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교도소 앞 출소환영식
출소하던 날의 군산 교도소 앞의 풍경
나는 교도소에서의 마지막 날 밤, 18개 월 동안 갇힌 생의 마지막 날 밤을 편안하게 발을 뻗고 잘 수 없었다. 아무리 둔감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대범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은 별종의 인간일 것이다. 방은 말갛게 치웠고 징역 보따리는 모두 정리하고 싸서 꾸려놓은 상태였다. 보통 일반수 같으면 출소 때가 되면 적어도 며칠 전에 만기 방이란 곳으로 옮긴다. 출소를 며칠 앞둔 들뜬 사람이 일반 재소자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격리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양심수의 경우는 그런 일이 없다. 그럴 필요도 없는지 모른다. 모두 독거방에 수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새 날, 긴 내일을 위해서 눈을 붙이기로 몸을 뉘었다. 그때가 아마 자정쯤 되었을까? 괘종시계를 맞추어 놓지 않아도 나는 일어났다. 새벽 3시경이었던 것 같았다. 세수를 하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교도관이 문을 연다. 소장이 어제 밤에 댁으로 퇴근하지 않고 소 내에서 잤다는 것과 그가 지금 일어나서 나를 환송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나는 매일 다니던 복도를 마지막으로 걷는다는 감상에 젖으며,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정막한 시간에 발걸음을 사쁜 사쁜 걸었다. 학생들이 수용되어 있는 동앞을 지날 때 나는 그쪽 안을 쳐다보았다. '잘 있거라'를 속으로 뇌이며 보안과장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보안과장과 소장이 앉아 있었다. 곧 차가 나왔다. 그곳은 만물이 잠든 고요한 밤이 아니었다. 연방 바깥 상황이 보고되고 있었고 직원들이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새벽 만기일인 24일이 시작되자마자, 그러니까 24일 새벽 1시에 출소할 수 있다는 말도 했으나 - 실제로 일반수들 가운데는 그렇게 나가기도 한다고 했다. - 나는 교도소 직원들의 문제도 생각하고 환영 나온 사람들도 생각하여 1년 6개월을 갇혀 살았는데 마지막 몇 시간을 더 못 살겠는가 고 그 아이디어를 일축했다. 그런데 이 날 아침 새벽 4시쯤 나가려든 나의 계획은 다소 차질을 빚고 있었다. 그것은 나 외에 다른 사람이 출소하는데 그 다른 사람이 조직 깡패의 높은 간부라고 하여 바깥이 좀 소란하다는 것이다. 소장과 보안과장의 생각은 그의 출소가 완료된 후에 나를 내 보낸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출소 시간을 시차제로 한다는 말이다.
밖에는 50여명의 사람들이 나의 출소를 환영하러 나와 있다고 하였다. 소장과 보안과장은 바짝 긴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를 환영 나온 사람 가운데 국회의원이 있다고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분과 교도소 직원간에 실강이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연인즉 그 국회의원은 교도소 안으로 소장을 만나러 들어오겠다고 하고 직원은 안 된다고 하여 큰 실강이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그들은 더욱 긴장하는 얼굴 표정이었다. 나는 나보다 먼저 출소할 사람을 빨리 내보내고 내가 곧장 나가게 해 달라고 했다.
그 사람의 출소가 완료되었다는 보고가 있자 우리는 일어섰다. 소장과 보안과장은 한사코 나를 바깥까지 환송하겠다고 같이 따라 나왔다. 나는 아직도 어두운 교도소 밭앝으로 그들 두 사람과 나란히 서서 걸으면서 나갔다. 저만큼 떨어진 곳, 철책으로 막아놓은 선 뒤로 불빛이 보였고 사람들이 몰려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마지막 저지선, 그곳에 초소가 있는 지점의 좁은 통로를 지나갈 즈음 어떤 사람이 저지하는 교도소 직원을 밀치고 들어와서 나와 함께 걸어나오던 소장을 보고 '소장 놈이 누구냐'고 대들 듯이 물었다. 너무나 기가 막힌지 소장은 '왜 그러느냐'고 대꾸하였다. 이 때 그 사람은 '네 놈이 소장이냐, 내가 국회의원인데 나를 못 들어가게 막다니' 하면서 그를 밀치는 것이었다. 이 때 뒤에 섰던 보안과장이 앞에 나서서 '소장님께 그 무슨 막말이냐?'고 하면서 '할 말이 있으면 내게 하시오'라고 가로막았다. 이 때 '네 놈은 또 무엇이냐?' 하면서 힘껏 밀쳐서 보안과장은 그만 땅에 넘어졌다.
내가 무엇인가 개입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찰라 밖에서 나의 모습을 본 어느 교우가 '홍 목사님-' 하고 소리쳤다. 그 다음 순간 다른 사람들도 소리쳐 불렀다. 그래서 나는 내 앞에서 벌어지는 그 장면에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순간적으로 판단하고 나는 뛰어 나갔다. 홍창의 장로님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우리는 껴 앉았다. 그 순간을 얼마나 오래 기다렸던가? 그 후에 낯익은 그리운 얼굴들이 계속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계속 껴 앉았다. 예상을 넘어 부산에서 아버지도, 큰 형님도 오셔서 나를 놀라게 하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차례를 양보하고 뒤에 서 있던 아내는 내가 찾을 때 나타나 우리는 깊이 포응하였다. 미국에서 온 딸 정화와 아들 성산과 성봉이가 거기 와 있어 나는 너무나 기뻤다.
서울에서 많은 교계인사들과 재야인사들이 내려 왔었다는 사실은 뜻밖이었으나 반가웠다. 조용술 목사, 총회 총무 서정래 목사를 비롯 총회 실무자들, 전민련 의장 신창균 장로를 비롯하여 범민련 관계자들이 여럿 보였다. 전북서노회 목사들, 젊은 민중교회 목사들, 강경대 부모님, 이 지방 출신의원 평민당의 장 의원, 등이 보였다. 그러나 향린 교우들이 많이 내려온 것을 보았을 때 나는 크게 반가우면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비디오를 찍는 사람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내 앞에는 "환영 통일의 사도 홍근수 목사 출소"라고 쓴 현수막이 길게 옆으로 펼쳐져 있었고 사람들은 그 현수막 뒤에서 어떤 의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출소 환영식이 시작되었다. 총회 평통위원장 신삼석 목사가 사회를 하였다. 국가보안법철폐하고 양심수를 석방하라, 양심수를 석방하고 남북합의서 이행하라. 등등의 구호를 교도소 쪽을 향해 소리쳐 외치면서 새벽의 정막을 깨고 있었다. 신 목사의 감사 기도가 있었다. 나는 인사말과 출소소감을 말하였다. 서울에서부터 이곳까지 먼 길을 와서 이 새벽에 나를 환영해 주어 감사하다는 인사, 내가 만기가 되어 출소하게 되었지만, 저 교도소 안에는 우리의 젊은 학생들, 노동자들이 10 여명이 아직 갇혀 있다는 것, 내가 먼저 나와 죄송한 느낌이 있고 내 마음이 무겁다는 것, 어서 속히 국가보안법이 철폐되어 정말 애국적인 청년들이 이 역사를 책임지고 이끌어 나가는 새 날이 어서 속히 오기를 소원한다는 것, 등의 취지로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이야기를 마치고 교도소를 향해 국가보안법 철폐, 양심수 석방의 구호를 선창하고 참가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마지막으로 신창균 의장의 선창으로 만세삼창이 있은 후 출소 환영식을 간단히 끝냈다.
