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목사님이 감옥에 있는 동안은 한달에 한번씩 이라도 설교를 해 달라고 해서 꼼짝 못하고 응했습니다. 그렇게라도 참여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굉장히 요새 흥분을 했습니다. 흥분하면 안되는 건강상태이므로 되도록이면 화를 안내려고 합니다. 본문이 화내는 얘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참고 참으면서 억제를 하면서 뉴스의 내용을 전하려고 합니다.


제목이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성서에 있는 예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 있는 말씀은 특별히 긴데, 그래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심하게 책망하셨다는 증거는 마가복음에도 그런 중요한 요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마태가 즐기는 7가지로 나누어서, 7번의 "화가 있으리로다"라는 책망의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가 그 극단의 독설가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걸 우리가 어떻게 소화를 할 것인가. 어리석고 눈먼 놈들아, 위선자들아, 회칠한 무덤들아, 뱀들아, 독사새끼들아, 이게다 예수가 한 말입니다. 무거운 짐은 남의 어깨에 메우고 자기 손가락은 까닥도 않하는 놈들, 탐욕과 방종으로 채워진 놈들아, 저주를 받을 놈들아 ...


아벨이 피로부터 땅에 흘린 모든 의로운 피가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너희는 지옥에 가고 말 것이다. 너희는 심판을 반드시 받을 것이다. 대충 보면 점잖은 분이 할 수 없는 이런 지독한 말을 총동원했습니다. "카알라일"이라는 사람이 [사람평론]을 쓰는 데 유명합니다. 그중에 마호메트에 관해서 쓴 "마호메트 전"이 있는데 거기서 마호메트를 평하는 중에 한귀절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마호메트가 위대한 점의 하나는 "정당한 화"를 낼 줄 아는 사람이다. 즉 의분을 폭발시키는 사람이다." 그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서에 특별한 존재들인 예언자들의 특성 중에 간과할 수 없는 점은 바로 그 분노입니다. 이른바 귀한 분들은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지거리를 잘하는 것이 예언자들의 특성의 하나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의 예언자계열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에게 당하는 사람들, 무능한 사람들, 병든 자, 약자, 짓밟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머니의 품처럼 무조건 부드럽기만한 그 예수가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고 썩은 갈대도 꺾지 못하는 감상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부드럽고 따뜻하기만 한 그분인데, 반면에 남을 이유없이 억압하고 군림하고 무자비한 자들이 욕심에 사로잡혀서 눈이 어두운 상태에 있는 그런 것을 볼 때 그토록 분노해서 마치 감정을 조절할 수 없는 것처럼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말은 다 동원해서 욕설을 합니다. 원래 예수는 양반이 아니고  쌍놈이니까 말은 험하기는 험하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씨에 비해서 도무지 주워 담을 수 없는, 특별히 그때 유대교의 지도자들의 귀에는 말자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언어였습니다.  까닭은 예수는 너무도 분노에차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 23장에 책망의 일차적인 대상은 바리새파들과 랍비들로 삼고 있습니다. 랍비란 율사들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변호사나 검사, 판사에 해당되는 법을 다루는 전문가들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이 원래 예수당시의 것이라고 보면은 결코 바리새파나 율사들에 국한 시키지 않고 유대교 일반에게 행하는 책망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유대교라면 단순히 종교 집단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는 유대민족을 대표하는 두 상징적인 기관이 있었습니다. 하나가 "성전"이고 또 하나가 유대민족 자치의 최고의 기관이고 상당한 권한을 가진 소위 "산헤드린"이었습니다. 이 성전과 산헤드린 두 기둥 위에 서있는 장의 대표가 대사제 입니다. 