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 안내글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 안내글
“겨레의 통일이 목마른 사람들” (2)
8월의 붉은 사과’
오 기모(평화 소모임 회원)
흔히 사과하면 남한에선 대구사과를 지칭한다. 그러나 나에겐 먼저 고향이 떠오른다. 내가 태어난 곳인 평안남도 숙천 법리는 온 동네가 사과밭이었다. 그래서 이곳 사과를 보통 ‘숙천사과’라고 한다. 숙천 일대의 토양은 사과가 잘 자라도록 하는 인산이 풍부해 숙천사과는 맛이 좋고 품질이 우수했다.
우리 마을에서 평양까지는 ‘백리’인데 기차로는 1시간 가량 걸렸다. 서해가 멀지 않아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논농사를 많이 짓기도 했다. 주변엔 선돌(입석) 등 선사시대의 유적뿐만 아니라 고구려 시대의 유적들도 많았다.
나는 1925년 9월 30일 사과농사를 지으시는 농부의 5남 1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지금 팔순을 바라보는 나로서는 어린 시절의 모습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희미하다.
나는 다소 늦은 10살에 소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내가 다녔던 학교는 일제말기라 일본은 한국에 대한 ‘황국신민화’ 정책이 매우 심한 상황이었다. 국어가 일본어였고, 국사가 일본사였다. 우리 국어는 ‘조선어’라고 하여 외국어 취급을 당했다. 우리 역사도 일본사의 일부분으로 편성하여 왜곡하고 부정적으로 기술했다. 일제는 성과 이름을 바꾸고 교육을 이용하여 한국인을 일본인화하기 위해 발악했다.
내가 소학교 5학년이었을 때 아버지는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나 형님들 덕분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평양에 있는 ‘평양농업전문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바로 위의 형이 평양에 있었기 때문에 형과 함께 생활하며 학교에 다녔다. 당시 내가 다닌 학교뿐만 아니라 각급 중등학교는 공부는 거의 하지 않았고, 강제 노역만 시켰다. 우리들은 전쟁용 비행장 건설현장에 투입되거나 군량미 증산을 위한 모심기 노역에 동원되기도 했다. 졸업 무렵에 4개월가량 교사강습을 받고 1945년 3월에 수료했다. 그때 내 나이 20살이었다.
해방 직전 소련군 북한 진입, 민심이반으로 ‘술렁’
“일제가 패망했다. 일제가 패망했다.”
1945년 8월 갑자기 조용하던 시골마을이 미루나무에 앉은 한여름 매미소리처럼 시끌시끌해졌다. 마을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삼삼오오 모였다.
“아, 글쎄, 숙천에 갔다가 들었는데 일제가 항복했두만.”
“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일제지배로부터 독립과 해방이 되는 거지.”
라디오 하나 없어 시국상황을 알 수 없었던 우리 마을 사람들은 숙천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일제가 패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에서 입으로 해방의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우리 마을 사람들은 1945년 8월 15일 밤늦게까지 ‘독립과 해방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며칠이 더 지나고서야 어렴풋이 해방의 의미를 조금씩 알게 되어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나도 마을사람들과 함께 목청껏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우리 마을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시골이다 보니 정세나 시국과 거리가 멀었고, 농사일에 바빴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향에 몇 개월을 머물면서 야학을 열어 문맹자를 대상으로 한글을 지도했고, 최남선이 쓴 ‘고사통’이란 책을 갖고 우리 역사를 가르쳤다. 우리 역사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서 나도 공부하면서 가르쳤다.
소련군들이 해방 직전에 먹이에 굶주린 북극곰처럼 북한에 들어왔다. 소련군들은 곳곳에서 시계 등을 약탈하거나 여성들을 괴롭혀 그들에 대한 증오심이 처마끝 고드름처럼 커져가고 있었다. 특히 국내파 공산주의자의 거두인 현준혁이 암살되었고, 조만식 선생이 1945년 11월 평양에서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자 얼마 후 연금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북한은 해방을 맞이한 기쁨이 풍선 터지듯 순식간에 사라지고 민심이 흉흉해졌다. 북한 땅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2월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 서울에 도착했다. 상경 1주일 만에 빵, 과자, 국수 등을 만드는 ‘풍국제분’이라는 매우 큰 회사의 서무과 직원으로 채용됐다. 이 회사에는 광복군 출신 청년들 30여명이 경비원이나 공장 노무자로 잇달아 들어와 일을 했다. 당시 미군정의 방해로 중국 임시정부 인사들은 귀국해서 마땅히 일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 이 공장, 저 공장에 나뉘어 말단 노동자로 취업을 해야 했다.
