ⅩⅦ강 땅을 움켜쥔 이들의 저항: 예루살렘 논쟁(12:1-44)

 

0. 기도

 

1. 지난 주 복습

- 참된 지도자(메시아)의 면모 또는 자격: 예루살렘 입성

- 종교적 삶과 표현의 문제, 형식과 내용의 문제

- 종교생활과 생활종교 또는 신앙생활과 생활신앙

- 기도와 믿음과 용서

- 종교의 제도화가 가진 단점들

- 권위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2. 말씀 읽기: 마가 12:1-44

 

3. 말씀 새기기

 

1 그리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가꾸어 울타리도 둘러치고 (포도주를 짜내는) 구덩이도 파고 망대도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농부들에게 빌려주고 (타지로) 떠났다. 2 그리고 때가 되자 (그는)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어 그들에게 포도원의 열매(소출)를 받도록 했다. 3 그런데 (농부들은) 그를 잡아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을 그들에게 보냈는데, (그들은) 그도 머리를 때리며 모욕했다. 5 또 다른 종을 보냈더니 죽였다. 그래서 많은 종들을 (보냈더니) 때리거나 죽였다. 6 이제 한 명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마지막으로 그를 그들에게 보내며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하고 말했다. 7 그러나 그 농부들은 서로 말하기를 이 자가 상속자다. 가서 그를 죽이자. 그러면 유산은 우리차지가 될 것이다.’ 하였다. 8 그리고 그를 붙잡아 죽였다. 그리고 그를 포도원 밖으로 던져버렸다. 9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는가? 와서 농부들을 없애 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포도원을 줄 것이다. 10 이런 기록을 읽지 못하였는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11 이런 일은 주님에 의해 된 것이라 우리들의 눈에는 놀랍다.’” 12 (그들은) 그를 잡으려고 했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예수가) 그들을 가리켜 비유를 말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를 내버려두고 떠나갔다.

 

- 이 비유는 무슨 사건 다음에 등장하는가?(11:27-33)

- 이 비유는 누구에게 들으라고 한 것일까?

- 농부들과 주인, , 각각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 이 이야기가 말하는 당시의 경제적 상황은 어땠을까?

- 이사야서 51-7절과의 관계는?

- 이 비유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12장 전체는 예루살렘의 입성 후 예루살렘 지도자들과의 대결을 보여준다. 예수는 갖가지 올무를 벗어 버리고 적극적 대결 양상을 보이시며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책망한다.

포도원 농부들의 이야기는 예수가 벌이시는 하느님 나라 운동을 거부하고 예수를 배척하는 적대자들의 행위가 얼마나 악랄하고 어리석은가를 보여주는 비유였으나 마르코 복음서 기자에 의해 변용되었다. 변용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우셨다. 그는 이 나라를 지도자들에게 맡기셨다. 그는 예언자들을 거듭거듭 보냈으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언자들을 배척하고 박해했으며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다. 그런데 그들은 이제 이 하느님의 아들마저 죽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를 다시 일으키시어 새 이스라엘의 머리로 삼으실 것이며, 이러한 악행을 저지른 지도자들을 진멸하고 이스라엘의 지도권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실 것이다.”

 

13 그리고 (그들은) 말로 그에게 올가미를 씌우려고 몇몇 바리새파와 헤롯파 사람들을 그에게 보냈다. 14 그래서 (그들이) 와서 그에게 말했다. “선생님, 당신은 진실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겉모습을 보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참된 길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카이사르에게 주민세를 바쳐도 됩니까? 안 됩니까? 낼까요? 내지 말까요?” 15 그런데 (그는) 그들의 위선을 알아채고 그들에게 말했다. “왜 나를 시험하느냐? 내게 데나리온을 가져와라. (그것을) 보자.” 16 그들이 가져오자 그들에게 말한다. “그것의 초상과 글자는 누구의 것인가?” 그에게 대답했다. “카이사르요” 17 그러자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로.” (그들은) 그에 대해 놀랍게 여겼다.

 

- 바리새파와 헤롯파 사람들의 질문이 예수에게 왜 올가미가 되는가?

- 예수의 대답이 올가미를 벗어날 수 있는 대답인가?

- 이 이야기는 독자에게 어떤 물음을 유발시키며 또 깨달음을 주는가?

