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뭐라구? 얼른 말해봐....

마지막 장면인줄도 모르고 오띨리아가 관객을 향해 얼굴을 돌리자, 나도 모르게 던진 말이다. 그리곤 기다렸다...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서...

그런데 검은 화면이 한동안 멈춰 있더니만, 어느새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영화 시작 전, 상영시간 112분으로 알고 있었고, 아~ 두 시간 가까이 되는 긴~영화네~했지만, 함께 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 영화가 끝나고 나니 결코 긴 영화가 아니었다는 느낌이 든다.


1987년 루마니아 혁명 2년 전이라는 배경 설명이 자막으로 뜬 후, 허름하고도, 왠지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기숙사 내의 이런저런 모습이 비춰진다. 그리곤, 분주하고도 불안해 보이는 두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시선은 멈춘다. 


리얼리티에 기반한 영화라고 했던가!

관객에게 보여지기 위한 화면이라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우리에게 보라고 말하는 듯, 흔들리기도 하고, 갑자기 어두워진 화면 속에 묻힌 그 무엇을 쫓기 위해 나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내밀고는 두리번거리게 한다.


임신....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

하지만, 이 말은 임신이라는 실제상황을 너무도 단순하게 표현한 말이다. 가비타의 임신은 이미 상대가 누구였는지, 또 어떻게 임신을 하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은-이건 단지 관객의 호기심일 뿐일까?-거두절미하고 가비타의 아버지가 찾아온다는 소식도 현재로서는 달갑지 않으며, 남자친구의 어머니 생일잔치 참석이 불분명한 상황에 놓여있는 오띨리아는 남자친구의 서운함을 겨우 달래가며, 더 급박한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이리저리 분주하다.


이미 가비타의 임신은 다른 것을 고려할 여지없이, 부주의함으로 생겨난 잘못된 일로 치부되고, 상영 내내 코빼기도 비추지 않은 상대를 완전히 배제한 채, 위험 속으로, 절망 속으로 치닫는다.

가비타는 나름 자신의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불법인 낙태시술을 해줄 베베를 섭외하고, 그 사람의 요구대로 호텔 예약까지 마쳤지만, 예약했다던 호텔부터 꼬이기 시작하더니, 낙태시술을 위해 얼마나 위험을 감수하고 왔는 줄 아냐며 떵떵 소리치던 베베는 결국 임신 3개월이라던 가비타의 말이 거짓이었음을 안 순간, 더 큰 강자가 되어 돈도 없고, 그야말로 힘도 없고, 빽도 없는 두 여성을 무참히 짓밟는다. 임신한 친구를 도우러 왔거나 말거나, 낙태를 앞두고 있거나 말거나 베베에게는 자신의 욕망만이 중요할 뿐, 욕망을 충족한 후에는, 아주 천연덕스럽게 낙태시술을 하고, 만약의 사태를 위해 다시 오겠다는 애프터 서비스 정신까지 발휘해 가며 베베는 유유히 호텔방을 떠난다.


시술 후, 삐져있는 남자친구를 위해 그 어머니의 생신 잔치에 참석한 오띨리아는 소위 지식인, 좀 가진 사람들이 모인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의 부모가 대학을 나오지도 않고, 그럭저럭 그저 별 볼일 없이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은근한 무시, 여자가 남자친구 부모 앞에서 흡연하는 것은 아주 버릇없는 행동이라는 꽤나 교양이 철철 넘치는 태도 앞에서, 역겨움을 간신히 견뎌내 가며, 잠시 전, 성폭행을 당해야만 했던 현실과 불법 낙태시술 공모로 인한 답답한 감정들을 꾹꾹 누른 채, 철없어 보이는 남자친구와의 현재를 더듬어 본다.


화면에 등장하지도 못한 가비타의 상대와 비슷하리라 여겨지는 이 남자친구는 오띨리아를 나름대로는 배려한다고 하지만, 틈만나면 오띨리아의 몸을 더듬고자 할 뿐, 서로가 가져야 할 책임감에 대해서는 그닥 믿음직스럽지 못한 애매한 태도를 보이며, 눈앞에 있는 오띨리아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왜 그렇게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더 깊게 들여다보지 못한 채 두 연인은 썰렁하게 헤어진다.


어두운 거리, 누군가가 뒤에서 걸어오면 불안감을 느껴야 하는 모든 여성들처럼, 오띨리야 역시 뒤에 오는 등치 큰 남자를 힐끗힐끗 바라다보며, 겨우 그 남자가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향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앞을 보며 걸어갈 수 있게 된다.

파티가 한창인 호텔, 성폭행과 낙태시술의 음습한 기운이 감도는 206호실에는 4개월 3주로 너무나 짧은 생을 마감해야한 한 생명이 타월에 감긴 채 화장실 바닥에 누워있다.