“오기모 동지, 고향이 평남 숙천이라지.”
“네, 그렇습네다.”
“나는 고향이 평남 서해면이야. 우리 광복군 동지들 좀 잘 살펴주라우. 그리고 광복군 동지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에게 연락을 주라우.”
풍국제분 광복군관리 총책임자가 나에게 다가와 부탁했다. 그는 나보다 10여살 많은 30대 초반이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김희선 의원의 부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평양과 중국을 오가며 광복군의 재건을 도모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에 입국했다는 소식이 있은 후 연락이 끊겼다.
1946년 10월 대구에서 좌익세력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대구폭동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에서 우익진영과 경찰 그리고 좌익세력이 크게 맞붙어 전국을 강타했다. 대구폭동사건으로 민간인과 경찰관 등 수십여명이 사망했다.
내가 다니던 풍국제분에서도 대구폭동사건을 계기로 좌우대립이 본격화됐다. 남노당의 좌익계열이 ‘전국노동조합 전국평의회(전평)’ 지부를 결성했고, 우익진영에서도 ‘대한노총’ 지부를 만들어 회사 내에서 좌우가 수시로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 거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익진영의 세가 점차 강화되었다. 좌익진영은 일부가 북으로 넘어갔고 일부는 지하로 숨거나 군에 입대하여 몸을 피하기도 했다.
나는 좌와 우,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북한이 내 고향이긴 했지만 공산당이 싫어 좌에 발을 담그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폭력, 백색테러 등을 일삼는 우익진영도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없는 집단으로 생각하고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나는 이념의 흙탕물에 발을 담그지 않고 퇴근 후에는 순수 민족주의자들이 이끄는 여러 강습회에 나갔다. 한국의 대표적인 민족사학자인 정인보 선생이 연 ‘국사강습회’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강습소는 을지로에 있었다.
“나는 조선총독부 앞을 지날 때 고개를 돌립니다. 일제를 절대 인정할 수 없었고, 증오했기 때문입니다. 일제치하에서 최남선이 변절한 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그가 변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크게 통곡했습니다.”
열강과 토론으로 국사강습회는 매번 밤늦게 끝났다. 주요 교통수단이 전철이었는데 끊기기 일쑤였다. 정인보 선생의 집은 흑석동에 있었고, 내 집은 청파동에 있었다. 그래서 정인보 선생은 집 방향이 나와 같아 함께 걸어가며 많은 이야기를 하곤 했다.
국사강습이 끝난 후 1946년 겨울 무렵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이 연 ‘한글강습회’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최현배 선생의 진지한 학자적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라를 사랑하고 우리 한글을 사랑하는 열정이 온몸에서 풍겨 나왔다. 강습회의 인연으로 나와는 그 뒤 편지를 주고받았고, 내 첫딸의 이름을 한글로 지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혼란한 시국은 나를 강습회에 다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내 고민은 좌우 대립의 격랑 속에서 비온 뒤의 죽순처럼 더욱 커져갔다. 그토록 원하던 해방을 맞이했건만 같은 민족끼리 밤낮으로 싸우는 것이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어찌하면 좋을 것인가.’
우익의 세가 커지면서 서울은 거의 이승만 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갔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승만은 결코 민주주의를 할 인물이 못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승만 집단은 민의를 무시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강행했고 무자비한 경찰봉으로 체제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념대립 염증 시골서 교사활동, 여순사건으로 초긴장
나는 이승만 정권의 염증에 더 이상 서울에 있기를 거부하고 책이나 읽으며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947년 여름 풍국제분을 그만두고 교직을 알아보기 위해 전남 함평 학다리국민학교에 갔다.
