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잉태하여 낳는 여자


웃을 얘기가 아니고, 여자들에게 부러운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을 여자는 아니를 맣는다는 것입니다. 나도 아이를 가져봤으면 좋겠습니다. 한 생명을 자기 품에 안아보고 그게 점점 자라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겠느냐, 생각해 봤습니다. 누가 그런 것을 쓴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육아일기가 아니라 임신일기를 써보면 어떻겠냐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과정 전체를 써보면서 그 10개월 동안에 한 생명이 자기 속에서 자라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그런 면에서 남자 된 것을 불행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기 갖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더우기 해산의 수고라는 것이 얼마나 심한지 알기나 알고 그런 얘기를 하는가? 해산한다 할 때에는 죽음의 과정을 거치고 또 낳다가 죽는 사람도 많지만, 남자들은 그 고통을 변비하는 고통보다 조금 더 하겠지, 그정도로 알지만 그것이 아닌가 봅니다. 정말 죽었다 살아납니다. 그래서 어릴 때에도 그런 생각을 했지만, 왜 그 귀중한 생명을 낳는 과정에 한번 죽었다 살아나는 고통의 과정을  넣었나, 그게 좀 이상하다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땐 하느님을  찾지 않을 때인데도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한 생명 곧 기쁨의 상징이  세상에 태어나려면 반드시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만 나올 수 있게 했다는 것은 참으로 뜻깊은 것입니다. 아무리 약이 발달했더라도 아프지 않게 낳는 법을 쓴다면 이 본뜻을 위배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실제로 경험하게 하고 알려주는 데 굉장한 의미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를  보면 존경심을 가져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당신도 아이를 가져봤지 하고 생각하면 갑자기 생각이 달라집니다. 당신은 최소한으로 아이 하나를 낳았으면 한번, 둘 낳았으면 두번 죽음의 경험을 했다,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죽음의 경험을 한 존재이다,   남자 녀석들 중에는 평생 그런 경험 못해본 사람들이 많지만 여자는 적어도 한번 했다고 하니까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이런 중요한 인생의 문제를 담지하고 견디어냄으로써 인간의 역사를 꾸며 나가는 여자의 의미, 우리는 늘 이러한 것을 간과하는 잘못을 저질러 온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듯이,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민중교회에서 자기들끼리 성경 읽고 문답한 것에 제가 잘못된 부분 혹은 좀 보충할 부분은 격려하면서  매일  기록을 했던 책이 나왔습니다. 오늘 저는 여기서  배운 한 면을 얘기할까 합니다. 창세기 21장과 22장을 함께 읽은 것은 성서학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하지 못하는 일인데 그들은 이를 무시했더군요.여기에 제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사실은 몇 장 몇 장 하는 것, 거기다 절까지 붙이고 또 위에다 제목까지 붙인 것은 모두 나중에 만든 것이지 원래 원문에는 없습니다. 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얘기를 계속해서 엮은 것입니다. 사람이 얘기를 계속해서 내리 하면 반복하는 것도 있고 액센트를 주어 강조하는 것도 있고 문법이 좀 틀리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써서 하는 것과 다른 점이 거기에 있습니다. 마주앉아 얘기하듯이 얘기꾼이 얘기하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면 어디에 엑센트가 있다,  어디에 촛점이 있다, 그게 아니고 얘기 전체가 물 흐르듯이 그 자체가 삶입니다. 이런 얘기를 엮어 놓은 것을 딱 끊어서 21장 또 몇 절 몇 절로 나누어 놓고 또 제목을 붙이니까, 우리가 대개 성서 읽을 때 내용을 보기 전에 "아 이건 이런얘기구나" 하는 이해를 갖고 그 안에서만 읽어 버리고 맙니다. 그 잘못을 이들은 무시해 버리고 절수를 아주 없애버리고, 장이라는 것도 보지 않고 이걸 하나의 전체에 응결된 유기적인 얘기처럼 읽었습니다. 그러니 전혀 생각지 않았던 다른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전에는 이 두 본문으로 설교를 한두번씩 한 것입니다. 21장에 일어난 얘기와 22장에 일어난 얘기는 사실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주축으로 하고 일어난 사건들인데 그걸 따로 따로 봤지 한데 묶어 보지 않았습니다. 또 그렇게 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얘기하는 사람은 그렇게 했습니다. 한 사람의 운명에 두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 그것을 한 얘기로 보아 읽었던 것입니다. 한 사람 아브라함,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믿음의 조상이라고 존경을 받고 있는 아브라함, 그가 윤리적으로 존경받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믿음의 조상이라고 존경을 받는 아브라함에게 큰 사건이, 죽음과 같은 고통을 거친 큰 사건이 두번 연속해서 일어나는데 그게 21장과 22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그의 씨를 받은 하갈이라는 여자를 통해서 고통이 승화되고, 두번째는 아브라함 자신이 겪는 얘기로 되있습니다. 