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만일 그대로 있다가는 남을 구하기는 고사하고 자신들이 그 사태에 휘몰려 갈 것 같았습니다. 우선 우리가 탈 방주, 그리고 우리와 인연이 된 이들을 건질 방주를 만들자 ! 그리고 남은 무리들에게도 이것을 권해서… 절망한 저 무리들에게 살 수 있는 산 모델로서 보여야겠다. …우리 교회는 남을 위하기 전에 스스로 살고 싶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산다는 일은 이웃을 사랑하여 구한다는 일과 유리될 수는 없었습니다.

창립자들은 오랜 성찰 끝에 참된 교회를 재건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평신도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들은 절박한 종말적 의식을 갖고 있었다. 교회가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함이 이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은 애초에는 '교회'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반(半)수도원적인 생활을 하는 평신도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다른 교회에 모범과 대안을 보여주고 각지에 이와 비슷한 형태의 공동체들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어난 많은 예기치 못한 사건들을 통해서 오늘의 향린교회가 되었지만 창립자들이 창립 당시에 의도했던 것은 일반적인 형태의 교회는 아니었던 것이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향린교회는 특정한 이념을 갖고 창립되었다는 점이다. 향린은 어떤 특정 지역에 교회가 없어서 필요성에 움직여 생겨난 교회가 아니었다. 목회자 한 사람이 교회를 세우겠다는 의지를 갖고 교인들을 끌어 모아 설립한 교회도 아니었다. 향린은 신앙운동을 하던 젊은 신앙 동지들이 한국교회 개혁에 이바지한다는 원대한 이상을 품고 합의된 이념 아래서 목적의식적으로 창립된 교회였다. 이렇게 창립된 향린교회의 창립정신 혹은 창립의 이념은 ① 공동체 생활 ② 입체적 교회 ③ 평신도 교회 ④ 독립교회의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공동체 교회

향린교회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이상으로 삼아 공동생활을 하는 신앙공동체를 지향하였고 얼마 동안은 이를 실천했다. 즉 공동체 성원들이 각자의 직업을 갖고 살아가되 하루를 새벽기도회로 열고 저녁에도 성서공부 시간을 갖는 등 공동의 신앙훈련을 통해 공동체성(共同體性)을 가지려고 했던 것이다. 동지들은 직업을 통해 번 수입을 모두 내놓아 공동으로 관리하며 각자가 필요한 만큼 갖다 쓰는 '사랑의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려 했다. 곧 '반(半)수도원적 공동체'를 추구했다.
이들이 공동체 생활을 추구했던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지만 당시에는 평신도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일주일내내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까맣게 잊고 살다가, 기도와 명상 등 영성생활에는 둥한하다가 주일날 주일예배 한 시간 참석하고 마는 그런 무력한 것이었다. 신앙이란 것이 한 개인의 생활 전체에 관련되고 전체를 규정, 지배하는 것이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신앙과 생활이 서로 관련을 맺지 못하고 분리되어 있었던 셈이었다. 평신도들의 신앙이 이래서는 새로운 신앙운동을 할 수가 없었다. 신앙이 삶 전체와 관련되어 있으면서 삶 전체를 규정해야 했고 신앙인은 삶 전체를 바쳐서 복음을 전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함께 신앙운동을 해나갈 동지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공동의 신앙훈련을 통해 강하게 결속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공동체 생활은 '입체적 교회', '평신도 교회'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그것들의 기초가 된다고도 할 수 있다. 공동체 생활을 함으로써만 삶 전체를 바쳐서 그리스도를 위해 일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체 생활이 현실로 옮겨지는 데는 큰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가장 큰 현실적인 장벽은 시간이 흐르면서 동지들 사이에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공동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전쟁 직후라 누구나 맨손이었고 누구나 가난했다. 그래서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집에서, 신문지로 도배한 방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각기 경제적 조건이 달라지면서 생활양식의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고, 특히 자녀들이 성장함에 따라 공동생활에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교회에도 변화가 생겼다. 앞에서 서술한 대로 그들은 일요일 집회로서의 교회를 만들려던 것은 아니었다. 주일에는 구내에 함께 사는 사람들끼리 예배드리기로 했던 것이다. 처음 설교자는 안병무, 이영환, 홍창의였으며 후에 장하구가 이에 가담했고, 곽상수는 음악을 담당했다. 그러나 향린교회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출석하게 되었다. 창립 첫 해인 1953년에는 평균 50명이 출석했는데, 다음 해에는 평균 85명이, 그 다음 해에는 평균 135명이 출석하는 작지 않은 교회로 변화한 것이다. 물론 이들 모두가 공동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교회 구내에 사는 사람들과 바깥에 살며 출석하는 사람들 사이에 미묘한 문제가 없지 않았다.
게다가 장하구, 곽상수, 홍창의, 안병무 등 창립 지도자들이 자기 전공을 더 공부하기 위해서 하나 둘씩 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이영환도 '국가의 부름보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우선이다'고 하여 그동안 미루어왔던 군입대에 자진해서 응했다. 주요 창립자들이 모두 교회를 비우게 된 것이다.
이로써 공동체 생활의 이념은 창립정신 가운데 가장 먼저 무너졌다. 이 공동체 생활이라는 창립정신에 대한 창립자 자신들의 평가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애초에 불가능한 시도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의 제도이기 이전에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계승하는 신앙운동의 공동체라면 그 교회는 마땅히 교인들간의 공동체성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갈 수 있는 공동의 신앙 훈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변할 수 없다.


