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기독학생회와 향린의 창립자들


향린교회 창립을 주도하고 이끌어 온 안병무, 이영환, 장하구, 홍창의 등은 오랜 세월 동안 사귀면서 우정과 신앙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어 온 친구이자 동지들이었다. 이들 네 사람이 함께 모인 때는 이들이 서울대학교에 재학하던 때였으나 안병무와 장하구는 해방 전에 만주 용정에서, 이영환과 홍창의는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깊은 교분을 맺고 있었다.
만주는 한인들에게는 '광야'와 같은 곳이었다. 만주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대부분 일본인들에 쫓겨난 사람들이었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이주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안병무와 장하구는 1939년 만주 용정에서 은진중학교를 다닐 때 동산교회가 운영하던 소녀들을 위한 야학교에서 함께 가르친 인연으로 만나게 됐다. 이때 장하구는 이미 사회에 진출해 있었다. 장하구와 최봉삼은 1937년 동산교회의 새벽기도 자리에서 만났다. 이렇게 만난 이들 세 사람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신앙동지회를 만들어 매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신앙적인 꿈을 나눴다.
그러던 중 1940년 장하구가 먼저 일본으로 유학, 쇼지대학 예과에 입학했고 안병무와 최봉삼도 1941년에 도일(渡日)하여 다이쇼대학 예과에 입학함으로써 일본에서 학창생활을 함께 보내게 됐는데, 이때 문익환 동환 형제, 김관석, 장준하 등이 일본신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므로 그들과도 교류했다.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일제는 조선 학생들을 강제로 징집하는등 최후의 저항을 하였다. 안병무와 장하구는 징병을 피해 지내다가 장하구는 체포되고 안병무는 북만주 별촌에 1년간 숨어 있었다. 안병무는 1942년 봄 최봉삼과 도기순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도기순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은진중학교 성경과 영어 선생이었던 김재준과 재회했고 강원용과도 교분을 맺게 되었으니, 훗날에 향린교회와 관계를 맺게 되는 여러 교계 인사들과의 친분은 이미 간도와 일본에서 맺어져 있었던 것이다.
한편 고교 선후배 관계인 이영환과 홍창의는 일본 체재시 다른 창립동지인 곽상수와 한철하를 만났다. 홍창의는 평양 숭실학교 재학중에 그 학교가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자 평양 제3공립중학교로 옮겨 졸업 후 1941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구치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이미 이 학교에 재학중이던 이영환과 곽상수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한국의 유학생들에게 일본이라는 나라는, 만주와 마찬가지로 '광야'와 다름없었다. 식민지 조선의 아들인 이들은 갖은 차별을 당하면서 설움을 삼키며 공부해야 했다. 그들은 야마구치고교 영어 선생의 지도를 받아 성서공부를 하면서 신앙과 우정을 키웠다. 그들은 그 선생의 소개로 '공조회'(共助會)라는 신앙단체에 가입하였다. '공조회'는 일본의 모리아끼라(森明)라는 사람이 시작한 신앙단체로서 경건과 우정을 강조하는 진지한 신앙인들의 모임이었다. 이들은 경도대학 의학부에 진학한 후에도 '공조회'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8 15 전에 귀국하였다. 이들 '공조회' 회원들간의 친교와 유대는 현해탄을 넘나들며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향린교회 창립자들 가운데 장하구, 홍창의는 기독교인 집안이었으나 안병무는 그렇지 않았다. 안병무는 두 살 때 용정으로 이주하여 자연스럽게 항일 독립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살았다. 그는 한 가톨릭촌에서 십자가를 보았는데 동네 아이에게서 "누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대답을 듣고 '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대신 죽은 사람이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기독교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기독교인이 되면 술도 안 마시고 첩도 두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그런 기독교의 윤리를 좋게 여겨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만주에서 만난 안병무와 장하구, 일본에서 만난 이영환과 홍창의, 곽상수, 한철하 등 향린의 창립자들은 8 15 후 서울대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당시 한국 사회는 찬탁과 반탁 진영의 대립과 갈등이 폭력사태를 일으키고 있었는데, 학원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국립서울종합대학안' 반대운동까지 겹쳐 학원은 좌우익 싸움에 휩싸여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이 싸움에 가담하고 있었지만 이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거나 중간적 입장을 나타내는 학생들 또한 늘어가고 있었다. 