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국신학연구소가 주최한 제13기 월요신학서당 [민중신학이란 무엇인가?]의 제1강(1991년 4월 29일) 강연 내용으로 당시에 녹음을 풀었으나 아직까지 발표된 적은 없는 글이다.)

나는 민중신학을 이야기할 때 맨처음에 꼭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민중신학은 서재에서 나온 사변이 아니고, 한국의 정치현장에서 형성된 역사적인 산물이요 신학적인 귀결이다. 구체적으로는 군사정권이 수립된 이래 그들의 탄압 밑에서 그 정체를 드러낸 민중과의 만남과, 그들의 고난에 어떠한 형태로든 참여한 결과가 민중신학을 낳았다." 오늘도 역시 이 말을 먼저 전제해야겠습니다.


신학하는 일부 사람들이 군사정권을 통해서 구조악에 대한 인식에 도달했습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대체로 자유주의자였던 저들이 날로 조여드는 이 구조악을 몸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저항하기 위해서 저들은 한동안 재래신학의 틀에서 찾아낸 주제들인 인권 혹은 자유라는 시각에서 거기에 저항해보려고 했는데 그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었습니다. 이 저항과정에서 소위 성서에서 말하는 사탄 혹은 악마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권력적인 구조악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민중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그들을 만나서 비로소 저들이야말로 이 구조악에 철저히 수탈당하고 억압당하면서도 죽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역사의 맥을 이어가는 담지자임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민중들은 계몽의 대상도 아니고 구제의 대상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저들이야말로 생명의 원천이고 역사의 주체임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과의 만남은 커다란 사건인데, 이 사건은 신학자들로 하여금 재래적인 신학에서의 해방이라는 연쇄적인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사건들에서 충격을 받아 저 자신은 일찌기 "기독교의 탈서구화"라는 것으로 그 뜻을 발표했습니다. 그뒤 민중신학을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서남동 교수가 "反신학(anti theology)"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했습니다. 신학을 하면서 反신학이라는 모순적인 언어를 쓴 것이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이미 재래신학의 주제들에 흥미를 잃고 비신학적인 것에 관심을 해서 전통신학에서 보면 주변적인 주제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 이들이 있었습니다. 현영학 교수와 문동환 교수 등이 그 범주에 들 수 있을 것입니다.


7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 서구신학 내지 신학에서의 탈출(exodus)과정을 연속해서 일어나는 민중사건에 참여하는 것과 병행했습니다. 인혁당사건, YH사건, 결혼식 위장사건 등등이 일어날 때마다 많은 이들이 체포.투옥되었고, 그 가족들의 저항이 고난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이런 민중수난에 직.간접으로 참여함으로써 마침내 대학에서 한 차례 혹은 두 차례씩 쫒겨나고 혹은 감옥에 갇히고 하는 동안에 거리에서, 감옥에서 다른 얼굴의 민중을 만남으로써 신학의 Exodus행각은 가속화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에서의 Exodus의 과정에서 해석학적 혁명이 일어났는데 -- 저는 혁명이라고 봅니다 -- 이것을 대별하면 다음 몇 가지로 촛점을 맞출 수 있을 것입니다. 아래에 언급하려고 하는 것은 연쇄적으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상호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제목을 달리하더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상충되는 것도 있습니다.


첫째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시각의 전도입니다. 모든 사물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보는 도식에 철저했던 재래신학적 시각에서 모든 사물을 아래로부터 보게 되었습니다. "신으로부터 인간을"이 아니라 "인간에서부터 신을", "인간에서부터 민중"이 아니라 "민중에서부터 인간" 등등 이런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래로부터 보는 입장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2차대전 이후에 형성된 칼 바르트를 중심한 위기신학 등등에서 본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이것은 역시 성서 자체에 있어서도 "격상된 예수에게서 민중에로"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민중으로부터 예수"를 조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서 안에서 "지배체제나 특히 다윗 왕조 이래로 군림하는 왕조체제로부터 가난하고 눌린 사람들"이 아니라 "그 밑에서 절규하고 신음하고 저항하는 민중의 시각에서 왕권을" 등등 모두가 그런 시각의 소산입니다.