성전의 대사제가 곧 산헤드린의 국회의장같은 역할을 동시에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사람들 자체도 산헤드린을 민족의 대표기관, 곧 국회에 해당하는 언어를 써서 공한을 보낸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속국임에 틀림없으면서도 산헤드린에 장인 대사제를 향해서 거의 국가의 원수같은 언어를 써서 대우한 그런 공식문헌들을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산헤드린을 구성한 것은 사제계급과, 씨족을 대표하는 장로들, 즉 임의의 장로들이 아니고 어느 씨족의 장입니다. 동시에 그런 부자들이면서 농사지을 땅을 많이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아까 말한 법률을 책임진 율사 이른바 서기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세 단체가 합해서 지금으로 말하면 국회를 구성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쓰여진 것이 90년 이후라고 보통 잡습니다. 90년이라고 하면 예루살렘은 이미 함락되고 성전은 다 몰락됐으니까 자동적으로 사제계급은 없어졌고, 그걸 중심으로 산헤드린에 한 일부 중요한 계급이었던 장로들, 소위 부농들은 쇠퇴하고 율사들만 남아있었습니다. 그것이 유대교를 형성을 해서 마태복음이 쓰여질 때에는 율사들만이 바로 유대교를 대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화있을 진저 바리사이와 서기관들"로 집중하고 있지만 원래 예수님이 대상으로 한것은 그렇게 국한 된것이 아닌 유대교 일반, 유대교를 지배하고 유대민족에 군림하는 상부를 향해서 겨눈 책망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율사들에게만 축소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태복음이 형성될 때, 아니 70년 조금 지나서 74년에 로마가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함락시켰을 때 바리새파들이 중심이 되어서 얌난이라는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한 구석진 곳에 로마에게 아첨을 하고 타협을 해서 우리도 당신들의 그 점령권을 인정하고 협조를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거기에 학교 비슷한 것을 설립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경전을 완성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고 동시에 거기에서 이젠 국권을 완전히 잃어 버리고 분산된, 나라 없는 민족을 율법으로 어떻게 얼구어서 정신적인 지주역할을 할 목적으로서 이른바 성서, 율법을 기간으로 하고 그것만으로 생활전체를 적용할 수 없으니까 그것을 풀어서 생활 규율을 만들었습니다. 후기 유대교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러가지 세칙들을 만들어서 안식일에는 이렇게 해야 한다, 먹을 때는 이렇게 해야 한다, 결혼할 때는 이렇게 해야 한다, 이혼법은 이렇다 일일이 다 제정을 해서 국민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로 이들이 마태가 지금 겨누는 대상입니다. 그런데 화가 있다 하고 말하는 내용들 전체를 총 집약을 해서 말하면 두 특징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가 제일 중요한 것으로 저들이 주변적인 것과 본체적인 것을 전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비본질적인 것으로 본질적인 것을 깔아 뭉개고 무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제일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중심으로 삼은 본문인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통째로 삼킨다는 데 아주 분명하게 집약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루살이를 모기라고 번역해도 좋습니다. 곤충들이 달라서 어느말을 써야할지 모르겠지만 아주 조그만 동물을 말합니다. 이것은 큰 것은 그냥 술술 넘기고 조그만 것만 붙잡고 늘어지고, 송사리 때들만 못살게 굴고 고래나 코끼리 같은 것은 술술 통과시키는 이런 일련의 모든 행위에 대한 무서운 언어입니다. 즉 저들은 본질적인 성서를 해석해도 본질적인 데서  떠나서  말초 신경적으로 지나치게 부분적인 것을 확대해서 사물의 핵심을 무너뜨리는 그런 우를 범할 뿐 아니라 민중 위에 군림하고 나아가서는 그들을 억압했기 때문에 예수는 분노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아는, 마가복음 2장에 있는 안식법 같은 것, 예수와 바리새파들과의 대결이 그 전형적이 예가 되겠습니다. 안식일은 쉬는 것이다라는 대전제를 그들은 꼭 잡습니다. 안식일은 쉰다. 