향린교회 창립자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기독학생들은 좌우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거나 좌익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에서 같은 교회를 다니거나 이전부터 친분이 있던 창립 지도자들은 서울대학교에서 새로운 기독학생들을 만났다. 이영환, 이종완, 장하구, 홍창의, 한철하 등은 신암교회에, 곽상수, 김동명, 오기형 등은 승동교회에 다니고 있었고, 김철현, 문희석, 백종무, 안병무 등은 각자 다른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이들 기독학생들은 기도회와 성서공부 모임을 정례적으로 가지면서 신앙과 우정을 다져 나갔다. 이들은 학교 게시판에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기독학생의 모임을 공고를 붙여 알렸는데 여기에 약 2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이들은 매주 1회 성서읽기와 기도회를 가졌을 뿐 아니라 때로는 철야기도회를 갖거나 금식을 하는 등 열정이 넘치는 신앙활동을 전개했다. 이들 젊은 기독교인들은 한국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대부분이 기성교회에 대해서는 희망을 두지 않고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모임'으로 계속 모이다가 1947년에 서울대학교가 단과대학별로 정비됨에 따라 문리과 대학에서 처음으로 일주일간의 신앙집회를 개최하여 기독학생들의 결속력을 다졌다. 강연회 형식으로 열린 이 부흥회에는 당시 기독교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던 함석헌, 신사훈, 손정균 등과 진보적 신학계의 기수인 김재준, 그리고 그와 대결하고 있던 보수 신학계의 대부(代父) 박형룡 등이 강사로 초빙되었다.
신앙집회가 성황리에 끝나자 이들은 기독학생운동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되어 '문리대 기독학생회'를 조직하고 안병무를 초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하여 타 단과대학 기독학생들을 규합하여 '서울대학교 기독학생회 연합회'를 결성했는데, 이 '연합회' 초대 회장에도 역시 안병무가 선출되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모임'과 마찬가지로 기도회와 성서읽기에 집중했다. 또한 이들은 철야기도회를 자주 갖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들이 어느 정도 철야기도회를 열심히 했는지는, 그들을 잘 알고 있었고 목사로서 훗날 향린교회 임시당회장이 되기도 했던 김춘배가, 단식기도는 좋지만 철야기도는 잠을 못 자므로 정신이 흐려진다 하여 만류했던 데서도 잘 드러난다. 어느 겨울 밤에 철야기도를 하러 대학강당에 모여 있는데 김철현이 기도회장에 붙이기 위해 '민족통일을 위한 기도회'라고 크게 써 와서 논란이 있었던 적도 있었다. 그만큼 통일의 문제가 예민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또 한 번은 철야기도를 하다가 너무 추워 견디지 못하고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서 귀가하다가 순찰하던 경찰관에 붙잡혀 성북경찰서로 연행되어 문초를 당한 일이 있었다. 그때 이들을 문초하고 구타한 자는 훗날 이승만의 충복이 된 김창룡이었다. 그는 자신이 일제시대에 자원입대했음을 내놓고 자랑삼아 말하면서 대학생에 대한 질투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때 연행된 사람은 안병무, 이종환, 한철하 등이었는데, 한철하가 그에게 맞대꾸하다가 몹시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그는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한동안 반정부, 반군사적 사고를 갖기도 했다.
서울대 기독학생회는 신앙집회를 연례적으로 개최하였고, 각 단과대학별로, 또는 단과대학 연합으로 성서공부를 하는 일에 치중했고, 또한 매년 성탄절에 곽상수의 지휘로 헨델의 '메시아' 공연을 갖기도 했다. 이 행사는 기독학생회 차원을 넘어서는 큰 행사였다. 한편 이들은 남녀 8, 9명이 한 조가 되어 전국의 교회를 방문하여 신앙간증 형식의 순회강연을 개최하여, 교회 학생들에게 기독교인의 소명의식을 일깨웠고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비상한 각오를 하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도여행'을 한 것이다.
