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찬양대가 민요 풍의 노래를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시작한 그날 부터 굉장히 중요한 전기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감리교 학장으로 있던 변선환 교수가 퇴임하고 책을 출판하는 모임에서 감리교 신학대 찬양대가 두곡을 불렀는데 모두 한국곡 이었습니다. 다원화 시대 종교라는 말이 실제로 실현되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지금 성가대의 찬양도 피아노하고 장구가 한데 맞물려졌는데, 융합이 잘 이루어지는지는 몰라도 우리 나이쯤은 정서적으로 굉장히 차분함을 느낍니다. 그야말로 신바람이 납니다. 성령받는 것이나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징도 오늘 처음 치기 시작했다는데, 저도 원하던 것이었는데 홍목사님도 원했던 것 같습니다. 찬송가를 보면은 영국 국가, 독일 국가, 스칸디아 민요 등등의 각 나라의 민요를 두루두루 섞어서 한 것입니다. 그것들 우리 체질에 맞지도 않는 것을 억지로 자꾸 부르다 보니까 그래도 정이들어서 "좋은가 보다" 하는데 실제는 우리하고 상관도 없는 멜로디를 받아서 된 것입니다. 이것들이 우리 몸에 깊숙히 배어오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노래를 우리 가락으로 부르자"는 운동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내용도 지금 찬송가를 보면은 서구 사람들이 세계를 식민지화 시킬 때에 부르던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투적, 정복적인 찬송가 그리고 이 중에는 피안적인 내용이 많고, 멜로디 마저 아주 맥을 빠지게 하고 낭만적인듯 하면서 약간 슬픔에 잠기고 멀리 피안을 그려서 천당에 가게 할 생각이나 만드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묘하게도 미국쪽에서 나온 찬송가들이 특히 식민지 확장 때 쓴 내용과 곡이라는 것은 상당히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것인데 우리는 그대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아주 의미있게 찬양을 들었습니다.


오늘 제목이 특이하긴 한데 사실 근래에 많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전에 제가 일본에 가서 일주일 정도 국제 회의를 하고 와서 몇달을 앓았습니다. 그때 일본서 마음 먹고 간 것이 가정, 여성문제 등등의 책을 사리라는 마음을 먹고 갔었습니다. 그곳에 여성들이 참여를 했기 때문에 그런 책들을 추천받기 위해서 얘기를 진행하다가 일본의 지금 여성분위기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권의 책을 사고 독서를 하는 중에, 사회구성에 있어서 가족문제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서 앞으로 미래의 공동체에서 가족이라는 것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 하나는 동경대 와다하루끼라는 사람이 "김일성과 북만주의 항일전쟁"이라는 책을 내서 굉장히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한국에 동시에 번역된다는 얘기를 들었고 벌써 나왔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 책을 입수해서 세밀하게 읽었습니다. 만주라는 곳이 제가 자란 곳인데, 그때 저는 어린시절을 그 곳에서 보냈습니다. 독립군하고 공산권이 게릴라를 형성을 해서 밤이면 동네를 내려와 그들의 세계가 되고, 낮에는 만주군 혹은 일본의 세력으로 교차되는 곳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곳에서 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제가 자랄 때의 배경을 알고 싶어서 거기에 관한 것을 몇권 읽었습니다. 이런 등등의 일이 제 머리에서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성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인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여성해방을 위한 일에도 남에게 뒤지지 않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성에게 눌려있던 여성이 자기 권한을 찾는 문제, 해방이라는 시각에서 긍정적으로 봐왔습니다. 그런 발언도 하고 그런 글도 지금까지 써왔습니다. 그런데 이 책들을 읽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여성들이 쓴 "성의 붕괴"라는 책을 보면, 지금 일본은 혼자사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는데 퍼센트는 정확하게 잡을 수 없지만 대체로 20%이고, 특히 30대 이후들의 독신녀 여자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만난 사람중에도 두 사람은 그런 사람인데 결혼은 하지 않습니다. 직업을 확실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고 한 사람은 직업이 없습니다. 파트타임으로 수입이 20만엔 정도라고 합니다. 전임을 하지 않는 이유는 하기 싫어서입니다. 혼자 살고 여가를 자유롭게 즐기겠다는 것입니다. 직장을 가진 사람들 중, 38%-40%에 가까운 여자들이 직장을 가지고 있고 이혼률이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중에, "모성애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남성들이 여성을 가정에 붙들어 놓기 위해서 만들어낸 인위적인 발상이다. 모성애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부성애가 없듯이 모성애도 없다.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고 합니다. 