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순 목사 사순절 특강-5.1
(2001년 4월 4일 19:30~)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나온 다음에 금방 약속의 땅으로
간 것이 아니라 우리 다 아는 대로 40년씩이나 주변의 부족들과 싸움을 했어요.
그 중에 아말렉 군과 싸울 적에 어떻게 싸웠느냐 하면 모세가 양팔을 들고 있으면 이스라엘 측이 이기고, 벌받는 것처럼 이렇게 있다가 팔이 아파 팔을 내리면 아말렉 군대가 이기고 이렇게 해서 부관 두사람이 양쪽에 서서 붙잡고 있었다 하는 것이 출애급기에 있어요.
우리 생각에 기독교인은 말에 젖어있어서 모든 걸 말로 하려고 하는데 왜 모세가 기독교인 같았다면 "이스라엘 이겨라.." 이렇게 하면 되지
뭣하러 팔을 들고 있었을까? 왜 TV접시 안테나가 있어야 되느냐..그냥 뭐..하지..
기독교는 모든 걸 말로 할려고 하는데..

사실은 엘리사가 시체를 살릴 적에도 모퉁이에 앉아서 야훼의 이름으로 일어나라..이럼 되지 그 차갑고 딱딱한 시체 위에 엎드려서 입을 맞추고 손을 대었을까..

세번째로는 예수께서 사람을 고칠 때에 주의 이름으로 어떻게 하라 하면 되지
왜 믿는 자들이 손을 갖다 대라고 했을까? 이렇게 우리 몸을 써서 우주의 에너지를 쓰는...요즘에 氣라고 한참 하지만, 그걸 뭐라고 부르든지 간에.. 태초부터 있었어요.

어떤 사람은 만유인력이 뉴턴 이전에는 없는 것으로 착각해요.
만유인력이란 걸 발견했지.. 氣라고 하는 용어를 새로 했지..
태고적부터 우주 에너지가 있어서...
모세는 팔이 아픈데도 팔십 노인네가 계속 팔을 들었던 것이고
엘리사는 시체 위에 차가운 데 자기 몸을 갖다 대었어요.
그래서 우리 처음 한대로 몸조율을 잠깐 하고 시작할까 해요.
오른 다리를 왼쪽 발에다가 놓으시고 손은 가운데 손가락만 양쪽을
붙이시고 그리고 편안하게 무릎에 놓으시던지 가슴 높이로 들고 있던지. 그리고
눈을 감아도 좋고 떠도 좋지만, 감는 편이 좀 낫지만..머리에서 정수리까지 힘을
다 빼고.. 오늘은 정식으로 한 번 예수님 나이 33번 코로 들이 쉬고 입으로 내쉬던지 코로 내쉬던지 그런 걸 한 번 이렇게 속으로 33번만 셉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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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짧게 쉬어도 좋고 깊게 해도 좋고 몸뚱아리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시기만
하면 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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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처럼 초야에 묻혀 40년씩 썩지는 못하더라도, 예수님처럼 40일 동안 삼악산이나 금강산이나 어디 혼자 있지도 못하고, 단 나흘도, 단 네시간도..
단 40분도 못하지만 예배라고 하는 공간이 바로 그들이 놓여있던 그 자연 속에서 혼자 있는 것을 담게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에 말이 장점이지만 시시때때로 하느님의 고요한 시그널을 텃치할려면 우리 속이 고요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PRACTICE가 절대로 필요한 거예요.
계속 쉬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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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도 얘기했지만 몸의 중요한 순서로 보면 딱딱한 뼈나 그 다음에는 살과 같은 거, 단백질..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코로 드나드는, 인류가 식물과 동물과 함께 공유하는 내거라고 할 수 없는, 지구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권, 생명장인데...함께 그 숨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우리가 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면밀히 COUNTING하는 PRACTICE가 생긴 것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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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들이 큰 물, 산, 바위, 대륙이 있고 다 쪼개면 화학원소가 나오고
더 잘게 쪼개면 원자, 더 하면 핵이니 양성자니 전자니 또 더 나가면 쿼크니...점점점점 쪼개서 아주 미세한 데 가는데 그 너머에는 뭐가 있느냐... 진공이고 우리 숨으로 ..코로 드나드는 숨보다 더 얇은 것을 성령이라고 하는 것예요. 아주 얇아서 우주에 침투 못할 곳이 없는 것을 HOLY SPIRIT라고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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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예민한 사람은 아시겠지만 벌써 손 잡은 데가 땀나는 사람도 있고 뜨듯하고 숨이 저절로 깊어지고.. 코로 들어가는 게 찬바람이 아니라 훈훈해지고 머리부터 노곤하고 졸리운 듯, 그걸 평온이라고하는 건데 [샬롬].

가장 평온이 침투한 분이 그리스도인데 그래서 폭풍치는 호수의 배에서 주무셨다. 그 지경에서 잘 수가 없죠. 그런데 어째 주무셨을까?
지금 여러분이 쬐끔 맛보는 이런 평안이 엄습했기 때문에 매 찰라찰라 샬롬으로 그득해서 폭풍치는데서 코를 골고 주무셨다. 단잠이란 거는 여호와께서 주신 거다..이게 구약 잠언에 있고...달게 자는 것이 종교의 시작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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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몸이 훈훈하고 노곤하면 다른 놈이 툭 쳐도 씩 웃을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수용할 CAPACITY 용량이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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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몸이 차갑고 쑤시고 삐꺽이면 설교를 천 번 들어서도 혀끝으로 남을 꼬집고 배틀고 찌르고 이렇게 하게 되어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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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마운 숨.. 어머니 배에서 떨어질 때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내쉴 때까지를 일생이라고 하는데, 한번도 거르지 않고 아무리 바빠도 숨이 그치는 적이 없어요. 일생 그 고마움과 신비스러움과..어쩌면 이렇게 손에 잡히지도 않는 것이 가장 귀중한가...이런 화두도 할 수 있고..제가 시험해본 결과 예수님 나이수 대로 33번을 한 셋트로 해야 효험이 선명하기 때문에 33번이라고 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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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봄에 나른하고 뭐 춘곤증이니 뭐니 할 때 무조건 무릎꿇고 앉던지 지금처럼 의자에 앉아서 서른세번, 시간이 있으면 또 한번 셋트로 서른세번..이렇게 하면 단 십분이나 십오분이 안돼서 홀연히 몸이 밧데리 충전된 것처럼 활기가 넘치는 것을 체험할 수가 있어요. 이제 고만 합시다. 졸립지만 참으시고. 홍목사님이 제게 기회를 주셔서 이렇게 여러분의 특별한 사순절 프로그램에 오게 되었는데 오늘이 마지막이 되겠군요.