내가 놀란 것은 향린 교인들이 많이 군산으로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조용하게 출소하고 서울에서 혹 교우들이 교회에 모여서 환영예배를 본다면 그것은 적절하다고 생각하여서 군산에는 교인들이 서울에서 여기까지 내려올 필요 없다는 입장을 이미 교역자들에게 누누히 말해두었었기 때문이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이 문제로 교회에서 논의가 분분했었다고 하였다. 석방투쟁을 벌리는 동안 일치단결했던 교우들이었지만, 마지막에 나의 출소환영 방식을 놓고 의견이 크게 둘로 나누어졌다. 가족과 목회자, 당회 대표만 내려가서 출소를 환영하고 본격적인 환영은 서울에 돌아온 후 교회에서 하자는 의견이 한쪽에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향린 교인들이 대대적으로 내려가서 성대한 환영행사를 하고 그 행사를 국보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운동의 일환으로 삼자는 의견이 있었다. 청년들은 교회의 어른들의 의견을 받아드리지 않고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리하여 타협이 이루어져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기로 하였다고 한다. 이에 청년들은 직장에 월차 휴가를 내는 등 여러 가지 준비를 미리 하여 이날이 월요일인데도 많은 교우들이 군산으로 내려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이날 이 선생이 와서 출소광경을 전부 비디오로 찍고 또 사진기로 찍었다. 후에 그는 그것을 내게 가지고 와서 청구서를 내놓았다. 싼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군산까지 온 출장비를 청구하지는 않았다. 그는 여러 차례 부탁하지도 않은 사진을 찍어서 주고는 그 비용을 청구하곤 하였다. 이번에는 정말 고마웠다.
군산 한일교회에서의 출소환영예배
참석자 일행은 옆에 준비된 버스 편으로 군산 시내에 위치한 한일교회(김판봉 목사)로 향했다. 교회에서 정식으로 다시 출소환영예배가 있다고 하였다. 커다란 현수막이 쳐져 있는 예배실은 어느듯 사람들로 가득 찼다. 나는 강단위로 안내되었다. 주로 지역 목사들이 순서를 맡은 이날 예배는 재야 운동체의 의장인 군산의 전병생 목사의 사회, 이 지방에서 기장으로는 제일 큰 교회의 목사인 손병선 목사의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란 설교, 전양권 노회장의 환영사, 등이 있었다.
나는 이날 환영예배에서 행한 나의 인사말에서 무슨 내용의 연설을 했는지 일일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대강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구속되었을 때 우리교단과 엔시시가 즉각적으로 지지 성명을 발표해 주어 힘이 되었다는 것, 7개월 전 이곳에 왔을 땐 낯선 타향의 감옥에 왔다고 생각했지만, 이곳의 우리 교단의 목사님들이 면회를 와서 나를 외롭지 않게 했고 격려해 주었다는 것, 특별히 이곳 전북 서노회가 임시 노회를 마치자 말자 많은 목사님들, 장로님들이 와서 면회를 해 주었다는 것, 기장 목사인 것이 자랑스러웠다는 것, 등등의 이야기를 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구속된 목사를 지지하고 훌륭히 싸운 향린 교회의 장로들과 교역자들, 그리고 가족들을 일일이 소개하였다. 김판봉 목사님의 축도로 환영예배를 마쳤다.
그것으로 환영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한일교회 여신도회원들과 이 노회의 여신도들이 전날부터 정성껏 준비한 풍성한 식탁이 마련되어 식탁의 친교로 환영행사는 계속되었다. 김판봉 목사님의 사모님은 그의 아들이 운동권에 몸을 던진 청년으로 감옥에도 갔고 지금은 서울에서 민중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목사여서 내게 특별한 애정으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고 말씀해 주어 내 가슴이 뭉클하였다.
우리는 식사를 끝내고 출발하였다. 버스 외에 많은 교우들이 승용차를 가지고 왔었지만, 나는 버스에 올랐다. 이 버스는 광명에 있는 고완철 목사 교회에서 선선히 내어주어서 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버스에 올랐을 때 민자통의 의장으로 있는 손의현이란 친구와 함께 앉게 되었다. 우리 교우들 가운데는 그가 누구 길래 나를 독점하느냐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내 어릴 적 고향친구이고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동기동창으로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그의 친구들에게 늘 나를 높이 평가하고 자랑하곤 하는 친구였다. 내가 2-3년 전에 심야토론에서 한 발언으로 문제가 많을 때에 그것을 예찬하여 말하기를 내가 우리나라의 운동을 10년을 앞당겼다고 극구 칭찬하였었다.
그는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일어난 일과 상황을 소상하게 이야기하느라고 바빴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 특히 교회 장로님들과 이야기할 기회를 못 가진 채 어느 새 우리 버스는 서울에 도착하였다.
향린교회의 성대한 출소 환영문화제와 결의문
서울에 도착하여 집에서 잠깐 쉬고 저녁에 교회에서 있는 환영행사에 참석하였다. 이날 환영식은 교도소 앞에서의 약식 환영식, 군산 한일교회에서 있었던 환영예배와는 형식이 아주 달랐다. 물론 정신은 같았지만, 문화행사로 치러졌다는 것이 그러했다. 향린교회 II 성가대의 지휘자이기도 하고 전통음악에 관심과 조예가 깊은 이영국 교우와 역시 향린교회 I성가대 반주자이면서 서울 음대출신의 민족음악연구회 연구원인 이소영 교우가 함께 연출을 맡고 터, 노래터, 성가대, 어린이부, 중고등부가 참가하고 어른들은 교역자들과 장로님 외에는 별로 참가하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전 교회적인 문화행사요 축제였다. 이 시간에는 교우들 뿐 아니라 교계와 재야 인사들 등 근 600여명의 환영객이 몰려들어 350 여명의 수용능력을 가진 좁다고 할 수 없는 예배실이 이 날 만은 오히려 좁아 터져 설자리조차 없어 많은 분들은 예배실 밖에서 들어오지 못하였다. 예배실 안의 열기는 대단히 뜨거웠다.
