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지에 연재되고 있는 안병무 선생 유고 글




고린도전서 13장의 내용은 유명한 사랑의 찬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렇게 황홀한 음률이 담긴 시 구성을 가진 찬미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것이어서 사람들이 많이 놀라고 또 역사를 거쳐서 이 찬양 자체가 계속 찬양을 받아 왔습니다. 사랑의 찬미는 굉장히 음률적이고 그 내용이 장엄합니다. 맨 처음에는 사람들이 역사상에서 가장 최상의 것으로 ‘내가 이렇게 되어 봤으면, 이루어 봤으면’ 하는 것들을 예를 들면서 헤아립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다 주어졌다해도 만일에 사랑이 빠져 버리면, 사랑이 없으면, 오히려 그런 것은 전혀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세계를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라고 그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맨 처음에 이런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사람을 완전히 매혹시킬 만큼 황홀한 말을 잘 하는 것을 사람들이 그리워합니다. 나도 어떻게 말을 잘 해서 듣는 사람이 내 말을 이해하고 인식하고 그리고 행동으로까지 옮겨질 수 있는 그런 달변가가 되었으면 하는 소원이, 특별히 바울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되어 있
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는 수사학(현대의 웅변학)이라는 것이 가장 첫째 되는 학문으로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주 아름답게 할 수 있는, 말을 잘 하고 비록 천사의 입이 되어서 사람들을 황홀경에 빠뜨릴 수 있는 그런 재간을 내가 가졌어도, 내게 사랑이 빠져 있다면 그것은 울리는 징이나 꽹과리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랬습니다. “sounding brass”, “ein toned Er” 그야말로 황홀한 말들이 시끄러운 소음 이상 아무 것도 세상에 보태주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그때 당시 모든 지식인들이 부러워하는, 말의 황홀함, 웅변의 황홀함을 일거에 제거해 버리고 맙니다.
 

두번째로 내가 만일 예언을 하는 선물과 그 안에 모든 신비스러움과 지식을 인식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완전한 믿음을 가져서 산을 옮길 만한 그런 능력을 갖추었다고 해도 만일 거기에 사랑이 빠져 버린다면 그것은 ‘무’(無) 자체와 하나도 다를 게 없다. “Nothing”,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을 영어로 “not I love” 그러면 “I am nothing” 독일말로는 “Ich hatte der Liebe nicht, so ware ich nichts” 지금까지 내 모든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세번째로 만일 내가 가진 재산을 가난한 모든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어버리는 그런 용감성이 있다 해도, 그렇게 내가 적선을 있는 대로 다 베풀었다고 해도,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몸을 온통 불사를 만큼 나를 희생시킨다고 해도(이것은 사랑의 행동의 극치라고들
사람들이 생각했습니다. 관념이 아니라 결국은 행동에까지 들어가서 몸을 불사를 때까지 이릅니다). 모두가 실천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고 자기의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을 비판하는 것(그것은 가장 겸손한 행동이라 그렇게 보아왔는데, 그런 자기에게 실망을 하고 나도 실천할 수 있는 ‘나’ 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사람들의 바람인데) 그런 것을 다 바치고, 다 이루고, 필요하다면 내 몸 전체를 제물로 완전히 바치고, 그렇게 나를 희생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죽은 사람이 유산을 내놓는 것이나 돼지의 몸을 바베큐로 바치는 것과 조금도다를 바 없다고 판정을 합니다.


이렇게 그는 그 시대에 가치 있다고 사람들이 추구하는 ‘내가 이렇게 되고 싶다’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몇 마디로 전부 거부해 버립니다. 거기에 사랑이 빠지면 아무 의미도 없다고 일거에 제거해 버립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가 4절에서 6절까지 사랑의 주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영어로는 “suffer long”이라는 말로 번역을 했습니다. 자기를 오래 고통 가운데 집어넣는다, 위험 속에 빠뜨릴 그런 고난을 한다, 오래 참는다고 했는데 그 말보다 정확한 말은 지탱한다는 표현입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kindly” 하면 ‘친절하다’로 그 언어를 번역하였는데 그것은 어감이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독일 말의 “freundlich”라는 말이 조금 낫습니다. ‘친구로서’ 나는 ‘친구의 감정을 갖는다’ 그러면 친구의 감정을 갖는다는 말로 연결시켜서 ‘내가 너를 위하다’ 하는 말이라면 ‘내가 너를 위해서 고통을 받아도 좋다’ 그것이 친구의 가장 대표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Ich kann dich leiden”, 나는 너를 고난한다.  내가 너를 위한 것이라면 어떤 고통도 받겠다 그게 사랑하는 친구에게 가지는 마음씨입니다. 그런데 보통 요새 쓰는 말 “Ich kann f웦 leiden” 은 너를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너를 위해서 그만큼 나는 고통을 짊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즐거움만이 절대로 아닙니다. 사랑은 즐거움이다 생각하니까 사람은 환멸도 느끼고, 마지막에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돌려져서 결국은 실망이 원수 사이까지로 번져 나가지마는, 사랑한다는 말은 고통을 즐겨 내 가슴에 안을 용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저를 사랑했는데 네가’ 그런 상태로 돌아섰으면 그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친절하다(우리 번역) 그것은 잘못 오해받기 쉬운 이야기입니다. 아니, 아픔이 따릅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시기는 자기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시기하면 내가 사랑하지 않는 증거입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네가 나보다 못하다”라든지 “내가 너보다 낫다”는 사고는 일체 없습니다.
