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Ⅳ강 새 세상이 싫은 사람들: 갈릴리 논쟁 1(1:40-2:17)


0. 기도


1. 지난 주 복습

- 예수의 선포의 시간적 공간적 의미

- 예수의 운동의 공동체적 사회적 차원

- 제자도의 이상적 모습

- 회당과 집

- 종교 지배 구도와 더러운 영 들림 현상

- 악령 축출 후 발설 금지

- 시몬 장모의 치유와 섬김

- 예수의 기도1)(인간성)와 전도여행


2. 말씀 읽기: 마가 1:40-2:17


3. 말씀 새기기

40 피부병 환자가 그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그에게 간청하며 그에게 말한다.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나를 깨끗하게 할 수 있다.” 41 그리고 (그가) 측은히 여겨2) 그의 손을 내밀어 만지고 그에게 말한다. “원하니 깨끗해져라” 42 그리고 즉시 피부병이 그에게서 떠나가 깨끗해졌다. 43 그리고 그에게 호통치며 즉시 그를 쫓아냈다. 44 그리고 그에게 말한다. “어느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대신 가서 제사장에게 당신자신을 보이고 당신이 깨끗하게 된 것에 대해 모세가 명령한 것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도록 하라.” 45 그러나 그는 나가서 많이 선포하고 그 말을 퍼뜨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드러나게 도시로 들어갈 수 없었다. 대신 바깥 광야 지역에 있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모든 지역에서 그에게로 왔다.


- 예수가 피부병 환자를 고친 장소의 언급이 없지만 회당이었을까? 집이었을까? 아니면 마을의 공터였을까? 광야였을까? 

- 왜 많은 병중에 피부병 환자의 치유가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일까?

"If you will, you can make me clean," vs "If you will, you can make me well" 

- 예수의 의료행위의 특징(왕하 5장에 나오는 엘리사가 나아만을 치유한 이야기와 비교해서)

-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한 이유는? 율법 중시?, 사회적 관계 회복, 깨끗하게 하는 자(예수)와 깨끗해 졌음을 선포하는 자(제사장)와의 대조! - 7장과 비교!

- “왜 말하지 말라”고 하는가? 함구령에도 불구하고 소문이 퍼지는 이유는?


* 성서에서는 문둥병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피부병을 나병이라 한다. 나병은 불결할 뿐 아니라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나병환자는 다른 사람들(이웃과 친구들)과 접촉하는 것을 피하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가오면 “불결, 불결”하고 소리를 질러야 했다. 예루살렘과 기타 성곽도시에는 들어가지도 못했고 다른 곳에서 따로 살아야 했다. 또한 이 병은 죄질이 심한 경우에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벌로도 여겨졌다(왕하 5:1-143), 민수 12:1-16). 여기서 나병 환자는 율법에 규정된 격리 의무(레위기 13:45~464))를 깨트리고 예수의 전권에 모든 것을 맡긴다. 나병의 치료는 유대교의 선생들에 의하면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만큼 어려운 일로 여겨졌다(민수 12:12, 욥기 18:13).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전권으로 병을 치료한다. 마르코에게서 반복되는 치료행위의 특징 중에 하나는 예수와 병자의 접촉이다. 예수는 병자에게 직접 접촉을 하면서 병자를 고친다. 이런 행위는 정결법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여 자신도 부정하게 되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나병환자가 다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려면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사장에게 치유 사실을 인정 받은 다음 제사를 바쳐야 했다(레 14:2~32).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가 나병을 고쳐주신 사실을 유다인에게 증거하게 된다. 45절에 보면 피부병 환자는 많은 것을 선포한다. 그 동안은 예수가 선포하였으나 이제 그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선포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예수의 활동 중 섬김과 선포가 그의 첫 제자들에 의해서 이뤄지지 않고 시몬의 장모(여성)과 피부병 환자(불결한 죄인)에 의해서 이뤄지고 있다. 깊게 생각해 볼 일이다. 함구령을 내렸는데도 환자에 의해 기적 이야기가 퍼져나가고 그래서 예수는 드러나게 다닐 수 없게 된다. 예수는 경계하고 있다. 자신이 단순히 병 고치는 이로만 인식되는 것을. 질병의 치유는 하느님 나라 운동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래서 다시 광야로 간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자들이 아니라(1:36), 사람들이 그를 찾아 온다. 하느님 나라를 가져오는 예수는 자신을 위한 평안과 쉼을 누릴 수 없다. 타이센은 예수의 소문이 퍼지지 않게 하는 노력에 대해서 마가공동체의 상황과도 연결한다. 마르코 공동체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복음의 선포는 신중해야 했다. 그럼에도 예수의 복음은 널리 전파되고 마르코 공동체는 드러나게 다닐 수 없었고, 때로는 죽음도 감수해야 했다.