장내가 캄캄한 가운데, 한 어린이가 내게 보내는 편지를 읽는 것, 나의 '자유인으로 사십시오..."라는 파송사,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합창, 어린이들의 촛불 행진, 등이 강단 벽에 전면 스크린에 비치었다. 이것은 내가 구속되었을 때인 작년 4월에 교인들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교회에서 만들었다는 "통일의 십자가 어깨에 지고"라는 행사의 마지막 장면을 비디오로 담은 것이었다. 이어서 풍물패의 입장을 뒤따랐다. 나는 그 뒤를 따라 입장하였다. 이로서 이날 행사의 막이 올렸다.
내가 강단 쪽에 진출했을 때 홍창의 장로님을 비롯 장로님들과 이날 설교를 맡은 우리교회의 초청회원인 황성규 목사님을 대하게 되면서 감격의 포응을 하였다.
석방대책위원장이고 대리 당회장으로 내가 감옥에 가 있는 동안 교회를 이끈 김경호 목사의 예배부름, 노래터의 합창, 홍장로의 감격적인 기도, 노래터의 공연, 황성규 목사의 설교가 뒤따랐다. 이러한 새로운 스타일의 예배, 내가 그렇게도 오랫동안 보고싶어하던 축제, 그 예배순서에 나는 전적으로 흠뿍 빠져버린 나 자신을 미쳐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완전히 거기에 용해된 것 같은 경험을 하였다. 이윽고 내가 말하는 차례가 되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나는 거의 넋을 읽고 있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었다. 후에 내 이야기를 들은 부교역자들의 기억에 따르면 내가 강단에 다시 서게 되어 감개무량하다는 것, 문익환 목사를 위시하여 많은 통일인사들이 갇혀 있는데 혼자 나오게 되어 마음이 무겁다는 것,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철폐되지 않고 있고 현정권이 흡수통일을 꿈꾸고 있다는 것은 그 사이비성을 의미한다는 것, 등의 내용을 말했다고 한다.
이날 예배에서 향린교회의 결의를 다지는 결의문이 한익성 장로에 의해 낭독되기도 했다. 그 일절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사랑하는 목자이신 홍근수 목사님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목회자의 양심으로 분단된 조국의 통일과 남과 북의 진정한 화해를 위해 노력하시다가 반민족적이고 반통일적인 형 정권에 의해 영어의 몸이 되신 지 1년 6 개월 만에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셨다.
홍 목사님을 구속한 후 현 정권은 우리 향린교회를 와해시키려 했지만, 우리 향린교회 전 교인은 하나로 굳게 단결하여 홍 목사님이 걸어가시는 길이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 함께 가야 하는 참된 신앙의 길임을 굳게 믿고, 안기부의 부당한 구속과 사법부의 불의의 재판에 저항하여 우리의 정당한 의사를 온몸으로 표현했다....현정권의 온갖 탄압을 물리치고 우리 향린 교우들과 홍근수 목사님은 다시 하나가 됨으로써 통일을 향한 우리의 염원을 짓밟으려는 현정권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지난 기간의 많은 환란과 시련을 극복해낸 성숙한 모습으로 이 땅에 하느님의 뜻을 보다 적극적으로 구현할 뿐만 아니라 조국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정의로운 싸움에 우뚝 설 것이다...."
이 성명서는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을 촉구하면서 "향린교회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더욱 충실한 교회가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 나갈 것이다." 라고 다짐하였다.
한 목사나 신부나 승려가 그의 종교신앙의 소신을 따라 통일운동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성직자가 목회하는 교회나 성당이나 사찰의 소속 신자들이 이렇게 일치 단결하여 그 성직자를 지지, 성원하고 구속되었으나 물러서거나 움추려 들지 않고 석방투쟁을 전개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향린교회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그 목회자가 구속되었을 때 어떻게 했는가 하는 것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날 행사에서 다들 흐뭇해 했지만, 아내는 내심으로 불만이었던 것이 나타났다. 그는 그 날 그의 기쁨을 그의 춤으로 표시하고 싶었던 모양이었으나 아무도 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그 날 예배순서에서 그의 역할을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나는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는 그것이 좀 불만이었던 모양이었으나 다른 사람에게 표시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홍근수 목사 석방대책위 해체
향린교회는 내가 구속되었을 때 즉시 신도회 총회를 열고 구속된 목회자 석방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그의 석방운동을 전개하고 출소환영예배를 보는 날까지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대책위원회가 주관하고 참가한 활동들의 개략을 보면 신도대회(4회), 석방을 위한 강연회(4회), 노상기도회 및 평화시위행진(11회), 항의농성 및 특별, 철야기도회(27회), 문화공연(3회), 자료집 발행(4회), 통일기원 산상기도회 (1회), 성명서 발표(7회) 등이었다. 또 이 대책위에서는 가두 서명운동을 벌렸는데 7천여 명의 서명을 받았고 항의서한과 청원서 발송 등도 하였다. 특히 항의가두시위를 하고 그 무서운 안기부 정문 앞에 가서도 그곳에 구속되어 있던 나의 석방을 촉구하며 기도회를 보기도 하여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끄는 교회가 되었다. 향린교회는 석방을 기대했으나 나에게 2년 징역형이 선고되자 이에 항의하여 당시 해외에서 온 교회 지도자들을 참여시킨 채 법원에서의 항의기도회를 개최하는 등 일직이 볼 수 없었던 대담한 행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 석방대책위가 얼마나 교인들의 지지를 얻었는가 하는 것은 어떤 유급 직원을 둠이 없이 전 교우들이 참가하였던 이 위원회가 존속하면서 활동하였던 예산이 3천만 원 여에 달하였고 이것을 전 교우들과 후원자들이 헌금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향린교회가 바위처럼 굳굳하게 서서 흔들림이 없었던 것은 여기에 전 교우들이 일치단결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물론 교인들의 지도자들인 당회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과 신앙적인 소신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장로님들은 홍창의, 최봉삼, 도기순, 장충협, 이상근, 한익성, 강영옥, 문홍주, 장로 등이다. 그리고 초청회원으로 황성규 목사와 나의 아내인 김영 목사의 활동과 지도력은 교우들에게 큰 힘을 주었다.