무례하지 않습니다. 이 말도 우리 번역에 문제가 있습니다. “not behave itself unmannerly” 영어로 그렇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내가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상대방에게 이해되지 않는 그런 행위는 내가 안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말이면 훨씬 근사치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자기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seek not her own” 자기 자신의 뜻을 구하지 않는다. 내가 너를 상대하면서도 내 것을 구한다, 내 유익을 구한다, “나는 네가 좋다” 그 말은 위험한 말입니다. 네가 좋으니까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내 본위입니다. 네가 내 이웃이냐? 이렇게 물어볼 때 ‘내’가 중심으로 해서 상대방을 묻는 것이니까 그것은 상대방에게 사랑이 가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을 내 사랑으로 이용해 버리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랑은 소극적인 표현입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는 말은 여러 경우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성내는 이유가 ‘네가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네게 자리가 없다’ 혹은 ‘다른 사람에게 비중이 더 있고 내겐 비중이 없다’ 이런 등등이 성냄의 제일 중요한 이유가 되겠습니다. ‘내가 네게 인정을 받고 싶다’는 좋은 의미의 우정을 요구하는 것 같으나 거기에는 중요한 결함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상대방을 실제로 내 안에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나’만 중심으로 상대방에게 요구하기 때문에 성내기까지 됩니다. 사랑은 악을 생각지 않습니다. “no evil” 악을 생각지 않는다.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원한을 품지 않는다”(새 번역) 그 말이 훨씬 가깝습니다. 내가 너를 생각할 때, 사랑하면 할수록 내가 그와의 관계에서 좋던 일만 생각하는 게 원칙인데 자꾸 마음에 그가 나에게 못되게 굴었던 것만 회상되면 그 사랑은 끊어진 관계입니다. 비록 부모와 자식간의 사이라도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하고 위했는데 네가 나를” 이렇게 돌아서면 그때는 사랑은 정지된 상태입니다. 사랑은 악을 생각지 않고 못해준 것만 자꾸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와 나의 좋던 관계를 자꾸 생각하면서 그 잃어버린 것을 도로 찾는데 그 책임은 어디 있나? 내게 있다는 생각으로 자꾸 돌아져야 죽지 않은 사랑이고 살아있는 사랑입니다. 이런 이상의 말을 전부 아닌 것, 곧 부정적인 차원만을 골라서 이야기했습니다. 상당히 중요하게 골랐습니다. 사람에게 왜 사랑 아닌 것이 사랑처럼 들리나?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곱씹어보면 이유가 다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성낼 수도 있고, 사랑이라는 이름 가지고 무례할 수도 있고, 교만할 수도 있고, 뽐낼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전부 사랑이라는 이름 가지고 너를 내가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유를 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의외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드러냅니다. 마지막 절에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부정만 하지 않고 긍정적인 표현으로 뒷마무리를 합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rejoice not in iniquity” ,ungerechtigkeit”    불의를 절대로 즐거워하지 않는다, 여기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홀로의 것이 아닙니다. 너와 더불어 불의한 것은 즐거워하지 않는다. 참 사랑을 하면 너를 나와 더불어 범죄 속으로 끌어들이지는 않는다. 사랑하면 할수록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노력이 언제나 앞서도록 되어 있습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사랑을 만끽하겠다고 그러면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 증거입니다. 아니, 나는 의외로 상대방의 원수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것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행해지는 것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보고 있고, 세상에서도 봅니다. 아니, 진짜 참 사랑을 하면은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와 더불어 기뻐합니다. 여기에는 ‘더불어’라는 말이 꼭 들어가야 이해가 됩니다. 너를 나와 진리를 기뻐하는 상대로 꼭 끌어가는 겁니다. 네가 진리와 더불어 행복해야 나도 너를 행복해하는 사람이지, 이러한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너를 불의 속에 몰아 넣으면서 내가 행복할 길은 없는 것입니다. 네 불행이 내게 행복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네 불행이 내게 행복으로 보여진다면 내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성에 대한 사랑이든, 우이든, 민족애든 간에 그렇습니다. 진리가 동반하지 않는 데는 인간의 참 행복을 줄 수 없다고 하는 전제를 구체적으로 너에게 적용하면, 그가 진리 안에서 행복해야 또 행복하게 해 줄 때 내 사랑은 참 사랑이 될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줍니다. 