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기도해 주신 문홍주 장로님 기도를 잘해주셨습니다. 그것이 마음에 맞으면 눈물이 납니다. 사람의 마음 통하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지방감정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지방정책이러고 해야 맞습니다. 지방차별이지 감정이 아닙니다. 일부러 차별해서 우리 민족을 분리시키는 정책이지 민족감정이 아닙니다. 단지 차별일 뿐입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릴 성서 말씀은 빌립보서 2:6절에서 9절까지인데, 우리 신약에 전승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가장 처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에 대해서 고백한 가장 오래된 층에 속하는 고백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점점 희미하게 무시당해왔습니다. 제가 번역을 다시 해봤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본체(우리의 모습, 우리의 형상)라고 번역을 했는데, 하느님의 모습이었으나 하느님과 같은 것을 하나 뺐습니다. 원문은 하느님과 같은 것을 뇌행물처럼이라는 것이 들어가 있습니다. 기득권처럼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비워 한 노예의 모습을 들어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은 노예의 형상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형상이라는 말과 하느님의 본체라는 말이 꼭같은 단어입니다. 노예의 모습을 들어냈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들어냈습니다. 그는 자신을 낮추어 죽음의 십자가에까지 복종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를 높이 올리셔서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어 하늘에 있는 자나 땅위에 있는 자나 땅아래 있는 모든 사람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가장 일찍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것을 바울이 인용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된것은 주님이 부활한 이후에 약 10년 전후에 늦어도 15년 전후에 이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고백을 한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읽으면은 두단락이 구별되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상반은 오늘 읽은 6절까지는 스스로를 아주 철저하게 비우고 낮추는 마치 종의 모습을 읽고 십자가에 처형되어서 없어지는 그런 글을 그렸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바로 그런 글을 하느님이 높여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고 모든 것이 그 앞에 굴복하게 하셨습니다. 후반은 다른 면을 보여줍니다. 아주 낮아지고 자기를 없애는 자신, 그리고 후반은 오히려 거기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한 글을 하느님이 높였습니다. 내용이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역사적인 그리스도론이 또 우리 머리가운데 차있는 것이 또 우리가 찬송가나 설교에서 많이 듣는것은 그리스도 하면은 바로 9장아래 모든 것보다 높으니 온 만물이 그에게 무릎을 꿇으니 전능하니 혹은 무속부제하니 라고 고백하고 싶어서 그 위에 있는 스스로를 비우고 낮추고 종이 되고 찌르면 죽을수밖에 없는 한계적인 존재로서의 예수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보통 우리의 정서입니다. 또 우리는 그렇게 배워왔고 기독교가 그점을 강조해왔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승리의 기독교, 결과적으로는 강자의 논리에 의해서 지배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고백의 어느쪽에 무게가 있느냐고 하면 복음서대로 역사의 예수를 그린 복음서대로 하면 촛점이 역시 수난당하는 예수에게 있는데 그것은 수난하는 예수, 영광이라는 부활을 우리 앞에 놓고 보면은 수난이라는 것이 앞서서 그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차지하고 영광송을 부활자체에 대한 보도는 아주 애매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보면은 지금 빌립보서에 있는 소위 그리스도 찬가라고 부르는 그것을 후반부의 것이 중요하지 않고 전반부의 것이 더 중요했다, 그것이 액센트가 있었다 그런 말이 되겠습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에 나오는 소위 때가 찼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찼다라는 것은 상반적인 말인데 우리 기독교에 중요한 내용으로 되어 있어서 성령이 충만하다 이것이 궁극적인 목적처럼 삼고 은혜고 무엇이고 찬다라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어있습니다. 기독의 목적도 채우는것 무엇인가 속이 공허한것을 채우는 것, 이것이 모든신앙 생활의 목적인 것처럼 이렇게 생각합니다. 