“안녕하십니까? 이 학교에서 교사로서 근무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교장선생님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럼, 11월 중순부터 수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학교, 특히 시골학교에선 교사가 태부족이었다. 교장이 언제든지 채용해서 도청 학무과에 보고만 하면 되었다. 나는 학교장과 11월 중순부터 근무하기로 약속받고 다시 상경했다. 그런데 내가 잠시 함평에 간 사이 어머니가 평남 숙천에서 서울 내 집에 오셨던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못 만나고 대전 형님댁으로 내려가려고 서울역에 있었다.
“오마니! 오마니!”
수많은 인파속에서 어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 반가웠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대전까지 내려갔다. 어머니는 막내인 나를 무척 측은하게 여겼다.
“기모야, 나는 너와 함께 지내고 싶구만.”
“오마니, 지금은 안 되어요. 함평에 있는 학다리국민학교에 교직신청을 해서 조만간에 다시 그곳으로 가야디요.”
나도 어머니와 함께 있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여건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대전에서 얼마간 머물다가 북으로 돌아갔다. 그것이 어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을 상상하지 못했다.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몇 차례의 편지를 주고 받았지만 그것도 더 이상 금지되었다. 나는 그때 어머니의 청을 거절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되었다.
나는 학다리국민학교에 근무하며 그곳에서 한 여교사와 사귀게 되었다. 나는 이광수의 ‘흙’, 박계주의 ‘순애보’ 등 낭만파 소설들을 읽으며 순수한 사랑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순수한 사랑은 유리병처럼 비명을 지르며 깨졌다. 양가에서 서로 극렬히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여자 쪽은 북한출신이라며 ‘혹시 과거 있는 사람이 아니냐’ 등의 이유로 반대했고, 우리 쪽(형)은 가정형편 때문에 거부했다. 이 일로 우리는 서로 한 학교에서 근무하기가 힘들었다.
남자인 내가 다른 학교로 전직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영화 ‘파시’의 무대가 되었던 흑산도에 대한 동경이 생겼다. 아무도 모르는 흑산도에 가서 책이나 읽으며 조용히 살고 싶었다. 그래서 친척의 친구분인 도청 학무과장에 찾아갔다.
“저를 흑산도로 발령을 내 주십시오.”
“아니, 오 선생. 흑산도가 어떤 곳인지 아시오. 그곳은 자기를 가두는 감옥이오. 외롭고 쓸쓸해서 한번 들어가면 고독도 참기 어렵고 풍토병에 걸려 폐인이 되기 쉽소.”
나는 강하게 우겼지만 그의 만류에 생각을 휴지처럼 접어야 했다. 그는 정 가고 싶으면 백양사가 있는 전남 장성으로 발령을 내주겠다고 했다.
나는 1948년 10월 장성군 백양사 인근의 약수국민학교로 발령을 받고 11월 그리로 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발령 직후에 여순사건이 일어나 좌익의 일부가 학교 뒷산인 노령 인근으로 피신해 왔다. 그들은 낮에는 노령 계곡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밤에는 민가로 내려와 ‘경찰지서’를 공격했다. 우리 학교 인근에도 지서가 있었는데 경찰과 우익청년들이 총을 지급받아 삼엄하게 경비를 섰다. 다른 곳에선 엄청난 총격전으로 희생이 컸는데 내가 근무하던 학교마을에는 다행히 불상사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준 전시상태여서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치 전쟁의 한 가운에 있는 것처럼 모골이 송연했고 스트레스가 바늘로 찌르듯이 온몸을 압박했다. 방학이 되어 호남선 열차를 타고 1시간쯤 달려가 정읍역에 당도해야 막혔던 숨통이 풀리는 듯했다.
여순사건으로 조용히 공부하며 책을 읽고 싶었던 내 소망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래서 그 이듬해인 1949년 봄 다시 학무과장을 찾아가 광주로 발령을 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1949년 6월 광주 학강국민학교로 발령을 내주었다.
한국전쟁 중 광주의 북한군 3개월 점령 “평온한 도시”
일년 후인 1950년 6월 25일 일요일이었는데도 교사들은 대부분 학교에 출근했다. 특별히 일이 있어서 출근한 것이 아니라 타지 출신의 오갈 데 없는 교사들이 서로 어울려 지내기 위해 학교에 모인 것이다. 교사 중 한명이 우연히 라디오를 켰다.