사명을 훌륭히 해 낸 후 석방환영회를 하는 날 해체되었다.
내가 목회현장을 떠나 있던 부재기간동안 향린교회를 이끌었던 교역자들로는 대리 당회장 김경호 목사, 곽건용 목사, 안정자 전도사, 등이었다. 이들은 혁혁한 공로를 세웠고 특히 김경호 목사의 목회적 지도력이 이때 인정을 받아 향린교회가 창립 40주년기념교회로 강남향린교회를 창립할 때 초대 목사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이제 그만하자'고 하려는 유혹에 대한 청년들의 경고
향린 교우들은 1년 반 동안 무수한 기도회, 가두평화항의행진, 헌금 등을 해 왔다. 어떻게 보면 어느 교회가 할 수 없는 훌륭한 일을 해 왔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는가? 이제 내가 18개월 간의 징역을 다 살고 나온 후로부터는 향린 교우들의 마음 속에는 '이제 그만 하자;' '그만하면 충분하다;' '이젠 좀 조용히 쉬자.' 는 등등의 심리가 자리 잡을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누가 나무랄 것인가?
그러나 그것을 나무라고 경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향린교회의 청년들이었다. 내가 석방되기 전날인 8월 23일 청년신도회의 기관지인 청년공동체의 시평은 나의 출소로 기대에 차 있는 향린교회 교우들에게 찬 물을 끼얹는 글을 쓰고 있었다. 그 시평은 향린교회 교우들에게 고난은 끝나지 않았고 또 끝나도 안 된다고 다음과 같이 경계하였다:
"만약 우리가 항상 정의의 편에 서고 분단된 민족의 고난을 함께 해 나가는 향린교회를 바란다면 우리가 겪어야 할 환란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향린교회를 한국교회의 유일무이한 진보적 신앙인의 공동체, 하느님의 명령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참 지체로 지켜나가길 원한다면 우리에겐 끊임없는 새로운 도전이 다가 올 것이다. 아니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도전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난 환란과 도전의 시기를 '특별한' 시기가 아닌 '평상적인' 시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청년들의 말은 지당한 말이다. 사실 청년들이 경계하고 있는 대상이 되는 교우들도 청년들의 말하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향린교회의 창립정신을 보거나 우리교회가 속해있는 교단의 신앙고백과 선교적 선언을 보거나 우리가 믿는 복음의 정신을 보거나 가나에 청년들의 시평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간 걸어온 구속이후 징역 1년 6개월 간을 되돌아볼 때 결코 내가 별난 목사여서, 특출한 목사여서 그렇게 논쟁적인 인물이 되었거나 남달리 징역을 살았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향린교회의 창립정신을 삶으로 실천하는 일이고 내가 속한 교단인 한국기독교 장로회의 신앙고백을 그대로 지역 교회에서 목회로 실천하려고 한데에 불과하였다고 생각한다. 워낙 다른 교회들, 다른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생활로, 목회로 실천하려는 목사들이 드물기 때문일 뿐이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평상시의 목회자로 돌아와서
나는 특별히 쉰다고 할 것 없이 그냥 목회에 임하였다. 그동안 오랫동안 교우들이 기다려왔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감옥에 가 있었던 것이 쉰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멀리 미국에서 온 가족들을 며칠을 지나고 성산이만 남고 정화와 성봉은 떠나야 해서 아쉬웠다. 그들이 모두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홍 장로님의 권유와 도움으로 중앙 병원에 가서 건강진단을 하였다. 이때 내시경 검사를 처음으로 해 보았다. 며칠 후에 나온 결과는 모든 것이 정상이고 건강이 아주 우수하다고 하였다. 나는 다시 모든 것에 자신을 가지게 되었고 목회에 임하게 되었다. 종전과 전혀 다름이 없는 목회를 다시 계속하게 되었다.
나는 1년 6개월 간의 나의 징역 경험이 생과 사회에 대한 나의 이해를 더 구체적, 현실적 차원으로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원칙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고 생각되었다.
미국의 한 신학교 총장으로부터 온 초청장
내가 평상시의 목회에 복귀하여 여념이 없던 어느 날 나는 이든(Eden)신학교 총장, Jim Wahli 목사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았다. 그것은 나를 놀라게 하는 내용이 담긴 초청장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93학년도 졸업식에 명예신학박사학위(Doctor of Divinity)를 수여하기로 이사회에서 결정하여 졸업식에서 수여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이유는 용기를 가지고 복음을 증언하였고 그 과정에서 감옥에 가서 징역을 살았으며 징역을 사는 어려운 기간에도 누가복음을 연구하여 그 공로를 인정하여 명예신학박사학위를 수여키로 했다는 것이다. 나는 학교에 알리지 않았는데 아마 이 일은 미국에 있는 나의 선생들이었던 에드워드 슈뢰이더 박사와 더글러스 믹크스 박사와 통일신학동지회 동지로 내가 다니던 신학교의 교수였던 강위조 박사 등이 노력했을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우선 이 편지를 읽었을 때 첫 순간은 매우 부끄러운 생각이 앞섰다. 내가 사실 한 것이라고는 별 것이 아니고 설교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설교를 하고 증언을 한 것뿐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만, 공연히 정부가 나 같은 사람을 구속하여 징역을 살렸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많이 알려지고 마침내 명예신학박사학위까지 받게 되지 않았는가 라고 생각해 볼 때 고소를 금치 못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내가 소위 말하는 반미운동을 했는데 미국의 신학교에서 그것 때문에 명예박사학위를 준다는 것이 생각해 보면 매우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던 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그 졸업식에 참석하여 학위증을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생각을 많이 하였다. 거절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구태어 졸업식에 가서 그 학위를 꼭 받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실 총장은 꼭 졸업식에 오지 않아도 학위증을 우편으로 보내 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가기로 했다.