둘 다 자식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아픔입니다. 아마 아브라함이 당한 시련 중에 이렇게 가슴에 맺히고 살을 깎는 것 같은 아픔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역사의 근거를 찾기는 어렵습니다만, 처음의 얘기는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으니까, 단산이 될 때까지 본부인인 사라에게서 아이를 못낳으니까 결국 사라의 몸종인 이집트 여인인 하갈의 몸을 통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아이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사라가 고뇌하면서 아이를 낳게 해주라고 주선했다고 되어 있지만 그건 아브라함 중심으로 만든 말일 수 있습니다. 뭐 사라가 주선하고 그럴 것 없이 적당한 때 아브라함이 너라도 통해서 씨를 받아야겠다고 씨받이로 생각하고 낳았는지 모릅니다. 그때는 그렇게 관용한 사라일 것도 없고 그렇게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어쨌든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동서를 막론하고 자식을 못낳으면 죄에 해당될 정도로 남녀를 막론하고 혈통을 잇지 못한다는 죄의식이 상당히 컸습니다. 우리 한국은 물론 그렇지만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단은 하갈이 이 죄책의식을 모면해 주었고, 사람이 겪기 가장 고통스러운 해산의 수고를 해서 아이를 낳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대가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단산됐던 사라가, 무슨 해괴한 일인지 이상한 자궁인지, 갑자기 어떻게 되어서인지 사라가 애기를 가졌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려고 하는 것인지 하느님의 장난같기도 하고 .... 갑자기 백살이 거의 다 된 사라가 애기를 가졌다, 아마 질투가 극단에 이르면 생리적 변화가 일어나는지, 하여간 애기를 낳았는데 그게 바로 이삭입니다. 이것은 본부인의 애기입니다. 후에 낳았지만 정처의 아내이니까 이건 진짜 아들이고 이스마엘은 먼저 낳기는 낳았지만 여전히 서자입니다. 이미 그때는 일부일처제가 아마 법적으로 공인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통해서 발전된 민족과 이스마엘을 통해서 발전된 민족이 나직도 서로 대결하고 있습니다. 아랍사람과 이스라엘 사람과의 대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정통성이 없는 몸종인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의 후예들이다. 사막의 종자들아, 우리가 이삭의 전통을 이은 진짜 정통이다. 아버지는 같지만 그래도 뭔가가 다르다." 이렇게 평행선을 이뤄서 오늘까지도 이 관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해결 못하고 영원한 원수같이, 피는 같은데 원수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여간 처음 얘기는 서자의 얘기입니다. 서자 이스마엘을 중심으로 얽힌 얘기이고,  두번째 얘기가 소위 정처에게서 난 전통을 이은 이삭에게 얽힌 얘기입니다. 그런데 처음 얘기에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추방해야 될 그런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그의 정처가 단산할 때까지 애를 못낳았으니까 그대신 낳아준 여자가 하갈이고 또 그런 의미에서 귀중한 존재가 이스마엘입니다. 혈통을 잇는다는 의미에서도 그렇습니다. 아마 아브라함도 그때 전통에 상당히 얽매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 강박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애기를 낳으니까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서 그 하갈을 내쫒으라고 했다지만, 아브라함 자신도 남자의 편에서 보면 비인간적으로 자기 자식을 낳아준 이방 여인과 그녀가 낳은 아들까지도 내쫓았다는 것입니다. 잘못됐다면 끝없이 잘못된 일입니다. 죽음을 내놓고 자기 자식을 낳아준 그 아내도 아내지만 그 자식까지 죽음의 세계로 몰아낸 것입니다. 광야로 내쫓았다는 것은 곧 짐승들에게 물려 죽어도 좋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두 장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성서에는 아브라함이 그 일을 저지를 때 굉장히 마음이 괴로웠다는 표현은 있습니다.   그러나 하갈의 아픈 마음을 묘사한 데는 한 군데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이 아프다고 하면서 대책도 강구하지 않고, 광야로 나가면 이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 물과 양식을 주어서 내쫓았습니다. 그게 애비 된 자로서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것이 그대로 반영되면서 하갈을 중심으로 얘기는 계속 전개됩니다. 하갈은 그 아이를 데리고 정처없이 얼마를 가다가 광야에서 헤메고 헤메다가 먹을 것도 다 떨어지고 마실 물도 다 없어졌고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됐습니다. 굶어서, 목이 말라서 죽게 되었습니다. 무슨 짓인들 하지 않았겠습니까? 할 일은 다 해 봤겠죠. 피도 먹여 봤는지 모릅니다. 죽어가는 자식을 차마 보지는 못하겠으니까 활을 쏠만한 거리에다 아이를 놓고 그쪽을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울었다는 얘기는 문학적인 상상을 한다면 끝없는 얘기가 나올 것입니다.