입체적 교회 / 선교

이들이 추구했던 교회상은 기성교회와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달랐다. 우선 그들이 생각한 교회는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에 잠깐 교회 나와서 한 시간 예배보고 설교를 듣는 것으로 만족하는 교회가 아니었다. 자기 삶의 일부분만을 바쳐서는 올바른 신앙운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체험에서 비롯된 확신이었다. 창립자들은, 당시 교회가 무력했던 까닭은 기독교인의 삶과 복음선교가 일치되지 못하고 서로 유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교회에 와서는 매우 경건한 사람도 사회생활에서는 비기독교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기독교인들은 불의, 부정, 부패를 일삼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의 삶에서 복음 선교가 이루어지고 기독교적 가치가 전파되어야 할 터인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사회생활에 쫓기며 살아 가는 사람들이 일주일에 단 몇 시간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성서공부를 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는 없었다. 신앙운동은 전생애를 바쳐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공동체라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지들이 함께 살아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는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 더불어 함께 사는 생활 공동체만이 새 교회운동의 모델이 될 수 있고 이 운동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 안병무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든 교인이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쳐서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에 봉사해야 한다고 믿었다. 주일날 한 번 모여 예배보고 헌금하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그것만 가지고 '나는 할 일 다 했다'고 스스로 안주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쳐서 선교하려면 자기 생업을 통해서 선교하는 수밖에 없다. 이들의 이런 확신은 '직업은 곧 하느님의 소명'이라고 본 종교개혁자들의 신앙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입체적 교회라는 창립정신은 교인들의 삶을 전체적으로 선교에 헌신하게 한다는 뜻으로서, 믿음과 생활을 일치시켜 생활 속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선교의 전선에 나서게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때로는 '유기체적 교회'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창립자들은 각자 직업을 갖고 살면서 교회 공동체에 필요한 일들을 분담하여 해결하도록 노력하였고, 또 자기 전공을 발휘하여 선교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설교와 성서공부 인도의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설교와 성서공부 인도로, 교육의 달란트를 받아 교직에 종사하는 사람은 교육으로,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은 음악으로, 의술을 펼치는 사람은 의술로써 선교하는 방식을 입체적인 선교 또는 입체적 교회라고 불렀다. 개인의 삶 전체가 교회 선교와 관련을 가지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입체적 교회 정신이다.
교회 창립의 뿌리인 '일신회' 회원들은 다양한 분야를 전공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모두 향린교회 창립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입체적 교회라는 창립정신은 다음과 같이 다양한 전공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