사순절은 예수께서 자신의 최후, his own last moment, 누구든지 자기의 최후가
있는데 그 마지막 최후에 대해서 그분 자신이 어떤 뜻을 품고 있을까를 좀 헤쳐
볼려고 해서 이런 프로그램이 있는 것인데...결론을 말씀드리면 우리는 그분의
뜻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심지어 코믹한 장면이 뭐냐하면 그 선생이 잡혀가니까 다 풍지박산이 돼서 제자들은 제자들 대로, 또 여늬 때 쫓아다니던 여인들도 아무튼 다 흩어진 걸 우리가 복음서에서 읽어요. 그러다가 그중에 제직회장격인 베드로가 어떤 여인과 맞부딪혔을 적에 "당신도 갈릴리 사람과
한 패지.. 당신도 지금 사형선고를 받은 예수하고 한 패지..." 이렇게 할 때에 베드로가 얼결에 "I don`t know him. 난 그를 모르오" 이렇게 말했어요. 일차적인 의미는 잡아뗄려고 난 무관한 사람이다 I don`t know 했겠지만 하필 많은 표현 중에서 베드로 입에서 불쑥 그 말이 나왔을까? 이렇게 2차적으로 생각하면 3년을 쫓아 다녔는데 정말 나도 모르겠다. 이렇게 은연중 반영된 것예요.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있나요? 끝내 알 수 없어요. 왜? 어느날 우리중의 한 사람이 아, 하느님이 이런 거로구나 파악했다면 그 사람이 하느님의 하느님이지...그래서 하느님은 영원한 X죠. 끝내 알려질 수 없는 것예요. 끝내 알려질 수 없는 것이 우주를 떠받들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모든 게 진행이 되는 거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3년간 쫓아다녔지만 도무지 종을 잡을 수가 없다는 말예요.
이게 예언자인지, 제사장인지, 랍비인지, 어느 카테고리에 어느 범주에 집어넣어야 될지를 모르겠다... 그러니 직접 함께 다니던 사람도 모르겠다고 했으니 우리야 더 말할 것도 없겠죠.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접근할까?

첫째로는 복음서에 있는 토막토막 단서에다가 지구에 많이 흩어져 있는 비슷한 경우의 도인들의 비슷한 사례를 조명으로 써가지고 우리 나름대로 조금 비춰보는 것입니다.

인도의, 다 아시는, 바가바드기타라는 수천년 묵은 작품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얘기가 써있어요. 어떤 나라에 쿠데타가 일어나서 왕자들 넷이서 숲속으로 도망을 가게 되었어요. 여러날 허기지고 목이 말라가지고 막내더러 물을 찾아보라고 그랬어요.
이놈이 돌아다니다가 아주 수정처럼 맑은 crystal clear한 호수를 만났어요.
그래서 허리를 굽혀 물을 떠먹으려고 하는데 이런 소리가 들려왔어요..
"얘야, 멈춰라. 내가 하는 물음에 대답을 하면 물을 마셔도 좋다. " 막내는 하두
갈증이 나니까 이따위 소리가 뭐야..하고서는 그냥 먹고 그자리에서 즉사했어요.
이렇게 하여 그 위의 왕자,,또 나가서 안돌아오고 ..마지막에는 큰형이 가서 보니
동생들이 모두 시체로 누워있는 걸 봤어요. 그때 똑같은 소리가 나서 "얘야,
내 질문에 대답을 해라. 그리고 나면 너의 슬픔과 갈증을 가시게 해주겠다" 그래서 큰 형이 그쪽을 바라보니까 학의 모양을 하고 있는 신적인 존재가 있어서 욥이 야훼께 질문에 대답할 때처럼 사내대장부처럼 허리를 펴고 학이 질문하는데 일일이 대답을 했어요. 다음과 같이;

하늘에 이르는 길이 무엇이냐? : 진리입니다.
인간이 슬픔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을 정복해야 하지? : 마음입니다.
이세상의 모든 경이로움 가운데서 가장 경이로운 건 뭐냐? : 자기 주변에서
다른 모든 생물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지만그 자신만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진정한 종교에는 어떻게 도달하느냐? : 주장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경전이나 교리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와 같은 것은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종교에 이르는 길은 거룩한 이들이 밟은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 학은 만족해가지고 자기의 본모습을 보이고 물을 마시도록 하고
동생들을 부활시켰다고 하는 얘기가 바가바드기타에 있어요.

그 중에 하나, 이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게 뭐냐?
우리가 장례식에도 많이 가고 다 하지만..우리 식탁에 있는 것도 다 죽은 거고..
돼지, 소, 닭..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계속 다른 생명이 죽어서..그래야 내 목구멍으로 들어오는데 이런 것을 보고보고 하지만서도 나만은 죽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경이롭다..이 기막힌 대답을..정답을 해서 통과했던 것예요.