'서울대학교 기독학생회' 학생들은 뜨겁고 경건한 신앙인들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청교도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이 '기독학생회 전국연합회' 결성 사건이다. 이들 서울대학교 기독학생들은 1948년에 자신들과 연희대학 기독학생회가 주축이 되어 '기독학생회 전국연합회'를 결성하자는 제안을 YMCA로부터 받았다. 이들은 이를 위해 남대문교회와 승동교회에서 모임을 가졌으나 '전국연합회' 결성은 결렬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서울대학교 기독학생회' 학생들의 눈에는 YMCA가 세속적인 문화에 젖어 사교와 레크레이션 등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서울대학교 기독학생들은 이런 신앙 양태를 소위 'YMCA식 신앙'이라 하여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독학생회 전국 조직은 '서울대학교 기독학생회'가 빠진 채 결성되었다.


'일신회'를 결성하다'

서울대학교 기독학생회'를 주도했던 학생들은 학교 밖에서도 두터운 우정을 맺고 활발한 신앙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8 15 이전에도 여러 경로를 통해 깊은 우정을 맺고 있었으나 서울대학에 와서 맺은 돈독한 우정과 신뢰가 신앙의 동지로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각자의 집을 돌아가면서 성서공부와 기도회, 토론회를 하는 등 모이는 데 열성적이었다. 이들은 졸업 후에도 계속 모임을 가졌다. 이들이 자주 모인 곳은 '종로생활관'의 오기형의 방이었다. 김성열(목사)이 관장으로 있었던 '종로생활관'은 3층 건물의 적산가옥으로, 주로 일본의 대학 출신 기독교인들이 모여 종합 사회사업기관 건립을 구상하고 있던 곳이었다.
1947년 7월에 이영환, 홍창의를 비롯한 대다수의 신앙동지들이 학교를 졸업하였다(당시에는 7월이 학년말이었다). 장하구는 이미 1946년에 졸업하여 문리과 대학 강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들은 졸업 후에도 흩어지지 말고 계속 모임을 갖기로 하여 그해 곽상수, 김동명, 김철현, 백종무, 안병무, 오기형, 이영환, 이종완, 장하구, 한철하, 홍창의 등이 '일신회'라는 모임을 결성했다. 이들이 졸업 후에도 계속 모임을 갖게 된 데에는 오랜 친구들간의 우정과 신앙동지 의식뿐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 훈련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후배 기독학생들을 후원하기 위해서는 모임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신회'라는 명칭은 홍창의가 에베소서 4장 4절 이하에 근거하여 제안했는데, '일신'이 '한 하느님'(一神), '한 믿음'(一信), '한 몸'(一身), '날로 새로워짐'(日新)을 의미하는 등 다양한 내용을 포함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모두 찬성했다. '일신회'라는 명칭은 한글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나 한문으로 표기할 때는 '一信'을 사용했다.
'일신회'는 회원들의 집을 돌아가면서 매주 성서독회, 기도회, 신앙토론회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설파한 갈라디아서와 하느님의 은총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로마서를 텍스트로 하여 성서공부를 했다. 여기서도 그들이 화석화되어 신앙의 실천이 없었던 당시 한국교회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의 진실한 믿음과 사랑의 실천, 그리고 복음의 자유를 강조하는 신앙을 갖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독서모임에서는 에밀 부르너(Emil Brunner)의 책 등이 주로 다루어졌는데, 책을 구하기 어려웠던 때여서 손으로 직접 베꼈을 정도로 열성이 대단했다. 당시 주요한 토론 주제는 진실한 신앙인의 삶에 관한 문제였다. 이들의 모임은 웨슬리(Wesley) 형제가 옥스포드에서 시작한 신성클럽(Holy Club)을 방불할 정도로 진지하고 뜨거웠다. 그때의 분위기를 이영환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

…어떤 때는 밤을 세워서 집회를 계속했는데 그 분위기가 어떻게나 열띠었는지 주위에서는 푸닥거리하는 패들이라고 웃음의 평도 했어요. 대체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전원이 모였는데 시간을 지키느라고 늦으면 많이 뛰기도 했지. 곽상수 형 댁에서 모였을 때에는 늦은 사람은 반성을 하라고 "이미 시간은 지나갔다.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라"라고 문에다 써붙인 일도 있지요.