이 측면만을 극대화해서 결과적으로는 안식일 법은 가난한 사람에게 아주 무거운 짐이 됐고 나아가서는 그들을 정죄하고 그들을 완전히 소외시키는 덫의 효과를 하게 했습니다. 예수 일행이 안식일에 밀밭사이를 지나가다가 밀의 이삭을 잘라서 그 알을 뽑아 먹었습니다. 이를 본 바리새파가 저들이 안식일법을 위반했다고 단죄한 것입니다. 남의 물건을 왜 훔쳤냐고 한다면 모르지만, 그러나 배가 고파서 밀알을 훑어서 입에 넣어 씹는 것이 결국 노동이 아니냐. 그건 추수하는 행동과 같은 것이니까 안식일법의 위반이라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루살이는 걸러먹는다는 겁니다. 본질을 떠난 것입니다. 여기 단호하게 예수는 맞섭니다. 그는 안식일의 본래 정신을 내세워 그 지엽적인 것으로 본래정신을 말살한 그들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안식일법은 실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설정된 것입니다. 일생동안 쉴새 없이 일하는 자들에게 쉴 권리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주려고 한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가진 자, 권력있는 자에게는 안식일 법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까닭은 그들은 특별한 날을 정하고 쉬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노동하는 사람들, 특별히 남의 밑에 노동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남을 부려나 먹고 일 하나도 않하는 놈들에게 안식일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다까? 그래서 23장에 그들의 행패를 잘 폭로한 것이 그들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메우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욕설을 한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안식일에 쉴수 없는 것이 오히려 문제였습니다. 하루하루의 양식도 구하기 힘든데 안식일에 쉴려고 미리 양식을 준비할 여분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쉴려고 해도 쉴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그러니까 예수의 제자들도 바로 그중의 하나인것이죠 밀이삭을 비벼서 먹는 정도로 배가 고팠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쉬는 법을 어겼다고 공격하는게 이게 바로 모기를 걸러 먹는 행위죠. 그럴때 저들은 단지 안식일을 쉬어야 한다는데 완전히 매어버리고 쉬라는 것은 왜 쉬라고 했는지를 묻지 않는 그 본뜻은 결국 사람을 위해서인데 특별히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그랬던 건데 그건 묻지 않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소경이요 무지한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 종교, 사회에서도 이와 꼭 같은 현상을 그대로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특히 교회가 크면 클수록 너무나 지엽적인 것을 가지고 예수의 본뜻을 유인하는 것을 권리처럼 알고 있는 현상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에서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들이 뭔가,교인들에게 귀중한 돈을 걷어서 무엇에 쓰고 있는가? 정말 지엽적인 데 대부분을 낭비하고 맙니다.


본문에 있듯이 박하나 회향이나 근채에 십일조는 드리면서 율법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정의나 자비와 신의를 소홀히 하고 있는 것 그게 지금 한국교회꼴 그대로 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너무나 교회 현실을 잘 알기 때문에 일일이 이 자리에서 지적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크리스챤 중에서 바로 크리스챤이라는 것을 고집함으로써 또는 교회를 위한다는 명분으로써 편협되고 위선적이고 기만적이고 한마디로 말해서 크리스챤이 되기 이전에 사람되기를 거부하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을 추상적으로 집약하면 사랑 아니겠어요? 그누구도 부인을 못하겠죠! 그런데 이것을 비웃을 만큼 기독교가 세계 역사에서 피를 가장많이 흘린 종교로 둔갑을 했습니다. 그리고 싸움을 제일 많이 하는 게 기독교입니다. 어디 가든지 싸움을 하는, 지엽적인 곳에 붙어서 사랑에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왜 사랑 본질에 들어갈 새 없이 주변문제에 머물러 싸우는 것입니까?