기독교는 여러 종교중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액센트가 되어서 자기들의 죽음을
못보는 종교로 타락했습니다. 다.. 대속의 죽음, 대속의 죽음..해서 자기의 죽음은 제쳐 놓았어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는 각자의 죽음을 나처럼 하라고 해서 하신 것인데 도리어 그것을 substitute로 하는 경향이 아닌가 합니다. 바울 선생은 나는 매일 죽노라..이렇게 말했어요. 그것은 월요일이면 월요일, 수요일이면 수요일, 하루만이라도 해보세요. 매일 죽는 거. 며느리가 시어머니 앞에..부부사이에..여기까지 올라오지만 처음에는 간이나 심장이 상하면서 참지만 하루 이틀 참아보면 뽀얗게 죽는다는 맛이 어떤지를 알게 될 것예요.

대개 기독교에서 우려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니까 그 무슨 고생하라는 것인 줄 알고..십자가란 죽음이란 걸 다른 말로 한 것이죠.
대개는 자기 짓거리의 결과로..힌두교나 불교로 보면 자기 업보 때문에 고생하면서도 곧잘 그걸 십자가라고해요. 예수에 관한 모독인데.. 십자가라는 것은 ego를 망치질해서 ..끌로 까서.. 가루로 만들라는 얘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라비아의 수피라고 하는 신비주의 집단은 그들 사이에서 예수를 그들의 최고로 치는데 그들 중에 전해 내려오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이런 게 있어요. "죽어라. 백번 거듭거듭 죽어라. 그렇지 않으면 이 삶을 다 건너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한 번은 예수께서 이런 화두를 던졌어요. 죽음이 있는데, 시체가 있는데 독수리가 내려온다. 문맥도 없이 그 한마디만 던지신 적이 있어요. 그건 뭐냐.. 구약에서부터 독수리라는 것은 여호와 하느님을
상징했어요. "내가 독수리의 날개로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로부터 날랐다" 던지
"주를 앙모하는 자는 독수리처럼 날개치고 간다" 고 해서 신의 prociency 신이 덮치는 것을 했는데... 어디에 덮치냐? 뽀얗게 죽은놈한테, ego가 사라진 놈한테만 신이 온다고 하는 것을 예수께서 이런 화두로 말씀하신 거예요.

어떤 노인이 제자를 데리고 강가에 앉아 있는데 마침 누가 헤엄을 못치는 사람이 강 한가운데서 허부적허부적..올라갔다..내려갔다..그러고 이들도 도울 길이 없어서 손을 놓고 보기만 했는데 조금 있더니 죽어서 위에 떠서 흘러가요. 그때 선생이 제자에게 하는 얘기가 저걸봐라 살아서는 자꾸 빠지는데 죽으면 편안히 떠서 간다..
이렇게 출생신고와 사망신고 사이의 강을 저렇게 시체처럼 죽어서 떠 가라..
이렇게 말했어요. 그런가 하면 같은 뜻으로 장자가 `빈 배`비유를 했어요.
배 둘이 가서 부딪치면 서로 욕지거리한다. 마..눈은 데코레이션으로 갖고 있냐?
임마 잘 보고 저어라.. 목에 힘주는 놈이 이기는데.. 그런데 탁 부딪쳐보니까
상대편 배에 아무도 없다면 암만 나쁜 뱃사공도 욕은 안한다. 이처럼 너희는 빈 배로 삶을 건너가라. 이렇게 장자가 표현했고 예수께서는 바울이 말한 대로 죽어서 가라..죽음이란 것을 기독교는 예수 한 사람 만으로 적용하고 찬송가에서는 많이 미화하였지만 구체적으로 내가 어느날, 여러분이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추상적으로 생각하실 거 없어요. 달력에서 틀림없이 365일중에 어느날, 어느 요일을 택해서 갈 거예요. 우리가. 그것을 하루나 한 시간만이라도 묵상하세요. 다른 종교에 비해서 우리 기독교가 너무 부끄러워요. 우리가 예수에게 다 전가하고 우리 자신의 죽음을 묵상하지 않는다구요.

이런 거에 대해서 신선이 된 인디안들은 뭐라고 가르치느냐하면 "우리가 왼손을 뻗으면 손 끝 닿는데 자기의 죽음이 일생을 그림자로 쫓아오니까 무슨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왼쪽을 보고 그 죽음에게 물어봐라. 그러면 죽음이 힐쭉 웃으면서 내가 너를 아직 안 건드렸는데 왜 절망하느냐? 이렇게 한다는 것예요. 그리고 이것이 옳은가 저것이 옳은가 할 적에 죽음이 항상 새파란 불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런 뇌물받고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죽음을 MELANCHOLY우울증에 빠지라고 쓰라는 게 아니라 인디안들은 ADVISOR로써 쓰라고 한 것예요. 삶의 충고자로서 쓰라는 것인데.. 바울도 그렇게 살았고 예수도 그렇게 사신 분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렇게 안 산 사람들은 어떨까? 우리가 거진 다 해당될 텐데, 보스톤인가 어디에 나이 칠십 먹은 외과의사가 그 동료들이 생신축하를 해주었어요. 세계적으로 저명한 외과수술을 잘하는 의사였기 때문에 외국서도 다 비행기 타고 축하객들이 왔어요. 그래서 파티가 한참 진행되는데 사회자가 보니까 주빈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찾다보니까 복도에 앉아서 흐느끼면서 울고 있어요. "아니, 선생님 온 세계에서 지금 선생님 축하해서..부러워해서..이렇게 하는데..왜 우십니까?" 그랬더니 계속 흐느끼면서 그 칠십 먹은 사람이 하는 소리가 "글쎄 내가 열다섯인가 열여섯 살 때 우리동네에 서커스단이 들어왔어..그때 이동네 저동네 자유롭게 다니면서 그 노래하는 삶이 그렇게
좋아서 나는 그 서커스 단원이 되고 싶은데 아버지, 어머니, 뭐..이렇게 해서 싫은데도 내가 외과의사로 성공했네." 이렇게 말했어요. I succeeded as a solution delucantly. 싫은데도 평생을 이렇게 해서 싫은 박수소리를 내 듣게 됐어. 나는 지금도 그 열다섯살의 꿈처럼 내 식대로 이 마을 저 마을 집시처럼 유목민처럼 돌아다니면서 자유롭게 노래하며 춤추는게 내 소원이었는데..나는 싫은데도 의사로 성공했네.. 이렇게 하면서 울었다는 실화가 있어요.

