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ⅩⅥ강 하늘사람들이 사는 법(11:1-33)


0. 기도


1. 지난 주 복습


- 두 번째 수난예고와 어린이를 받아들이라: 약자에 대한 우선적 사랑

- 이혼 금지: 여성 인권 선언, 가정의 회복

- 배타적 우선권 금지

- 죄를 단호히 물리치고 소금으로 살라: 높은 윤리성과 화해의 실천

- 돈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있는가? 평등주의적 경제 원리

- 이기주의, 가족이기주의를 버려야 열리는 대동 세계

- 성육신의 목표: “섬김”


2. 말씀 읽기: 마가 11:1-33


3. 말씀 새기기

11장

1 그리고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올리브산 근처 벳파게와 베다니아에 왔을 때, 그의 제자들 중 둘을 보냈다. 2 그리고 그들에게 말한다. “너희들의 맞은편에 있는 마을로 떠나라. 그리고 즉시 거기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새끼나귀가 매여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와라. 3 만약 누군가가 ‘너희에게 왜 이런 짓을 합니까?’라고 말하거든 ‘그것의 주인이 필요하시답니다. 즉시 그것을 다시 여기로 보낼 것입니다.’라고 하여라. 4 그리고 떠나서 바깥 길 가로 난 문 옆에 매여 있는 새끼나귀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풀었다. 5 그러자 거기 서 있던 몇 사람들이 그들에게 말했다. “새끼나귀를 풀다니 무슨 짓을 합니까?” 6 그래서 예수가 말한 대로 그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들을 내버려 두었다. 7 그래서 새끼나귀를 예수에게 끌고 와서 그 위에 그들의 겉옷을 깔았다. 그리고 (예수가) 그 위에 앉았다. 8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펼쳤다. 다른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가지들을 꺾어서 깔았다. 9 그리고 앞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축복받기를!” 10 우리 아버지 다윗의 나라가 오는 것 축복받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 11 그리고 예루살렘 속으로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것을 둘러보니 이미 저녁이 되어 열둘과 함께 베다니아로 갔다.


- 이 이야기가 의도한 바는 무엇일까?(스가랴 9:9-10, 창세기 49:10-11 이밖에 시편 89:3-4, 7절은 왕상 1:38-40, 8절은 왕하 9:13, 9절은 시편 118:25-26, 10절은 시편 148:1 참조 )

- 마르코 복음 저자가 갖는 예루살렘의 인식은 어떠한가?(3:22, 7:1, 10:32, 15:41 등)

- 11절에 모든 것을 둘러보았다는 구절은 무엇을 예비하는가?


* 11장 1절부터 13장 37절의 초점은 예수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수의 태도이다. 일단 예수는 올리브 산(감람산) 주변에서 머문다. 예수의 올리브 산 주둔은 스가랴 14:2-4절을 연상시킨다. “야훼께서 일어서시어 예루살렘을 치리니 …… 그날, 그가 예루살렘 동편에 마주보고 있는 올리브 산에 우뚝 서시면, 올리브1 산이 갈라져 절반은 북쪽으로, 절반은 남쪽으로 물러나 큰 골짜기가 동서로 뻗을 것이다.” 올리브 산은 새로운 시대가 옛 시대와 접전하게 되는 장소를 상징한다. 하느님의 대리자 사람의 아들 예수는 올리브 산에 오름으로써 옛 시대의 중심인 예루살렘을 향하여 정면으로 맞선다. 그 사건이 “예루살렘 입성”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새끼나귀를 풀어 그것을 타는 것은 창세기 49:10-11과  즈가리야 9:9-10의 말씀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저자 공동체의 해석이다. 예루살렘의 입성 장면은 다소 우스꽝스럽다. 환호하는 백성들과 침묵하시는 예수 사이의 묘한 긴장이 흐르는 한편 군마나 갑옷, 창검을 들고 입성하는 장군과 달리 새끼나귀를 타고 등장하는 예수에게 전통적인 정치적 메시야상을 기대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예수의 성전 입성은 확실히 젤롯당 혁명 사상이 전해준 다윗적 메시아 사상1)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첫날의 입성은 성전을 둘러보고 나간 것으로 끝난다. 백성들의 기대와는 달리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12 다음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올 때 (그는) 허기졌다. 13 마침 멀리서 잎사귀들을 가진 무화과나무를 보고 갔다. 그 속에(무화과 나무 속에) 무엇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까 해서였다. 그 (나무)에게로 갔더니 잎사귀들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14 그러자 그 (나무)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먹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제자들이 들었다. 15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갔고 성전으로 들어가서 성전에서 사고 파는 사람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뒤엎어버렸다. 16 그리고 성전을 가로질러 기물들을 나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7 그리고 가르치고 그들에게 말했다. “‘내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18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듣고서 그를 없애버릴 방도를 찾았다. 그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무리가 그의 가르침을 매우 놀랍게 여겼기 때문이다. 19 그리고 저녁이 되어서 도시 밖으로 나갔다. 20 그리고 아침 일찍 지나가다가 무화과 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았다. 21 베드로는 기억이 떠올라서 그에게 말한다. “랍비여!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습니다.” 22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한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라.” 23 내가 진실로 네게 말한다. 만약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던져져라’고 말하면서 그의 마음속에 의심하지 않고 또한 말한 대로 되리라고 믿으면 그에게 될 것이다. 24 이를 통해 너희에게 말한다. “기도하고 요청한 모든 것을 받는다고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25 그리고 서서 기도할 때 만약 누군가에 대해 어떤 것을 품고 있거든 용서해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들의 아버지께서도 너희들의 잘못을 용서할 것이다.” 26.