우리 새 번역으로는 그렇게 되었는데 정확한 번역으로는 사랑은 모든 것을 지탱합니다. 이것이 정확한 번역입니다. 모든 것을 지탱한다. 영어로는 “bears all things”가 옳은 번역입니다. 무엇을 짊어지고 나간다는 말입니다. 독일말로는 “vertragt alles” 번역이 낫습니다. 덮어준다는 것은 번역이 잘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뜻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데살로니가 전서 3장에 지속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은 오늘 잠깐 하고 마는 것이 아니고 즐거울 때만 웃는 게 아니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있을수록 사랑은 빛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고난의 역경을 밟으면 밟을수록 그 자체가 확실해집니다. 또 사랑은 어려운 때가 오면 올수록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거꾸로 상대방이 날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 사랑을 시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말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내 사랑은 끝끝내 지속하고 지탱이 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이란 말은 여기에 쓰여진 헬라어의 “스테게(stege)”라는 말로 지붕이라는 어원이 있습니다. 집은 지붕이 있어서 집을 가능하게 하는것처럼 언제나 지속적으로 지붕 역할을 해 줘야 비도 안 맞게 하는 것처럼 내 지붕이 되는 것, 그래서 덮어준다는 말까지 사람들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붕은 언제나 지속적으로 여기에 있어줘서 어려운 일이 있어도,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언제나 나를 덮어줘서 그래서 참 사랑이라 그것입니다. 사랑은 즐거울 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괴로울 때 조금 더 나아가서 상대방이 내게 괴로움의 존재가 될 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질 때, 그것이 없으면 편안하긴 한데 바로 그런 존재를 향해서 내 마음을 열 수 있을 때 그때 내 사랑은 단련되고, 내 사랑이 입증이 되고, 또 사랑이 바르냐 안 바르냐가 확실해집니다. 나는 이만큼 했는데 상대방은 그렇지 않더라 그러니까 우리 관계가 이렇게 됐다 그 말은 벌써 자기를 포기한 것이고 상대방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태도입니다. 사랑이 증오로 변하게 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사랑은 잠깐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고통스러우나 즐거우나 감싸주는 게 그게 사랑입니다. 상대가 너를 감싸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두 번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참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쉽게 줄줄 외우나? 교회에 오는 사람들, 특별히 믿는다는 말이 너무 형식화되어서 의미가 없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적인 의미의 믿는다는 그런 언어도 아니고, 모든 것을 믿는다고 하는 말은 밤낮 속습니다. 그 말입니다. 내가 네게 속을 줄 알아야지, 속지 않으려고 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말은 (세상에 나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전제하면) 속을 각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배신을 하는 것 같다, 분명히 했다, 어떤 증거를 가지고 있어도 그래도 믿겠다, 곧 신뢰입니다. 얼마나 지속되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속는다는 뜻입니다. 불신은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배신입니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돌로 메주를 쑨다고 믿는 게 믿음입니다. 돌로 메주를 쑤겠다 그래도 믿어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효’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아버지가 소를 끌고 지붕 위로 올라가라고 하면 올라가는 연습을 그냥 계속했습니다. 왜? 아버지가 올라가라고 했으니까 올라갈 수 있나부지! 그렇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 ‘효’는 그런 의미에서 신뢰입니다. 사랑은 모든 경우에도 믿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는 모든 경우에, 마지막에 철저하게 배신을 당했을 때도 제자들을 끝끝내 믿었습니다. 네가 나를 버릴 것이라고 단정을 하고도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내가 부활하면 네가 반드시 나를 찾아올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불신을 그대로 신뢰한 것, 불신 속에서 신뢰한 것, 이것이 부활의 사건입니다. 사랑의 완성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는 철저히 불신 속에서 배신을 받고 죽는 모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믿음의 창조자입니다. 인공위성같이 하늘에 쏘아 올린 것같이, 이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소식이 없어, 아무도 돕지를 않아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렸습까? 해도 아무 소식이 없어, 그래도 나의 하나님, 여전히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은 사랑의 부활입니다.