히랍말로 플로로라는 채운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빌립보서에 나오는 소위 비운다는 말에 상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채운다는 이것이 우리의 거의 목적처럼 되어있었고 비운다는 것이 아주 상대화 되어있었습니다. 비우는 것은 망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비우면 않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챤 들에게 값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정치꾼들에게 이용이 되어서 나는 비운다 비운다 하는 소리가 한참 대통령 된다는 말로 이용이 될정도로 비운 사람이 높은 자리를 앉는다 그런 식으로 이용이 되어도 우리의 진실한 의미를 제대로 그리스도 고백으로써 별로 쓰지 않아 온것입니다. 전통적으로나 기독교 사회에서 그렇습니다. 완전한것 차는것, 영광스러운것, 승리하는 것 그런데 관심이 집중되고 비운다는 의미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에게 있어서 십자가가 중심이고 바울은 십자가에 외에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그말을 심각하게 생각하면은 찬다는 그것보다도 비운다와 상당히 집결되는데 십자가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했던들 비운다는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십자가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도 얼른 뛰어 넘어 가서 부활 영광 쪽에만 가는것 그것이 우리의 경향입니다. 그래서 비운다 그것을 배려한다라든지 무능하게 된다는 상징적으로 생각을 한다면 동시에 십자가도 패배와 무능의 상징 이상 아무것도 아닌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 비운다라는 것을 빼고 십자가의 의미도 모를뿐 아니라 예수의 삶 전체를 우리는 알길이 없습니다. 비운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원천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말의 하나입니다. 이제 비운다는 말의 뜻을 돌아가면서 생각을 해봅시다. 예를 들어서 에밀레종 생각을 해보면 거기에 대해서 정사로서 기독된 것으로는 신라 경덕왕이 그의 부왕인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서 구리 12만톤으로 범종을 만들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이것을 위해 전국의 구리는 숟가락에 이르기까지 전부다 거두어 들이는 대로 26년에 걸쳐서 완성하여 성덕왕 신종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되어있는데 이것이 정사입니다. 얼마나 긴 시간동안 이것을 만들었나 찬란한 면만 보여주고 있고 아버지의 덕을 칭송하기 위해서 했다는 갸륵한 한 왕의 심정까지 표현한것입니다. 이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얘기만 하고 중요한것이 빠졌습니다. 정말 그 종이 이루어 질 동안에 비어진 다른 면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정사라는 것이 표면에 나타나는 것만 보여줍니다. 그런데 민중들은 참을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잘아시는 에밀레 종이라는 이름을 하나 붙였습니다. 그것은 정사에 없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사를 반역하는 정사는 눈감아서 보지 못하는 다른 얘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너희 눈에는 그렇게 보이느냐 우리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고 그 종을 27년 만드는 동안 대를 이어서 만드는 동안 숟가락 하나 남기지 않고 다 가지고 갈때 얼마나 착취가 심했으며 그 면을 보는데 어떤 집의 소녀를 잡아다가 구리를 부어서 그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얘기로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모든것을의미합니다. 민중의 모든 아픔을 고혈을 빨아서 이 종을 만들었습니다. 그 종을만든것은 실제로 그들이지 그것을 만드는 왕의 손가락 하나 까딱한 이유가 없습니다. 실제로 그것을 만든것은 민이었던것입니다. 꽝 하고 종을 치는 소리를 들으면은 거룩한 영광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민중의 귀에는 처음에 꽝 하는 소리를 듣지 않고 그 다음에 여운으로 남는 에밀레 에밀레 이 소리만 들렸습니다. 엄마 엄마 부르는 소녀의 슬픔과 비애의 소리만 들렸습니다. 민중은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너희 귀에는 그렇게 들릴지 모르나 우리는 그렇게 않본다.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 희생된 모든민중의 피와 땀과 고통 그것을 우리는 비명 소리를 듣는다. 한이 맺힌 소리를 우리는 듣는다. 그것이 민중의 얘기입니다. 영원히 듣지 않는것 누구도 관심 가지지 않고 듣는것 그것을 얘기체로 만들어서 전하는 것이 민중입니다. 또 그들이 말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덕왕의 성전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에밀레종이라고 만든 민중들은 진실을 말하려고 합니다. 세상에 않보이는것 깔린것을 얘기하려고 합니다.