하갈은 죽을 것을 호소한 것입니다. 차라리 죽여 주십시오. 그때 한 소리가 들립니다. "걱정마라. 하느님께서 네 아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다. 어서 가서 아이를 일으켜 주어라. 내가 그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떨어져 거리를 두고서 아들을 보면서 울고 있는 하갈은 아마 그 아이가 죽은 순간 자기도 같이 죽으려고 마음 먹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다른 길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죽는 길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몸도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다른 지혜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극단에 몰리면 그렇게 됩니다. 그때 한 소리가 자기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들린 겁니다. 하느님의 소리가 들렸다고 성서가 말한 순간이 하갈에게 있어서는 절망에서 체념을 딛고 일어난 새로은 희망의 순간입니다. 처음에는 "너는 태어나서는 안될 인생이었다. 너는 서자, 나는 이집트 여인으로서 몸종으로 더럽혀진 여자, 우리에게 무슨 장래가 있겠느냐? 차라리 함께 죽자." 그런 그에게 "서자는 사람이 아닌가. 서자라고 살 권리가 없고 미래가 없으라는 법이 어디있느냐? 서자가 멸시받는 그 사회가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천한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고?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이를 악물고 살아야지." 이런 심정이 그를 체념 속에서 벌떡 일어나게 한 것입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죽을 이유가 없다." 그럼으로써 하갈은, 하느님의 소리라고 했습니다만,  씨받이 하갈이 아니라 한 민족의 어머니가 됐고, 끝끝내 그 아이를 살려서 이집트 사람과 결혼을 시켜 며느리를 맞아들여 사막에서 사는 큰 민족의 조상이 되게 했습니다. 하갈이 겪은 죽음의 고비, 아브라함도 함께 겪어야 할 죽음의 고비가 하갈을 통해서 묘사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 민족이 형성되었습니다. "살아야 되겠다" 하고 움직였습니다. 희망을 가지니까 눈이 띄어지는 법입니다. 그때 그의 눈에 사막의 오아시스가 발견됐습니다. 이래서 새 생명을 얻고 광야에서도 살 길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두번째 이삭의 이야기는 아브라함 자신이 겪은 일입니다. 이것을 저는 연결해 서 생각하지만 성서학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것입니다. 난 아브라함이 굉장히 괴씸하게 여겨기도 합니다. 씨받이의 역사처럼 비참하고 기가 막힌 일은 없는데, 게다가 씨받이가 자기 새끼를 낳았는데 그들을 내쫓은 아브라함은 나쁜 사람입니다. 하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아브라함이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가슴에 맺힐 죄책감이 그대로 계속되지 않았겠습니까? 그 하갈의 얼굴이, 그 이스마엘의 얼굴이 그의 기억에서 지워질 수 있겠습니까? 그대로 그가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꼭 벌을 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22장, 곧 이삭을 바치는 얘기를 읽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생각입니다.