유대교가 그랬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가 독사의 새끼라고 했겠어요? 한마디로 구약도  가난한자를 위해서라는 것이 상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안식일 법을 어떻게 해석해서 법으로 정했느냐 하면 사실은 가난한 자들을 돕지않겠다는 것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삼고자하는 의도도 있습니다. 거지들이 동냥을 오면 주기 싫으면 주기 싫다고 하면 좋은데 안식일에 일 할 수 없기 때문에 거지를 구제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동냥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거지에게 물건을 건네주는 것도 죄다. 쉬는 것을 거역하는 것이다. 건네주는 것도 내방에서 내손이 방밖으로 나가면 그것은 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안식일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대신 밖에서 손이 들어오면 그사람이 책임이 있고 거기에서 건네주면 책임이 없다. 이걸 왜 만드는줄 아세요? 거지가 와서 동냥을 주십시오 할 때 유대교에서 거절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럴 때 내가 손을 밖으로 내주지 않으면 않줘도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으로서는 고르반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이건 하느님에게 바치는 거다 하고 정해놓습니다. 그러면 부모가 굶어 죽어도 안 줘도 됩니다. 이렇게 간교하게 피할수 있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지엽적인 것에 매달려서 안식일 자체의 본래의 뜻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으면서 그걸 오히려 사람을 정죄하는, 그래서 그 사회에서 소외시키는 역할을 하게한 그들을 향해서 예수는 분노를 터뜨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주변적인 것을 가지고 본질적인 듯이 결사적으로 싸우는 그리스도교를 우리는 주변에서 보고 있습니다. 이걸 예수는 그렇게 싫어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저들이 모세의 율법을 잘 외워서 알기도 잘아고 말도 유창하게 잘하고 그래서 스스로 지도자고 선생으로 군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과 가르침과 행동은 전혀 달랐습니다. 행동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를 지내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별개의 문제로 완전히 구별시켰습니다. 자기가 실천하지 못하면 최소한 실천하지 못하거나 않하는 사람들을 정죄하지는 말아야지요. 정죄할 권리가 그들에게 없는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도 그런 약점을 아니까 결국 어떤 식으로든지 위장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 율사들이 장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사람의 눈을 가리우는 해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눈을 속이는 전문가가 되버렸습니다. 이런 것들을 향해서 예수는 회칠한 무덤같다고, 속에는 송장이 썩어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번지르하게 만들어 놨다고 책망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태공동체는 지금 커가고 있는 - 그 때까지는 교회가 따로따로 독립된 교회로 있다가 하나로 합해서 카톨릭화 되고 공교회가 되가면서 또 성서도 캐논화가 되가면서 점점 성격이 바뀌어져 가서, 해석이 달라지기 시작하면서 예수의 본래의 뜻을 왜곡하고 지엽적인 것을 가지고 싸움을 일으키고 그 말씀의 뜻이 무엇 때문인지를 묻지 않고서 싸움을 하는 크리스챤 자체에게 반성의 자료로 경고로 삼은 것입니다. 돌아서 자기 내부를 향해서 반성하는, 경고하는 말씀으로 삼는 것입니다. 간접적으로 크리스챤에게 향한 책망이기도 합니다. 그 중에 특별히 지도층에 있는 크리스챤, 교회 안에 지도층인 자들에게 공격의 화살을 던진 것입니다. 종교용이라는 것은 마태가 있는 상황에서 된 것이고, 예수 당시에는 그런 정치혁명과 종교, 사회문제와 종교문제를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책망의 대상은 위정자들에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물론 산헤드린 자체도 절대로 종교 기관만이 아니고 그 생활전체를 관여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 향한 공격이었습니다.


복음서에는 구체적으로 로마 제국에 대해서거나 위정자들을 전면적으로 노출한데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처형한 빌라도에 대한 서술에는 그 인간상을 우회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의 눈에는 빌라도가 왜 예수를 처형했는지 그 이유가 잘 파악되지 않습니다. 전문가들도 성서를 읽으면 왜 예수를 처형했나 무슨 이유로 사형을 시켰나 잘 파악이 안됩니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재판과정에서 보면 고소할 내용과 제목이 전혀 다릅니다. 로마 제국이 관여할 수 없는 내용들을 가지고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처형한 제목이 끝까지 아리송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로마 자신은 이해관계를 보지만, 빌라도 자신은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도  위험한 분자로 보이니까 그를 죽이기로 결정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합리화하려고 온갖 언어를 구사하려고 한것 같습니다. 