- 이 본문의 구조를 그려보라

- 무화과 나무 저주 이야기와 성전 파괴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 무화과 나무 이야기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 성전 파괴 사건에서 예수께서 금지한 것은 무엇인가?

- 왜 예수님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했을까?

- 22-25까지의 예수님의 명령을 요약해 보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야기 해 보자. 

- 믿음과 기도와 용서가 사회적 정의와 평화 실천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 성전에 들어와서 한번 휙 둘러보고 나간 첫날에 이어 두 번째 성전 방문이 시작된다. 이 두 번째 성전 방문이야기는 그 유명한 성전 파괴 사건2)을 저주받은 무화가 이야기가 감싸고 있다. 이러한 샌드위치 방법(인클루시오: inclusio)은 마가가 잘 사용하는 방법으로 성전 파괴 사건과 무화과나무의 저주(호 9:10, 렘 29:17, 미 7:1-4 참조)는 일종의 관련을 맺게 된다. 

 이 대목에서 문제가 되는 것 중에 하나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는데 예수가 그것의 열매 없음을 보고 저주하였다는 것이다. 버트란트 러셀은 『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이 구절을 들어 예수는 잘못된 감정의 소유자이기에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무화과나무가 포도나무와 함께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나무(이사야 5,7과 예레미야 8,133))로 쓰인 것과 성전과 연결되어 이 사건이 벌어진 것, 또 “때”라는 명사가 특별한 시간 혹은 종교적이고 질적인 때를 나타내는 카이로스(καιρ???????)라는 낱말을 사용한 점을 들어서 이 사건은 하나의 상징으로 읽어야 한다.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없고 12장의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는 포도원 지기들이 참된 소유주와 그가 파견한 사람들과 상속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13장 1절에서 제자가 말했듯이 성전은 겉으로는 번지르르 하였다. 멀리서 보았을 때 잎이 무성한 무화과처럼 말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성전은 공간적 종교의 대표적 상징이며 진정한 때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인 것이다. 공간을 중요시하는 종교는 한 곳을 성스러운 곳으로 만들고 나머지는 세속적인 것으로 만들어 이분법적 사유를 하게 된다. 예루살렘을 성스러운 곳으로 만들었던 예수 당시의 유대교는 성전을 중심으로 성과 속, 정과 부정, 죄인과 의인의 이분법적 사유를 하는 대표적인 예가 되었다.

 성전에 들어가셔서 예수가 보여준 행위는 성전의 물질적, 재정적 측면에 대한 거부와 종교 의식적 차원의 거부를 의미한다. 귀신들을 내쫓듯이 성전에서 상업적 행위를 하는 자들을 내쫓는다. 물건을 나르는 행위는 종교의식상의 물건들을 운반하는 것이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사 564):7, 렘 7:11-15; 학개 2:6-9, 슥 14:16, 20-21도 참조)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예수의 비판은 성전이 특정한 사람들의 이익에만 이바지하고 있다5)는 것과 성전을 반로마 활동의 근거지로 삼아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려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성전은 모두가 와서 기도하는 곳이다.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동서를 횡단하며 보여준 예수의 개방적 선교를 생각해 볼 때 바로 성전이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처가 되어야 했다. 모든 민족이라는 표현은 특히 이방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자주 쓰였다. 그러나 성전은 지금 그러하지 못하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는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메시야 등극식을 치룬다. 성전 안과 밖은 계속해서 대비되며 성전은 다른 것으로 대치되고 있다. 성전은 개혁되는 것이 아니라 기울어져 가는 이 세상과 더불어 성전도 사라져야 한다. 성전 파괴 사건에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이 성전을 근거로 먹고 살던6)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다. 이들은 곧바로 예수를 없애버릴 방도를 찾는다.