여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그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법이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심청전을 보면 있듯이 무슨 큰 우환이 있으면 사람을 잡아 바칩니다. 특별히 내 자식을 잡아 바치라고 할 때에는 무슨 배경이 있다고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내 상상이겠지만, 이스마엘과 하갈에게 행한 그 죄를 끝끝내 속죄할 길이 달리는 없습니다. 가장 아픈 것을 당해봐라,  뼈와 살을 갈아 내봐라, 그러기 전에 너는 미래가 없다, 무서운 저주가 올 것이다,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성서는 물론 그렇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를 시험해 보려고 그랬다고 되어 있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아이를 잡아 바치려고 그 아이를 끌고 장작을 패서 메고 가는 그런 애비가 어디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이삭은 약속의 자식입니다. "너를 통해서 한 민족이 하늘의 별과 땅의 모래와 같이 번성할 것이다"라는 약속이 주어져 있는 그런 자식입니다. 자기 아들이면서 자기 아들이 아닌, 한 민족의 조상이었습니다. 그를 바쳐야 하는 그 배후에는 역사적으로 구체인 무슨 큰 일이 있어야만 했겠지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키에르케골은, 그들이 가는 도중에 말이 없었다, 침묵했다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 했습니다. 윤리를 넘어선 그런 상황에 무슨 말이 있겠느냐, 말을 못했다, 아내에게도 말을 못했다응 겁니다. 그저 한두 마디 말이 나옵니다. 장작을 지고 가는 아버지에게 이삭이 "아버지!"하고 부릅니다.  "왜 그러느냐. 내가 지금 듣고 있다." 아마 얼굴을 제대로 못 쳐다봤을 것입니다.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제물을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폐부를 찌르는 질문이 어디 있겠습니까? 차라리 내가 죽지. 그때 그는 "제물을 드릴 어린양은 하느님이 손수 마련하신단다"고 답했습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표현했고 히브리서는 "하느님은 죽어도 살릴 것임을 믿었다"는 해석을 따르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자식을 죽이는 애비가 된 아브라함은 이 순진한 질문에 정면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피했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가슴, 이 애비의 가슴을 아마 상당히 상상을 많이 해도 좋을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대답할 말이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운명은 하갈과 이스마엘이 당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극단적인, 아주 극단적인 비극입니다. 하갈은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죽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울고 있지만 아브라함은 자기 손으로 자기 칼을 들어서 자기 새끼를 찔러 죽이는 그런 위치에 처해 있습니다. 인과적으로 보면,  이스마엘과 하갈에게 했던 그 죄를 이 길로 밖에 해결할 수 없으니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이렇게 보면은 아브라함은 몹시 불행한 남자입니다. 두 자식을 이렇게 다 죽여버리다니! 한 사람은 내쫓아서 죽이고 한 사람은 제 손으로 찔러 죽이는 이런 처참함 상황에까지 몰아갑니다.


제단 위에 가져간 장작을 쌓고서 그 위에 아이를 얹어 놓고 이제 칼을 드는 순간까지 아이는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마음은, 그가 사람이었다면,  그 아이의 아비라면, 그를 찌르기 전에 그 속은 다 썩었겠죠. 아니다!  이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애비가 자식을 죽인다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다! 사람을 제물로 쓴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아무리 관습이 그렇고 종교적 계율이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은 안된다! 하느님이 원한다? 그 따위 하느님이 있을 리가 없다! 그건 말도 아니다! 만약 그런 하느님이라면 나는 거부하겠다! 무슨 다른 길이 있을 것이다!  분노가 치미는 순간, 운명에 저항하는 순간, 눈이 뜨인 것입니다.


왜 사람을 잡아 바칩니까? 다른 방법을 찾자, 그래서 양을 발견했습니다. 양을 잡아 바쳤습니다. 하느님에게 거역하는 것이 돼도 할 수 없습니다. 성서는 물론 천사가 나타나서 "잠깐 멈춰라. 그럴 필요 없다. 저기 양이 있으니 대신 잡아 써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척도로 그렇게 얘기하지만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반드시 그렇게만 볼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조금은 대항을 해야 좋아 하십니다. 반항을 좀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덮어놓고 "예예" 하다가는 오대양 사건이 일어나고 별별 사건이 다 일어납니다. 내가 소화할 수 없는 일은 "안됩니다. 날 이해 시키십시오", 그쯤해야 우리 자식들도 대견하지 그저 "예예" 하면 그것처럼 싱겁고 희망이 없고 슬픈 것이 없습니다. 자식들이 대항할 때가 제일 귀엽습니다. 이 사건이 아마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는 역사의 종지부를 찍은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것을 기념하는 얘기가 이렇게 신앙적으로 표현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이 두 얘기를 보면 거의 유사한 내용입니다. 물론 그 안에서 보면 남자 위주의 눈에 거슬리는 서술들이 있습니다. 하갈은 아무런 저항, 권리도 없고 아무 말도 없습니다. 이스마엘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하갈에게 뒤집어 씌운 그것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사라마저도"그래도 너하고 나하고 사이에서 난 자식인데, 이 아이를 목숨을 내놓고 났는데...."  그 아이를 죽이려고 데려가면서 부인한테 의논하는 장면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윤리를 넘어선 일이니까 차라리 침묵이 낫다고 그렇게 해석하지만 여자가 완전히 무시된 것입니다. 애비의 절대적 결정권이 반영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주류와 비주류, 중심과 주변이라는  사고가 전제됩니다. 역시 주류는 처에서 난 이삭이고 비주류는 몸종에서 난 서자, 그것은 영원히 평행선을 긋고 함께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꼼짝을 못합니다.   이것이 비극을 낳은 것입니다. 여기에 저항을 해서 이러한 관성을 혁명화 하느냐, 아니면 거기에 복종을 해서 비극을 일으키느냐, 이런 단계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서는 그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서에서 야훼는 결코 사라의 편에만 서지 않았습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하갈아, 눈을 뜨고 일어나라. 네 근심인 아이, 그를 서자라 하지 말아라. 그를 통해서 내가 큰 민족을 만들 것이다. 똑같은 축복을 내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자의 분노라는 것이 대개 기성체제에 저항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동학을 창시한 최치원도 서자인 것처럼 알만한 인물 중에는 대개 서자 출신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여간 하갈이 서자를 길러서 한 민족을 형성했고 아브라함은 제물을 바친 악습에 저항해서 또 한 민족의 조상을 만들었습니다. 가히 혁명이라면 혁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두가지 일이 한데 섞이면서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씨받이에 불과하던 하갈이 서자를 앞세워서 한 민족을 만들고, 관습과 전승된 습관에 끌려다니던 아브라함이 분연히 저항해서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는 악습을 거부했습니다.