'일신'은 그때 이들의 신앙의 지표처럼 중요시됐다. 1947년에 안병무가 주로 황해도 일대에서 피난온 기독교인들을 만나 그들을 중심으로 계획에 없던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교회가 정식으로 설립했을 때 이름을 '일신교회'라고 붙일 정도였다.
이토록 열심이었던 '일신회' 모임에도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948년 8월부터 김철현을 필두로 김동명, 오기형 등 외국유학을 떠나는 동지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모임은 쉼없이 계속되었고 동지적 유대는 점점 굳건해져 갔다.


<6.25전쟁으로 흩어지는 '일신회' 동지들

전쟁의 기운이 한반도를 뒤덮고 있던 민족사적 위기 앞에서 '일신회'의 젊은 신앙동지들은 각자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임은 어떻게 이끌고 나갈 것인지에 대해 뚜렷한 목표나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들의 진로를 설정하기 위해 1950년 6월 23일 저녁 자하문 밖 승가사 근처에 있는 한 기도원(원장 유재현 목사)에서 수련회를 가졌다. 이 모임에는 안병무, 이영환, 이종완, 장하구, 한철하, 홍창의가 참석하였으며, 곽상수는 약속을 했으나 일이 생겨서 참석하지 못했다. 이들은 위기의식이 고조되어 있던 때라 당시 상황과 자기들의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토론하고 기도했다. 수련회 사흘째인 25일에 시내를 다녀온 사람으로부터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이들은 기도소에 모여 구국기도회를 가졌다. 이때 장하구는 "이승만 대통령과 채병덕 총사령관을 축복하시고 힘 주시기를 빈다"고 기도하기도 했다. 당초에는 며칠 더 수련회를 할 계획이었지만 26일에 중단하고 효자동까지 걸어나와 특별한 약속 없이 각자 헤어졌다. 한국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고 대안을 모색하고 있었던 이들 젊은 신앙인들조차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나리라고는 예기치 못했고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쟁을 만나자 황망하게 헤어지게 된 것이다. 이때의 모습을 안병무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

그때 신앙자세는 전쟁 소식을 듣고 이승만 박사와 채병덕 참모총장을 위해 기도한 데서도 잘 나타난다. 우리는 허겁지겁 수도원에서 나와 인사도 못하고 흩어졌다. 완전히 무방비 태세였다. 정부도, 교회도 무방비 상태였다.…

'일신회' 동지들은 이렇게 황망히 헤어졌다. 아무런 기약 없이 헤어진 동지들 가운데 이영환은 장하구 원금순 부부와 한집에 살면서 병원을 같이 운영하고 있었기에 모두 함께 피난을 떠났으나 안병무, 홍창의, 곽상수는 서울에 남아 있었다. 안병무는 전쟁이 나자 일신교회 교인들을 버리고 혼자 떠날 수 없어서 순교를 각오하고 당시 거처였던 일신교회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일신교회가 인민군에게 접수되자 충남 서산으로 내려가 지내던 중 1 4후퇴 후 국민방위군 간부훈련생으로 징집되어 일주일만에 한 달 과정의 훈련을 끝내고 장교로 임관하여 군인생활을 했다. 국민방위군 부패사건이 터져 방위군이 헤체될 때 그는 군에서 풀려났다. 한편 홍창의는 피난길에 나섰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와 여러 고비를 겪은 후 1 4후퇴 때 제주도로 갔다. 