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Ⅶ 강 새로운 가르침 1(4:1-4:20)


0. 기도


1. 지난 주 복습

- 각지에서 예수께로 사람들이 몰려옴(몰려듬과 따름)

- 열둘의 선택

- 예루살렘으로부터 파견된 율법학자들과의 논쟁

- 누가 참 가족인가?


2. 말씀 읽기: 마가 4:1-20


3. 말씀 새기기


4장 

1 그리고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주위에 매우 큰 무리가 모이니, 그는 배에 올라 바다 안에 앉았다. 모든 무리는 바다를 향하여 뭍에 있었다. 2 그리고 많은 비유들로 그들을 가르치셨다.1) 그의 가르침으로 그들에게 말하였다. 3 “들어라2), 보라!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씨를 뿌리는 가운데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새들이 와서 그것을 먹었다. 5 그리고 다른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그리고 흙이 깊지 않아서 즉시 (싹은) 돋았으나 6 해가 솟자 타버렸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버렸던 것이다. 7 또 다른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가시덤불이 자라 그것을 숨막히게 하니 열매를 내지 못했다. 8 그러나 다른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열매를 내고 더 성장하여 30배, 60배, 100배의 (결과)를 가져왔다.” 9 그리고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말하였다.


- 언제 비유를 말하는가?

- 이 비유의 제목을 붙여보라. 예를 들면 “결실을 맺은 씨”, “서툰 농부”, “노동과 성과” 등등

-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 이해되지 않는 구절이 있는가?

- 씨를 뿌리러 나간 사람은 혹시 예수 자신일까?(1:38, 2:13, 2:17 참조)

-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갈 때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게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 이 비유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 3절의 “들어라”, 9절의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이렇게 “제대로 들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혹시 3장 7-8절에 몰려든 사람들 중 옥석을 가리려는 교육책일까? 


* 이 비유는 농부가 씨를 뿌리면 그 씨들 중에 몇 몇은 실패하지만 대다수는 결실을 맺는다는 자연스러운 농사와 관련되어 있다. 혹시 주위 사람들은 상세하게 묘사된 실패의 경우에 주안점을 둘지 모르나 씨 뿌리는 자는 그러한 실패 가운데에서도 자라 30~100의 결실을 맺는 풍요로운 수확에 관심한다. 기원전 3세기의 테오프라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경작이 잘 안된 밭에서는 50배를 수확하고 세심하게 경작된 밭에서는 100배의 수확을 얻는다.”

   이 비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문점이 제기 되어 왔다. 어떤 농부가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씨를 뿌린단 말인가? 예레미아스는 파종이 밭을 가는 일 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런 비유가 가능하다고 주장하였으나 오늘날 이것에 대한 여러 비판이 있다. 쇼트로프는 아직 갈지 않은 땅에 파종을 하는 19-20세기 아랍의 농부들을 부주의하게 관찰한 결과를 근거로 속단하였다고 비판하면서, 아직 갈지 않은 토지에 씨를 뿌리는 경우는 가을 파종 때로 제한된다고 주장하고, 헤드릭 역시 파종하기 전에 땅을 갈아 엎는 것이 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본문은 파종과 수확에만 관심이 있고, 사실 경작의 과정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이 비유는 파종과 결실! 이 두 상황에 집중되어 있다.

   쇼트로프에 따르면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길가나 다른 곳에 뿌리게 된 것은 농부가 경솔하거나 서툴러서가 아니고 협소한 농경지를 일구었던 평범한 팔페스틴 농부였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한다. 즉 씨앗을 한 번 뿌렸을 때, 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에 떨어지는 경우가 동시에 발생할 수 있으려면 그 땅은 협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1세기 당시 척박한 농촌의 생활상을 반영하며, 마가공동체가 그리는 힘겨운 민중의 삶과도 연결될 뿐만 아니라 척박한 상황에서 말씀을 선포한 예수의 이미지와도 연속성을 유지한다.