의    학 - 이영환, 홍창의          음        악 - 곽상수
철    학 - 장하구, 이종완          종교학(신학) - 김철현
교 육 학 - 오기형                    공        학 - 김동명
종교철학 - 한철하                   법        학 - 백종무
사 회 학 - 안병무

입체적 교회의 정신은 공동체 생활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그들이 추구한 바는 기독교인 한 개인이 전 삶을 통해 선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개인의 선교역량을 교회를 통해서 발휘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입체적 교회는 이런 교회의 선교를 제도화하려는 시도였다. 따라서 창립 3년 반만에 공동체 생활이 무너진 것과 함께 입체적 선교의 이상도 큰 타격을 받았다. 그래서 훗날 안병무는 "공동체성은 실패한 셈이다. 이로써 입체적 교회라는 목표도 달성되지 못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입체적 교회 정신이 교회의 일반적이고 선언적인 도덕률이 아니라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것을 전제로 추구된 이념이었음이 드러난다.
당시에는 공동체 생활이 실패함으로써 입체적 교회 정신도 좌절되었다고 말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도 이 정신을 재해석하고 발전시킬 필요는 여전히 남아 있다. 오늘날에는 향린교회 초기와 같이 교인 전체가 공동생활을 하며 자기 직업을 통해서 선교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기에는 교인 규모가 너무 커졌고 사회가 복잡하고 다원화되어 있다. 하지만 무릇 기독교인이라면 자기의 전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타당한 진리이다. 교회는 교인들이 그런 참된 복음의 증언자가 될 수 있도록 훈련과 친교 프로그램을 갖춤으로써 오늘날 입체적 교회의 정신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평신도 교회

'평신도 교회'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곧 직업적인 목회자가 없는 교회라는 뜻과 목회자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는 뜻이 그것이다. 향린교회는 위의 두 가지 의미에서 평신도 교회로 출발했다.
창립자들이 평신도 교회의 정신을 내세운 것은 목회자의 역할을 전면 부정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리고 당시 목회자들이 참된 복음전도에 헌신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목회자들에 대한 반감 때문은 아니었다. 평신도 교회 정신의 핵심은 목사에게만 의존하고 전 삶을 바쳐서 신앙을 실천하고 선교하는 데는 등한한 평신도들을 일깨우고 그들로 하여금 교회 선교의 모든 부분을 책임지고 수행하게 한다는 데 있었다.
창립자들은 복음 전도를 자신의 사명으로 확신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중에 목사는 물론, 신학을 전공한 사람조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성서를 읽고 토론하며 기도하는 데 열심인 사람들이었고, 모두 대학 교육을 받아 의식수준이 높은 각성된 평신도들이었으며, 각기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복음전도에 헌신한 사도 바울을 신앙의 푯대로 삼고 있었다. 이들은 복음 전하는 일과 경제 생활을 영위하는 일을 함께하는 데서 목회자들의 어려움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목회자도 교인들과 똑 같이 직업을 갖고 경제생활을 영위하면서 평신도 입장에서 목회하는 것이 그들의 바램이었다. 평신도들이 훌륭한 복음 전도자가 되려면 목사에게 의존하는 신앙 태도를 버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들도 직업적으로 목회만 하지 말고 목회하는 일과 직업을 따로따로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바로 이 방법이 "교회의 장점과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지만 교회가 가지고 있는 폐해를 보충하여 전도를 열심히 할 수 있는 길을 새롭게 모색"한 것이라고 믿었다. 곧 평신도들이 전도에 열심히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교회제도의 개혁방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평신도의 현실은 어떤가. 이들은 일주일 동안 복음 전도는 까맣게 잊고 살다가 주일이 되면 의례적으로, 습관적으로 교회에 온다. 그리고 목사가 자기들의 마음에 맞는 말을 해 주기 바란다. 목사의 설교가 마음에 맞으면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가나 또 금방 잊어 버린다. 평신도들이 목사만 바라보고 아무 일도 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 활력이 없다. 안병무는 당시 평신도들의 신앙생활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었다 :

