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평화의길.doc

발제문인데, '씨알'의 아래아 글자를 인식하지 못해 글자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네요. 첨부한 워드 파일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8부 : 평화의 길

함석헌의 평화 사상

# 함석헌의 평화 사상은 근/현대 한국민족사와 유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그는 개인적으로 체험한 고난=反평화의 삶 속에서 평화사상을 형성하였으며, 평화에 대한 갈구를 양보하거나 늦추지 않았다.

# 함석헌 평화론의 사상적 배경 : 노장사상, 이사야서, 예수, 간디(힌두교), 퀘이커교, 한국역사 자체

# 함석헌의 사고는 평화라는 큰 틀 속에서 다양하게 움직이고 있으나, 평화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그는 평화를 論/사변/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삶 자체, 자명한 것, 필연적인 길, 신념의 내용으로 본다. “살고 난 뒤에는 쉬움도 어려움도, 좋고 언짢음도, 잘잘못도 있겠지만 삶을 뿜어대는 불길 속에는 그런 것이 다 있을 여지가 없다. 生者는 不可不生이요, 死者는 不可不死다. 필연이다. 이것을 깨닫는 데 자유가 있고 평화가 있다.”, “평화는 공존의 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평화만이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이다.”

# 그는 궁극적인 평화를 낙관적으로 본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신념화하면서도 현실적으로 평화의 길을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고, 평화를 가로막는 무서운 장벽을 직시하고 있다.

# 우선 그는 정치=권력=국가=폭력=전쟁으로 보고 국가지상주의를 맹렬히 비난하고 나아가 국가 자체를 거부한다. 그의 반국가주의는 노장사상, 간디, 예수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국가는 폭력으로 판도를 설정하고 통치하는 합법적 폭력기관이다. 국가가 있기 전에 폭력이 있었고, 폭력으로 얻은 전리품을 지키기 위해 국경을 만들고 또 그 국경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악순환을 숙명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정치인 = 국가를 만든 장본인 = 권력 추구 = 큰 도둑놈들.

# 그는 평화운동의 저해요소들로 남북의 긴장/분단, 주위 강대국들의 야심(패권주의), 인간의 본성, 민중의 도덕수준 등으로 분류한다. 인간이 원래 仁임을 강조(性善說)한 그는 정치나 권력이 인간의 본연성을 억누르고 왜곡시킴으로써 이기주의, 분리주의, 차별주의, 집단주의, 국가지상주의 등을 불러와 결국 평화를 파괴시켰다고 주장한다.

# 인위적인 것이 자연스러운 길을 가로막는 현실에서 본래 자기를 지키는 방법은?
① 평화의식은 전체의식=”우리는 하나다.”에서 출발되어야 한다. 남북 민중이 결합하는 것만이 우리 민족의 전체의식을 회복하는 지름길.
② 평화운동은 ‘속마음’의 변화를 추구하는 종교=정신운동이며, 외적 변화를 목표로 하는 사회운동이나 정치운동에 앞서야 한다. 여기서 종교란 기성 제도종교가 아니며 어떤 궁극적인 것을 믿는 신념을 의미. 한국인 고유의 하나님(한울님)신앙이 평화의 주춧돌이 될 수 있음.
③ 한국 민족의 평화성에 대한 재인식이 세계 평화운동에 기여할 수 있음. 한국 정신의 본원인 仙道의 기본 정신(無爲, 자연, 靜虛, 柔弱)은 곧 평화사상. 선도적 삶을 구현한 온달, 처용, 검도령에 주목.
④ 유약하고 무능하며 이름없이 음지에서 고난받는 민중이 평화운동의 주역이 되어 온세계를 평화에로 이끌 수 있다는 신념.

# 그는 씨이 평화의 담지자, 평화의 원천이라고 보면서도 씨에 대한 사회과학적, 철학적 정의를 시도하지 않았다. “씨은 지위도 없이 권력도 없이 그저 땅을 디디고 서서 전체를 위해서, 전체라는 것을 의식도 못하면서 전체를 위해서 봉사하다가, 또 봉사하다가 가는 사람들입니다. … 그러니까 난 대로 있는 사람, 못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들어준 본성을, 그 바탕을 비교적 깨뜨리지 않고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나라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 “씨의 본질은 평화다. 씨의 바탕이 평화요, 평화의 열매가 씨이다. 그러므로 씨의 목적은 평화의 세계 외에 있을 수 없다.”