이것에 대해서 이런 사람은 우리도 다 그렇게 되어 보이지만 죽음이란 걸 쓰지 않은 케이스이고, 이에 비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건 뭐냐..willingly and gladily..기꺼이 아주 흔쾌히 나는 내 식대로 실패했다 하는 얘기인 것예요. 우리가 내 식대로 실패하던지 내식대로 성공해야지 싫은데도 주변에서 부자가 되라고.. 주변에서 유명해지라고.. 해서 열두살 열다섯 살때 품었던 꿈을..생애 한 번인데..이거하고 팟죽 한 그릇에 장자 지위를 팔아 먹은 에서와 같이 인생들이 거진 다가 타협을 하는데..
이건 그래도 70이나 돼서 알아차린 사람이 드물죠.. 이런 것이 다 우리가 주변에
경쟁관계에 있어서 너도나도 모르게 유행이 가다가 이 삶이 한 번이고 내식대로
살다 실패를 해도 퍼지게 실패를 하면 여한이 없을텐데..

예수께서는 인간의 척도로 볼 때 확실히 실패하신 분이고, 그는 여한없이
다 이루었다고 하실 때에 이 외과의사에 정 대칭되는 존재로 I willingly, gladly
기꺼이 여기서 물거품이 된다 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눈으로도 적극적으로 멋지게 지구를 퇴장한 사람들이 있는가? 몇번이나 제가 인용해드린 소련의 도인 그루지에프, 그 괴짜, 조그만 곳에다가 많은 사람 집어 넣었다는 사람..이 사람이 죽을 적에 제자들이 몇 백명인지 천여명 둘려놓고 빨간 모자에 앉아서 한손에는 커피잔을 들고 한 손에는 시가를 피우면서 "또 다른 질문이 있는가?" 이렇게 하면서 앉은채로 나가버렸어요. 앉은 채로 나가는 것을 좌탄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꼭 힘이 없거나 병들어야 죽는다고 생각하는데 의외로 생의 축제를 상징하게 빨간 모자와..시가를 피우면서 또 다른 질문이 없는가 이렇게 하면서 앉은 대로 가버리는 참 멋진 경우가 있었어요.

그런가 하면 인디안 도인들 사이에서는 거의 관용구가 되어 있는 것이 있고 실제로 그렇게 간 사람이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기지개를 펴고..얼마나 좋겠습니까..나무가 있고 해가 있고 다 있는데.. 기지개를 펴면서 "아 오늘 참 죽기 좋은 날이군" 이렇게 해서 싹 나가서 죽는 경우가 있어요. It is good day to die. 우리가 올 적에는 아버지 어머니 의사로 왔지만 갈 때야 내 의사로 왜 못가겠는가? 그렇게 해서 그냥 몸을 빠져나가는 case가 인디안들 사이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가 하면 모세의 마지막은 어떠했는가? 저번에도 얘기한 것처럼 40년 궁중교육 받고 40년을 cowboy처럼 무명인간으로 살고 다시 40년을 하느님께 강제징집 당해 가지고 싫다고 하는 데도 굳이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가지고..그걸 끌고..
우리가 출애급기 민수기 보면 고분고분한 백성이 아니어요. 하.. 이리 가라 하면
저리 가고 저리하라 하면 이리하고 그걸 다 두들겨서..그게 자청한 직업도 아닌데..얼만큼..그래서 나중에는 아주 투박한 뚝배기 같은 그런 면모가 나오지요.
하느님이 말하기를 "내가 이 모익 같은 백성을 도중에서 다 멸도시키고 너하고
2세를 통해서 새로 씨를 뿌리겠다" 할 적에 모세가 하느님께 이렇게 타일렀어요.
"하느님 이게 말이 됩니까? 사방에서 하느님께 욕이 돌아갑니다. 자기 백성을
자기가 끌어다가 죽이니 이게 뭡니까?" 그래서 구약을 보면 하느님도 말이 없이
모세에게 졌어요. 그 다음에도 또 끌고 가라고 할 적에 모세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이게 내가 깐 자식들입니까? 당신이 괜히 이렇게 해가지고...여러분 아시지만
시내산에 가서...요새 그걸 깰 사람이 어디있어요. 눈에 보이지도 않는 형체가
중국영화처럼 손가락이 나와서 팠으면 그것 루불 박물관에 가면 몇천만불 받을텐데
그걸 팽개치고 깨는..이렇게 뚝배기 같은 인품이었어요. 그런데 그 40년을 다해서 한 줄 요르단강만 건너면 promised land 젖과 꿀이 흐른다는 낙토가 있는데..보고만 죽어라 하는 것처럼 가서 보여주고 you die here 여기서 죽어라 해서 비스가 산에 가서 죽었어요. 나이 120인데도 눈이 침침하지 아니하였더라.. 신명기 끝에 이렇게 써있어요. 정력의 젊은이로 제발로 걸어 올라갔어요. 들것에 실려간 것 아니라.

또 아니, 누굴 놀리십니까? 내가 자청했습니까? 아니, 강만 건너면 되는데 여기서 죽으라니 이런게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죠. 기껏 자식 준다고 하고서 잡아 죽이라 하고.. 예수의 죽음을 이 아브라함과 모세의 맥락에서 보셔야 하는 것예요. 우리는 내 생전에 전부 성공하기 원하지만 그건 ego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고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그 마지막에..우리가 보면 그 얼마나 아쉽고 원통하고 이용당한 생각이 들기도 할텐데 성경에 보면 아무 소리도 없이 죽어서 지금 무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하고 신약에 보니까 예수 변모산상에 나타났다고 하는 것예요. 우리 인간은 죽을 때 아쉬움이니..뭐..였더라면...이런 것이 많은데 이런 거인들에게서 보니까 언제든지 그걸 accept해요. 받아들이고 아무 군소리, 후렴이 없이 뽀얗게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석가는 어떻게 죽었는가?
어느날 가까이 있는 제자도 아니고 먼데서 늘 존경만 하던 가난한 신도가 하나
있었어요. 그 사람이 굳이 선생님을 한 번 모시고 싶다고 그래가지고..이름도
없는 놈이.. 그래서 석가가 가서 먹고와서 식중독에 걸렸어요. 그래서 죽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베드로에 해댕하는 제자가 아난이라고 하는 제자가 있는데..
다들 뭐 속으로 ...글쎄 이 개자식 같은 놈.. 아니 글쎄 이게 어떤 스승인데..
우리 스승이...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개죽음 아닙니까? 식중독으로 죽으면.
아, 누가 모함해서 죽었다 하면 영웅적이라고 하지만 식중독으로 죽었어요. 석가가.