 

주민세의 납부여부를 다루는 장면은 로마의 법과 하느님의 법 중 어느 것을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납세는 유일신 신앙의 민중정서와 현실적인 로마권력이라는 양날을 지닌 날카로운 칼이었다. 주민세는 서기 6년 헤로데의 장남 아르켈라오가 파면된 후 임명된 최초의 로마 총독에 의해 부과되기 시작했다. 갈릴래아의 유다가 이끄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이 납세를 거부하면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유혈 진압되고 말았다. 그 이후 다들 억지로나마 주민세를 냈지만, 각자의 처지에 따라 다른 주장들을 하였다. 바리새파는 납세는 로마의 노예임을 인정하는 혐오스런 짓이며 유일하신 이스라엘의 주님이신 야훼 하느님께 불충스런 짓으로 여겼으나, 현실적으로는 마지못해 이행했다. 반면 친로마정권인 헤로데 당원들은 당연히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납부하여 로마의 평화와 안정을 누려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예수의 어떤 대답도 바리새파나 헤로데 당원 모두를 만족시키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예수는 이들의 간계를 알고 있었고 데나리온을 보이며 기막힌 말로 위기를 모면함과 동시에 이들을 되받는다.

데나리온은 로마의 은화로서 세금을 낼 때 사용하는 화폐였다(헬라어 드라크마). 표면에는 월계관을 쓴 카이사르의 초상과 이름이, 그리고 이면에는 신화적 인물이나 신들의 보좌에 앉은 동물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런 형상이 우상숭배로 해석될 여지가 있어서 더욱 문제였다. 그것은 바로 카이사르의 권력을 상징했다. 예수가 이 때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게 하신 것은 저들로 다시 한번 카이사르의 권력을 확인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카이사르가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카이사르를 군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이사르가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를 군주로 인정하여 그에게 세금을 바치고, 하느님이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면 그를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하느님께 바치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치라는 말은 되돌려주라는 뜻으로 모든 부채와 세금의 납부를 나타내는 전문적인 용어이다. 카이사르의 권력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권력의 한계를 보여주며 카이사르의 권력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권력을 인정하여 둘이 경쟁할 경우에는 오직 하느님의 권력에 순복해야함을 보여준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는 물음에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을 되돌리라는 것을 첨가한 예수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하느님의 것 아닌 것이 이 세상에 있는가? 황제의 정치적 상대성과 하느님의 절대성을 비교할 수 있을까? 현상과 세속 현실을 묻는 질문에 본질과 영원한 진리를 대답하시므로 현실의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고통과 어려움에 처할수록 원리, 원칙을 잊어서는 안 된다.

 

18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인 사두개파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그것을(부활에 대해) 질문하며 말했다. 19 “선생님, 모세는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썼습니다. ‘어떤 사람의 형제가 죽고 부인만 남아서 자식들 두지 못한 경우, 그의 형제는 그 부인을 맞아 그의 형제에게 후사를 세우도록 해야 한다.’ 20 칠 형제가 있었습니다. 첫째가 아내를 맞았다가 죽고 후사()를 두지 못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를 맞았는데 후사 없이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그렇게 일곱이 후사를 두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에 모두 죽고 여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들이)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인은 그들 중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일곱이 그 여인을 맞았으니 말입니다.” 24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성서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기에 이것을 잘못 이해하는 것 아니냐? 25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는 장가들지도 않고 시집가지도 않으며,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되기 때문이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에 관해서, (그들이) 일으켜진다는 것을 두고 모세의 책 가시덤불 이야기에서 하느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것 즉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말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했는가? 27 (그는) 죽은 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자들의 하느님이다. (당신들은) 크게 잘못 이해하고 있다.” 28 그리고 율법학자들 중의 한명이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다가 (예수가) 그들에게 잘 대답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물었다. “모든 것의 첫째가는 계명은 어떤 종류의 것입니까?” 29 예수가 대답했다. “첫째는 이것이다. ‘들어라, 이스라엘! 우리의 주님 하느님은 한 분인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네 온 마음으로, 네 온 숨으로, 네 온 정신으로, 네 온 힘으로 너의 하느님 주님을 사랑하라’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라.’ 이 계명들보다 더 큰 다른 계명들을 없다.” 32 율법학자가 그에게 말했다. “옳습니다. 선생님, (주님은) 한 분이시고 그밖에 다른 분은 없다고 하신 것은 참입니다. 33 그리고 온 마음과 온 정신과 온 힘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제사보다 더 낫습니다.” 34 예수는 [그가] 현명하게 대답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감히 그에게 더 이상 질문하지 못했다.

 

- 당신은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또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 산 자들의 하느님이란 뜻은?

- 여러분에게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가?