 예수의 제자들은 무화과나무의 저주를 통해 성전이 뿌리로부터 즉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이제 구원의 핵심이었던 성전은 쓸모없다. 무화과나무가 파괴된 것처럼 이제 성전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을 얻는단 말인가? 예수와 함께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구원을 이루어 줄 것이다. 이 공동체는 공간의 공동체여서는 안 된다. 시간의 공동체여야 한다. 이 공동체는 때에 따라 굳건한 믿음을 가져야 하며, 때에 따라 기도하고 시시때때로 서로 용서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그러한 용서와 믿음의 근원은 하느님에게 있다.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한다고 여겼던 성전을 포함한 그 어떤 것도 이제는 필요 없다. 하느님과 곧바로 대면할 수 있는 그러한 공동체라면 성전이 있는 이 산을 번쩍 들어 바다에 빠뜨릴 수도 있으며 성전 멸망 따위는 이들에게 있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전이 가지고 있던 종교의식적 차원은 아마도 예수의 성만찬으로 대치되었을 것이다. 주후 70년 성전이 파괴된 뒤에 랍비운동은 예수가 길을 터놓은 그 일, 곧 성전으로부터 분리된 종교적 삶을 계속해서 밀고 나가게 된다. 일상적인 삶과 매일 매일의 식사는 이제 거룩한 것으로 여겨졌다. 토라에 나타난 하느님의 뜻은 일상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증거하는 것이 되었다.


27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리고 성전 안에서 그가 걷고 있을 때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그에게로 왔다. 28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어떤 종류의 권위를 가지고 이것들을 행하느냐? 누가 네게 이런 것을 할 이러한 권위를 주었느냐?” 29 그러자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한 마디만 묻겠다. 나에게 대답해라. 그러면 너희에게 무슨 권위로 이런 것을 하는지 말하겠다.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비롯된 것이냐.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냐? 내게 대답하라.” 31 그러자 그들끼리 궁리하면서 말했다. “만약 ‘하늘로부터’라고 말하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 라고 할 것이다. 32 그렇다고 ‘사람으로부터’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무리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모두 요한을 참으로 예언자라고 여겼던 것이다. 33 그래서 예수에게 대답하여 말한다. “알지 못한다.” 그러자 예수가 그들에게 말한다. “나도 너희들에게 무슨 권위로 이것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


- 예수의 권위를 물었을 때 예수께서 왜 세례요한의 이야기를 했을까?


 예수가 세례요한의 활동 근거로 자기의 위기를 모면한 것은 세례요한의 세례가 성전의 무용(無用)과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의 세례의식은 성전의 제사행위의 대치였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성전을 가서 부수지는 않았다. 그런데 예수는 성전을 부수고 있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헤롯의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죽는다. 예수는 종교적 권력가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정치적으로 고발당해 죽는다.


4. 다음 주 말씀

1) 마르코복음서 12장 1절-44절을 꼼꼼히 읽어 보세요.(다른 번역본과 비교하며 읽거나, 손으로 베껴 쓰시면 좋습니다.) 시간 나시면 마르코 복음서 전체를 읽으시면 더욱 좋습니다. 바라기는 마르코 복음서 공부를 하면서 이 복음서를 한 10번 정도 읽는 것입니다.


※ 질문들

- 이 비유(12:1-12)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 농부들과 주인, 종, 각각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 바리새파와 헤롯파 사람들의 질문이 예수에게 왜 올가미가 되는가?

- 예수의 대답이 올가미를 벗어날 수 있는 대답인가?

- 이 이야기는 독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는가?

- 당신은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또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 산 자들의 하느님이란 뜻은?

- 여러분에게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가?

-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로 볼 수 없다는 예수의 이야기는 어떤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

- 예수가 율법학자들을 강하게 비판하는 부분은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