“오늘 새벽 북괴군의 남침으로 우리 국군과 일전일퇴를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전쟁이 전면전인지 아니면 국지전인지 잘 분간할 수 없었다. 며칠 지난 뒤에야 전면 남침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학교는 휴교했고 학생들은 대부분 피신하기 위해 부모가 있는 곳으로 갔다. 고향에 갈 수 없는 나와 몇몇 교사들은 함께 학교에 머물렀다.
전쟁이 일어난 지 몇 주가 흘렀다. 그동안 총이나 대포소리 한번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미군기가 날아와 남광주에 있는 다리들을 폭파했다. 그리고나서는 또 한동안 잠잠했다. 1950년 7월 20일 대전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전쟁발발 1개월이 채 못 되어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들이 광주에 진입해 들어왔다.
광주의 한국전쟁은 1950년 7월 하순이 되어서야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광주의 한국전쟁은 이상한 전쟁이었다. 왜냐하면 총성이 거의 울리지 않아 매우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북한군이 광주에 진입할 때 한국군은 저항할 병력이 거의 없었다. 북한군은 너무나 쉽게 무혈 입성했다.
북한군이 지배한 광주의 3개월도 비교적 평온했다. 좌익의 극심한 난동도 없었다. 아마도 1년 전에 발생한 여순사건을 직간접으로 목격하면서 좌나 우에 서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움직인 탓으로 풀이된다.
내가 근무한 학교는 북한군이 점령한 후 ‘대한민국 국민학교’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인민학교’로 바뀌었다. 좌익계의 남한 출신이 교장으로 새로 부임했고 북한에서 내려온 20대의 소년단 책임자가 교육을 맡았다. 퇴각하기 1주일쯤 전에 나이를 다소 먹은 북한 출신 교무주임이 배속됐다.
전쟁 전 이승만 정권은 반공교육을 철저히 강조했다. 그래서 교실과 복도 등은 온통 붉은 색으로 ‘북괴군은 뿔난 도깨비’라는 내용의 그림들이 붙어있었다.
“선생동무. 이거, 누가 한 거이오.”
“우익교사들이 하고 모두 부산으로 도망갔소.”
북한군의 질문에 누군가 답변했다. 우리는 다소 우려했지만 다행히 별일이 없었다. 피란을 가지 못한 10여명의 교사들은 모두 일단 면직된 후 사상검열을 받은 후 재임용했다. 나는 북한군의 속성을 책을 통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동료교사들을 불러놓고 은밀히 요령을 알려줬다.
“여러분, ‘자아비판서’를 쓸 때 절대로 자기가 과거에 좌익에 참여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변절자를 가장 증오합니다. 그냥 머리가 아둔하여 공산당 활동을 하지 못해서 부끄럽다고 쓰면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내 요령대로 자아비판서를 섰다. 그러나 두 사람은 좌익 활동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내 말을 믿지 않고 거짓으로 좌익에 참여했었다고 썼다가 재임용되지 못했다. 3000여명의 학생들은 대부분 피란 갔고 몇 십 명만 등교했다.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주로 ‘김일성 노래’를 가르쳤고, 북한에서 만든 신문을 읽고 토론하는 ‘독보회’를 진행하자고 했다. 교사들은 시내 커다란 장소에 집합시켜 놓고 ‘공산당사’ 등을 가르치며 북한과 김일성에 대한 찬양학습을 시켰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을 했다.”
1950년 9월 하순에 간간히 미군기가 북한군이 점령한 광주상공을 지나가며 삐라를 뿌렸다. 삐라에는 인천상륙 작전이 성공했다며 북한군은 투항하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학교에선 학생들에게 삐라를 줍는 즉시 갖다 신고하라고 했다. 나는 멀지 않아 북한이 퇴각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북한군은 광주 점령 3개월만인 1950년 10월 비교적 조용하게 퇴각했다. 다만 진주할 당시 잡아 구속했던 최영욱 전 전남지사와 지방토호 현준호 등 일부는 퇴각하면서 총살했다.