석가가 그 눈치를 알고 내가 죽으면 그 신도가 맞아죽을 것 같아서 제자들을
불러다 놓고 이런 얘기를 했어요. "얘들아, 내 말을 잘 들어라.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두사람 있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누군가 했어요. "하나는 우리 어머니라서 내가 이 지구에 왔고 또 하나는 쟤인데 쟤 때문에 가게 됐으니 이 두분을 잘 모셔라" 이렇게 말했어요. 아주 특별한 인연이니까..그래서 죽일려고 했던 것도 못죽이고.. 우리는 영웅적으로 죽기를 바라지만 그건 다 꿈이고.. 죽음의 형태가 천가지 만가지 어디로 오던지 언제든지 그걸 찰라에 빨리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배워야 할 것 예요. 물론 예수께서 마지막 말씀이 "다 이루었다" 하신 것처럼 석가는 마지막 말이 뭘까? 우리는 알고 싶죠. 마지막에 be light unto thyself 너 스스로에게 빛이 되거라 이렇게 하고 꺼졌어요.

그러면 이런 그루지예프나 인디안들의 자세나 모세나 석가나 이런 분들의 자세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일생 걸어온 momentum이 누적되어서 그렇게 되었겠지요. 그러면 어떤 존재의 자질이길래 그렇게 되었겠는가?
첫째로 다 이루었다고 예수가 말했을 때를 우리가 한번 몇초만이라도 그 자리에
대입해 보세요. 수제자란 놈은 닭울기 전에 세번 I don`t know him. 그랬지..
그 전에 회계 맡은 놈은 아예 날 팔어..우리 같으면 이를 갈던가 심장마비를 몇번 걸렸을거야. 달려죽기 전에... 아니, 믿던 놈이 팔어..한놈은 모른다고 그래.. 기타는 어디 갔는지도 모르고..세상에 이런 지경인데도 분노나 책망이나 섭섭한 표현이나 구명운동이나 이런 지저분한 게 한 개도 없고 빌라도가 살려주겠다고 제의하는 데도 아무 묵묵부답으로 해서 고요히 자기 길을 스스로 가서..요한복음에 보니까 내 스스로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이 드라마를 보면 내가 억울하게 죽는 것이지만 이건 다 저들이 뭘 하는지 모르고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기 때문에 내가 다 design해서 스스로 내가 주체적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말씀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저는 첫째로 예수의 life style을 보면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고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라 이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만이 아니라 그 삼년, 아니 삼십년 내내 매일저녁 주무실 적에는
It is finished 이렇게 하고 period를 찍고 마침표를 찍고 가셨다고 제가 확신할 수 있어요. 매일매일을 야무지게 문장을 마치고 발뻗고 코골고 자야만...나머지는
하늘을 trust하고..

우리는 예전에 하던거 그대로 칠판에 죽 늘어 써 있는데 그걸 한 개도 안 지우고 자고 또 자고 또 꿈에는 또 가상현실에서 또 연출을 하고..
그런데 매번 칠판을 깨끗이 지워서 It is finished..이런 것을 일생 달려간 분이
그날도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 It is fimished 이렇게 한 것예요. 이것은 언제나
지금 이 찰라에 머물기 때문에 그런 것예요.

어느나라에 도인이 하나 있었는데 예수처럼 나이가 젊어서 제자들과 비슷했어요.
여러분들 아시지만 예수가 40이나 50이 아니라 서른살예요. 30대니까 베드로나
안드레, 마태도 다 대개 30대 혹은 좀 나이가 많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요새로
말하면 청년부 회원이었어요. 그것도 평신도이고.. 그런 한 패들 열세명이
돌아다닌 거예요.

그런 스승이 있었는데 매번 자기가 선생 대접받는게 싫어서 제자들에게 약조를
받았어요. "다시는 어느 마을에 들어가서는 날 선생님이라고 하지 말아라.
아주 귀찮다." 그래가지고 어느 마을의 여관에 들어 하루 저녁 자고 일어났는데
주인이 와서 밥상을 잘 차려주어서 잘 먹었어요. 그 다음에 찻잔을 록차인지,
흑차인지 한 잔씩 대접을 하였는데 한참을 이렇게 차 공양을 하다가 갑짜기
주인이 스승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절 제자로 받아들여달라고 했어요.
선생이 눈을 크게 뜨고 좌중을 둘러보면서 어떤 놈이 날 선생이라고 얘기해줬느냐?
다들 그런적 없다고 해서 주인에게 물었어요. 당신이 내가 선생이란 걸 어떻게
아셨소? 그 여관주인 하는 얘기가 "제가 이자리에서 30년을 같은 영업을 했는데
매번 식사후에는 손님께 차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선생님처럼 세상에
아무 것도 없고 찻잔과 자기만 있는 양, 지금 여기에 있는 모습을 보고서 제가
어떻게 모릅니까? 우주에 다..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고 지금만 ..지금이
sacrament로 우주에서 이렇게 한 번 밖에 없는 것을 거행하는 자세로 아주..이렇게 무게가 centered되어 있는 걸 봤을때 제가 How can I miss? 내가 어떻게 놓칩니까?