 

세 번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너를 믿는다는 것은 너는 기성품이다라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다 된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이고, 가능성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사람이 내 앞에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볼 때 “너는 질적으로 틀려먹었어” 하고 선언해 버리면 그땐 사랑이 정지되는 순간입니다. 부부관계나 부모와 자식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틀렸어 너는, 너는 희망이 하나도 없어, 너는 꽉 막혔어” 포기하면 그 순간 그 사랑은 정지되는 것입니다. 아니, “너는 달라질 거야, 아니면 내 이해가 달라질 거야, 그래서 너와 나와의 관계는 달라질 거야, 꼭 달라질 거야” 이것이 바람입니다. “나는 네게 기대를 걸어, 너는 가능성이 있어” 독일말로는 “m쉍lich” 아직도 너는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 네가 나를 열 번 속였지만 그러나 나는 네가 다시 달라질 것을 믿어” 그것을 버리면 나는 끝납니다. 그게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무서운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너는 반드시 나를 이해할 때가 올 거야, 아니면 내가 너를 이해할 때가 올 거야, 지금 모습은 아닌 것으로 변할 날이 올 거야” 그런 의미에서 너를 믿는다는 것과 바란다는 것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앞으로 보다 달라진 모습의 너만 아니고 우리의 관계를 바라보고 현재를 살아갑니다. 어제에서 현재를 살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절망해서 사랑은 곧 끊어집니다. 마지막에 모든 것을 견딥니다. 독일어나 영어나 “Love endures all thing”, “die Liebe duldet alles” 무엇이든지 견딘다. 이것은 시간성보다는 아픔의 농도입니다. 네 아픔을, 네게 내게 준 아픔을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그 깊은 아픔을 어떻게 이겨내느냐 하는 것이 내 사랑이 참 사랑이냐, 아니냐를 입증합니다. 이렇게 사랑을 네 가지 아주 중요한 말로 구체적으로, 적극적인 말로 표현을 합니다. 마지막 13절이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바람),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 으뜸은 사랑입니다’

믿음과 바람, 사랑, 이 셋은 영원히, 영원히 사람이 사는 때까지 존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없어서는 안될 3대 중요 요소입니다. 바울은 왜 이렇게 보았을까? 사실 어느 하나를 떼어놓고는 어느 하나도 성립이 안 됩니다. 사랑이 늘 성립되려면 그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와 나는 깊은 인연이 있어서 그것을 갚기 전에는 떨어질 수 없어, 옷 한번 스친 것도 인연이야, 갚을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인연의 줄을 맺어 왔어”라고 설명을 합니다. 우리에게도 우연이 아닌 인연이 있습니다. 너하고 나하고 왜 이렇게 마주섰나? 원수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은 참 좋은 말인데 그 말을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네게 내가 갚을 것이 있구나, 네가 나한테 갚을 기회를 줬다”라고 받으면 아주 좋은 말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든, 이 바람이 있어서 사랑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기 때문에 사랑을 성립하려면 믿음, 바람을 빼고 성립이 안되는 것은 거꾸로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일 삼각형을 그린다면, 이 사랑을 맨 밑바닥에 쓰고, 왼쪽에 믿음이라는 것을 쓰고, 오른쪽에는 바람이라는 것을 쓰면 삼각형이 됩니다. 결국 바탕은 사랑이고, 사랑 위에서 바람도 있고, 믿는 것도 있지만 여기에서 하나되는 끝점에 다시 무엇으로 솟아나나? 그것은 사랑이겠지요. 끝끝내 사랑은 마지막 정점에 서서(polarization이라고 영어로 씁니다) 이것이 앞으로 밀고 나가면 바람, 믿음 이것은 뒤로 피라미드형을 하면서도 끝끝내 살아서 움직여 줘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바람은 언제나, 믿는 것도 언제나 따르나 이것이 없으면 이 삼각형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람, 믿음 이것이 있을 때 사랑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거꾸로 사랑이 있을 때, 믿음이라는 것도 바람도 성립이 됩니다. 그것이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앞서야 되나? 그것 역시 사랑이 앞서야 됩니다. 무엇이 끝까지 살아야 되나? 사랑이 끝까지 있어야 되겠지요. 그것이 아니면 인간이 안 되, 인간으로서 제 구실을 못 해, 그러면 너와 나와의 관계가 깨져, 공동체 깨져, 내 삶도 깨져, 그러니까 믿음과 바람과 사랑은 언제나 우리에게 있어야 되, 싫든지 좋든지 이것을 이루긴 이루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제일 바탕은 사랑이라, 사랑을 빼고 다른 것만 칠을 하려고 하면 되지가 않아, 그것은 언제나 있어야 하는 우리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공동체를 왜 만들었나? 어떻게 보면 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영원한 숙제를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피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부관계마저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인간에게 준 사랑이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되겠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에서 동물이 아닌 사람으로 주어졌을 때, 이 기회에 해결하자, 이 중요한 과제를 피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믿음과 바람과 사랑은 언제나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맨 밑바닥에 놓을 것은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