이런 시각은 가치관을 완전히 전도시킴으로써 주변적이었던 것이 중심적인 것으로 탈바꿈되는 무수한 사건들을 연속적해서 적어도 우리 안에서 일으켰습니다. 가령 예수를 귀족화하고 왕족화하고(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던가 하는) 나아가서 신격화하는 요소들이 기독교 신학의 중심 관심사였지만, 바로 그런 것들은 낡은 가치관의 산물이고 본래의 예수에 있어서는 그의 천한 신분, 무명성, 한마디로 하면 민중성이 그의 본질을 이루고 있음을 인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룩함, 신성함 따위가 높은 데, 깨끗한 데, 고귀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 밑바닥에서 학대받고 천시당하는 현장의 이른 바 죄인이나 창기나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세리같은 이들의 형태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즉, 교회 성전 같은 종교적으로 구별된 장소가 아니라 인신매매가 성행되고 매음을 하고 사생아를 낳고 아귀다툼을 하고 있는 그런 장소가 거룩함의 산실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진실은 참 아래, 음지, 주변으로 가면 갈수록 밝혀진다는 확신을 갖게 됨으로 그런데서 신학의 주제를 찾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이 민중신학의 하나의 중요한 측면입니다.


두번째로 모든 사물의 사건성을 중요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데서 신학의 거점을 찾아내서 로고스 신학 또는 말씀의 신학이라고 신학의 본질성을 표명함으로써 복음서 연구에 있어서도 예수의 말씀에만 비중을 두고 마침내 성서 전체를 말로 선포한 것 즉 케리그마가 그 중심이라고 보고 있는 데 대해서, 민중을 만남으로써 그 사건성을 체험한 민중 신학자들은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로 로고스 신학에 대항하게 되었습니다. 사건은 행동하는 자들이 맞부딪히게 됨으로써 일으키게 되는 결과입니다. 삶은 움직인다는 것이고, 그것은 사건을 점철시키는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건은 운동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을 서술할 때 경험한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사건과 직결된 것으로서 바로 삶을 직접 수식없이 나타내는 민중언어입니다. 이것은 사변에서 나온 로고스와는 다른 것입니다.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말은 죽은 것입니다. 말 보다 삶은 언제나 앞서는 것이며, 거기에 진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예수의 삶을 추구하는 대신 역사의 예수를 사변화한 케리그마로 그의 삶을 은폐하려는 신학을 전면 거부하고 케리그마가 있기 이전의 예수에게로 돌아가려는 부단한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역사학자들의 고고학적인 노력 혹은 복고적인 작업은 역사의 예수의 사건성을 박제화해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런 길을 가자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역사의 예수를 파악하는 길은 그를 사변의 대상으로 함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참여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론과 실천만을 나은 일반적인 부분에서 말한다면 언제나 실천이 앞설 때만 바른 이해와 해석이 가능하다고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을 연구하려는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그리스도론이나 그의 신학적인 이론에만 집착해서는 그를 모르는 것이고, 그의 삶을 언제나 전제할 때만 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의 자신의 고백에서 감옥에도 여러번 갔고, 무수히 구타당하고 무수히 박해를 당했고, 마침내 로마에 의해서 체포되어서 로마에 압송되어서 그 다음에는 전설에 의하면 그곳에서 처형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런 그를 전제로 할 때에만 그의 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전제하면서 읽을 때만 바른 인식에 도달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세번째 주객도식의 극복입니다. 신과 인간, 혹은 인간과 자연, 혹은 자연과 역사, 나와 너, 남자와 여자 등으로 철저히 이분화하고 이 둘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애를 쓰기는 했지만 한번도 그것을 이룬 적은 없습니다. 분화된 둘의 관계를 연결시키려고 애를 썼던 대표적인 인물로 마틴 부버나 혹은 에밀 부르너나 불트만 같은 사람을 들 수 있습니다. 마틴 부버의 유명한 책 [나와 너]를 보면, 너도 나와 똑같은 파트너가 되어야 할텐데 주객도식에 의해서 나는 주체가 되고 너는 객체가 되어서, 자꾸 그렇게 되어 버려서 다우가 이스가 되는 문제를 한탄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고민의 노출이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불트만같은 사람도 하느님과 인간관계를 문제하면서 그 관계성을 "하느님을 모르고 인간을 알 수 없다" 또 "인간을 모르고 하느님을 알 수 없다"라는 전제를 안고, 하나의 사람을 추구하려니 하느님을 모르니까 추구할 수가 없고, 하느님을 추구하려니 사람을 모르니 추구할 수가 없어 결국 이야기 할 수가 없다라는 불가지론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가령 언제든지 신을 시혜자 혹은 창조자로 보고 인간을 은총에서 산다거나 혹은 피조물로 보는 이런 사고의 틀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도그마에서부터 인간이 신의 은총에 의해서 특별한 권력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유도되어서 결국 예속관계 사회를 인정하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특권자를 인정해주는 뿌리를 종교에서 찾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아무리 공정해도 평등하지 않고, 주체와 객체로 중심과 주변으로 나뉘어지고, 그 관계를 그럼으로써 종속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사고가 집단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서 그것을 가장 잘 이용하여 생육된 것이 국가라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국가라는 말이 왕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권력의 모체로서 아래사람에게 적당히 권력을 분배함으로써 할 수도 있고, 회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계속 그대로 국가가 유지되어 있을 때 계속되어왔는데 교회에까지 침투되어서 사제 계급과 평신도와의 관계가 이렇게 되어버리고 알았습니다. 그러나 민중사건에서 어떤 계시와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없이 너없고, 너없이 나없다. 따라서 실재 있는 것은 나, 너가 아니고 우리 뿐이다."