거기서 서울대학교 병원이 제주도로 피난하여 한림에 설립한 구호병원의 소아과 의사로 일했다. 장하구는 육군 보병학교에서 미국 군사교본을 번역하는 문관으로 일하다가 1 4후퇴 후에는 대구에서 미군 정보부대(MISD)에서 중국어 문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그밖에 이영환은 부산 구포에서 대진의(代診醫)로, 한철하는 대구에서 통역장교로 일하다 제대 후 부산에서 한국신학대학 강사로, 이종완은 부산에서 통역장교로, 곽상수는 군악대원으로 일하는 등 각자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전주에서 신앙운동을 펼치다

안병무는 방위군에서 풀려나자 각지에 흩어져 있던 신앙동지들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일일이 그들을 만나서 함께 모이자고 제안했다. 안병무는 전쟁 이후를 대비해 한 도시에 모여 살면서 기도하고 신앙 훈련을 쌓으면서 장래를 논의하자고 열심히 설득하고 다녔다. 그는 민족의 처절한 고통에 대해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직접 목격하고 온 몸으로 경험하고서 새로운 신앙운동을 통해 기독교인으로서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것을 제안했던 것이다. 특히 안병무는 일신교회에서의 목회 경험을 통해서 교회의 무력함, 평신도들의 신앙 실천이 없는 목회자 중심 교회의 무능함을 깊이 체험했다고 한다. 그는 일신교회 목회에 온 정열을 바쳤다. 그런데 6 25가 나자 교인들이 트럭을 한 대 마련하여 같이 피난길에 올랐는데, 그때 교인들이 자기 물건을 하나라도 더 가져가려고 아귀다툼하는 것을 보고 그는 기성교회로는 사람을 조금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뼈저린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일신회' 동지들은 그의 제안에 기꺼이 동의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모임을 추진한 안병무는 그 동기를 이렇게 말한 바 있는데, 여기서도 민족문제에 대한 이들의 관심을 엿볼 수 있다 :

그동안 무슨 정신으로 살았는지, 어느 노(怒)한 철퇴(鐵槌)에 실신한 폐인같이 어리둥절한 지 1년 이상… 이래서야 되나 !  마치 동시에 꿈을 깬 듯이 어떤 선동자도 없었건만 부산에서 모임을 갖고 이 시대에 주시는 음성을 듣자, 그리고 일하자, 내일 죽더라도 무엇을 하려다가 왔다는 보고의 자료라도 있어야지. 그것이 그때의 이구동성의 결론이다.
이때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던 신앙동지들은 마침내 함께 모여 살기로 결의하고 그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마침 적십자 전주지부가 전주에 병원을 세우기로 하고 병원장을 찾고 있었는데 구미에서 일하고 있던 이영환이 그 병원장에 선임되어 전주로 가게 되었다. 이에 안병무는 단신으로 전주에 내려가 그곳 상황을 살핀 후 자신은 전시 연합대학 강사로 일하기로 하고 어머니와 동생 안병택과 함께 전주로 내려 갔다. 곽상수가 그 뒤를 따라 가족과 함께 전주에 와 신흥학교의 음악교사로 부임했으며, 이어서 홍창의도 제주의 서울대학병원 구호병원이 철수하자 전주로 왔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부산과 대구에 있던 한철하와 장하구를 제외한 '일신회' 동지들이 1951년 11월부터 전주에 모여 살게 되었다. 그때까지 이영환은 미혼이어서 안병무의 집에 동거했으며 그 집에서 매주 모여 기도회와 성서공부를 계속했다. 한철하와 장하구는 '일신회'가 2∼3일씩 특별모임을 할 때면 전주로 와서 모임에 참석했다.