나는 여권수속을 했고 미국 영사관에 비자신청을 했다. 영사에게서 전화가 와서 만나자고 하였다. 나는 영사관에 갔다. 영사는 6개월 이상 징역을 산 경력 때문에 비자를 내 줄 수 없다고 하였다. 나는 내가 징역을 산 것이 사실이지만, 양심수이고 정치수인데 그 이유로 비자를 내주지 않는다는 것은 좀 이해할 수 없다. 더욱이 인권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지지한다는 미국이 그런 이유로 비자를 발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이러니칼하다는 등의 말을 하였다. 그러나 그 영사는 그렇다하더라도 규정상 어쩔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미국여행을 하려는 것은 애당초 내 아이디어는 아니고 나는 시간도 없다. 다만, 너희의 나라 신학교에서 바로 내가 징역을 산 이유 때문에 명예신학박사학위를 주겠다고 초청을 하였기 때문에 가려는 것뿐이라면서 초청장을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그는 그렇다면 모든 법원 서류들을 사본하고 그것을 영어로 번역하여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나는 그렇다면 나는 비자신청을 기권하겠다고 말하였다. 그것이 한 두 장도 아니고 2-3천 쪽에 달하는 방대한 것이고 그것을 번역할 시간이 있을 만큼 한가한 사람도 아닐 뿐 아니라 그렇게 까지 하여 당신네 나라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노라고 하고 나오려 하였다. 그랬더니 그 영사는 오히려 그러면 한글로 된 문서나 서류를 그대로 가지고 와 보라고 하였다. 자기네 에이전시가 있으니 거기에 의뢰하겠노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다음날 내 사건관계 서류를 한 보따리 사서 가져다 주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로 전화하여 비자를 내주었다.
나는 내가 명예신학박사학위를 받는다는 것을 될수록 알리지 않기로 하였다. 그래서 내가 목회하던 세인트 루이스 한인교회에도 알리지 않았다. 다만, 나를 후원했던 웨브스트 글로브에 사는 트람프 내외, 쉬래이더 박사, 들에게만 알리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93년 5월 구속된 후로는 처음으로 해외 나들이를 갔다. 명예신학박사학위를 수여받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워싱튼 디.시.에서 딸 정화와 사위 갑송이가 우리와 합세하였다. 우리는 쉬레이더 박사 댁의 손님이 되었다.
졸업식 전 날밤 이든 신학교 총장은 박사학위 수여자들을 환영하는 리굜션 파티를 신학교 공관에서 열어 나와 아내는 저녁에 거리로 갔었다. 정든 이든 신학교 캠퍼스가 그대로 거기 있었다. 리굜션 파티 장소는 도서관 서쪽에 있는 빌딩이었다.
교수진이 거의 다 바뀌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그동안 긴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지금 총장을 하고 있는 유진 월리 박사와 또 교수만 낙 익은 얼굴일 뿐 내가 알만한 교수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유진 월리 총장은 내가 이든에 다닐 당시는 신약학 교수로 있었다. 이날 밤 참석한 사람들은 명예신학박사학위를 받는 세 사람 (나를 포함),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는 20여명과 교수들이었다.
총장은 참석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하였다. 나에게 와서 내가 감옥을 살았다는 것과 감옥에서도 누가복음을 연구하여 그 공로가 인정되어 명예신학박사학위를 주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우리와 같이 앉았던 목사들은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 면서 이해할 수 없다고 놀라는 것이었다. 소개받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간단한 말을 하였다. 나는 일어서서 왜 목사인 내가 감옥에 가서 18개월 동안 징역을 살아야 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 날 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잘 이해한 것 같지 않았다. 언론의 자유가 있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사회인 미국에서 목회하는 목사들이 한국의 양심수 목사를 이해할리 만무하다는 것을 그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나와 함께 명예박사학위를 받는 사람이 두 사람 더 있었다. 한 분은 왼쪽 팔이 없는 상이군인출신이고 신체장애자였지만, 그러한 악조건을 딛고 그는 미국 서부인 샌프란시스코에서 수십 년 동안 병원 챠플린을 하면서 특수 목회를 한 목사였다. 또 한 분은 연세가 많은 여성으로 환자여서 산소통을 휠 체어에 싣고 호흡기를 코에다 달고 있는 분이었다. 그는 많은 재산을 이든 신학교를 위해 바쳐온 분이었다. 외국인으로서는 나 하나였다.
학위수여식은 다음날 오후 세인트 루이스 시내에 위치한 성 막크 교회에서 있었다. 나는 학교에서 까운과 박사 스톨을 빌려 입고 식장에 참석하였다. 졸업식 시작 시 아카데믹 마치에는 내가 20여 년 전에 이 학교에 다닐 당시 대학원장을 했던 알렌 밀러 박사가 내 눈에 익숙한 까운과 후드로 정장을 하고 참석하여 반가웠다.
설교가 있은 다음에 학위수여식이 시작되었다. 명예박사 학위 수여가 먼저였다. 아카데믹 학장(한국에서 교학처장과 비슷)인 오글스비(Oglesby) 교수는 나를 이렇게 소개하였다:
"에머슨은 언젠가 이렇게 적은 일이 있습니다. '인격은 지성보다 더 위대하다.' 나는 오늘 우리 현대세계 공동체에서 어떤 문화적 환경아래에서는 에머슨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홍근수 박사는 수난 받는 인간성이 필요로 하고 갈망하는 것에 비쳐서 하느님의 심오한 사건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조화를 향해서 이 두 가지, 즉 인격과 지성을 결합시킨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예신학박사학위 수여축하식
내가 미국에 가서 명예신학박사학위를 받아 온 것을 나의 한신 동기동창이고 통일신학동지회와 사회윤리학회 동지인 손규태 박사가 이것을 축하해야 한다고 하여 월 일 저녁 7시에 향린교회에서 통일신학동지회, 사회윤리학회, 향린교회가 함께 공동으로 주최하는 명예신학박사학위 수여 축하의 행사가 개최되었다.
사회자인 손 박사의 인사말과 취지 설명이 있었고 찬송가를 부른 후에 홍창의 장로님의 다음과 같은 기도가 있었다.
"이 세상을 뜻 가운데서 창조하시고 역사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느님 아버지, 저희들은 당신의 섭리하심을 믿기에 이 땅이 당신이 원하시는 정의와 평화가 깃드는 나라로서 마침내는 통일의 희년을 맞이할 것을 바라보며 지금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랜 역사를 통하여 서로 원수되었던 이스라엘과 피엘오(P.L.O.) 사이에서 조차도 평화의 길이 열리는 것을 저희들은 바라보며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단일 민족으로 살아 온 이 민족이 아직까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이 현실을 바라보며 저희들은 더욱더 뼈아프게 느껴옵니다. 주님! 이 불쌍한 민족을 굽어 보시사 이 민족에게 평화의 소망이 비치게 하옵소서. 오늘 이 시간은 고 정하은 박사 기념 논문상 수상식과 홍근수 목사 명예박사 수여를 기념하기 위하여 저희들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들이 쏟아 온 정열과 그 업적이 우리나라 온 교회와에 위해 살아 있는 증언과 표본이 되게 하옵소서. 이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하여 선두에서 애쓰신 홍근수 목사의 노고와 그 열성으로 인하여 주어진 명예박사 학위가 우리 온 겨레에 길이 빛나는 표상이 되게 하옵소서. 그가 걸어 온 고난의 길을 다시 조명해 보며 그 길이 홍 목사 만의 길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길이 되게 하소서. 결국 주님이 가신 그 길 위에 저희들도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모두가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게 하옵소서.