그런데 한국 말에 우리라는 말은 단수가 모여서 복수가 되는 영어의 we와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라는 말의 본 뜻은 "울타리"(소우리 돼지우리 할 때 그 우리)인데, "우리"는 숙명적인 공동체, 한 울타리 속에 있은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족제도에서 연유된 것이긴 하지만 그 의미는 심장합니다. 비록 개인주의가 발달했지만 지금도 한국 사람은 우리 집, 우리 아이라고 하지, 내 아이, 내집하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그 말은 낮섭니다. 외국사람들은 언제나 내집 내 아이합니다. 더구나 내 남편, 내 아내라고 하는 것은 한국 사람에게는 대단히 쑥스럽습니다. 서양사람들은 주저없이 내 남편, 내 아내 하면서, 모든 내 소유물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내게 예속된 종속관계의 언어로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참 귀중한 말입니다. 예속관계가 아닌 상관관계여야 참 너와 나의 관계는 옳은 관계일 것입니다. 민중들은 지배층의 정책에 물들어서 평소에 분화된 듯해도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존재로 보여도 수난의 현장에서, 투쟁의 전선에서는 나와 너라거나 잘난 놈, 못난 놈이 없고 단지 우리만이 있습니다. 우리는 꿈과 주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창조하고 우리가 함께 투쟁하고 노동하고, 우리가 함께 싸우고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하는 신념으로 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는 영웅주의 따위가 삽시간에 자취를 감춥니다. 평소에 그렇게 무서워하던 특권층으로 차압하는 관권, 관리에 대해서 일말의 공포도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 해방운동을 경험했습니다. 인간사회를 계급적으로 보는 것은 바로 이런 주객도식을 깨는 데 있어서는 적절한 전략이라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원래 나.너 라는 개체는 모르고 원래 우리만이 있습니다. 아담은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그것은 동시에 흙이라는 어원을 가졌기 때문에 자연과도 주객도식에 이끌어 맬 수는 없습니다. 아담이 땅을 지배했다, 혹은 정복한다는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서구인들이 그런 식으로 해석해 왔던 것입니다. 하느님도 아담을 개체간에 우리와 같은 형상으로 아담을 즉 사람을 창조했지요. "우리와 같은 형상으로 아담을 만들자" 이런 언어를 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