1 그리고 며칠 뒤에 (그가) 다시 가파르나움으로 들어가니, (그가) 집5)에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2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문 앞에도 빈 자리가 없었다. (그는) 그들에게 말씀을 말한다. 3 그런데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운반하여 그에게 데리고 왔다. 4 그러나 무리(오클로스) 때문에 그에게 가까이 데려갈 수 없어서 그가 있는 곳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뚫어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6)을 내려 보냈다. 5 예수가 그들의 믿음을 보고 중풍병자에게 말한다. “아이야, 너의 죄들이 용서받았다.”7) 6 몇몇의 율법학자들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그들의 마음속에 추론하기를8)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9) 하느님 한 분 아니고서야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8 그러자 (그들이) 자신들 속으로 이렇게 추론하는 것을 예수가 당신의 영으로 즉시 알아채시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왜 너희들의 마음속에 그렇게 추론하느냐? 9 무엇이 쉬운가? 중풍병자에게 ‘너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것과 ‘너의 들것을 가지고 일어나 걸어라’라고 말하는 것 중에. 10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 중풍병자에게 말한다. 11 “네게 말한다. 일어나 너의 침상을 가지고 너의 집으로 떠나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즉시 침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갔다. 모두들 놀라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런 일은 본적이 없다고 말하였다.


- 다시 가파르나움의 집에 가시다. 여전히 많은 군중이 운집했으나 여기서부터는 반대세력이 등장한다. “다시”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

- 집의 구조

- 네 사람의 용기와 집요함!

- 병의 원인에 대하여(시 38:3~5, 103:3의 문맥 참조), 희생자 비난하기.

- 병을 고치는 것과 죄를 용서해 주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

- 예수는 “내가 네 죄들을 용서해 주겠다”라고 말하지 않고 “네 죄들이 용서받았다.”라고 말한다(삼하 12:13 참조).

- 논쟁의 역할? 제자들을 위한 교육! 예수 죽음의 이유 보여주기~

- 인간이 하는 죄 용서는 하나님께 모독인가? 신과 인간의 관계 설정 문제.

- 인자의 세 가지 해석 가능성: 1. 예수 자신, 2. 오실 메시아(다니엘 7:13-14) 3. 사람


* 중풍병자의 치유이야기는 중풍병자를 치유하는 이야기 중간에 죄의 용서를 삽입한 이야기다(치유-논쟁-치유). 이런 샌드위치와 같은 형식10)은 마가가 좋아하는 형식으로 그 가운데 핵심이 들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경에서 병과 죄 사이에는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밀접한 상관성이 있다. 창 3:16-17에서 보듯이 타락과 관련하여 고통이란 말이 나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하느님께 무조건 순종하면 병들지 않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는다(출 15:26; 레 26:14-16). 불순종할 경우에 대해서는 생길 수 있는 온갖 병을 앓게 되리라는 경고를 받는다(신 28:15, 22, 27, 58-61)11). 이렇게 예수 당시 사람들도 병든 자는 하느님께 불순종한 것이라는 생각이 퍼져 있었다. 따라서 예수의 육신의 치유는 하느님의 용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죄 용서는 하느님이 하시지만 인간 행위의 합법성과 불법성을 판단하는 결정권을 쥐고 주무르는 사람들은 바로 예루살렘과 줄을 대고 있으면서 갈릴리에 살고 있는 또는 파견된 율법학자들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죄 사함 선포는 하느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 이전에 율법학자들의 권력을 해체하는 역할을 한다.12) 예수가 죄 용서를 할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하느님이 하실 일이다. 그런데 병자가 예수의 죄 용서 선포에 의해 치유 받음으로 예수의 죄 용서는 인정받았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예수는 결국 신성모독죄로 죽음에 이른다.

 10절의 ‘사람의 아들’은 세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갖는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 평범한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하느님의 용서 권한에 인간이 참여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서로 용서하는 행위야말로 인간이 신성에 이르는 길이다.

 * 여러 가지 물리적 환경이 어려운 상황에서 그 상황을 넘어서 치유 받고자 하는 행위 즉 여기서는 네 명의 친구들이 보여준 것을 예수는 믿음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을 뚫고 나오는 경향은 마가에서 많이 보인다(마르코 5:21-43; 10:46-52). 예수가 말하는 믿음은 역시 이런 식으로 어려움을 뚫고 나오는 적절한 행동으로 표현되는 태도이다.