혁신이라는 이름 하에 미화되어 가고 있는 이 분위기 속에서 이 민족의 통일의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가고 통일의 목소리도 약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외세들은 이 나라를 지구상에서 유일한 위험한 지역으로 지정하고 언제까지나 분단국가로 묶어 놓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 이 백성은 혼돈 속에 빠져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모르고 헤매고 있습니다.
주님! 이 시간 주님의 종의 입을 통하여서 이 민족이 갈망하는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밝히 저희들에게 보여주시옵소서.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다시 추석을 맞이하게 됩니다. 추석을 맞이하여 갈 곳 없이 멍하니 북쪽 하늘만을 쳐다보며 애타하는 겨레들의 목소리를, 주님! 들어 주시옵소서. 그렇게 애타하며 기다리다가 많은 동족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한시간을 가짐으로서 저희 모두가 다시금 통일의 열망에 불타게 하옵시고, 우리가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을 저희들에게 보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의 모든 악의 근원이 되어 있는 이 분단의 장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저희 귀에 들리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손규태 박사의 수상 경위 보고
그 다음으로 손규태 박사가 다음과 같이 명예박사 학위 수상 경위를 말하였다.
"지난 5월에 있었던 이든(Eden)신학교 졸업식에서 홍근수 목사에게 명예신학박사학위수여 취지를 말할 때 오글스비(Oglesby) 교수는 "에머슨은 언젠가 이렇게 적은 일이 있습니다. '인격은 지성보다 더 위대하다.' 나는 오늘 우리 현대세계 공동체에서 어떤 문화적 환경아래에서는 에머슨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홍근수 박사는 수난받는 인간성이 필요로 하고 갈망하는 것에 비쳐서 하느님의 심오한 사건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조화를 향해서 이 두 가지, 즉 인격과 지성을 결합시킨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을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미국사람들이란 제3세계 문제들의 판단에 있어서 대단히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홍 목사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대단히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든 신학대학이 그에게 학위를 수여한 것은 그의 고매한 인격과 박식한 학문적 성과만 고려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짜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이유는 그가 한국에 돌아와서 향린교회 안에서 그리고 향린교회 식구들과 더불어 하느님의 말씀을 메임 없이 선포한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디모데 전서 2장 9절에서 보면은 사도 바울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메이지 아니 하느니라." 한국에는 수많은 강단들이 있지만은 정치적 외압에 의해서 그리고 교회 내에 잘못된 신자들에 의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자유로이 선포되고 있는 강단은 적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홍근수 목사는 그동안 향린의 강단을 통해서나 다른 어느 곳에서도 매임 없이 그 말씀을 자유로이 선포해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1년 반 동안의 옥살이를 했습니다. 이점에서 저는 홍 목사 뿐만 아니라 이것을 가능하게 도와준 향린교회야 말로 기장 안에서 아니 한국교회 전체 안에서 유일하게 하느님의 말씀이 자유롭게 선포되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카돌릭 교회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이라고 합니다. 또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 교회론에서는 교회는 하느님이 그 백성들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는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비한 몸과의 결합도 중요하고 하느님의 백성의 모임도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 변혁의 사건을 일으키지 못하는 교회는 아무리 그 신성성과 함께 모임의 숫자를 강조한다 해도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홍 목사는 사건의 주인공이요 그리고 향린교회를 사건의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1년 반 동안 옥살이를 했던 것입니다. 이 교회는 경건의 모양만을 갖춘 교회가 아니라 그 능력을 갖춘 교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홍 목사님이 명예학위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홍근수 목사가 가진 민족애와 나라 사랑은 조국의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가져오는 일에 헌신하게 했습니다. 이 점에서 저는 홍 목사는 인격과 지성, 그리고 하느님과 민족에 대한 뜨거운 헌신성을 가진 애국자라고 생각합니다. 이 통일문제는 앞으로 우리 모두가 더욱더 노력하지 않으면 않될 우리 모두의 과제로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그는 통일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마다하지 않고 그리고 어디든지 달려갔습니다. 이런 애국심과 열정이 그로 하여금 옥살이를 마다하지 않게 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로 하여금 지난 5월 20일 미국의 이든 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게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익환 목사의 축사
이어서 통일신학동지회의 고문인 문익환 목사와 박형규 목사님의 축하의 말씀이 뒤따랐다. 먼저 문익환 목사님의 축사는 다음과 같았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생을 목회를 하신 어느 목사님이 한탄 조로 말하기를 '지금 내게 50불만 있으면 명예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는데 내 수중에 25불 밖에 없어 그것을 받지 못하는구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에서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명예박사학위란 것이 시시하다는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일대학교의 졸업식에 간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학박사학위를 받는 사람들은 저기 아래 회중석에 앉아있는데 명예신학박사학위를 받는 사람은 단상에 앉게 하고 또 후드도 총장이 직접 씌워주는 것이었습니다. 신학박사학위를 받는 사람은 그냥 이름만 부르더군요. 그런데 명예신학박사학위를 받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얼마나 사회에 공헌을 세웠는가 하는 것을 읽더군요. 그래서 저는 '아, 정말 그렇구나. 명예신학박사학위라는 것이 정말 명예로운 것이구나'하고 고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명예신학박사학위란 논문을 써서 박사 하는 것보다 더 빛나고 값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생 속에서, 역사 속에서 논문을 써간 그런 실질적인 공적을 인정받는 그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홍 박사는 본래 논문을 쓴 박사를 한 위에다가 또 명예박사학위를 얻었으니까 조금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손규태 회장님께서 여러 가지 좋은 얘기를 해주셨는데 저는 조금 의의가 있습니다. 너무 교회 중심적인 얘기를 하는 것, 교회라고 하는 것이 댓박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빛을 못나가게 하는 게 아니라 빛을 아예 죽여 버립니다. 부뚜막에 소금도 쳐야 짜다고 하는데 이 땅위에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이 사회가 이렇게 썩었다는 것은 모두 소금이지만 부뚜막의 소금그릇에 담겨서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너무 교회 중심적인 얘기하는 것이 그리 마땅하지 못합니다. 홍 박사도 그렇고 손 박사도 그렇고 모두 제 제자들인데 조금 교회론적인 사고를 깨버리라는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사실 홍 박사는 교회라고 하는 그릇이 감당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조그마한 그릇이 감당할 수 없는 그릇인데 향린교회가-- 보통교회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목사를-- 다 감당해 주었다는 점, 그 점에서 향린교회에 제가 큰 축하를 드리고 교회라고 하는 것은 본래 이러해야 한다는 것을 본보기를 보여주었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홍 박사는 학위논문을 썼는데, 그 주제가 에른스트 부롯흐(Ernst Bloch)의 희망의 철학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였습니다. 