이렇게 지금 여기 있는 것을 매일 매일 이렇게 걸어가신 분이 나중에
It is finished 이렇게 말하셨어요.

이와 비슷한 게 석가의 에피소드에 있어요. 저번에도 잠깐 얘기했지만 웬 젊은이가 침을 탁 뱉고 야지를 했어요. 뭐 오늘날 부..처..님..이랬다면 다 엎드려 절했겠죠. 그런데 예수나 석가는 살아있을 적에 그분들이 보통 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만한 눈을 가진 사람은 몇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젊은이가 야지를 놓고 막 훼방을 놓고 그랬어요. 그런데도 뽀얗게 있지도 않은 것처럼 ..뭐 분노를 누르는 것도 아니고 as if not 마치도 없는 양 하니까 그놈이 세상에 처음 그런 반응을 받아서 정신이 없어가지고 집에서도 한 잠을 못자고 있었어요.....사실은 예수께도 비슷한, 수피에 내려오는 얘기가 있어요. 예수께서 제자들 하고 바닷가를 지나가는데 바닷가에 보면 미역줄기 같은 게 많이 나와 있어요.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어요.
"어떻게 사람들이 돌멩이를 던지고 욕을 하는데 그렇게 뽀얗습니까? " 그랬더니
예수께서 놀란 듯이 "저거 봐라 저런 해초들이 나오는 거는 바닷속에 있기 때문에 나오는 거다. 그런데 나는 분노라는 게 없는데 어떻게 나오느냐?" 이렇게 말했어요. 그러니까 분노를 참고 간을 상하게 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여기 없다.. 요 부피 속에.. anger라는 게 없는데 어떻게 나오느냐? 저건 있으니까 나왔지..여기 애초에 없었어..이렇게 대답하는 게 아랍사람들을 통해 나오는 예수의 일화였어요....이와 같이 이 젊은이가 밤 새 못 자고 아침에 일찍 새벽에 일어나 가봤더니 마침 그 사람이 같은 나무 밑에 앉아 있어요. 거기 가서 절을 하고 "어제 침 뱉은 거 용서해주십시오." 그랬더니 전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이 자리에 침 뱉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자리에 침 받은 사람은 어디 있는가? 밤새 간지스 강이 저 대양으로 갔고..." 요새 말로 하면 풀포기에 있는 분자도 계속 돌고 내 속에 세포도 다 갈리고..
이 자리에 자네도 새사람이고 나도 새사람이고.. 용서를 청할 사람도, 용서를 받을 사람도 없다..바울이 매일 죽는다고 말한 것 처럼..이미 다 새 건데 이 자리에 침뱉은 사람은 어디 있으며 침 받은 사람은 어디 있는가? 이 젊은이는 너무 약코가 죽어가지고 이렇게 질문했어요. "저도 선생님과 같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석가가 "나도 정확히 자네와 같았네..그러니 나와 같이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뭐 내가 용서하노라.. 일흔번의 일곱번까지.. 어떤 사람은 일흔 번의 일곱 번이니까 490번인데 용서 못해주겠어..491번 이라서... 뭐 이렇게 까지도 가지 않죠.

제가 원치 않았지만 향린교회에 와서 주기도문을 몇 번 얘기하게 됐는데,
"내 죄를 사해 준 것처럼.." 그렇게 기도로만 하시지 말고 이번 한 주일을 고거만
하도록 하세요. 그러면 저새끼 그냥..이런 거냐?... 내 죄를 사해준 것 같이 저놈을 사해주었느냐?
그렇게 life와 connection 되어야 입에서 지절거린 게 거기까지.. 하늘 컴퓨터에
불이 들어가는 거지.. 사는 거는 B로 살고 말은 A로 하면 저절로 끊어버리고..

언젠가 제가 뉴헤븐에서 집회를 하는데 철야를 한다고 해서 할머니들이 담요를
가져오셨길래 "할머니들, 이 담요 깔고 하면요..하느님도 담요 깔고 들어요."
자다 지절거리다가.. 자다 지절거리다가..그러면 그쪽에서도 기도 끝나고 뭐했느냐고
툭치면 떠오르는 게 몇 없죠. 너무 그러면 기도가 아니어요. 밤에 우리가
아무리 친절해도 옆에서 시험공부하다가 자는 친구가 잠꼬대하면 거기 대답
해줍니까? 잠꼬대에다가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는데 하느님이 대답을 해주겠느냐
말예요. 자기도 뭔지 모르고 여기서 습관적으로 들어서, 나오는 것인데 하늘에서
대답 안해요. 제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지요. 아예 하지 말아요. 하지 않으면
힘이라도 안 빠지지...

앞의 여관주인의 말처럼 이 찰라에 있어서 살아온 어제도 이미 없는 거고 내일은 아직 안 온 거고 사실 지금만이라고 하는 것을 병원 중환자실에 가본 사람들은 다 체험할 수가 있어요. 이 지금-여기 here now라고 하는 데에 있으면 동시에 공격성과 두려움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예요.