교회는 한 사람이 의무적으로 설교를 하게 마련된 시간에 (설교를 하고), 교인들은 설교 들은 값(헌금 - 인용자 주)이나 들고 죽은 부모의 산소를 찾아보는 기분으로 한 번씩 참예하면 다인 줄 아는 그런 자리가 아니라 구속받은 무리들이 결속하여 거기서 살아가는 자리이어야 하며, 따라서 거기서 사는 사람은 그저 피동적으로 남을 의뢰하고 출입하고만 있을 수 없었고, 각자가 그리스도의 증인 된 자각이 요청되었습니다.

이래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평신도가 먼저 변해야 한다고, 평신도를 먼저 변화시켜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평신도들의 신앙태도를 변화시켜서 복음 전도에 적극적인 참된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데 주력하고자 했다. 하지만 타성에 젖어 있는 평신도들의 신앙을 개혁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모색된 여러 가지 방안은 안병무의 [목회론-내가 만일 목회를 한다면]({야성} 제3집), [평신도의 목회]({야성} 제7집), 장하구의 [예배에 대한 평신도의 의견]({야성} 제4집), [내가 그리는 교회생활]({야성} 제6집), 그리고 {야성}지의 소식란인 몇몇 [잡신록(=야성록)] 등에 나타나 있다.
창립자들이 추구했던 평신도 상(像)은 평신도가 교회의 모든 삶에 있어서 주인임을 자각하고 소명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이었다. 목회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일주일에 한 번 예배에 참여하는 그런 교인이 아니라 모두가 복음 선교의 일선에 나서는 교인이 바람직한 평신도였던 것이다. 안병무는 자신들이 추구했던 평신도 교회 정신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목회자에게 월급을 주고 그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고 그밖의 사람들은 무조건 수동적이 되거나 관조자가 되는 그런 체제는 그리스도 공동체일 수 없다. 공동체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어떤 형태로거나 그리스도 전선에 서야 한다.

향린교회의 평신도 교회 정신은 당시로는 매우 선구적이고 독특한 것이었다. 세계 신학계가 평신도운동의 의의와 가치에 주목하기 훨씬 전인 1950년대에 이런 선구적인 이념을 내세웠다는 것이 놀랍기까지 하다. 그리고 이는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위계질서를 깨뜨리고 '만인사제설'(萬人司祭說)을 내세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정신과 성과를 이어받는 진정한 개혁교회의 전통이었다. 일찍이 장공 김재준도 평신도운동의 의의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었다 :

평신도는 그리스도의 몸이면서 그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교회의 질서가 교직자를 중심으로 고정되면) 그런 경우에는 교직자의 할 일만 늘어가고 평신도는 극히 미미한 책임밖에 관계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교회 노쇠의 시작입니다. 평신도가 다같이 선교와 봉사의 책임을 느낄 뿐 아니라, 그러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정열에 뜨거워질 때, 교회는 그 본래의 임무를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정신은 상당히 오랫동안 향린교회 제도에 반영되었다. 장로, 집사, 제직회 등 기존교회의 제도와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모든 교인을 직책에 관계없이 '선생'이라고 불렀으며 제직회 대신 '위원회' 조직을 가졌던 것이다.
향린교회의 역사가 흘러오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어 1974년에 담임목사를 청빙함으로써 이제 더이상은 평신도 교회가 아닌 목사가 중심이 된 교회가 되었다. 하지만 담임목사가 있다고 평신도 교회 정신이 무효화한 것은 아니다. 평신도들이 모든 교회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평신도 교회 정신은 여전히 타당하고 유효한 정신이며, 변화된 상황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발전시켜야 할 훌륭한 전통인 것이다.