그 후로 광주에는 북한군이 다시 들어오지 않았고 대신에 상무대가 창설되어 군인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반면에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로 많은 적군과 아군들이 희생되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3년 만에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가고 멈췄다. 휴전 후 학교는 개교되었지만 상당수의 아이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광주에서 살았던 아이들은 희생이 거의 없었지만 산골이나 시골에 살았던 아이들은 전쟁이 끝난 한참 후에도 좌우의 죽고 죽이는 비극의 덫에 걸려 가족과 함께 희생됐다. 그 수가 무려 한반에 30% 정도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이 끝난 후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정이 더욱 심해졌다. 결국 이승만 정권은 1960년 4·19 혁명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민중을 배반한 권력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역사는 보여주었다.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장면 정권이 수립되면서 서울에서 유명한 학자들이 잇달아 광주로 내려와 민주주의를 주제로 강습회가 열렸다.
국민학교 교사였던 나는 백성을 살리는 민주주의를 강하게 열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부도 할 겸해서 강습회를 적극적으로 찾아다녔다. 교수들은 정치·경제 등 한국의 나아갈 방향을 역설했다. 나는 우리나라의 미래에 대하여 비교적 낙관적인 생각을 했었다.
군부정권 등장 ‘작은 항거’하자 불온한 인물 낙인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 기대는 시든 장미꽃처럼 박정희 군사정권의 등장으로 짓밟히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군인들이 얼마 후 학교에 난입해 들어왔다.
“오 선생, 혁명공약을 암송해 보시오.”
“아직 못 외웠습니다.”
“뭐야, 저기 나가서 외우고 있어.”
군인들이 학교에 들어와 교사들을 대상으로 혁명공약을 외우라고 악을 고래고래 질렀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한다’ 등 6개항이었지만 나는 암송을 거부했다. 참된 민주주의를 기대했건만 일제와 좌우대립, 전쟁, 독재시절보다 더 잔혹한 운명의 그림자가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작은 항거를 계속했다.
“오 선생. 혁명공약을 다시 외워보시오.”
“아직 못 외웠습니다.”
“이 새끼…, 그것도 못 외워.”
흙탕물보다 더 더러운 군인들의 폭언에 심한 모욕감이 생겼다. 지금까지 어느 체제, 누구로부터도 교사로서 모욕을 받은 일이 없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마음의 한 구석에서는 군사정권에 대한 증오심이 자라고 있었다. 결국 나는 1961년 6월 사직하고 말았다.
그러나 군사독재와의 나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서울에 올라온 나는 덕수상고와 선린상고 등에서 근무했지만 1년여가 넘어도 정식 발령이 나지 않았다. 군사정권은 나에게 주홍글씨로 ‘불온한 교사’라고 낙인찍고 고등학교 발령을 방해했다.
그 후 나는 한동안 실업자 생활을 해야 했다. 다행히 수년 후 국민학교에 복귀하여 정식발령이 났지만 한 학교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여러 학교를 전전해야 했다.
나는 군사정권에서 공직에 있는 것이 매우 부끄러웠다. 더구나 승진하거나 표창을 받는 일은 송충이를 만지는 것보다 더욱 역겨웠다. 오직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했다. 교장이나 교감으로 승진하려면 많은 상장을 받아 인사고과 점수를 올려야 했다. 서로가 받으려고 아우성이었지만 나는 일체 받지 않았다.
박 정권의 혹독한 18년간의 군사독재가 1979년 ‘김재규의 총’으로 조종을 울렸다. 너무 기뻤다. 이제는 진정한 민주주의 꽃이 피는 서울의 봄이 올 것으로 믿어졌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면서 군사독재는 명줄을 질기게 이어갔다.
나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강렬한 저항을 목격하면서 교사 신분이면서도 ‘시민항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김대중 선생이 주도한 집회는 보라매든 어디든 목숨을 걸고 찾아다녔다. 1989년 전교조 교사들에 대한 해직과 탄압이 거세어 질 때 ‘늙은 교사’였지만 후원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통일은 평화와 행복의 공동체를 일구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외세에 의하여 분단되었지만 우리 힘으로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전교조 교사들이 문익환 목사를 초청하여 통일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나는 문 목사의 통일강연회를 거의 빠짐없이 찾아다녔다. 후에 문익환 목사가 관계된 ‘통일맞이’에도 회원으로 가입했다.
1991년 65세의 나이에 정년퇴임하여 43년간의 교직을 마감했다. 그러나 나의 통일운동 활동은 그 때부터 본격화됐다. 통일관련 강의를 어디든 찾아다녔고, 특히 경실련 통일협회가 개최한 민족화해아카데미 강좌는 매우 유익했다. 그 강좌 참여를 통해서 내 또래의 60~70대의 ‘통일열정가’ 들을 다수 만날 수 있었다.