샌프란시스코에 딜롤더라고 하는 심리학교수가 여러해 동안 아마존 밀림에 가서
인디안 도인을 스승으로 모시고..하고서는 책을 낸 것이 있어요.
어느날 정글로 들어가는데 아 원숭이 소리, 앵무새 소리..뭐 깍깍깍..아주 살아있는 생명의 소리들이 나죠. 그런데 제자도 거기에 들어가 봐라.. 해서 한발을 디뎠더니 정글이 딱 정지했어요. 짐승들이 금방 알아채고...나중에 선생님도 해보십시오. 그랬더니 그냥 지나가는 데도 마치도 없는 걸로 치고 새와 짐승들이 계속 떠들고 있어요. 선생이 있는 걸로 안쳐요.. 그 까닭이 뭐냐고 물으니까 "네 속에 있는 violence를, 그 폭력성을 냄새맡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사람이 항의를 했어요.
"그게 아니올시다. 당신은 인디안이어서, 더럽고 그래서 자연 같고, 나는 샴푸도
해서 그랬으니까..." "O.K. 그럼 다시 해봐라" 그래서 어디를 갔더니 인디안
세명이 불을 피우고 고기를 잡아먹고 있는 것을 보고 그 기름기를 얻어다가 몸에다 칠하고 해봤어요. 그러고 해봤더니 다섯 발자국을 가니까 또 다시 들켰어요.
이 교수 이야기가 자기가 살아있는 생물들이 있는데를 아무 것도 건드리지 않고
통과하는 데 5년이 걸렸다고 했어요. 자기 존재의 그 난폭한 것을 빼낸 후에..
용서하십시오. 제가 감리교이기 때문에.. 감독 뽑을 때 거기를 지나가게 하는 게
좋겠다.. 내가 그랬어요. 거길 관통하는 건 감독, 열 발자국은 목사, 다섯
발자국은 장로, 한 발자국은 집사..뭐 이렇게 하는 게 차라리 낫지 뭐 수억씩 써가지고..
뭐 하느님 없는 걸로 치고.. 그러니 우리속에 얼마나 그 공격성, 특별히
한국사람들 공격적이어서 교통사고 사망이 제일 많잖아요.. 교통사고 사망율이
세계 최고 아닙니까? 고려 때 이조 때라면 안 죽을 사람들이 죽잖아요. 자동차
생긴 다음부터 일년이면 몇십만명씩 죽잖아요.

근데 어렸을 때 뭐라고 했어요? 찌르릉 찌르릉 비켜나세요..우물쭈물하면 큰일
납니다..그래서 자전거 가지고 할머니 우습게 보고.. 그렇게 우리 어렸을 때에
뇌리에 박히더니 진짜 차 가지고 찌르릉 찌르릉..뭐 우물쭈물하다가는 큰일 납니다.
해가지고 큰 일 낸 거지요. 아주 위험한 동요가 한두개가 아니어요.
영어로 번역해보세요. 서양 사람들 정신 없을 거예요.. 아. 자전거 가지고 있으면
되는 거지 우물쭈물하다가는 큰일납니다. 보세요 얼마나..그러니까 보행자들 다
죽이는 거 아닙니까? 아이 제일 많이 죽이죠..한국이 OECD에서 제일 많죠?
그건 뭐냐면 노래에 다 있는 겁니다. 우물쭈물 하지 말래는 것이...나는 간다는
것이.. 이 공격성을 빼야 해요.

기장총회장도 한 번 아마존에 가서 몇발자국이나 가나 보면 좋겠어요.
존재의 질을 생명 다른 ecology system이 알아채주는 것예요.

그런가 하면 티베트에 이런 얘기가 있었어요. 마을에 호랑이가 와서 자꾸 사람을
잡아먹는데 그걸 어떻게 퇴치시키느냐고 했더니...
거기 도인 하나가 성문앞에서 자고 있어요. 서양사람이 물었어요. 이러다가는
맹수한테 죽지 않느냐 했더니.. 이사람은 공격성도 없고 두려움도 없고..
하는 얘기가 짐승이 아무나 잡아먹는 것 아니라 남녀 사이에 연애하는 것 같이
도망가야 쫓아가지요. 안 도망가면 연애가 안 성립하죠. 그처럼 맹수가 잡아
먹을 때는 토끼나 여우 도망갈 때 두려움이 꽉찬게 양념이 잘 돼서 먹는다..
그러니까 두려움이 없으면 냄새를 맡아보고 이게 양념이 안된 거다..
이런 상태인데 그때.. 다니엘이 사자에게 말하듯이, 이제 돌아가라..이렇게 해서
퇴치하는 방법이 티베트에 있었어요.

다시 말해서 난폭하다는 것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 이 지경에서 예수께서는
It is finished 했던 거예요. 누구든지 원망할 사람, 또 두려움, 이런 것이
없을 때만 이런 선언을 할 수가 있는 것예요. 이렇게 예수께서는 말하자면
생명의 코스를 다 달려가신 것인데 생명이란 거는 빳빳한 거 아녜요.
출렁거리는 거를 생명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봄에 싹이 나고 땅이나 딱딱한
껍질을 뚫는 그런 봄기운.. 또 여름의 청청한 버드나무 휘어지는 것 같은 거..
또 가을에 물들고 스스로 죽고 과일 만들고..또 겨울에 생명의 기색을 뿌리위에
다 감추고 뿌리속으로다가 해서 침잠하는.. 이 네가지 자연이 보여주는 이것을..
꺾일때 꺾이고 떨어질때 떨어지고..이 리듬을 계속 타는 것을 생명이라고 해요.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제 가을에 해당하는 거를 알고 스스로 불을 놓고 재를
만들고 재에서 다시 부활하는 불사조와 같은 길을 걸어가신 것예요.

결론으로 나무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생각할 적에 철저히 인간적으로 실패한
것인데..어떻게 그 속에서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거는 이 한 시간에 그 길을 다 헤쳐볼 수 없지만 제가 좋아하는 조명이 있어요.
여러분도 아마 중고등학교 때 보신 거지만 문자를 제가 그대로 외우지 못하지만
대강 이래요. [추강에 낙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메라] 가을 강에 배를
저어가서 낙시를 했는데 고기 안 물었다...우리 같으면 뭐..오늘아침에 마누라
깽판치더니 이랬다..재수없다..헌금을 냈는데 왜 이러냐...이렇게 길어질 텐데.
다음 구절이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가노라] 허탕쳤다고 하는 것을 달빛을
실었다고 표현하는 상실의 미학... 이런 것을 갖고 자기의 최후를 맞이하신
것예요.

그런가 하면 노자 도덕경에 보니까 [위대한 완성은 이지러진 것 같다. 위대한
충만은 빈 것 같다. 그러나 그 효용은 다함이 없다.] 십자가를 두고 한 것 같은
얘기예요. 인간적으로 야무지게 하는 게 아니라 하늘에서 볼 때만, 하늘 의식만,
하늘의 눈만 의식하고 삶을 연출하신 분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제자의 배반과
뭐 제사장과 누구의 모함... 다 하지만..그 속에서 의례 달빛만 싣고 배저어
가노라..이런 심정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예요.