   또 주의 깊게 볼 대목은 좋은 땅이라고 번역된 땅은 기름지거나 비옥한 땅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닌 ‘아름다운’, ‘선한’을 뜻하는 ‘칼로스’가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즉 본문에서 좋은 땅은 특정한 기름진 땅을 의미하지 않으며 좋은 결실을 맺으면 어느 땅이든 좋은 땅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길가에 뿌려지는 씨앗도 새에게 먹히지 않았으면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이나, 돌밭에 뿌려진 것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헤드릭에 따르면, 마가의 의도는 생산력 있는 땅과 그렇지 않은 땅을 대조하려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뿌려진 씨앗들이 직면하게 되는 다양하고 상이한 위협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때, 이 비유가 뜻하는 바는 “하느님 나라는 모든 저항3)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나라는 결실을 맺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실패에 눈을 두지 말고 수확을 믿고 파종하는 농부처럼 묵묵히 하느님 나라 운동을 지속시키면 된다. 계속해서 밭으로 나가 씨를 뿌려야 한다.


* 30~100배에 대한 재미있는 해석

보리나 밀을 심어 잘 가꾸면 낟알 하나가 적으면 30개, 많으면 100개로 불어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 알의 씨앗은 박토의 경우 일백배 옥토의 경우 2백에서 4백배의 결실을 맺는다. 강원도 옥수수의 경우는 칠백배이다. 그러한 것으로 보아 여기서 30배와 100배는 그리 많은 수확이 아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잘해야 본전이고 그렇지 않으면 손해 보는 것이다’라고도 볼 수가 있다. 도마복음서의 97장에는 다음과 같은 비유가 나온다.

“아버지의 나라는 음식이 가득 차 있는 항아리 하나를 머리에 이고 먼길을 떠나는 한 아낙과 같다. 항아리의 손잡이가 깨어졌고 음식은 아낙이 모르는 채 노상에서 아낙 뒤로 새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아낙이 집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항아리를 내려놓았다. 그제서야 항아리가 텅 비어 있는 것을 알아 차렸다.”


10 (그가) 홀로 있을 때에, 그 주위에 있던 이들이 열둘과 함께 그 비유를 그에게 물었다. 11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비밀이 주어졌다. 그러나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들이 비유들이 된다. 12 보기는 보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듣기는 듣지만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니, 그들이 돌이켜 용서받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13 그리고 그들에게 말한다. “(너희들이) 이 비유도 알아듣지 못하니, 어떻게 모든 비유를 이해하겠는가? 14 씨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린다. 15 말씀이 길가에 뿌려진 사람들이란 이렇다. 들을 때에 즉시 사탄이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가져가 버린다. 16 그리고 돌밭에 뿌려진 사람들이란 이렇다. 말씀을 들을 때는 즉시 기뻐하며 그것을 받아들이지만 17 자신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한 때 뿐이다. 그 말씀 때문에 환란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즉시 걸려 넘어진다.

18 또 다른 이들은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 말씀을 듣지만 19 세상 걱정과 부에 대한 유혹과 그 밖의 것들에 대한 욕심이 들어와 그 말씀을 숨막히게 해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 20 그러나 좋은 땅에 뿌려진 자들은 이렇다.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받아들여서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낸다.”


- 여기서 말씀이란 무엇일까? 오늘 우리는 어떤 말씀(누구의 말, 어떤 내용의 말 등등)을 듣고 어떤 결실을 하는가? 씨앗은 곧 하나님 나라였을 것이다. 

- 비유는 어떤 특성을 가질까? 해석의 용이성과 난이성

- 12절에 대하여

1. 적대자들에게 하는 말로

2. 후대 교회 상황반영

3. 예수를 배척한 자들에 대한 해석

4.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 밖의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 이 부분이 마르코 공동체의 해석인 이유

1. 앞의 예수의 말씀은 ‘씨’의 운명과 씨 뿌리는 자의 자세에 초점이 있는 반면 해설은 반대로 ‘밭(땅)’에 초점이 있다. 즉 해설은 씨를 받아들이는 네 종류의 밭을 범주화하고 있다.

2. 예수의 비유는 실패한 세 경우(단수)와 성공한 경우 세 경우(복수)가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해설은 이를 무시하고 네 종류의 사람(복수)으로 열거하고만 있다.

3. 비유에서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는 자연현상일 뿐인데 해설은 사탄의 역할로 규정하고 있다. 