제가 그 논문을 감옥에서 정성을 들여서 읽고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실 목회학 박사이기도 한데 그 논문을 보니까 별로 목회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것이었으니까요. 후의 그의 신학박사 학위 논문을 보면 목회보다는 역사에 관심이 있고, 민족의 통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공산주의 철학자이고 희망의 철학자인 에른스트 불롯흐와 사상적으로 본격적인 대결을 했다는 것은 언젠가 한국에서 통일을 앞두고 민족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어 보겠다는 만만치 않은 기백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제자이지만 이 정도의 제자가 있다는 것이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홍 목사는 통일문제를 가지고 계속해서 교회뿐 아니라 사회전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설쳤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 이 문제의 역사가 앞으로 열리게 됐습니다. 참 기쁩니다. 그동안의 기독교회가 1995년까지 통일하자고 하고 저도 전국을 95년까지 통일이 된다고 역설하면서 돌아다녔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저를 보고 환상적인 몽상가의 꿈같은 얘기라고 사람들이 비판을 했습니다. 환상적인 몽상가가 아닌 현실정치인 김대중씨도 1995년까지 통일이 된다고 했구요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도 임기 내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통일운동을 해왔던 저나, 같이 해온 홍 박사나 그동안 애쓴 것이 꿈같은 얘기가 아니고 손으로 만질 수가 있는 현실이 우리들의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홍 박사나 저에게 있어서 이것은 정치적인 의미를 넘어가는 신학적인 얘기가 있습니다. 기독교 평화의 복음의 구체적인 실천으로서 민족 통일을 우리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홍 박사의 통일운동은 정치적인 차원을 넘어가는 본질적인 깊은 신학적인 신앙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를 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굉장히 기쁩니다. 논문을 쓴 박사 위에다가 또다시 명예, 진짜 명예로운 박사학위를 받는 홍 박사에게 정말 기쁜 축하를 드리면서 이만 제 말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문익환 목사는 그 전에 그가 청주 교도소에서 복역할 당시 청주지법에 나와서 홍 목사에 대한 증인으로 말한 일이 있는데 이에 관해 후에 정리하여, 살림지에 기고하였다. 제목은 아마 "조준희 변호사에게"라고 했던 것 같다.)
박형규 목사의 축사
그 다음으로 박형규 목사의 다음과 같은 요지의 축사가 있었다:
제가 40주년 기념 때인가 언제인가 향린교회에 와서 설교를 할 때 제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70년대, 80년대를 통해서 서울 제일교회가 조그만한 등불 역할을 했는데 이제는 그 등불이 향린교회로 옮겨진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는 향린교회가 등불 역할을 열심히 하시오.' 그런 설교를 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입니다. 사실 서울 제일교회가 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서울제일교회가 뭐 할 때는 너무 캄캄해서 조그만 불씨라도 굉장히 크게 보일 뿐이었습니다.
지식에 있어서나 목회에 있어서나 또 사회활동에 있어서 정말 큰불인데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징역을 10년은 살아야 하는데 조금 해가 떠올까말까 하는 그런 시기에 한국에서 목회활동을 했기 때문에 그 큰불의 존재가 약간 희미해졌다는 것 뿐입니다. 사실은 큰불인데 아직도 날이 진짜 밝았는지 아직도 어두워지려는지 오락가락하는 그런 시대에 한국에서 큰불을 아무도 인정을 하지 않으니까 미국사람들이 저 태평양 건너서 한국에 이런 큰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든 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학위를 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말 홍근수 목사님이 명예신학박사학위를 받은 것을 감사하고 축하합니다. 그러나 명예박사 받았다고, 이제 큰 불 되었다고 그냥 주저앉지 마시고 더욱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크신 역할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답사
답사 차례가 와서 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인사말을 하였다:
사실 제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오늘 이렇게 여러분들이 많이 나오신 것을 보면서 정말 죄송한 마음도 있고 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실 지난 5월 달에 미국으로부터 명예학위를 준다는 연락을 받고 가까운 손 박사님과 몇 분 동지들에게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축하를 해야겠다고 말을 합디다. 학회에서 동지들간에 조촐하게 하는 것으로 알고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아무런 기척이 없기에 않하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요번에 잠깐 미국에 간 사이에 교회하고 연락을 해서 이런 거대한 행사로 되게 된 것 같습니다.
마침 며칠 전에 미국에서 친구 목사 한 분(홍순관 목사)이 와서 그 초청장을 보고 나서 매우 실망한 표정으로 '홍 목사답지 않은 일'이라고 한 마디 했습니다. '거절을 하고 하지 않도록 말렸어야 하지 않느냐'고 나무라는 말도 덛붙쳤습니다. 저도 '동감이다'라고 말을 하기는 했습니다. 그 친구는 바쁘기도 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만, 아마도 오늘 모임의 의의를 그리 두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앉아서 이 식을 지켜보면서 잘 됐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까닭은 사실 제가 조금이라도 한 일이 있고, 명예학위를 받을 자격이 있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향린 교인들을 비롯하여 바로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제가 없습니다. 또 제가 감옥에 가 있는 동안 저는 안에서 호강을 했습니다만, 여러분들은 저를 위하여 얼마나 육체적, 심적 염려를 하고 격려를 해 주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이 학위는 제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학위 까운이나 모자, 후드 같은 것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만, 가져왔다면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의식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오늘 여러분들에게 직접 학위를 되돌려주고 또 제가 감사의 뜻을 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을 해서 이러한 축하의 기회를 겸양의 뜻만 가지고 사양해 온 것이 너무 생각이 짧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을 분들은 향린교회 교우들이고 그리고 저를 평소에 아껴주시고 격려해 주신 여러분들입니다. 특히 제가 구속되어 감옥에 갔을때 정말 여러분들이 힘써주셨고 연대해주셨고, 마음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여러분들, 재야운동을 하시는 여러분들, 통일운동을 하는 교우들, 그리고 교회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동지로 함께 일해 오신 여러분들이 명예신학박사학위를 받아야할 당사자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오늘 여러분께 돌려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받은 영예, 그것은 모두 여러분들이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기회를 빌어서 1년 반 동안 교회를 떠나 가 있는 동안 특별히 기도해주신 것, 또 향린교회 교인은 아니지만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편지로 격려해주시고 또 어려운 면회를 오시고, 여러 가지 옥바라지를 해주신 재야 운동 선배님들과 동지들, 여러분 모두에게 오늘 늦었습니다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정말 스승이신 문 목사님, 목회의 대 선배이신 박 목사님께서 너무 과분한 축사를 해주셔서 너무 황송하기까지 합니다. 제가 지금 그만한 일을 했기 때문에 하신 축사라기 보다는 앞으로 정신을 차리고 일을 하라는 격려로 이해를 하고 감사하면서, 겸허한 마음으로 이 축하를 감사히 받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어머님의 무덤 앞에 서서
어머니
이 불효자 근수가 돌아왔습니다.