그후 2001년 경실련 통일협회에서 활동하던 전문가들과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평화와 통일을 위한 시민연대(평화연대)’를 결성했다. 나는 초대 화해협력위원장이 되어 현재까지 이 모임을 이끌고 있다. 우리 모임엔 나 이외에 신의주 출신 홍순명 선생(94세)과 안명록 선생(76세), 황해도 출신 최종대 선생(65세) 등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여럿 있다. 15명의 우리 ‘노인 통일선봉대’ 대원들은 나름대로 통일과 평화를 위하여 목청을 높이고 있다.
우리들은 최근 광화문과 시청광장 등에 모여 파병반대 촛불시위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통일과 관련 토론회나 모임에는 우리들이 대거 출정한다. 대부분의 행사장이 사람이 없어 썰렁하지만 우리가 도착하면 그래도 꽉 찬 듯한 느낌을 준다.
←일산 노인정에 내가 세운 한글학습반에 많은 초등학생들이 참석하여 인기를 끌었다. 1995년부터 10년째 해오고 있지만 한때 40여명의 어린이들이 매년 줄어들고 있어 안타깝다.
한국전쟁 중 어머니 작고소식 듣고 “불효자” 통곡
몇 해 전 고향사람을 만났다. 나는 그에게서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오 선생의 오마니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1월 맏아들과 함께 월남하기 위해 황해도 해주까지 내려왔디요. 그런데 한국군 사령관이 ‘피란 민중에 간첩이 끼어 있다’며 남하를 전면 중단시켰습네다. 오마니는 할 수 없이 남하를 단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셨디요. 그런데 그 무렵 서해안 일대에는 누군가 세균을 살포해 흑사병(?)같은 전염병이 창궐했디요. 오 선생의 장형도 그만 흑사병에 걸려 그 해 겨울 숨졌고, 오마니도 충격을 받아 돌아가셨습네다.”
나는 고향 사람의 얘기를 듣고 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내가 어머니의 뜻대로 모셨더라면 어머니를 그렇게 보내지 않았을 텐데…. 어머니의 음성이 어디선가 들리는 것만 같다.
“오마니, 오마니.”
어머니를 다시 한번 불러본다. 그리고 지금 당장이라도 고향에 달려가고 싶다. 어머니의 무덤이라도 찾아가 통곡을 하며 사죄하고 싶다.
내년이면 나는 84살이 된다. 북한의 문이 많이 열렸지만 분단 이후 아직 나는 내 고향 평남 숙천에 가보지 못했다. 지난 해 10월 평양 정주영체육관 준공식 때 참석하려고 준비를 하며 어린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그런데 출발 며칠을 앞두고 발에 병이 생겨 급히 입원해야 했다. 도저히 한 발짝도 걸을 수 없었다. 1개월가량 입원해야 했다. 하늘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토록 고향에 가보고 싶었는데….’
나는 눈물을 흘렸다. 다시 기회가 오길 기다리지만 그렇게 60여년을 기다리다가 얻은 것을 갑작스런 발병으로 못 가게 되어 너무 안타까웠다.
나는 요즘 ‘노인 통일선봉대’ 모임을 이끄는 것 이외에 내가 사는 마을의 노인정에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바른 우리 말’을 수년째 지도하고 있다. 한때 30~40명이 되어 인기가 있었지만 애들이 있는 집이 많이 줄었고, 그마저도 영수학원에 보내는 바람에 참여자가 많이 줄었다. 그래도 나는 실망하지 않고 한글을 지도하며 통일의 꿈을 그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아이들아, 정말 미안하구나. 우리 세대들이 잘못하여 조국이 분단되었다. 통일을 이루려고 많은 노력을 다 하고 있지만 내 생전에 통일이 실현될지 모르겠구나. 부디 너희들이 이 할아비들이 이루지 못한 통일을 꼭 이루어 내다오.”
나는 오늘도 통일에 대한 나의 꿈이 이루어지길 간구하며, 신발 끈을 질근 동여매고 서울로 향하는 전철에 몸을 싣는다. ‘나의 꿈, 통일이여 어서 오라.’◆

5.13~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