앙운동이 밀가루 반죽을 부풀리는 누룩처럼 한국교회에 퍼져 나갈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는 공동체 생활을 꿈꿨는데 남아 있는 것은 동지들이 떠나고 난 썰렁한 빈집뿐이었다. 그는 입체적 교회를 꿈꿨는데 남아 있는 것은 예배 공동체였다. 그러자 그마저도 장하구가 독일에서 돌아온 후인 1956년

9월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그의 말대로 독일 유학은 일종의 '도피행'과 같은 것이었다. 안병무는 당시의 절망적인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

…형제니 친구니 동지니 하면 절대불변의 영원한 것이라 믿어 필요하면 혈서로라도 쉽게 맹서할 수 있었다. 그때 엄마 떠난 소년 같아 교회의 지도자는 하나도 믿을 수 없어도 '우리 그룹만은 반드시…' 하는 생각과 더불어 황홀한 꿈이 전개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꿈도 벌써 깨졌다. 동지니 친구니 해도 벌써 어쩔 수 없이 금간 것을 보았고 우정이니 결사적이니 해도 경우와 이해가 맞아야 맞는 말이고, 가정이나 지위가 생기면 우정과 동지 사이는 상 아래 떨어진 부스러기도 차례지지 않는 초라한 신세인 것을 벌써 알아 버렸다. "너희가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도다." 그런 한 이제 형제니 동지니 사랑이니 꿈이니 해서 적당한 말로 비끄러 매보려고 해야 썩은 새끼토막이다. 깨진 꿈 도로 찾을 수는 없다. 이제는 제가 배신했거나 당했거나 한 몸인 꿈 깨어 두 몸인 것을 분명히 알았으면 외롭더라도 그립더라도 불안해도 홀로 제 길 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고독해짐이 좋아서가 아니다. 고독해 질 수밖에 없으니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향린의 변화의 근저(根低)에는 공동체 생활의 실패가 자리잡고 있었다. 즉 공동체 생활의 실패가 변화의 근본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말이다. 공동체 생활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물론 시대적 제약도 없지 않았겠으나, 근본적으로는 창립자들의 견해 차이를 조정하지 못했던 데에 있었다. 놀랍게도 이는 미리 예견된 일이었다. 안병무는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기 전인 1953년 1월에 하나의 평신도 공동체 운영을 가상하면서 여기에 닥칠 어려움을 이렇게 피력한 바 있었다 :

…그런 외적인 난관보다도 참 문제는 오히려 우리 안에 있었습니다. 전에도 말한 대로 교회란 그대로가 삶의 장소인 한 그 안에는 정말 산상의 보훈이 그대로 그 질서요 윤리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못된 근성은 자꾸 머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egocentric(자아중심적)한 것인데, 그것은 명예욕, 소유욕, 지배욕, 주관적 고집 등으로 나타나는데 그런 것에 접할 때처럼 절망되는 때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개는 그 가정과 연결되어 가족들 사이의 충돌, 아이들의 싸움문제, 아 ! 지금도 생각하면 가정이란 저주스럽도록 거친 돌이었습니다. 그럴 때면 주동 멤버는 독신이었더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치밀어 오르곤 했습니다.

가족 이기주의 때문에 공동체 형성에 실패했다는 안병무의 결론적인 진단은 40년이 지나서도 변하지 않았다. 홍창의도 대체로 비슷한 의견을 개진한 바 있다.
이로써 남산에 반(半)수도원적인 생활 공동체를 세워 신앙운동을 펼치려던 초창기의 꿈은 꽃피우지 못했다. 대신 다른 성격의 교회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 교회는 평신도 교회라는 점에서, 그리고 선교하는 교회라는 점에서 여전히 독특한 교회였다. 이 교회는 공동체 생활이 실패로 돌아가자 1천여 평의 대지가 필요없게 되었다. 그래서 산 아래로 내려오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