이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나 하는 것을 성서는, 하느님이 천사를 통해서 눈을 현재에서 미래, 또는 여기에서 밖으로 돌리게 했다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나 안에서 당하는 그것만 보지 말고 밖에서 계기가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닫힌 문을 열어주는 문고리는 언제나 밖에 있습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더군다나 그렇습니다. 감옥의 열쇠는 밖에 있지, 안에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런 곳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열쇠는 밖에 있습니다. 무언가 밖에서 충동, 힘이 와야 합니다. 그러나 밖의 소리는 내 안에 있는 소리, 내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눈, 가능성과 유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는 다른 눈, 또 하나의 다른 눈을 뜨는 순간입니다. 뭔가 캄캄하게 막혀만 있어 보이는 그런 눈, 그런 눈을 감고 열린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뜹니다. 그것은 바로 내일을 보는 그런 눈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은 조금도 다른 데를 못보고, 해방을 못보는데 있습니다. 꼭 죽는 길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자살자의 현장을 몇번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당하고 있는 그 순간에서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는 길은 보지 않습니다. 이것 아니면 죽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나 하갈을 통해서 보나, 이 절대 절망적인 상태에서 눈을 돌려서 내일을 볼 수 있는, 옆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뜨게 한 분이 있는데 그가 바로 하느님입니다. 성서는 그렇게 고백을 합니다. 누가 말했듯이 "닭의 목을 비틀어도 아침은 여전히 온다"라는 이런 이야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굉장한 큰 신앙을 가졌던 한국인들의 민족적인 신앙과 같은 것, 그런 것이 있는 한 죽으라는 법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옥중생활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이, 또 굉장히 힘드는 것이 내가 밖의 생활과 단절돼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거기서 신문이라도 본다지만, 우리 때는 신문은 고사하고 밖에와는 완전히 단절되어 부인이 고무신을 바꿔 신은지 아무도 모릅니다. 거기 안에서 고통하는 사람이 그것을 걱정합니다. 더군다나 "너희들은 빨갱이들이니 아이들까지 살 수 없게 됐다", 이런 협박을 합니다. 관계가 자꾸 좁아지니까 점점 그것이 비통해 집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내일이 있다. 옆에 있다. 밖에 있다." 이 희망이, 크리스챤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홍목사가 이번에 정말 대학에 입학을 했습니다. 함석헌 선생이 제게 "학교도 못가본 주제에..."라고 얘기하곤 했는데,홍목사도 평생 학교라는 곳을 못가보다가 이제 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감옥에 들어간 사람을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고 "서울대학 들어가기도 힘든데 참 거기 들어가다니 머리가 좋구나"하고 생각을 하지, 동정은 안합니다. 우리 홍목사도 해산하는 고통을 겪고 있는데, 이제 큰 아이를 낳을 겁니다. 아마 통일을 낳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이것이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몸으로 겪으면서 새로운 것을 있게 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되도록이면 여러분, 연락을 하고 밖에서 노크를 해줘야 합니다. 잠깐 면회하고 편지보내고 하면 굉장히 하루를 즐겁게 보냅니다.


오늘 우리 현실이 아브라함이나 하갈이 서있는 현실과 꼭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 정신이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선거에 이겨놓고 저들이 기고만장해서 천하에 무서운 것들이 없습니다. 오래 못갑니다. 우리는 수난을 좀 겪어야 합니다. 아직도 수난이 모자랍니다. 그런 걸 용서하는 우리가 아직도 뭔가 죽음의 경험이라는 것을 못한 증거입니다. 죽음을 거친 기쁨, "고난을 통한 기쁨", "


죽음을 통한 기쁨"이 진짜지, 그렇지 않은 기쁨은, 그렇지 않은 승리는 진정한 승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한 부활, 그것 아니면 부활은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부활은 있을 수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