독립교회

독립교회는 어느 교단에도 가입하지 않은 교회를 뜻한다. 창립자들이 독립교회를 유지하려 했던 까닭은 첫째 당시 교권, 지방색 등으로 추하게 싸우고 있던 기존 교회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고, 둘째 평신도 교회를 유지하려면 교단에 가입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교회는 해방 직후부터 신사참배 등의 문제로 갈등에 휩싸여 있었다. 교단이 교권싸움으로 분열된 것은 물론이고 개교회도 파벌싸움으로 복음 전도는 뒷전에 밀려 있었다. 장로교에서 소위 '고신파'가 분리하여 나간 때도 이 즈음인 1951년이었다. 또한 성서해석 방법의 문제를 두고 북한에서 내려온 평양지역 중심의 '총신파'가 교권을 장악하기 위해 조선신학교의 총회 직영을 취소하였고, 이전부터 있어온 신학사상의 차이로 김재준을 징계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에 끝내 '기장'이 복음의 자유, 교회의 갱신을 선언하고 독립해 나갔다. 이때가 1953년 6월 10일이었으니 향린교회가 창립된 후 약 한 달이 지난 때였다. 이 시기는 교회의 갈등과 다툼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런 교회의 갈등과 분열은 신학과 신앙노선 문제를 내세웠으나 대부분의 경우 그것보다는 교권과 지역패권주의 때문이었다. 민족의 분단이 고착화되고 전쟁이 일어나 민중의 삶이 도탄에 빠져 있을 때 교회가 민족의 정신적 각성을 촉구하고 방향을 제시해 주기는커녕 싸움과 분열만을 일삼고 있었으니 일반인들의 교회에 대한 인상이 좋을 리 없었고, 심지어 교파 싸움에 회의를 느껴 교회를 떠나는 기독교인들도 많아지게 되었다.
창립자들은 이런 교파 싸움의 본질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장하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표면에는 신학 문제를 내세우고 있으나 그 실(實) 지방별(地方別)을 가장 큰 요소의 하나로 하고 있는 교권(敎權) 싸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바는 그런 교권 다툼을 일체 경원(敬遠)하는 입장이다.

이렇게 민족문제에 대해 방향을 제시하기는커녕 기득권 유지를 위한 싸움에 몰두해 있는 교권주의자들의 교파싸움을 혐오한 나머지 향린의 창립자들은 독립교회 형태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독립교회를 선택했던 다른 하나의 이유는 평신도 교회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염려했던 것은 교회가 교단에 가입하게 되면 반드시 목사를 청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립교회 정신은 향린이 1959년에 한국기독교장로회에 가입함으로써 형식적으로는 무너졌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10여 년을 목사를 청빙하지 않은 채 평신도 교회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독립교회 정신의 명맥을 유지했다. 노회에서 파송한 임시 당회장은 있었지만 이는 행정상의 당회장일 따름이었고 교회의 모든 일은 교인들이 계획하고 실천했다. 독립교회의 정신에는, 참된 교회는 교권을 가지고 서로 다투면서 분열이나 일삼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복음 전도에 온 힘을 기울이는 교회여야 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파 다툼에 중립적인 제3의 입장이 요망된다고 그들은 역설했다. 곧 향린교회는 "그리스도가 하나이므로 그의 몸 된 교회도 하나라는 것을 믿지"만 독립교회로 남아 교권싸움에서 제3의 입장을 견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미약하나마 선교사들의 신학을 신봉하던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비판도 엿보인다. 초기의 교인이었던 이종범(후일 장로가 됨)은 이런 독립교회 형태에 대한 자신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

향린이라는 평신도 교회를 창설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쌍수를 들고 찾아와서 입적했다. 싸움 없는 교회, 아무 파에도 가담하지 않는 교회, 딸라의 배경도 없고 선교사의 콧김도 없는 교회, 따라서 교역자라는 무관 제왕도 없는 순수한 평신도의 교회, 이거야말로 한국적 교회가 아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