또다시 어둠 속으로, 베베가 일러준 대로, 높은 아파트 옥상을 찾아 쓰레기통으로 휙~하고 던져진 그 생명, 그리고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오띨리아.

돌아온 호텔방은 잠겨있고, 가비타는 요기를 위해 식당에 앉아있다.

3일을 예약한 그 호텔방은, 그 하룻 사이가 마치 수 만년은 된 듯, 많고 많은 일들을 목도하고, 그러나 호텔방도, 오띨리아도, 가비타도...아무 말 없이 그저 일상 속으로 다시금 돌아온다.

그러나...오띨리아는 그저 일상 속으로 복귀하는 것에 할 말이 많았던 것 같다. 관객들을 향해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는 눈을 맞추려고 하니 말이다.


영화의 주제가 ‘낙태’에 있다고 하지만, ‘낙태’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은 이 영화는,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가졌으나, 주체적이기 보다는 친구에게 의존해 있는 나약한 가비타의 모습, 친구를 위해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통해 욕망의 도구를 자처한 것으로도 모자라 모든 뒤처리까지 감당해야 했던 오띨리아의 모습, 낙태를 앞둔 여성 앞에서 만큼은 거의 신의 자리에 있는 듯 두 여자를 쥐락펴락하는 베베의 모습, 가족의 굴레 속에서 착한 남자인 척 하는 남자친구의 모습, 그리고, 어둠이 내리워진 거리 등, 이 모든 것이 여성을 이중삼중 옭아매고 있다는 현실을 그야말로 리얼리스틱하게 보여주고 있다.


왜 이 영화는 그 배경을, 루마니아 혁명 2년 전이라고 전제해 놓고 시작했을까? 혁명을 준비하기 위해 고민하는 젊은이들을 그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 시기, 차우셰스쿠는 인구가 줄어든다는 이유로 이혼, 낙태, 피임까지도 불허했으며, 그로인해, 50만명의 여성들이 불법 낙태시술을 받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들은 넘쳐나는 음식을 즐기고 있지만, 한쪽에서는, 설탕을 사기 위해 줄을 서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띨리아의 남자친구를 빼면, 베베나 가비타나 오띨리아나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대열에 함께 속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연대하기 보다는 돈과 몸을 착취하고, 서로의 발목을 붙잡고 있을 뿐이다.

암울함. 음습함. 그리고 불안감. 일상 속에 이러한 것들이 이리도 깊게 스며들어 있는데, 어찌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성 그리고 몸에 대한 결정권조차도 박탈되어 있는 시기는 비단, 그때 뿐이었을까. 

여전히 세계 곳곳에는 지금도 불법 낙태 시술로 인해 생명을 잃어가는 여성들이 있다.

이 영화는 결코 몸을 함부로 굴리면 이런 꼴을 당해! 라는 천박한 얘기를 전하고 있지 않다.

지난 2월에는 모자보건법 14조를 중심으로 한 낙태 관련 법 개정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낙태를 금지하되, 그 예외조항에 ‘사회적 사유’라는 것을 첨가하느냐의 여부와 낙태가능 주수-현행 7개월, 논의는 12주-등이 주된 논란이라고 하는데, 사실 남한의 경우, 불법이면서도 버젓하게 낙태시술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사문화된 법이기도 하다. 낙태를 금지하는 것만이 능사일까. 여전히 보수계나, 종교계에서는 낙태 금지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여성들로 하여금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 앞에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는 낙태의 문제는 그 초점이 어디에 맞춰져야 하는 것일까? 인구감소에 대한 대안으로 낙태, 이혼, 피임 등이 금지되었다는 루마니아 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것을 이유로 여성들의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빼앗아가는 행위는 국가가 가타부타 논의할 사항은 아닐 것이다.   


생명에 대한 기대와 기쁨 보다는, 임신에 대한 불안, 임신 후의 절망 등은 비혼과 기혼을 막론한, 모든 여성들이 지니고 있는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행동에 대한 결과, 그리고 책임을 묻기 이전에, 이 사회가 이중적인 성의 잣대에서 벗어나, 얼마나 여성 그 자체의 몸을 존중하고, 또 결정할 권한을 주고 있는지, 그리고 새 생명이 태어난 후,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얼마나 되어 있는지, 건강한 가족을 표방한답시고 법률이 정하고 있는 울타리 밖에서 태어날 수 밖에 없는 새 생명에 대한 차별의 시선을 거두고, 법률 제도의 개정, 사회 보장 제도의 확충 등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를 대답할 수 있어야, 비로소 ‘낙태’‘여성’‘인권’‘몸의 결정권’등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띨리아의 마지막 눈길을 다시 떠올려 본다. 그 눈길은, 혁명이 아니고서는 뒤바뀔 수 없는 이 현실에 대한 체념이었을까? 아니면, 누가 우리를 손가락질 할 수 있으랴 하는 본질을 까발리고자 하는 소리없는 외침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