'일신회'가 전주에 자리를 잡게 되자 모임을 주동했던 안병무는 전주의 교계 인사들을 만나 자신들이 전주에 온 뜻을 전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일신회'는 그들에게서 상당한 의혹의 눈총을 받았다. 그 까닭은, 당시 한국교회는 극심한 교파분열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고, 그 틈을 비집고 온갖 이단이 횡행하고 있던 차에 낯선 젊은이들이 새로운 신앙운동을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전주의 교계 인사들은 '너희들은 무슨 파냐 ?', '어느 지방 사람이냐 ?', '무슨 야심을 가지고 왔냐 ?', '분열을 일삼는 무리들이 아니냐 ?'고 말하며 동지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당시 한국교회 사정을 비추어 보면 정체가 불명한 이들 '일신회' 동지들의 동기를 의심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런 의심을 받았다고 물러설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변명 대신 우리의 행동과 시간으로 대답하기로 했다"고 말하면서 새로운 신앙운동에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들은 자신의 과제를 당시 식자층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교회에 대한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시각을 고쳐 놓고, 평신도들이 복음을 깨달아 참 기독교인이 되도록 한다는 것으로 설정했다. 이 가운데 특기할 만한 점은 평신도들에게 참된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들의 신앙을 새롭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 갱신의 주역이 평신도임을 천명한 것이었다. 세계 신학계에 '평신도 신학'이 제창되기 전인 이때 이들은 이미 교회 개혁의 원동력을 평신도들에게서 발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금까지 쌓아온 신앙 훈련을 기반으로 새로운 신앙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우선 이들은 평신도를 각성시키기 위해 각기 다른 교회에서 봉사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그래서 안병무는 신흥교회에, 홍창의는 완산교회에, 이영환은 태평교회에, 곽상수는 서문교회에 각각 나가서 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이 각 교회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성서공부였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성서로만'(Sola Scriptura)의 정신과 상통하는 것으로서, 교회 개혁의 방향과 방법은 성서적이어야 한다는 이들의 신앙의 표현이자, 교회가 성서를 떠나 세상과 타협하여 사교클럽화되어서는 안된다는 이들의 신념의 표현이었다.
각 교회에서 활동한 이들 동지들은 매주 한 번씩 모임을 가졌다. 이 정례모임은 우선적으로 동지들 각자의 신앙의 성장과 친교를 도모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이들은 이 정례모임에서 당시에 사회적 사상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들을 복음의 빛에 비추어 토론했다. 그리고 동지들이 인도하는 성서공부가 각 교회의 사정에 따라 약간 다른 모양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이 모임은 그 차이를 조율(調律)하고 각자의 활동성과를 확인, 점검하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신흥교회에서 열린 이 정례집회는 본래는 동지들만의 모임이었다. 그런데 이 집회가 지역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크게 호응을 받아 모이는 숫자가 나날이 늘어갔다. 이들이 전주에 온 지 불과 2개월만인 1952년 1월에 이미 80여 명이 참석하고 있었으며 4월에는 100여 명이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는 목회자도 여럿 있었다. 이들 동지들이 초기의 의혹을 벗어 버리고 지역의 교계 인사들로부터 인정받게 된 것이다. 향린교회가 창립되기 이전에 이 집회에 참석하여 창립자들과 관계를 맺고 훗날 향린교인이 된 한익성(현재 본교회 장로)은 이 모임이 전주 시내 각 교회의 학생, 청년들의 관심을 모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집회에서 주로 다루어진 주제들은 '인간의 실상', '가인의 후예', '예수의 부활과 인간의 신생', '알지 못하는 신', '성경론' 등 주로 실존주의적 문제들과 신학적 문제들이었고, 강사는 '일신회' 회원인 안병무, 이영환, 한철하 등이 맡았다. 후일 연세대 신학과 교수를 역임한 유동식과 몇 사람의 지역 목회자들이 참여해서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 집회는 초기에는 매주 일요일에 열리다가 나중에 월요일로 모임 날짜가 바뀌었다.
이 집회가 계기가 되어 안병무는 이해영(목사)의 초청을 받아 '영생신학원'(현 전주대학의 전신)에서 강의하게 되었다. 이 학원에는 약 30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모두들 사회유지였으며, 62세가 넘은 장로 등 고령 학생들도 있었다.
단시일내에 이들의 모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온 것은 기존의 낡고 구태의연한 신앙에서 벗어난 새로운 신앙운동에의 갈망이 기존 교회에 팽배해 있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민족적 위기를 당하여 갈 길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전망에 갈급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일신회' 동지들은 전주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신앙운동에의 의지를 더욱 확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과 뜻을 같이 할 사람들이 많이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신흥교회에서 모인 정례 저녁집회가 인근 지역에 알려지자 몇몇 동지들은 부흥집회에 강사로 초청받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는 대구 육군병원, 제주 한림과 같이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는 지역이나, 남원과 같이 빨치산 투쟁이 치열하여 누구도 가기를 꺼려하는 위험지역도 들어 있었다. 그들은 먼 길과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의 초청에 응하여 사도 바울처럼 '전도여행'을 다녔다.