우리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하는 것은 센티멘탈한 얘기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장수와 같이 아무에게도 원망하지 않고 아무도 탓하지 않고 스스로
우주에 나혼자 있는 양 어련히 일어날 게 일어났다고 다 받아들이면서 나아가는
그 모습을.. 지구 행성에 남기기 위해서 가신 것입니다.
생명이란 것은 이렇게 출렁이는 것이고 부활이라는 것은 바로 그 생명의
리듬대로 가서 무덤이 볼 적에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도로 토해 낸 사람을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질문에 관하여

질문은...성경책 펴고 기도 좀 하시면 다 돼요. 최후에 대답해주실 분이 자기 머리 위에 계시는데 괜히 옆으로만 수평으로 하지 말고... 마가복음이 16장인데, 앉아서 세시간이면 다 읽어요. 그런데도 평생에 한 번도 안 읽어요. 하고 싶은 질문들이 처음에는 많은데 호기심에서 난 거냐..이걸 가려서 천개의 질문을 세개로 압축시켜주는 것을 종교라고 해요.
수많은 질문이 있죠. 그러나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요점을 파악하시면 결국 하나 둘로 압축이 되는데 우리는 쓸데 없는 얘기를 많이 하는 수가 있어요. 그때 성경을 펴고 살아계신 분하고 직접 컴퓨터 접속을 하는 게 제일 좋다..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어요.

성경보는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지만 저번에 제 경우를 소개해드렸지만 답답할 적에 주역 점치듯이 아무데나 열고 첫눈에 들어오는 것을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고 할 적에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 것이 나오는지 제가 얘기했죠.
슬픔에 가득찼을 때 항상 끼뻐하라... 그래도 저는 그걸 하루종일 했어요. 그렇게 어리숙하게 할 적에 connection이 일어나는 것예요.

예를 들어서 비판하지 말라...이런 게 있어요. 아주 쉽죠. 왜냐면 대개 비판하지 말라면 비판 안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희랍어 어원은 뭐다..또 칼빈은 뭐라고 했다.. 계속 이렇게 하고 돌아다녀요.
아랍 세계의 하산이라는 도인이 자기가 어지간히 도를 닦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강변에 앉아 있었어요. 모래사장에.. 그런데 저만치서 웬 깡패같은 놈이 여자하고 나란히 앉아서 술병 같은 호리병을 따라 마시고 있었어요. "에이구 인생이 불쌍하다.." 그러면서 속으로 맗하는 순간 강 복판에서 배가 뒤집어지면서 사람살리라는 소리가 나고 그래요.
그걸 보더니 젊은이가 웃통을 벗더니 헤엄쳐 가서 여섯명인가 일곱명을 건져 냈어요.
그때 하산은 "아유..나는 신학교 출신이지만 수영을 못해서 한 사람도 못건지는데.." 하고 또 속으로 "저런 허송생활 보내는 놈이 있는가 욕까지 했는데 나는 한 사람도 못구해서 면목이 없구나.." 하면서 이렇게 고개를 떨구고 있었어요. 입장이 곤란해서...
그런데 나중에 그 젊은이가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면서 앞으로 걸어와서 서더니...감히 쳐다보지를 못했어요. 정황이 우습게 되어 머리를 계속 떨구고 있는데.... "하산!" 자기 이름을 불러요. 그리고 "The woman over there 저기 있는 여자 She is my mother 내 어머니야.." 그리고 그 병을 쏟으면서 "This is water 이게 물이지 술이 아닐세.." 하산은 앞이 새카매졌어요. 그 때 "내가 I saved seven dicks 일곱사람을 구했는데 You go! save the remain one! 가서 나머지 한사람을 구하라!" 그랬어요.
하산은 그의 발 앞에 엎드려서 "저도 구해주십시오" 이렇게 하고 눈을 뜨니까 배도 없고 사람도 없고 다 없어진 체험을 했어요. 이것이 Do not judge예요.
우리는 왜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예수께서 말씀했느냐? 반사가 돌아오니까...가 아니라 우리가 혼자 태어나서 혼자 가는데 세상을 떠날 때 돌이켜 보면 나하고 인연맺은 사람이 다 내 성장을 위해서 인연맺은 교육자료이지 사실은 한놈도 없다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차 타본 경험이 있지만 정거장에 있는 사람이 볼 때 기차가 가요. 그러나 기차에 탄 사람이 보면 정거장이 가듯이 상대적으로.. 우리가 남의 장례식에 가서 그사람이 세상 떳다, 떳다..하지만 우리가 그사람의 자리에 있을 때는 세상이 펑하고 사라져요. 그래서 아무도 없어요. 나 혼자이지. 혼자 하느님 앞에 서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해서 남을 비판한다고 하는 것은 헛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다. 있지도 않은데 공연히 헛다리 집느냐.. 이래서 Do not judge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하나가 양념없이 심심하죠. 바울서신은 양념 쳐가지고 많이들 좋아하는데 예수께서는 노동자 출신이라 말을 학자적으로 안 해서 뭐..팔을 잘라라..눈을 빼라.. 뭐..비판하지 말라...무시무시한 게 이걸 읽어`버리면`... 안돼요.. 대개 설사해요.

딱 눈에 하나가 들어오면 하루만이라도 수요일이나 목요일날.. "Do not judge 비판하지 말라" 직장에서도 하루종일만 비판 안 해보면..아주 어거지로, 무식하게.. 비판하지 않으면 그때부터 하늘하고 온라인이 통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는다면 뭐 칼빈 주석 찾고..
요한 웨슬레 펴놓고..또 뭐..희랍어 어원이 어떻고 하면서... 다..개수작예요.
제발 개수작 안 하실려면 지극히 작은데서부터 생활에 링크시켜야겠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