이런 말들을 인권의 차원에서 다 옳다고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결과로 남는 것은 허전하고 삭막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자는 남자대로 자기 세계를 얘기하고 여자는 여자대로 자기 권리를 찾고 뿔뿔이 헤어지니까 이것은 하나의 집이지 Home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외로워서 그런지 "품"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품이라는 것이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젊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품의 느낌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40대의 젊은 독신녀가 제게 찾아왔는데 그는 드물게 볼 수 있는 강인한 의지의 여자였습니다. 직장관계로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결혼도 했었는데 실패를 하고 아이는 커서 고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이고 미국에 가서 결혼을 한다음에 재출발을 하고 몇십년을 악착같이 해서 학위를 따서 돌아왔는데 그 학위하고 직장이 맞물리지 않아서 고생하는 상태에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내용을 몇마디 들어본 후 오는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무슨 말을 시작했는지는 모르나 무슨 말을 하다가 말중에 품이라는 말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품이 뭡니까? 그렇게 물어봅니다. 이 사람이 품이라는 말을 모르기에 그래서 이유가 있다고 생각을 해서 품이란 이런 것이 아니냐며 한참 얘기를 했습니다. 이 여자가 끝무렵에 가서야 "제가 정말 잃어 버린 것이 있었군요. 그것이 바로 품이었군요. 저는 이 말 조차도 잊어 버렸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여자는 자기의 삶을 이겨나가려고 투쟁하는 속에서, 남자에게서 해방받으려고 남자를 일시적으로 증오하는 속에서, 여권을 찾는 투쟁 속에서 품이라는 것을 잊어 버렸습니다. 개념도 잊어 버리고 말도 잊어 버렸습니다. 그런 얘기를 듣고 저도 놀랐습니다. 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눈이 동그래지는 분도 계신 것 같고 저런 말을 이 시대에 무엇때문에 하는가 하고 들을 분도 계실 것을 전제하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미국가서도 청강생이 한 40명정도였는데 반수 정도가 여자였습니다. 그들은 홀로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반대학 나오고 결혼해서 실패한 사람들이 절반은 되는 것 같고 하나씩 묻지는 않았으나 나이가 30-40대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그들은 새 출발을 하면서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문동환 박사가 미국에 살다가 한국에 혼자 나온다고 하니까 딸 아이가 하는 말이 "이제야 우리 집이 정상이 되네"라고 하더래요. 왜 그러냐고 하니까 "엄마와 아버지가 한데 있는 데가 어디 있어. 우리집만 한데 있어서 모두 이상하다고 한다"고 하면서 아빠만 가면 우리 집이 정상이 된다고 했답니다. 미국이 그런 세상으로 되었고, 일본역시 벌써 그렇게 되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홀로서고, 직업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 제 삶을 살아간다고 했는데 그래도 그렇게 주장하는 그의 얼굴에는 화색은 없었습니다. 자유를 찾고 권리를 주장하다 보니까 결국 잃어 버린 것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품"이라는 말같이 맞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성운동이 결국 발전하다 보니까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품이란 것이 세상에서 없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래 전에 스팽글라라는 고등학교 선생이 "서구의 몰락"이라는 세권의 책을 내서 괭장힌 충격을 던졌습니다. 문명비판의 책이었는데 거기에서 그가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조국이라는 말, 모성애라는 말, 가정이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한데, 조국이라는 독일말이 세계라는 말로 바뀌어 졌고, 가정이라는 것은 없고 House만 남고, 개인만 남아있다. 모성애도 없어졌고 여자만 남았다. 이렇게 탈 바꿈을 해서 서구 문명의 중심은 다깨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공통된 것은 조국, 가정, 모성... 이것을 하나로 말하자면 "품"이라는 것으로 집약이 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품이 없어져 갑니다. 품을 잃어 가는 세상... 품을 잃고 홀로 사는 세계, 한데 모여 살지만은 모래알을 비닐주머니에 담은 것 같은 것, 이것을 헤치면 와르르 흩어져 나가는 것, 서로 응결될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인간들이 되어갑니다. 품을 잃은 사람들, 홀로 사는 사람들, 65년에서 85년까지 20년 사이에 변화가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어느 통계에 의하면 프랑스에서 벌써 65년에 시작되었는데 27.6%가 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20년후에는 34.8%로 증가했습니다. 미국은 65년에 24.6%였는데 85년에 40.9% 지금은 반수가 넘었습니다. 영국은 22%가 한 세대에 혼자 삽니다.