# 현재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씨이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정체가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씨을 억누르고 위축시키는 것은 바로 국가, 정치, 문명, 문화, 제도화된 종교 등이다. 지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오히려 反 씨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그렇다면 평화는 불가능한 꿈? 민중의 저력은 그들을 누르고 있는 모든 체제를 전복시키고 평화를 구현할 능력이 있다. 참 승리는 밖에 있지 않고 씨 제 속에 있다. 씨 에게 자율권을 주는 것이 평화의 길이다. “씨을 못살게 굴지 말고 가만두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평화에서 시작하자는 말이다.” 국가주의의 암벽을 무너뜨리고 폭력주의의 사나운 짐승을 잡기 위해 세계적인 평화기구를 설치하여 세계의 씨이 뭉쳐야 하며, 씨이 과학을 체득하여 적을 극복할 힘을 모아야 한다.

# 그는 인권운동, 민주화 운동에 가담해 싸우면서도 운동권이 사회, 정치, 경제의 가시적인 지평에 머물러 전략적인 차원을 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한다. 어떤 운동이든지 종교적 차원을 무시하면 결국 국가지상주의의 함정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평화운동도 사회운동이나 정치운동 차원에서 성취할 수 없는 것이고, 정신운동, ‘속마음’에서부터의 운동일 때만 가능하다.

# 그는 씨이 바로 사람의 ‘본래성’, ‘속마음’을 가장 순수하게 지닌 원유라고 보며, 주저없이 씨 자체를 민중이라는 말과 일치시키는데, 이는 서구적인 개인으로서 개체가 아니라 집단성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예수에게서 씨, 우주정신, 신을 동시에 만난다. “씨은 씨이기 때문에 자연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믿게 되어 있다. 믿는 것이 씨이다. 하나님과 씨은 한 실오라기의 두 끝과 같다. 위에서는 하나님이요 아래서는 씨이다. 씨 중에서도 참 씨이 예수였다.” 그는 종교적이면서도 가장 비종교적이요, 예수에게서 궁극적 씨의 원천을 보면서도 기독교 자체에 대해서 가장 냉철한 비판가일 뿐 아니라 그것에서 탈출하고 있다. “참 정신, 즉 신은 어떤 밖의 조건에 의존하지 않는다. 정신은 정신만으로 서는 것이지 그 자체가 아닌, 겉 모양은 아무리 종교의 모양을 했어도 종교가 아니다.”

# 민중의 평화운동은 인위적인 데서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평면적인 싸움에서 승부를 걸지 말고 근원적 차원, 종교적 차원에 뿌리내려야 한다. 그는 투쟁전략을 말하는 일이 없으며, 어떤 형태의 폭력/증오도 반대한다. 대신 내적 평화, 마음의 평화를 강조한다. 국가는 폭력을 뒷받침하는데, 반폭력을 주장하면 결국 희생하는 길 밖에 없다. 물론 희생이 끝이 아니라 투쟁(희생)의 과정을 통해 ‘빛’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다름 아닌 종교적 차원에서 찾을 수 있는 평화인 것이다.

# 그는 예수운동을 오늘에 실현한 대표적인 모델로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을 내세운다. 평화운동도 정치문제에 걸려 있는데, 그 운동은 어디까지나 종교적으로 투쟁할 때만이 승리할 수 있다. 평화를 위한 민중운동은 진리의 진리성을 입증하는 실험 과정이다.

# 그의 평화사상은 반정치, 반폭력, 반국가로 이어졌으며, 결국 무정부주의(Anarchism)에 도달했다. 그는 전 생애를 통해 국가라는 이름 밑에 도사린 폭력성을 몸으로 체험해 왔다. 그러므로 그의 평화론과 반국가주의는 그의 생을 통한 실험의 결론이라고 보여진다. 또한 그가 귀착한 것은 자연주의이다. 그는 참 우주, 역사, 자연, 신을 하나로 묶는데, 그것을 일관하는 것은 그의 표현대로 하면 ‘뜻’이다. 이 뜻이 실현되는 것이 바로 평화다. 그 뜻대로 안에서 신과 인간, 자연과 역사가 이원적으로 파악되지 않고 하나로 조화/통합되는 데 평화가 있다. 그것은 새삼 만들어 나갈 현실이 아니라 원래의 모습이다. 이 원래적인 길을 가로막는 반평화세력은 인위성이며, 이 인위성을 폭력으로 것이 정부이다. 그러므로 평화를 위한 투쟁은 결국 반평화적인 것을 제거해서 세상이 제 본래의 길을 가게 하는 것이다. 장애물이 강력해서 우회하더라도 결국 물은 정해진 방향대로 흐르고 만다.