그러한 세밀한 흔적은 우리는 지금 직접 상상력을 동원하는 길밖에 없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들이 내세운 고소 내용과 그를 처형한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로마 법으로 보아서는 예수를 사형해야 할 근거는 나오지 않습니다. 성서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복음서에는 그가 예수를 무죄라고 고백하면서도 결국 대세에 몰려서 처형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대세란 말을 보면 그때 로마 제국은 지금 민주주에서 내세운 여기보다도 민주적인 면이 많습니다. 그것은 속국에 있는 그들에게도, 탄원서를 내면은 그 현지에 있는 총독이든지 그들을 갈아치우는 것은 상례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들은 민심을 굉장히 중요시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총독도 아첨을 않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명을 해서 그 사람들 몰래 1,000명이고 2,000명이고 그중에 3,000명까지 로마로 올라가서 탄원서를 내고 원로원에 그것을 내면 결국은 통과돼서 거기 있는 현지 사령관이나 총독이 철수하지 않으면 않되는 그런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여기서 빌라도는 그런 위험 때문에 자기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예수를 죽인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에 나타난 예수를 처형한 빌라도의 모습은 형편없는 꼭두각시같이 되고 맙니다. 유대민족이 지도계급들에게 아부함으로써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로마의 법을 배반한 것이 됩니다. 로마에 발을 들이고 있는 놈이 로마 법을 무시하면서 예수를 처형했으니까 결국 자기가 선 자리를 뒤집어 엎은 것이 되고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일에 빌라도가 이런 비본질적인 입장에 서서 본질적인 것을 침범함으로써 마침내 예수를 처형하는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던들 로마제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게 빨리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빌라도가 이 짓을 했기 때문에 예수의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서 결국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로마제국의 운명이 앞당겨진 것은 빌라도의 어리석은 짓 때문에 그렇게 됐다. 그가 빌라도 예수를 죽이지 않았다면 로마는 더 연명을 길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결론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 빌라도도 하루살이는 걸러먹고 낙타를 통째로 삼키는 놈이 된 것입니다. 낙타를 먹었으니까 배가 터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역사를 봐도 거의 예외없이 바로 이런 미련함 때문에 그처럼 창피한 과거를 빚어왔던 것입니다. 옛날에 비할 것 없이 오늘의 정치현상을 보면은 그대로 입니다.  나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반한사람이었고, 그걸 지지합니다. 그런데 정부가 하는 일은 분노가 터져서 볼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보안법을 끝끝내 붙잡고 늘어지고, 반공법을 기반하는 보안법을 붙잡고 늘어지는 녀석들이 분명히 써붙이기를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이다. 거기의 수반인 고르바초프를 대환영한다고 합니다. 사회주의라는 말만 나와도 감옥에 넣는 것들이 고르바초프에게 그렇게 아첨할 수 있을까요? 고르바초프가 언제 한번 레닌주의를 반박하고 나섰습니까? 공산주의를 부정하고 나선 일이 있습니까? 엄연하게 레닌이 뒤에 있고 자기는 레닌의 새로운 해석자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그 빨간기는 그대로 있고 낫과 망치가 표시된 태극기를 그대로 앞에둔, 엄연히 그런 사람, 그 나라의 원수를 어쩜 그렇게 환영할수 있을까요? 노태우가 모스크바의 비행장에 내리니까 외무부장관은 고소하고 조그만한 관리하나 내보냈습니다. 무슨 대접받고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국가라고 상대를 한다면 처음에 6시에 도착하겠다고 하다가, 7시에 온다고 하다가 지체되고 또 8시에 온다고 그랬다가 결국은 9시30분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더니 시간이 없어 3시간만 보낸다고 하더니 하루저녁 자고 간다고 해서 갑자기 당황해서 신라호텔에서 요리하는 사람 70명을 갑자기 비행기로 급수송해서 온갖 요리와 아첨을 하면서 만찬이 아니고 야찬도 아니고 새벽찬을 먹어가면서, 그리고 만반의 음식을 준비했는데... 저는 오늘 아침 신문을 읽고 또 분노를 했습니다. 그사람이 애써 만든음식에 손을 별로 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끼밖에는 아침도 점심도 안먹고 한국에서 주는 음식하나도 안먹고 그대로 갔습니다.  다 일본에서 가지고 온 것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먹었고, 점심도 비행기 안에서 일본에서 가지고 온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러니 이게 무슨 꼴입니까? 아니 반대로 말해서 무얼 얼마나 치사하게 굴었으면 이렇게 우리를 무시합니까?