이렇게 되면은 살기도 홀로서기인데 영국도 지금 주택 자체가 문제가 없는 만큼 많은 데도 자꾸 혼자 살기때문에 주택은 모자라 갑니다. 자꾸 분화되니까 주택문제가 계속 느는 것이지 사람이 늘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족은 품이었습니다. 거기서 노동과 임금이라는 조건 밑에서 붙어 있는 것이 아니고 품이 라는 것에 있어서 거기서는 반듯이 따지지 않고 자기가 돈벌지 못해도 콤플렉스 않가져도 되는 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산업사회 산업혁명과 더불어 가족제도, 대가족이 깨져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핵가족으로 돌아섰는데 그것은 경제 단위가 되고 말았습니다. 핵가족도 사실상 점점 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삭막한 세계로 들어갑니다. 세밀한 사회학적 분석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만은 기계사회라는 것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기계와 첨단 기술에 의해서 어떤 것이 한번 나오면은 그것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내놓고, 거기에 적응해서 사람들이 맞추어서 살도록 세상이 꺼꾸로 되어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 끌려다니면서 모두 알알이 개별적으로 그와 관계를 지어나가면서 품이라는 것은 점점 없어지고 맙니다.


품 하면 일단 여자를 생각합니다. 애기를 품은 모습이 가장 품의 상징입니다. 젖을 물린 모습이 가장 품의 상징입니다. 엄마는 생명을 가진 자궁, 생명을 가진 젖가슴, 이것이 상징적인 품의 원형입니다.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모습이라는 것은 엄마의 가슴에 애기가 젖을 물고 새근새근 코를 골며 자는 그 모습이 아마 우리가 생각하는 낙원의 모습, 그것일 것입니다. 기독교가 마리아의 상을 그리고 홀로 사는 홀아비들이 예수상보다 마리아 상을 걸어 놓는 이유는 하도 적막해서 마리아 상을 늘 보면서 평화의 위로를 느꼈던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젖을 물리는 일도 없어지고 아예 아이를 낳지 않고 남자가 아이를 낳으라는 운동이 지금 한참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이론상으로 성립이 됐다고 합니다. 제가 본 책에서는 이론상으로 남자가 아이를 낳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애기 낳는 문제도 사랑을 거쳐서 낳는 것이 아니고 체외 수정법이라는 것이 있어서 무수하게 그렇게 되버리고... 낳자 마자 어머니가 자기 젖은 물리지 않으니까 아이에게 품은 벌써 없어집니다. 이제는 체외 임신까지 논리적으로 성립이 됐다고 주장하며, 아이하고 엄마하고 직접 상관 없다는 쪽으로 몰고갑니다. 그럼 더 나아가서 세상은 어떻게 되어가는가? 꼭 남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남는 것은 삭막한 것입니다. 이런 현실이 다가오는데 우리는 모른척 하고 있을까? 그런 현실을 놓고서 기독교가 자기 낭만적인 얘기만 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않될 것 아닌가? Home이 아니고 House, 잠깐 와서 잠만 자고 가는 홀로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소위 가정이라는 Home이라는 것도 붕괴됩니다. 모성애도 파괴되어 갑니다. 모성애라는 것은 다르게 보면, 거기에 거부할 이유가 있습니다. 거부할 수 있습니다. 모성애를 다른 말로 하면 희생이라는 말입니다. 젖을 먹인다는 것은 자기 피를 먹인다는 것이 아닙니까? 남자들은 나는 희생하지 않고 너만 희생하라고 해서 여자의 희생 위에다가 품이라는 것을 형성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지났습니다. 낙원이라는 것이 품이라는 말인데, 안심하고 내맡긴 품인데 거긴 무슨 희생인가가 있습니까, 거기에는 사물이 없습니다. 애기가 엄마의 가슴에 품어 있는 모습이 낙원과 같습니다. 그것이 소위 범죄 전의 아담과 하와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사람이 그리워하는 낙원인데 한번 지나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다른 생각을 해야지 그것을 다시 회복시키려고 해보아도 되지 않습니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습니다.