13 그리고 (예수는) 다시 바닷가로 나갔다. 그리고 모든 무리(오클로스)가 그에게로 나왔고, (그는) 그들을 가르쳤다. 14 그리고 지나가다가 알패오에게 속한 레위13)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말한다. “나를 따르라” 그리고 (그는) 일어나 그를 따랐다. 15 그리고 (그는) 그의 집에 그를 눕게 하였다.14) 그런데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비스듬히 누웠다. 그들은 많았고 그를 따라왔다. 16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 (그가) 3)</SUP></A>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말한다. “나를 따르라” 그리고 (그는) 일어나 그를 따랐다. 15 그리고 (그는) 그의 집에 그를 눕게 하였다.<A HREF="#FOOTNOTE14"><SUP>14)</SUP></A> 그런데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비스


- 가르침의 장소가 어디인가? 바닷가는 제자를 부르는 장소일까?

- 세리라는 직업에 대하여

- 제자들의 범위와 관련하여, 레위는 예수를 따른다. 그런데 12의 명단에 없다. 만약 레위가 가파르나움의 세관이었다면 처음 부름을 받은 4명의 제자들과 어떤 사이였을까?

- 죄인들과 정결법

- 식사: 처음 제자를 부를 때는 사람 낚는 어부라는 목표가 있었다. 레위를 부를 때는 그것이 없다. 그러나 레위와 다른 세리와 죄인들은 제자가 되어서 식탁을 공유한다. 

- 17절의 의미는? 역설적 의미, 10:45를 제외하면 “~ 위하여 왔다”라는 형태로 예수 자신의 소명을 소개하는 유일한 구절이다.

- 바리사이파들


* 예수 당시 로마가 인정한 자치령들은 조세권을 누렸고, 제국의 조세와는 달리 세금은 황제의 국고가 아닌 자치령 군주의 금고로 들어갔다. 갈릴리의 경우에는 헤롯 안티파스의 금고로 들어갔다. 관세의 징수는 국가 관리가 아닌 세리 즉 세금 청부업자들에게 맡겨졌다. 세리는 국가와 합의하여 연간 납부액을 결정한 뒤, 징수액과 비교하여 초과분은 자신이 갖고 부족분은 물어냈기에 대부분의 세리는 차액을 남기기 위해 지나치게 세금을 물었고 가파르나움처럼 국제적인 무역 도로가 관통하는 곳에서는 이방인들과의 접촉이 불가피하였다. 이런 점에서 레위는 죄인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었다(마태 18:17, 21:31-32에 보면 이방인이나 창녀와 나란히 언급됨). 유다교를 바로 믿으려면 세리라는 직업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한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를 볼 때 제자들의 범위가 확대됨을 알 수 있고 특히 이들이 예수를 좇아가서 바로 함께 식사를 나누었다는 사실은 제자 됨 중 하나가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제사장들이 성전의 제사를 통하여 제의적인 정결을 확보했다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준수 특히 일상생활에서의 율법 준수를 통해 제의적 정결을 확보하였으며 그 중심부에는 정결한 식탁교제가 있었다.15) 샴마이 학파와 힐렐 학파에 귀속하는 법률들의 모든 개별적 율법 단화들 가운데 67%(정확히 3분의 2)가 식탁교제에 관한 규정이다. 


4. 함께 생각해 봅시다.


- 성서에 나오는 기적, 치유, 악령 축출이 암시하는 바는?

- 우리 교회 안에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는 것들 중에 예수의 입장에서 볼 때 잘못된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 안식일 법은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을 형성한 정체성이자 보루였다. 예수는 그것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은 무엇인가?

- 예수의 이런 용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 여러분에게 있어서 함께 밥상을 같이 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누구인가?

- 여러분의 경험 속에서 이전의 생각과 새로운 생각이 부딪혀서 갈등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함께 나누어 봅시다.


5. 다음 주 말씀

1) 마르코복음서 2장 18절-3장 6절을 꼼꼼히 읽어 보세요.(다른 번역본과 비교하며 읽거나, 손으로 베껴 쓰시면 좋습니다.) 시간 나시면 마르코 복음서 전체를 읽으시면 더욱 좋습니다. 바라기는 마르코 복음서 공부를 하면서 이 복음서를 한 10번 정도 읽는 것입니다.


※ 질문들

- 금식(속죄일)에 대하여

- 혼인잔치에 대하여

- 제자들은 무엇을 하는가?

- 안식일에 대하여

-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위의 세 가지 의미 중에 어떤 뜻으로 보아야 할까?

- 생명이 위험하지도 않은데 치유한다.

- 병의 성격들

- 예수 죽음의 그림자

-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연합전선

- 2:1-3:6의 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