홍목사를 국가보안법으로 잡아 넣고, 공산주의를 부정하지 안은 고르바초프에게 온 민족전체를 총동원해서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면 그건 뭘 의미하는가? 그 방자한 꼴은 그 책임이 고르바초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습니다. 낙타는 통째로 통과시키고 그사이로 뭘하려고 들어오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대 환영, 속도 빼줄 것 같이 하는 일, 엄연히 사회주의자인데 한국안에서는 조금만 사회주의 냄새만 나도, 조금이라도 가난한 자앞에 서야한다. 혹은 통일문제가 지상의 과제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북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좋은건 좋다고 인정을 해주자 이런 말만 해도 속속들이 잡아서 보안법으로 가둡니다. 이게 하루살이를 걸러먹고 낙타를 통째로 삼키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그 낙타한테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어느 한가지 성과를 거둔 것이 없습니다. 다 생각하겠다고 적극적으로 협력을 고려하겠다, 이런 말밖에 남긴 것이 없습니다. 신문에도 나온 대로 잠옷을 입고 손내밀면서 잠깐사이에 5억불을 받아간 것 밖에.....그런데 송사리 떼는 왜 그렇게 잡아 넣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통일을 위해서 애쓰는, 위험을 무릅쓰고 민족의 장래를위해서 애쓴 목사들, 신부들을 왜 잡아갑니까? 왜 낙타는 통과시키고 하루살이는 걸러내는지 모르겠습니다. 걸러내는 작전입니다. 그래서 분합니다.


보안법을 적당히 이렇게 저렇게 사용하면서 국민을 기만하듯 철저히 기만하는, 그리고 크게 그를 보도하면서 그대표 정당에서는 이제는 민심이 바꿔졌다는 환호를 올렸다고 신문에 났습니다. 이제는 이것으로 노태우가 상당히 인기가 올라가게 됐다고 박수 갈채를 보내고 있습니다. 목적이 뭡니까? 결국 자기 정권지키자는데 중심이 있지 우리 민족의 혼, 민족 자체의 입장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우리쪽의 자존심을 팔아서 자기 개인의 정권을 지켜가겠다는 이런 치사하고 파렴치한 꼴을 노출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페레스트로이카를 그대로 그 정신을 살려서 개방사회로 하려고 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고 아직도 보안법같은 것은 절대로 사수하려고 하면서 한쪽에서는 이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북방정책으로 문을 열었다고 하면서, 경제적인 상황만 문을 열라고 하나 본데 그렇게 분리가 됩니까? 거기에 문화가 계속해서 들어오고 이젠 소련문화권에 든 것같이 소련물건으로 야단입니다. 허락도없이 바꿔놓으면서 단지 적성국만을 이북과 소련계 계통만이 보안법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5월 부터는 직교역이 가능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직교역이 가능해졌으면 그전에 드나들던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점점 기어나오는 소리가 벌써 6월달에 또 더 올라가서 12월달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장사꾼들이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드나듭니다. 장사할 사람들이 이 정부 틀렸다고 하면서 장사할까요? 최소한으로 "참 평양은 아름답네요" 라든지 무슨 찬미를 할거 아닙니까? 어디가서 손님보고 욕을 하면서 장사하는 장사꾼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전부다 찬양죄에 걸리게 돼있습니다. 그런 장사꾼들이 무수하게 드나드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고 목사들이 밖에서 통일하려고 했다고 잡아넣었습니다. 그들은 절대로 아부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민족이 하나되기 위해서 애를 쓴것인데 그들을 막잡아 넣습니다. 제가 이번에 보안사에서 만든 기록을 보고 완전히 나는 노출이 되있는 몸이구나 하고 내놓고 하나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위험한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진짜 무서워 해야할 것은, 그들의 아성인 권력권 안에 있습니다. 거기 누가 침범할 수 있습니까? 그 소굴 안에 어떻게 기어들어 갔는지 누가 압니까? 저들이 공산주의 무서워하고 재야의 사람들을 무서워 하지만, 결국은 그들이 안심하고 있는 사람, 매일 그들에게 문안하는 사람들에 의해  침투당합니다.제일 무서운 소굴은 권력이 지배하고 있는 곳입니다. 누구도 손을 못대는 곳입니다. 관여할 수 없는 위험지대입니다. 저희 체제가 방어할 수 없습니다.  속속들이 악이  퍼져나가는 것은 그 안을 누구도 감시할 수 없고 억압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거기서 퍼져나오는 것들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 하천 등이 오염이 되서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런 상황까지 몰려온 것도 다 이런 데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적성적인 위험도 그 안에도 있습니다. 그렇게 썩었는데 거기를 침투해 들어가지 다른데 침투할 까닭이 없습니다. 도대체 조용술, 이해학, 문신부 등 그리고 우리 홍목사, 무엇 때문에 잡아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북은 우리의 적성국이다. 그런데 고르바초프는 적성국인 이북과 군사동맹을 체결한 국가의 수반입니다. 그걸 그렇게 환영하는 마당에 국가보안법을 두고 이걸 이용해서 잡아간다, 미우면 미워서 잡아갔다고 하지 강제로 말을 억지로 꿰어서 잡아들이는 이들을 예수가 용서할까요?