절하며 아룁니다.
그동안도 평안하셨습니까?
요즘 같은 요란한 세상에서는
여기 평화롭게 누워 계시는
어머님이 가장 부러운 분 같이 여겨집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았어도
용서받지 못할 이 불효자를
나무라시지 않으시고 그대로 반겨주시니
고마워요 어머니
어머니
이 세상이 그리도 더 이상 보기 싫으셔서
어머니는 안 기다리셨나요
무슨 급한 일로 그렇게 훌쩍 떠나셨나요
사랑하는 남편 홀아비로 남겨두시고
우리 십 남매, 이제 결혼하여
그 배가 된 자식들을 매정하게 아기 젖떼듯
떼시고 뒤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서둘러 떠나셔야 했나요?
어머니는 기다려 주시지 않으셨어요
이 불효자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어머니를 미국에 한번 모시고 효도할 때까지
아버지 어머니 함께 모시고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떠날 때까지
목회학 박사, 신학 박사, 그리고 명예신학 박사학위를
어머님께 선물로 드릴 때까지
그때까지 어머니는 못 기다리시고
그냥 훌쩍 떠나셨지요
이 불효자식은 그것이 한이 됩니다
하기야 건강 때문에
그때까지 더 기다리시기가 어려웠겠지요
그 허약한 몸에 단말마 같은 통증을
더는 감당하기 어려우셨다지요
그 마르신 몸이나마
더 이상 지탱하고 서 계시기에는
두 다리가 너무나 힘이 없으셨다지요
그것도 부족한 듯
병마는 마지막에
어머님을 중풍으로 쓰러뜨렸다지요
한쪽이 마비된 채
갑갑한 방안에 종일 들어 누워만 계셔야했다지요
그래서 태평양 건너편에 있는
이 셋째 아들에겐
마지막 작별의 기회도 주시지 않으신 채
서둘러 떠나셨다지요
이 불효자식은 그것이 한이 됩니다.
어머님은 참석하시지 않으셨어요
어머니의 자랑스러운 손녀 정화의 펜실바니아 대학교 졸업식에
그가 좋아한 신랑과의 결혼식에
어머니의 손자 성산의 트리니티 대학 졸업식에
어머니의 또 다른 손자 성봉이가
세계에서 제일 긴 서사시를 써서 읽었던
세인트 폴의 예술가들의 카페에
어머님은 참석하지 못하였어요
그것이 이 불효자는 한이 됩니다
어머님은
어머님을 위해 예약된 자리를 비우셨어요
셋째 며느리 영이
보스톤 대학교 신학대학을 졸업하던 식장에
그가 미국 연합 감리교단의 총회에서
그 영광스러운 목사안수 예배를 보던 그 식장에
그가 백인교회에 담임목사로 자랑스럽게 취임했던
부락톤의 펄스트릿트 교회 예배당에
어머님은 그 때마다 어머님의 자리에 안 계셨어요
이 불효자는 그것이 한이 됩니다
어머님은 또 나오시지 않으셨어요
이 셋째 아들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영구 귀국하던 김포공항에
서울 향린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던 그 역사적인 취임예배에
셋째 며느리가 세계 최초의 여성교회를 창립하던
서울 종로 5가의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 강당에
저희 내외가 한국에서 최초의 부부목사로 소개되던 기독교 방송국에
어머님은 이 모든 행사 때에 안나오셨어요
이 불효자는 그것이 한이 됩니다
어머니께서 더 오래 사셨다면
아들 하나 목사 되고
아들 넷이 장로 되고
막네 아들 안수집사 되고
며느리 하나 목사 되고
사위 하나 목사 되고
자식새끼 하나 축나지 않고 다 살아있어
어머니 슬하에
백 명에서 둘이 더한 백 이 명이나 된 것을
일가친척 교회 장로들 다 모시고
아버지 9 순 잔치 벌릴 때 참석하시어 흐믓해 하셨을 텐데
셋째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축시 써 바치고
온 가족들이 무대에 나와 춤추며 즐기던
이런 신나는 경사에
어머님이 계셨더라면
누구보다 더 먼저 나오셔서
신명나서 두둥실 춤을 추시지 않으셨겠어요?
또 목청 높여 창을 하셨겠지요
그러나 어머님이 그 자리에 안 계셨으니
이 불효자는 그것이 한이 됩니다.
그러나 어머니 잘 가셨는지 몰라요
아니 일부러 서둘러 떠나셨는지 몰라요
셋째 아들 불효자가 민주화 운동한다고
통일목회 한다며 떠들다가
수갑을 차고 밧줄로 묶이고
재판 받고 유죄 선고받고
마침내 감옥에 갇혔던
그 꼴을 보시기 보다
일직 이 세상을 하직하신 것이
잘 하셨는지 몰라요
그러나 어머님이 조금만 더 오래 사셨더라면
1년 반에서 하루도 감함이 없이
형기를 끝까지 다 살고 난 후
'통일의 사도'라고 환영받으면서
감옥 문을 당당하게 걸어나오던
그 날 새벽의 감격적인 순간을
보실 수 있었을 터인데요
그 때는 차라리 춤추시지 않으셨을까요?
그 아들을 '자랑스러워'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러나
어머님이 안 계셨으니
이 불효자는 그것이 한이 됩니다
그러나
어머님은 그 모든 자리에 계셨고
그 증인이 되셨습니다.
기뻐하시고 춤추셨지요
살아있는 영이 되시어
미국으로 이스라엘로 서울로
자유자재로 날아다니시면서
보셨지요
신나셨지요
춤추셨지요
어디든지
저와 함께 해 오신
어머니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를 사랑하신 어머니
(석방된 후 부산 시립공원묘지에 있는 어머니의 묘지를 참배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