사회 구조가 그렇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 품을 뺏는 사회입니다. 이기주의 추구를 하게 되어있고, 개인주의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회주의도 같습니다. 처음부터 가족 사회주의라는 것은 제도적으로 가정을 전제하지는 않았습니다. 가정은 오히려 아이를 낳자 마자 아이는 수용하게 하고, 남자 여자 공통으로 일터로 나가서 일을 하게 했습니다. 이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냉혹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무언가 적을 눈앞에 계속 만들어서 정열을 뿜게 하려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혁명의지만 자꾸 불어넣을 때는 유지가 되었는데 그것이 희미해 지니까 그 다음에는 맥이 빠지고 쓸쓸한 분위기만 남았습니다. 냉혹한 세상, 노동만 강요하고, 모임을 가져도 계획된 속에서 사람들을 모으니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품이라고 할 때, 김일성을 품으로서 내미는 것입니다. 어버이의 품, 그것을 자꾸 느끼게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통일까지도 품의 영역 속에있습니다. 통일되면은 조국이라는 품이 돌아온다고 합니다. 품을 빼면은 반란이 일어나니까 그것을 대신한 것이 김일성의 품입니다.


일본은 왜 천황제를 두었느냐고 하면 여왕벌에 비유해서 설명을 합니다. 여왕벌이 있는 동안에는 그 품 속에서 하나가 되어 있지만은 여왕벌을 제거하면 알알이 흩어져서 통제할 가능성이 없으니까 천황제를 둔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당에 우린 품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야겠습니다. 교회를 생각하면 더군다나 그렇습니다. 희생이라는 것을 빼고 품이라는 것은 오지 않습니다. 여자 혼자 끌어 들여서, 혼자서 모성애 다시 지키라고 강요할 수 없습니다. 희생을 빼면 품은 않옵니다. 가족이라는 것도 "나"를 그만큼 적게 하고, 자기를 깎는 그것들이 모여져서 응결된 것이 바로 품의 장입니다. 서로 이것을 하지 않겠다고 하니까 품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 여성이 주역을 했는데 난 혼자 하지 않겠다고 하니까 그러면 우리가 합해서라도 이것을 만들자고 해야할텐데, "안하면 말지"하는 것이 오늘의 모습입니다. 품은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품은 생기지 않습니다. 나에게서 너 혹은 우리라는 것으로 축을 옮겨야 합니다. 각기 자기를 깎는 것이 응결되어서 품이 된다는 말입니다. 여자가 손을 떼니까 이제 어떤 방법으로든지 같이 하자고 나와야 하는데 그것이 없습니다. 품이라는 것은 상관 관계에서 형성이 되는데 그것을 이루려는 노력이 형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자가 일방적으로 당했던 것인데 그가 후퇴하니까 새로운 노력을 해야 되는데 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품으로서의 공동체라는 것, 생각하지 않으면 않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전제에서 예수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품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느냐? 그 귀절이 제게 와 닿았습니다. 내가 품기를 얼마나 원했느냐? 마태복음 새번역에는 "품"이라는 말이 한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가를 찾아 보니까 두번 나오는데 하나만 "품기라"는 말로 나옵니다. 이 말의 희랍어의 뜻은 새 둥지와 같이 감싼다는 것인데 저는 그것을 품이라는 말로 바꾸고 싶습니다. 에미가 먹여주는 관계에서 하나의 보금자리는 품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깨지면 도리어 버리고 달아납니다. 오늘의 사회가 버려진 새 같은 느낌이 납니다. 번역에서는 반영이 않되는데 한국말로는 "품는다"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Together, 모은다는 뜻으로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독일어도 마찬가지로 모은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품는다는 것이 더 옳은 번역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공동번역에는 그 단어도 없고 옛날 번역에도 그것이 없었습니다. 누가에도 마태에도 꼭같은 희랍어 단어가 있는데 그 단어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품에 안기를 얼마나 원했느냐,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 그렇게 연결을 하다 보니까 예수가 이런 말을 합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품이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나는 머리둘 곳이 없다." 가장 고독한 사람의 말입니다. 오늘의 군상들을 나타낸 가장 외로운 모습을 예수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이것을 그대로 의미상으로 집약을 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 세상에서 외롭게 박해 받고 뺏기는 민중들아 내 품으로 오너라. 내가 너를 끌어 안아 줄것이다. 내가 절대로 수고를 주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지치고 실망하고 이런 사람 들이 내 품에 오너라. 조건없이 너를 안아 줄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 시각에서 예수와 민중 얘기를 했습니다만은 예수와 민중과의 관계에서 보면은 어떤 조건도 내세우는 일이 없고 그냥 그들의 예수가 계획을 세우고 어떤 스케줄을 짜서 전투 전략을 내세워서 민중을 계도하면서 강제로 끌어가는 모습이 아니라 거꾸로 그의 둥지에서 고생하고 있는 민중의 소원에 끌려 다니는 것이 예수의 모습입니다. 품은 나의 것을 저쪽에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제 뜻을 수용하는 모습입니다. 나를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저쪽 것을 받아들이는 그 폭이 얼마나 넓은가 하는 것이 바로 품인데, 저쪽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는 자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결국 자기를 희생하겠다는 각오없이는 안 됩니다.