4. ‘말씀’이라는 낱말이 여기서 절대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서 ‘복음’이라는 용어 대신에 ‘복음’을 뜻하기 위해 자주 사용한 전문용어다(행 4;4, 6:4, 8:4, 10:36,44, 14:25, 16:6, 17:11, 18:5, 갈 6:6, 골 4:3, 살전 1:6 딤후 4:2, 약 1:21, 벧전 2:8, 3:1 요일 2:7 참조). ‘복음’이라는 뜻의 ‘말씀’이 예수의 입에서 사용된 곳은 여기에만 있다.

5. 이 짧은 단락 속에 공관복음서의 다른 곳에는 찾아볼 수 없으나 신약의 나머지 문서들, 특히 바울 서신에서 흔히 사용하는 낱말이 많이 등장한다(『예수의 비유』예레미야스 분도출판사 73~74 참조).

6. 씨 뿌림을 선포 활동에 비긴 것은 예수의 어법에 일치하지 않는다. 예수는 선포활동을 추수에 비유한다(마 9:37~38, 눅 10:2, 요 4:35, 38).

7. 도마복음서에는 이 부분이 없다. 


그렇다면 마가의 알레고리 속에서 길가, 돌밭, 가시덤불 등등은 어떤 집단을 상정하는 것일까?(8:27-33, 14:53-72, 10:17-22, 5:25-34/10:46-52) 마가는 자신의 공동체가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 즉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것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의 말씀을 따를 수 없게 만드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어떤 사탄이 바로 나에게서 예수의 말씀을 빼앗아 가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예수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가? 세상의 욕심을 물리치지 못하고 마는 이유는 무엇일까?


4. 비유에 대하여


- 비유는 원래 이해하기 쉽도록 한 것인데 어려워진 이유?

비유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게 관련된 실제적 일과 불가분리적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런데 비유가 전달되면서 비유가 말하여진 역사적 상황 즉 화자와 청중사이에 공유하고 있던 일의 정황이 전달되지 않았다. 그래서 비유가 수수께끼나 암호처럼 들리게 된 것이다.


- 비유와 알레고리의 차이를 아는 것이 비유 해석의 성패

비유: 거기에 사용된 모든 낱말이나 개념이 본래의 의미 그대로를 뜻하게 되어 있다. 비유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과 관련하여 공격하거나, 설득하거나, 논증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된다.(사무엘하 12:1-4의 비유, 사사기 9:8-15의 우화). 그러므로 비유의 의미를 찾는 것은 ‘그 때’, ‘거기서’의 본래적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며 그 비유는 단 하나의 의미만을 나타냈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한다. 

알레고리: 거기에 사용된 하나하나의 낱말이나 개념은 암호일 따름이지, 그 안에 문자적 의미가 전혀 내포되어 있지 않다. 알레고리는 이야기의 모든 세부 사항이 현재의 상황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고, 텍스트의 역사적 맥락보다, ‘해독자’의 입장을 해석의 일차적 단초로 삼는다.


- 비유 해석의 방향: 역사적 해석과 무역사적 해석(알레고리[1880년간 교회의 비유해석]: 종교적 진리 찾기, 도덕적 교훈 찾기/ 문학적 해석[구조주의, 심미주의]: 삶의 지혜와 교훈 찾기 등) -> 역사적 상황(역사적 예수의 상황인가, 복음서 편집자의 상황인가?)의 재구성 불가와 의미의 다양성 통제 불가 -> ‘현실’을 반영하는 포괄적인 메타포(은유)


- 역사적 해석의 중요성: 이유는 성서의 말씀은 발생사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수천 년 전 과거에 특정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겨냥한 말씀이기에. 그리고 오늘의 독자는 그러한 성서 말씀 앞에 서야 한다. 독자가 성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그 말씀의 본래적 의미가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위에서 말한 역사적 상황의 재구성 불가 때문에 학자들의 연구가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연구결과에 귀를 기울이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 어떻게 역사적 자리를 찾을 것인가?

상황보도가 있는 비유(루가 15장 1절 이하)와 상황보도가 없는 비유들(예수의 전체적 활동 속에서): 상황보도가 있는 비유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원래의 역사적 자리라기보다 복음서 저자의 창작인 경우가 많다. 상황보도가 없는 비유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행위의 모든 활동 속에서 역사적 자리를 추론할 수밖에 없다. 