이들에 대한 분노를 예수가 퍼뜨렸는데 우리는 지금 예수의 심정을 정면으로 배반하는 그런 교회를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정말 예수의 심정과 더불어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오늘 이시대를 향해서 분노를 터뜨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와 상관이 없는것입니다. 우리는 또다시 민족적인 위기에 서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걷잡을 수 없는 이 부패상이 어떻게 터질지 모르겠습니다. 산하가 모두 썩어가고 있는데 정부는 계속 예산은 않세운 건설목표를 자꾸 발표해 나갑니다. 이렇게 속이는 법이 없습니다. 북방정책을 내세워서 낙원이라도 만들듯이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민족은 막 썩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엄마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아이를 이웃집에 맡기고 나들이 갔는데 그 이웃집의 부주의로 인해서 그 아이가 죽었습니다. 저들은 아이를 내놓을 생각은 하지 않고 그의 의복, 장난감들을 내놓습니다. 그 아이 엄마가 내 아이를 달라! 내 아이가 있어야 그 의복이 있고 그 장난감이 있지...   정부가 번지르하게 내놓은 것은 이미 죽어버린 그 아이의 의복들, 장난감들을 자꾸 내놓으면서 우리를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이 민족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민족정신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식수는 마실 수 없게 되고 밭의 곡식들은 모두 극약으로 뿌려져서 그 음식들을 못먹게 되는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기업들은 그래도 나만 알고 너는 안중에 없습니다. 물이 썩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정신세계가 썩어가고 있습니다. 그런것 때문에 속이 상해서 조금 소리친 사람들 마구 잡아 가뒀습니다. 오늘 신문에 보니까 6공에 들어와서 잡아간 노동자만 1,211명이라고 합니다. 하루에 평균 1.1명꼴씩 잡아들입니다. 이런 마당에 우리 할일이 뭐일까요? 각분야에서 죽어가는 우리 아이를 살리는 일을 본격적으로 해야 할텐데 그게 뭐일까? 이게 우리의 과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떻게 보면은 차라리 낙타를 삼키게 유도해서 그놈들 모두 죽게할까? 아니면 우리가 이시대에 함께 죽을 각오를 해야 할까?


오늘 같이 이렇게 답답한 설교를 하기도 드문일 입니다. 이 시대의 시련을 어떻게 이겨 넘어갈 것인가? 예수의 말씀은 오늘 현장에서는 우리에게 너무 벅찬 말씀입니다. 그러나 단하나 우리는 이 경고의 말씀을 그저 회상하면서 나는 이렇게 극단의 말을 요구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써 어떤 면에서나 모기는 걸러먹고 낙타는 삼키는데, 내자신에게 내가 공동의 선 가운데에 있는지 하는 이 반성은 철저히 해야겠습니다. 이 향린교회 안에도 그런 면이 분명히 있게 마련입니다. 그 반성은 우리에게 돌려서 해야합니다. 그 주변적인 것에 대해서 해방되서 본래의 길에 들어서야지 주변적인 것을 물고늘어져서 예수에게 접근도 못하는 그런 상태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수의 본뜻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노력은 우리가 최대한으로 해야겠습니다. 성서를 읽는데서 부터 교회 대인관계에서 부터 사회생활 전반에서, 나 자신부터라도 이런 잘못은 범하지 말아야 겠습니다. 예수의 경고가 오늘, 지금 우리에게 떨어진 경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