제가 언젠가 광주의 영아원에 안내를 받아서 구경을 하다가 모두 창백한 모습의 동공만 큰,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을 보다가 갑자기 뛰쳐나왔습니다. 가서 만지면은 웃다가 내가 지나면 울고, 또 다른 아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젖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 동공이 나를 중심으로 돌고있는데 갑자기 소름이 끼쳤습니다. 내가 무슨 위선을 하고 있는가하는 생각이 나서 뛰어나왔습니다. 백목사님이 나를 안내했는데 그 이유를 몰랐죠. 그때 난 너희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막연한 한 젊은이의 구름같은 감상적인 생각밖에 없고 난 너희들에게 줄 것이 없다. 준비를 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원하는 것이 젖이 아니냐? 젖은 피가 아니냐? 나는 공급할 피가 없다. 그때 제가 메시아라는 것은 결국 모든 관심이 집중되는데 고스란히 나를 맡겨 버리면 죽음에 다다를 수 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모습입니다. 십자가도 그런 의미에서 교차점에서 꼼짝못하는 것이 십자가 입니다. 자기 희생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같은 이런 현실에서 희생하려는 모습이 없고 나만 확장시키고 내뜻만 관철시키는 그런 것이 무엇이 되겠느냐? 운동권이나, 우리 향린교회도 그동안 그런 모습도 보여왔습니다. 홍목사님 잡혀들어간 다음에 여러분은 놀라울 정도로 단결해서 그 배후의 세력으로 등장을 했습니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홍목사님 개인 문제가 아니라 단결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힘이 얼마나 강한가 하는 것은 얼마나 서로 간에 품이 될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품이 없는 운동이란 오래 가지 않습니다. 품은 서로 희생하면서 서로 연결하는 동지적인 따뜻한 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제나 적대자를 전제하는 것 말고, 우리가 어느 정도의 품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는 상징적이라도 좋습니다. 마지막 장면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떡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이것은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주려는 내 살이다. 이것은 내가 너희들에게 주려는 내 피다. 이것을 나누어 먹어라. 그 기본 자세, 이것이 마지막 구체적 십자가의 상징인데 그것이 하나의 품이 되어서 예수의 민중들이 아주 다르게, 바리새파하고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예수님은 품을 내놓았습니다. 그 무식한 민중이 그 품에 안겨서 끝끝내 세상을 이길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모여서 예배의식을 하는 것은 우리가 품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라는 바울의 표현, 우리 번역으로 하면은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어서 그것이 우리 공동체에 중요한 목표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린 그 품안에 있습니다. 아니 우린 그 품을 형성해야 합니다. 포근히 앉아서 가만히 잠만 자는 것이 아니라 잠의 구체적인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기 위해 우린 요람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빼면은 삭막한 투쟁 밖에 남지 않습니다.


일제하에서 우익과 좌익, 좌익 내부에서의 분열이 극심해서 20-30명, 많아야 100여명끼리 서로 싸움만하다가 상호 투쟁을 하는데 얼마나 한국 사람끼리 서로를 죽이는지 저는 놀랬습니다. 상대방을 모두 몰살시켜 버립니다. 살벌한 관계만 있지 품은 없었습니다. 우리 운동권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운동은 해야 하나 품이 없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대전제가 있습니다. 삭막한 투쟁만 머리에 두면은 결국 언젠가 분열만 남게 되고 냉혹한 현실 밖에 남지 않습니다. 엔( :in)그리스도, 그런 의미에서 바울도 투쟁에 일생을 보냈는데 그는 지탱해 나갈 수가 있었다고 봅니다.


40년 전에 향린교회 출발은 이런 의미에서 품을 만드려고 했던 것이 본래의 목적이었습니다. 그것이 이기주의라는 것 때문에 많은 도전을 받았고, 우여곡절을 많이 거쳤습니다. 상처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나 고정된 품은 없겠으나 품을 형성할 때만 교회 라는 곳은 제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고난당했으니까 나도 희생해야 되겠다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엔 그리스도, 그의 품됨을 연속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품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이기주의 현실을 극복하는 또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만 가능할 것입니다. 엔 그리스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라는 말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