1952년 1월경 한철하는 위험지대여서 목회자가 없던 남원교회에서, 안병무는 재정이 넉넉치 않아 목회자를 모시지 못하고 있던 전주 덕진교회에서 각각 일주일간 집회를 인도했다. 당시 덕진교회는 청년들이 다수 모여 있는 교회였지만 재정 형편이 어려워 1년여 동안 목회자를 모시지 못하고 평신도들끼리만 모이고 있었다. 덕진교회 청년들은 무보수로 부흥회를 인도해 줄 부흥강사를 찾던 중 안병무를 소개받았다. 안병무는 이들과 협의하여 '부흥회'가 아니라 '기독교강연회'라는 이름으로 집회를 인도했다. 이 일주일간의 '기독교강연회'는 많은 젊은이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을 이루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일신회'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덕진교회 주일예배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이 일은 당시 연희대 신학과에 재학중이던 안병택이 사실상의 전담자로 크게 수고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갖고 전도여행을 많이 다니던 안병무는 사도 바울의 심정을 갖고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목자를 갈구하고 복음을 사모하지만 결국 일꾼이 없다. 남원은 위험해서 가지 않고, 덕진교회는 돈이 없어서 일꾼이 없다. 진실한 주의 종 ! 아,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없는 시대여…
안병무는 1952년 3월에는 '대구신우회'가 주최한 대구 육군병원 집회에 강사로 초청받아 전쟁으로 인해 병들고 불구가 된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위로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10일 홍창의의 주선으로 제주도 한림교회(서울대학병원의 제주도 구호병원이 있던 곳)가 주최한 강연회에서도 강연했다. 이 강연회에는 3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했다. 이외에도 '일신회' 동지들은 여러 곳으로 전도여행을 하며 복음을 전파했는데, 그 과정에서 전쟁을 통해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을 피부로 체험했다. 그들은 슬픔과 좌절에 빠져 있는 민중들을 위로하면서 6 25전쟁을 '민족의 수난'으로 가슴 속에 깊이 각인해 나갔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야성}(野聲)지 발간

'일신회'가 펼친 신앙운동 가운데 가장 널리, 가장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활동은 {야성}지를 발간한 일이다. {야성}지는 안병무를 편집인겸 발행인으로 하여 1951년 11월 12일 전주에서 창간되어 전국에 배포된 신앙동인지(信仰同人誌) 성격의 잡지로서 주요 필진은 '일신회' 동지들이었다. 그들은 신앙과 신학에 관한 글들뿐 아니라 자신들의 전공에 따라 다양한 글들을 {야성}에 기고했는데, 이 잡지는 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국의 기독교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커다란 신뢰를 얻게 되었다.
평균 40∼50쪽 분량의 소책자인 {야성}지는 창간호 머리말에서 "나는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거칠지만 진실을 담아 기존 질서를 비판하고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가겠다는 의지와 목표를 분명히 천명했다. 여기에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희망을 잃고 좌절하고 있는 민족에게 위로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자 하는 간절함이 들어 있었다. {야성}은 이론적 성격의 잡지가 아니었다. {야성}지는 "Scholar(학자)가 아니라 Student(학도)로, Minister(목사)가 아니라 Layman(평신도)으로서 어떤 체계나 논리적 결론이 아니라 미완성한 그대로, 우리의 삶에서 느끼는 그대로를 발표하자는 것"이 자신의 의도라고 밝혔는데, 여기에 {야성}지가 갖는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야성}에는 6 25라는 민족적 비극이 피처럼 스며들어 있다. 창간호 머리글로 안병무가 쓴 [고난의 의미]와 장하구가 희곡 형태로 쓴 [욥], 그리고 역시 안병무의 글 [시간과 영원의 출발]은 민족이 당한 파국적 비극의 현장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전제되었던 글들이었다. 그리고 한철하는 역사의 의미를 묻는 글을 연재했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의 악몽을 번역해 냄으로써 당시의 종말적 상황에서 교회의 무능에 대한 비판을 대신했다.