- 비유와 발화자인 역사적 예수


- 비유와 역사적 예수가 말한 비유를 처음으로 들은 1차 수용집단: 비유를 들은 시점에 청중은 예수를 ‘권위 있는 교사’ 정도로 인식했을 확률이 높다. 이들은 예수의 비유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제3의 청중에게 예수의 비유를 전달하게 된다.


- 비유와 2차 수용집단의 해석학: 2차 수용집단이란 예수의 비유가 구두 전승을 통해 전달되고 문자 전승으로 자리 잡은 후, 복음서 저자의 손길을 거쳐 본문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참여한 수용자층을 망라하는 개념이다. 여기에서 엄청난 갈래가 발생할 것이다. 또한 그런 갈래는 수용자들의 삶의 정황4) 때문에 수용되고 생존하게 된 것이다(양식비평의 통찰). 2차 수용집단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신앙 위에 비유를 받아들인다. 따라서 문자로 기록된 예수의 비유는 1차적으로는 기독론적으로 재해석되고, 또 이어 교회론적으로 적용되게 된다.


- 비유와 3차 수용집단의 해석학: 우리가 만나게 되는 최종 텍스트는 일련의 해석의 결과물이다. 텍스트가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었던 것은 첫 발화자인 예수의 말씀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청중들의 삶의 정황 속에 수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 편집자의 손길을 거쳐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원 비유의 의미가 애매모호하게 된다. 최종 텍스트의 독자들은 비유를 최종적으로 편집한 인물들의 해석에 종속되게 된다. 동시에 3차 수용집단은 자신의 삶의 정황과의 적실성 때문에 비유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고수하거나, 새로운 해석을 찾게 된다. 전자의 경우, 독자는 비유 단락을 읽으며 자신의 교리적 선이해를 확인받고 싶어 하고, 후자의 경우는 새로운 해석을 토대로 텍스트가 갖는 기존의 영향력을 바꾸려 한다. 그런데 전자가 확인받고 싶어 하는 비유의 해석은 대부분 교리의 확증이기 때문에 1차나 2차 수용집단에 의한 해석을 무시하고 곧 바로 예수의 말로 인식하려는 경향을 지닌다. 이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예수의 비유해석은 발화자 예수의 의도와 무관하게 현재 독자의 교리를 확증하는 역할에만 묶이게 된다.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후자는 기존의 이해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발견되는 제한된 새로움을 갖게 되거나, 아전인수격의 해석으로 흐르게 되기 쉽다. 따라서 전자든, 후자든 모두 예수의 비유를 자신의 상황에 주입하는 알레고리적 해석을 하게 된다. 이런 위험 때문에 김창락 교수 같은 분은 역사적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역사적 해석을 통해 제한된 새로움이 아닌 정말 낯선 새로움을 만날 가능성이 많고 또 비유의 원 의미에 다가갈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비유는 그 자체가 하나의 은유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은유(메타포/상징)는 스스로 저 너머를 가리키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1차, 2차, 3차 수용집단의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 오늘 우리가 깨달은 비유의 메시지는 날로 새로워지고, 또 다른 독자들의 이해를 창출하는 새로운 현실로 작용할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면에서 오늘 우리는 비유의 독자이자 새로운 해석을 여는 저자이기도 한 것이다. 


5. 다음 주 말씀

1) 마르코복음서 4장 21절-34절을 꼼꼼히 읽어 보세요.(다른 번역본과 비교하며 읽거나, 손으로 베껴 쓰시면 좋습니다.) 시간 나시면 마르코 복음서 전체를 읽으시면 더욱 좋습니다. 바라기는 마르코 복음서 공부를 하면서 이 복음서를 한 10번 정도 읽는 것입니다.


※ 질문들

- 등불이 누구를 나타내는 것일까? 예수일까, 제자들일까?

- 스스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 겨자씨의 비유의 핵심은?

- 하느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에 합당한 구체적인 행위를 하나씩만 만들어 보자.

- 실망과 낙담과 체념을 이기고 새롭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