만리장성을 중국의 심볼같이 되어있어서 중국의영광을 상징하는 것같이 생각하고 웅장하고 대단하다고 보고 있는데 맹부인이라는 얘기를 어느 중국신학자가 우리에게 전해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끌려가서 일하던 사람 거기서 결국은 죽었습니다. 그사람의 아내되는 사람이 그들을 찾아가서 울고불고 하소연 하면서 내 죽은 남편의 뼈라도 내놓으라고 통곡을 해서 마침내 그 두꺼운 만리장성이 무너지면서 뼈가 튀어 나왔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남편의 뼈였습니다. 또 쌓으고 쌓아도 무너지니까 왕이 어느 도사에게서 물어보니까 일리마다 사람을 같이 묻어야 만리장성이 된다고 해서 일리마다 하나씩 사람 묻었으니까 만리면 만명의 산 사람을 묻은 것입니다. 그래서 만리장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의 한사람이 이 맹부인의 남편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왕이 그 여자를 보자고 해서 보더니 너무 절색이니까 탐욕이 생겨서 자기 아내로 하려고 하니까 그여자가 좋으나 세가지 요구만 들어달라. 첫번째는 강가에서 49제를 지내고 49높이의 탑을 쌓고 그것을 기념하고 그 현장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왕은 그 현장에 꼭 참여하면 결혼하겠다고하니까 왕이 정말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그 49척되는 높이에서 그 왕을 내려다 보면서 그 왕이 지금까지 하던 온갖 죄악을 폭로하고 물에 빠져죽었습니다. 그랬더니 왕이 하도 분해서 그 시체를 건져다가 갈고갈아서 물에다 내던졌는데 그것이 변해서 은빛 색깔의 조그마한 고기들로 변해서 지금까지 산다는 내용입니다.


전반부의 만리장성을 만든 이 영화스러운 얘기를 그린 정사가 있습니다. 그 굉장하고 어마어마한 중국을 상징하는 그러나 이 민족을 거꾸로 다른 얘기를 합니다. 그때 거기 동원된 수많은 이름 없는 민중들의 피와 눈물 이것을 얘기하기 위해서 맹부인 얘기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이 부활만 얘기하고 십자가에 죽는 그 모습은 자꾸 피하려고 하지 얘기를 전혀 않해줍니다. 이 정사가 강한 자들 앞에 내세우는 그 2만의 숨은 희생자들 그러나 실제로 그 만리장성에서 쌓은 세력들 그것을 무시해 버리는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민중 얘기라는 것을 한것입니다. 우리 역사 안에서 잊혀진 것들, 사람들이 관심하지 않는 것들 , 이 잊혀진 이면을 찾아서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가 영원히 증언해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을 끊었던 세력이 우리를 따라와서 증언하는것 그리스도인이 할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말할때 가장 중요한 십자가의 의미도 바로 이 이면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전능한 예수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신의 모습을 가졌으니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몸을 입되 십자가에 체험되기까지 철저히 자기를 비웠다. 바로 민중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희생되나 실제로는 만리장성을 쌓고 실제로는 종을 만든 역사의 담지자 실제 창조자, 그들이 무시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증거하는것, 그 십자가를 증거하는것과 절대로 유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기를 비운다는 것이 어려운 얘기이지만 우리 기독교가 기도하는 내용은 자기를 채우는 것으로 꽉 차있습니다. 하느님을 참 사랑합니까? 혹은 자기 남편을 혹은 아내를 또는 어느 누구를 사랑합니까? 정말 사랑하는 모습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자기 욕심을 끝끝내 충족하는 것입니까? 사정없이 마지막까지 뺏는 것이 사랑의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난 이만큼 사랑했는데 라고 생각하면 그 순간 당신의 사랑은 정리된 것입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당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예수십자가 의미가 그렇게 사랑의 극치를 얘기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철저히 비웠다는 의미에서 자기 무장해제를 하고 자기의 생각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극치를 나타내는 것 그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말하는것 사랑과 희망과 믿음 등등 얘기하는 것 여기 표시된 사랑이나 복종이나 혹은 신앙 들도 비운다는 것을 빼지 않고는 절대로 불가능 한것입니다. 여기 기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서구 문화의 한 형태입니다. 기독교와 성서는 다릅니다. 그것을 뺏는것 가지는것 점유하는것 극복하는 것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이 미덕입니다. 동양은 그와 반대로 비우는것입니다. 하느님과 마주앉아 이점이 없으면 사람과의 마주앉음에 있어서도 내 생각한 바를 관철시키겠다는 그것까지 포기하겠다는 순간 그때 사랑은 싹트는 것읍니다. 사랑은 자기를 비우겠다는 것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를 비운 가장 상징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빼면은 영광도 부활의 의미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자신을 비우되 철저히 비워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했다는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민중이라는 말을 민중신학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라고 우리는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