{야성}이 발간되자 독자들로부터 즉각적으로 반응이 왔다. 그 반응 가운데는 "성경 연구란을 넣어 주시오", "좀더 본격적인 연구논문을 실어 주시오", "은혜 사모하는 몇 사람에게 생명떡과 같은 {야성} 병(餠)을 분식(分食)하여… 주님께 감사를 드리나이다" 등과 같은 건의와 감사의 글들이 답지했다. 반면에 "'야성'이란 야만인의 소리", "대체 웬놈들의 소리냐, 정체를 밝혀라", "광야의 소리가 아니라 서재의 소리다"라는 등의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반응도 소수지만 없지 않았다.
{야성}지에 기고한 '일신회' 동지들은 각자의 전공에 따라 다양한 글을 기고했다. 그 글들 가운데는 동지들이 모임에서 토론하고 고민했던 내용들도 들어 있었다. 곧 교회 갱신의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평신도 교회', 목회, 예배 등에 관한 글들과 같이 교회의 삶에 관한 글들이 많았고, 연구논문, 번역논문, 새 찬송가 소개 및 해설, 희곡, 신앙수상 등도 있었다.
{야성}지는 학생, 청년, 군인 등을 주독자층으로 하고 있었다. 각 육군병원 장교병실에서도 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일반교회에는 거의 배포되지 못했는데, 그것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부수가 제한되어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목사들이 {야성}지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수지만 뜻있는 몇몇 목회자들의 적극적인 성원도 있었다. 창간호 [잡신록]에는 "이 일({야성} 발간하는 일-인용자 주)을 위해서 주께서는 동역자를 주시었다. 부산에 숨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숨은 이들을 주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숨은 이'는 이희주(권사)를 주축으로 안병무가 전쟁 전에 서울에서 목회하던 일신교회 교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들은 부산 피난생활중에도 {야성}지 발간에 적극 협력했다. 이때 정용주(후일 본교회 장로가 됨)도 이 후원사업에 참여하여 창립자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들 외에도 대구의 시장과 거리에서 장사를 하던 피난민들 중에 '대구 신우회' 회원들이 {야성}지 발간을 후원했다. 그들은 또한 대구 육군병원의 상이용사들을 돕는 데도 앞장서고 있었다. 그리고 대구 애락원(나환자촌)의 교인들도 기도로써 잡지 발간을 지원해 주었다. 당시 전주 미군부대에 근무하던 유성덕(현재 본교회 교인)이 종이를 제공하기도 했다. 발간자들은 후원자들에게 감사하면서 이들을 위해 금요 철야기도회를 개최했다. 필자와 독자들간의 유대관계가 매우 돈독했음을 보여 주는 일화이다. 김재준도 {야성}을 위해 금일봉을 전달하면서 다음과 같은 격려의 글을 보내왔다 :

귀지의 출간을 진정으로 축하하며 감사합니다. 항간에 흔히 있는 선전적인 기사가 아니라 신앙동지로서의 진실한 고백문을 읽는 담백하고 순수한 정조가 좋습니다.
{야성}을 발간하기 위해 안병무는 전국 각지를 뛰어다녔다. 편집을 책임지고 있던 그는 {야성}을 인쇄한 부산을 수시로 다녀야 했고, 또 부산, 대구 등 각지를 돌며 기금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야성}은 1951년 11월 12일 창간호를 발간한 이래 7호까지는 전주에서 편집하여 대구와 부산을 오가면서 인쇄했다. 경제 사정이 어려워 종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환도 후에는 향린교회가 발행하여 전국에 배포했는데 한때는 발행부수가 3,000부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1956년 1월 15일 제12호를 마지막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한국교회에 바람직한 교회갱신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야성}지 발간은 향린교회 역사에서뿐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역사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