 

사두개파와 논쟁은 부활에 관한 것이다. 부활과 관련된 이 이야기는 초대교회가 유대교와 부활의 방식에 대한 논쟁 맥락에서, 그리고 헬라 이방세계에서의 부활의 사실에 대한 논쟁 맥락에서 선포되고 전승되었던 것이다. 유대교의 부활관은 물질적인 부활관 즉 부활체는 현재의 육신과 똑같은 몸을 가진다는 것임에 비해 그리스도교는 신성한 몸을 주장했으며(고전 15:35~49), 헬라인들이 육체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은데 비해, 그리스도 교회는 육체의 부활을 인정했던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이곳에만 등장한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대제사장 그룹과 귀족층 인사들로 구성되었으며, 부유하고 세속적이었다. 그들은 교리에 있어서는 보수적이었으며 바리새적인 혁신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모두 거절했다. 그들은 무엇보다 모세 5경을 중시했으며, 예언서와 성문서도 이들의 정당한 해석이 되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구전을 인정하지 않았고, 내세나 부활이나 천사 등은 부정했다. 왜냐면 이런 교리들은 율법서에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부활의 교리는 구약에 아주 약하게 나타나 있으며, 이사야 26:19, 다니엘 12:2에 부활에 대한 사상을 분명히 볼 수 있을 뿐이다. 내세나 영생, 부활의 사상은 중간기 묵시문학 시대에 와서 꽃피웠다. 그러나 이런 보수성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였지 교리자체의 보존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형사취수제는 한 집안의 가부장적 가계를 유지하여 재산과 유산을 보존할 수 있게 하는 방편이었다. 이런 관습이 바리새파의 부활교리를 비판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런 경우에 바리새파는 첫째의 아내가 된다고 말한다. 사두개파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단순히 현 삶의 반복내지는 연장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을 통해서 본 그리스도인들의 죽음 이후의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이며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하느님은 산 자의 하느님이시다. 그런데 그런 하느님이 이미 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한 것은 그들이 살아 부활하지 않았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말씀이 부활의 증거가 된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죽음의 이해를 달리 할 수 있다. 진정한 죽음이란 하느님과 관계가 끊어질 때 오는 것이다.

율법학자의 질문과 예수의 대답 다시 이어지는 율법학자의 대답은 자못 흥미롭다. 성전에서 제사보다 사랑의 계명이 더 낫다는 율법학자의 대답은 참으로 대담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 나라와 멀지 않다고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그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목숨까지 내놓고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하느님 사랑 계명에서 온 숨을 다해라는 부분이 율법학자의 말에서는 빠져있다. 과연 그는 뒤에 나오는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을 달게 받고 목숨까지 잃어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을까?

 

35 예수가 성전에서 가르치면서 대답하여 말했다. “어떻게 율법학자들이 그리스도가 다윗의 아들이라고 말하는가? 36 다윗 자신도 거룩한 영으로 말했다. ‘주님께서 나의 주님께 말했다. 내가 네 적들을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나의 오른편에 앉아라.’ 37 다윗 자신이 그를 주님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그의 아들이 되겠는가?” 많은 무리들이 그의 말을 즐겁게 들었다. 38 그가 가르치는 가운데 말했다. “시장에서 인사 받고, 기다란 예복입기를 바라는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에서는 윗자리를 원한다. 40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고 거짓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들! 이런 자들은 더욱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41 그리고 헌금함 맞은편에서 무리들이 헌금함에 동전을 넣는 것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많은 부자들이 많이 넣고 있었다. 42 그런데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 렙톤 두 닢 즉 한 코드란트를 넣었다. 43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불러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에게 진실로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모두 넣은 것보다 많이 넣었다. 44 모두 풍족한 가운데 그것들을 넣었지만, 이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 가진 것을 모두 곧 그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로 볼 수 없다는 예수의 이야기는 어떤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

- 예수가 율법학자들을 강하게 비판하는 부분은 어디인가?

 

로마를 뒤엎고 왕으로 등극하는 정치적 메시야 상에 대한 기대도 잘못된 것이지만 종교적 권위를 가지고 민중을 억압하는 것은 더 나쁘다. 겨우 두 닢으로 목숨을 연명하는 과부의 전체 생활비마저 등쳐먹는 성전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4. 다음 주 말씀

1) 마르코복음서 131-37절을 꼼꼼히 읽어 보세요.(다른 번역본과 비교하며 읽거나, 손으로 베껴 쓰시면 좋습니다.) 시간 나시면 마르코 복음서 전체를 읽으시면 더욱 좋습니다. 바라기는 마르코 복음서 공부를 하면서 이 복음서를 한 10번 정도 읽는 것입니다.

 

질문들

- 13장은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서 쓰인 것일까?

- 상황이 위급함을 나타내는 표현들을 찾아 보자. 위기의 징조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 거짓 그리스도들은 어떤 이들을 말하는 것일까?

- 오늘의 거짓 그리스도는 어떤 모습의 사람들일까?

- 13장의 저자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청중들에게 제시하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또 어떻게 위로하고 있는가?

- 13장이 오늘을 사는 우리와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